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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89화 (89/92)

89화

수진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속으로 물었다.

당신의 반응이 너무나도 궁금해.

기뻐했으면 좋겠어. 나만큼 행복했으면 좋겠어.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입을 뗐다.

“아기가 생겼어.”

한해는 잠시 멈춰 있다가 눈을 껌벅였다.

“아기?”

“여기.”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기 배를 가리켰다.

늘 침착하게 일정한 톤을 유지하던 한해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아기가 생겼다는 말이지?”

하나 둘 셋, 그는 두 주먹 불끈 쥐고 환호했다.

챔피언이 된 스포츠 스타의 모습 같기도 하고, 복권 1등에 당첨된 사람이 이런 모습일까 싶기도 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등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수진아.”

포근하게 품어오는 그의 팔을 느끼며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렇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너무 좋아.

“더 이상 기록을 깰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무슨 뜻이야?”

“널 만나고 나서 인생 최고의 순간이 늘 갱신되었거든. 또 기록이 깨지네.”

“좋아?”

“지금 두 발이 땅에 닿아 있는 건가?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야. 날아가 버릴까 무서워.”

“그래서 날 이렇게 꼭 안고 있는 거구나? 안 날아가려고?”

“여기에…… 우리 아기가 있단 말이지?”

그는 두 손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천천히 쓸었다.

“응. 아직 병원에는 안 가봤어.”

“당장 가보자.”

“우리 아기가 배고프다는데?”

말을 하면서 그녀는 치트키를 발견했다.

먹고 싶은 게 있을 때 아기 핑계를 대면 언제나 해결되겠는데?

“그럼 일단 밥부터 먹고!”

백허그를 풀고 맞은편으로 돌아가려던 그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 더 안아줘.”

“얼마든지.”

허리를 굽히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그는 가만히 기다렸다.

“고마워, 오빠.”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똑같이 고맙지. 서로에게 선물을 준 거니까.”

“마음이 급해진다.”

“왜?”

“왜긴 왜야. 빨리 결혼식을 준비해야 하니까.”

그가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지금도 이런데 아기가 태어나면 어떨까?

상상의 나래를 펴던 그녀는 뺨에 뭔가 축축한 것이 느껴져 현실로 돌아왔다. 맞닿은 한해의 얼굴에서 묻은 눈물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야? 나보다 더 좋은가 봐…….

좋아해줘서 또 고마워. 다 고마워, 오빠…….

그녀는 미래의 어느 봄날을 그려보았다.

볕 좋은 오후, 유모차를 함께 밀며 산책하다가 달콤한 디저트도 먹고 아기의 재롱도 구경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을.

아기는 누굴 더 닮았을까?

행복한 상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

강은 아버지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이 회장은 말이 없었고 집무실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장하지 않으세요?”

고개만 끄덕끄덕.

“나갈 생각이 없으시면 음식을 시킬까요?”

“아니다. 잠깐 나가서 먹자.”

비로소 입을 연 이 회장은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할 때 자주 찾는 한정식 집으로 강을 데리고 갔다.

단품 메뉴를 주문하고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대화는 없었다.

후식까지 다 먹고 나서야 대화가 시작되었다.

“실형이 나올 수도 있다.”

“네. 변호사도 그러더군요. 자신할 수 없다고.”

“어느 정도는 각오한 일이다.”

“마지막까지 한해 형을 그렇게 돌려보내시는 걸 보고 짐작했습니다.”

이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매실차를 한 모금 마셨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왜 그러셨습니까?”

“재판 전까지만 해도 나는 믿지 않았다.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강은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진솔하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다. 이런 적은 처음이야.

“왜 싸움이라고 생각하세요? 한해 형하고 싸울 필요가 뭐가 있나요?”

이 회장은 반박하지 않았다.

“모든 게 다 아버지 뜻대로 될 순 없습니다.”

“안다. 자식인 너만 봐도 알 수 있지.”

강은 아버지의 두 가지 자아가 싸우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달라져야 한다는 자각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태도를 유지하려는 고집의 싸움.

잘못을 인정하면 지금까지의 인생이 부정당할까 봐 두려운 걸까?

이 회장은 자리를 뜨기 전에 마지막으로 읊조렸다.

“재판 결과를 기다려보자.”

.

.

.

강은 회사에 들렀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꼭 처리해야 할 업무만 넘기고 퇴근했다.

레이나가 그를 맞아주었다.

“피곤하지?”

그녀는 강의 옷을 벗기고 꼭 안아주었다. 그는 순순히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아버님은 좀 어때?”

“막상 재판을 해보니 각성이 좀 되신 것 같아. 내려놓으신 모습도 보이고.”

“아버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모든 과오를 한꺼번에 인정하기 쉽지 않으실 거야.”

“응.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씻고 와. 누워서 좀 쉬자.”

강은 짧은 샤워를 마치고 침대로 들어왔다. 먼저 누워있던 레이나가 그의 품에 안겼다.

“대단히 감사한 일이야.”

그는 레이나의 풍성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뭐가?”

“지치고 힘든 하루 끝에 이렇게 가만히 안고 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그치? 나도 가끔 자기 품에서 그 생각 해.”

“무엇이든 대체제가 다 있는 세상이지만 인간의 온도만큼은 대체 불가능한 것 같아.”

“돈으로도 살 수 없지. 단순한 체온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는 사람한테만 느낄 수 있는 온기는…….”

“수학 선생님이라서 생각이 다를 줄 알았는데. 상당히 낭만적이시네요?”

강의 농담에 레이나도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강 씨의 체온이 지금 현재 화폐가치로 얼마쯤 하는지 계산이라도 해볼까요?”

“됐어요, 선생님.”

키득거리는 가운데 문득 아득해졌다.

레이나. 이제 너 없이 살 수 있을까?

그녀는 그의 머리에 코를 묻었다가 심장에 귀를 댔다.

“따스함과 진동, 그리고 지문같이 특별한 냄새. 그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것들이야.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변수가 아니라 상수들이지.”

강은 가만히 눈을 감고 그녀의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그녀의 온기와 심장박동, 체취…… 그녀의 상수들을 음미했다.

가슴에 귀를 대고 있을 때 그녀가 물었다.

“들려? 심장 뛰는 소리?”

“그럼. 잘 들리지.”

“내 심장소리도 구별할 수 있을까?”

“그건 어렵지 않을까? 심장박동 소리가 사람마다 다른가?”

“그럼 더 자세히 들어봐.”

그는 포근한 가슴에 더 뺨을 밀착시켰다. 워낙 도발적인 그녀가 또 무슨 장난을 치려나 생각하면서.

“잘 들어보면 뭔가 좀 다를 텐데?”

“평소보다 체온이 조금 높은 것 같기도 하고?”

“또? 혹시 다른 소리가 섞여 들리지 않아?”

“배고파?”

“아니. 배 말고 가슴에서.”

전기에 감전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꼭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강은 고개를 들고 레이나를 마주 보았다.

“뭐야. 설마…….”

레이나는 싱글거리기만 했다.

“레이나…… 맞아? 내가 생각하는 그거야?”

“오빠가 뭘 생각하는데?”

“우리…… 아기 생겼어?”

그녀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 와락 그녀를 안았다.

“고마워. 축하해. 너무 좋다. 정말…… 무슨 말을 해야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있을까?”

재판이 끝난 뒤 빛을 잃고 침전해있던 눈동자에 비로소 빛이 돌아왔다.

“이강 씨. 그렇게 좋아?”

“너도 알잖아. 내가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인 거. 그런데도 이 정도야.”

“왜 그렇게 좋은데?”

“그걸 설명해야 하냐?”

“나 선생님이잖아. 설명해봐.”

“요즘 계속 과거의 늪에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어. 그런데 아기는 내일의 존재잖아. 우리의 미래잖아.”

강은 초원의 동물들처럼 레이나에게 얼굴을 비볐다.

“자기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어.”

“넌 별로야?”

“난 좀 아쉬운데. 우리 둘이 좀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아이를 갖고 싶었거든.”

“인생은 길어요, 선생님.”

레이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강에게 입을 맞췄다.

환희의 입맞춤이 한참 이어졌고,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그녀가 말했다.

“이렇게 매일 밤 난리를 치는데 임신이 안 되는 게 이상하지.”

“우리가 좀…… 그랬나?”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노래 가사가 얼핏 머리를 스쳤다.

아픈 기억들은 가슴에 묻어두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놓아주자. 후회 없이 꿈을 꾼 것뿐이니까.

걱정 말고 내일을 맞이하자. 내일을 노래하자.

*

이태화 회장의 선고심이 있는 날이었다.

첫 공판에는 레이나도 함께 갔지만 오늘은 강 혼자 아버지를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운전기사가 모는 차 뒷자리에 두 부자가 나란히 몸을 싣고 법원으로 향했다.

“잠은 잘 주무셨어요?”

“그럭저럭.”

“어머니가 많이 걱정하고 계세요.”

“누가 누굴. 너희 엄마는 잘 지내고 있는 거냐?”

“네. 오늘 선고가 잘 나오기를 기도하시겠다고 하셨어요.”

“절도 교회도 안 나가는 사람이 기도는 무슨.”

이 회장은 묵묵히 창밖을 보다가 중얼거렸다.

“서류 준비하라고 해.”

“네?”

“니 엄마가 이혼하고 싶어 한다며? 하고 싶은 사람이 서류 준비해야지.”

강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잔인한 운명의 손아귀마냥 절대 어머니를 놓아주지 않을 것 같던 아버지였는데.

“진심이세요?”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준비하라고 해.”

“아…… 알겠습니다.”

“너도 알겠지만 오늘 법정구속이 될 수도 있다.”

“항소심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보석도 있고요.”

“구치소에 있더라도 변호사 통해서 이혼 절차는 진행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진행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기다렸던 대답인데도 한해는 왠지 서운한 기분에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아버지는 지난번 공판 때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다.

“재판 결과 보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강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할아버지 되실 것 같아요.”

침잠해 있던 이 회장의 표정이 크게 동요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레이나가 임신했어요.”

“뭐라고? 언제?”

“저도 지난주에 알았어요. 아버지가 재판 때문에 신경 많이 쓰실 거 같아서 선고 나온 뒤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이 회장은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 그저 한 번 웃어넘기는 것이 아니라 한참 동안 온몸으로 웃었다.

“축하한다, 강아.”

축하……라는 말을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었나?

대학에 붙었을 때도, 결혼할 때도 무심해 보이던 아버지였는데. 그 무심함이 너무 익숙해져 서운하지도 않았는데.

“고맙습니다. 아버지도 축하드려요. 할아버지가 되신 걸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회장은 창밖 멀리 시선을 던지다가 강을 돌아보았다.

“그 아이한테 전화 좀 걸어봐라. 축하 인사라도 해줘야지.”

“지금요?”

“나에겐 지금밖에 없을 수도 있어.”

이 회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강은 핸드폰을 꺼냈다.

.

.

.

레이나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상담을 하는 중이었다.

과격한 운동을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임신한 상태에서 기존의 운동 프로그램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전담 트레이너와 함께 임신 중의 운동 프로그램을 짜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강이었다.

지금쯤 재판장으로 가는 길일 텐데?

그녀는 트레이너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응. 오빠.”

“잠시만. 아버지가 통화하고 싶대.”

“나하고?”

그 순간 이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이한테 얘기 들었다. 아이를 가졌다고? 축하한다.”

“아버님…….”

“그동안 내가 못되게 굴어서 섭섭했겠지. 그것도 일종의 빚인데 어떻게 갚을지 곰곰이 생각해보마.”

투박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아버님 아니에요. 빚이라니요. 전 그냥 아버님 재판이 잘 풀리고 건강…… 건강…….”

갑자기 목이 잠겨버렸다.

“아버님…….”

“그래. 지금 길게 통화할 상황이 아니니. 몸조리 잘하고 순산하도록 해라.”

이 회장은 강을 바꿔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지막으로 흘리듯 남긴 말이 그녀의 가슴에 새겨졌다.

“미안하다.”

레이나는 왈칵 솟아오른 눈물을 참지 못했다.

코끝이 빨개진 그녀를 보고 트레이너가 놀랐다.

“회원님 괜찮으세요?”

레이나는 눈물을 비치며 웃었다.

“괜찮아요. 너무 괜찮아요.”

“무슨 일이세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러게요. 왜 자꾸 눈물이 날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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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은 출근을 하고 한해 혼자 재판에 참석했다.

법정에 들어와 보니 강도 혼자 와 있었다.

지난번 재판에서 상처 입은 모습을 봤던 한해는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들어 인사하려 했다. 그런데 강이 먼저 다가왔다.

“잘 지냈어?”

불쑥 악수를 청하는 그의 모습이 생경했다.

“어…… 나야 뭐. 넌?”

“나도. 수진이도 잘 있고?”서슴없이 그녀의 안부를 묻는 태도도 낯설었다.

“응. 수진이도 잘 지내지. 너…… 뭔가 좀 달라진 것 같다.”

“그런가? 칭찬으로 받을게.”한해를 얼떨떨하게 만든 사람은 또 있었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이 회장도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심지어 옅은 미소까지 머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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