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강은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에게 경영을 가르치면서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으니까.
‘나를 설득하려거든 감정은 싹 말린 다음 찾아오는 게 좋을 거야. 눈물로 호소하는 짓 따윈 나에게 마이너스다.’그래서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작정하고 찾아온 참이었다.
“합의 따위 없어도 이길 수 있어.”
아버지의 허세를 보니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아버지. 제발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 운명은 힘과 권력이 아닌 한해 형의 처분에 달려 있어요.”
“이미 부탁해봤다. 자존심도 버리고. 그 녀석이 말 안 하더냐?”
“뭘요?”
“그날 병실에서 내가 얼마나 모욕을 당했는지?”
강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그런 일에 대해선 들은 적이 없었다.
“녀석은 날 갖고 놀았어. 난 병실에서 나동그라졌지. 새파란 변호사 놈들 앞에서, 얼마 전까지 내 며느리였던 수진이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식으로서 무조건 아버지 편을 들어드렸을 겁니다. 그러나 그 일은 이미 과거가 되었고 당장 내일 모레 재판이 시작됩니다.”
“녀석이 합의 관련해서 뭐라고 하더냐?”
그는 드디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통화를 했습니다. 한해 형은 저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많이 갖고 있어요. 그 마음을 이용하면 합의를 받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확신할 수 없지요. 하지만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최선은 다해봐야죠.”
“또 그런 모욕을 당하라고?”
“모욕은 잠깐이지만 수감 생활은 깁니다. 아마 교도소에 갇히고 나면 하루하루가 모욕으로 느껴지실 겁니다. 저랑 같이 한해 형을 만나 봐요.”
강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이 회장은 못 이기는 척 중얼거렸다.
“같이 가서 읍소를 해보자 이거지?”
“단순히 읍소여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의 진심 어린 사과가 있어야 합니다.”
이 회장은 잔뜩 인상을 썼다.
“제가 보기에 아직도 그런 마음이 없으신 것 같네요.”
강은 참담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아니다. 사과하마. 자리만 만들어봐라.”
이 회장이 최종결론을 냈다.
“그냥 만난다고 다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마지막 기회에요. 정말 진실한 마음을 다해 사과하셔야 합니다. 지금처럼 말고요.”
이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도 한 가지 있습니다.”
“나한테 용건이 많구나?”
강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다.
“너 얼굴이 왜 그래? 재판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냐?”
“어머니하고 이혼해주십시오.”
이 회장은 파이프를 빨려다가 호흡을 멈추었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걸로 아는데, 내 대답은 같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부모의 일을 자식이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씁니까?”
“우린 너의 부모이기 이전에 부부야.”
“부부라고요? 정말 두 분이 부부의 모습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까 한해 이야기를 할 때는 비교적 차분했던 강의 목소리에 울분이 차 있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세상 모든 부부가 완벽하게 사는 건 아니니까.”
“네. 부부의 모습은 전부 제각각 다르지요. 그러나 부부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게 있습니다. 최소한의 애정은 남아 있어야 합니다.”
“불과 몇 달 전에 이혼한 녀석이 지금 애비한테 결혼이 뭔지 가르치려는 거냐?”
“저도 실패를 해봐서 잘 아니까요. 우린 서로에게 애정이 없었습니다. 제가 애정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은 집착이었습니다. 두 분은 어떠십니까?”
이 회장은 비웃듯 뇌까렸다.
“애정으로 사는 부부가 몇이나 있겠냐?”
“그 사람들이 애정이 아니라고 하는 감정들, 이를테면 우정이나 동지애, 연민 등등도 우호적인 감정입니다. 그런데 두 분은 아니시잖아요.”
“지금 그 얘기를 할 때냐?”
“네.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버지가 지금까지의 과오를 진심으로 돌아보셨으면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어머니부터 놔드리는 게 맞아요.”
“전에도 말했지만 안 돼. 내 생각은 변함없다.”
걷다가 벽에 쾅 부딪치는 기분이었다. 자욱한 파이프 담배 연기가 딱딱한 벽을 만들어버린 착각이 들었다.
강은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다시 아버지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모를까……
그렇다 해도 어머니가 용서해주는 건 또 다른 문제일 테니.
“어머니는 다시는 아버지 곁으로 안 돌아갈 겁니다.”
“상관없다.”
“어머니는 이혼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고…… 어쩌면 제가 소송을 도와드릴지도 모릅니다.”
“할 테면 해봐.”
뻣뻣하게 고개 쳐든 아버지를 가만히 쳐다보던 강이 힘없이 말했다.
“이런 식으로 고집부리시면…… 한해 형을 만났을 때도 걱정됩니다.”
“일단 만나는 보자. 그때만큼은 최대한 저자세를 취할 테니.”
그나마 그 약속이라도 받아낸 게 다행이었다.
비록 아버지는 여전히 딱딱한 오만의 껍질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지만 강은 솔직한 마음을 내보이는데 거리낄 게 없었다.
“혹시 궁금하지 않으세요? 제가 왜 이렇게 아버지를 구해드리려고 하는지?”
이 회장도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본 적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음을.
강이 녀석은 나를 엄청 싫어할 거야.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이렇게 날 도우려고 애쓰는 걸까?
“왜 그러는 거냐?”
“저도 궁금했어요. 처음에는 결혼 때문인가 싶었어요. 레이나와 결혼을 하려는데 아무래도 아버지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는 결혼식을 올리기 불편할 테니까요.”
“이혼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결혼이야.”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강은 애처로운 표정으로 아버지를 마주했다.
“제가 크면서 본 아버지의 이미지는 괴물이었어요. 미움의 괴물. 어머니에게도 그랬고 저에게도 그러셨죠.”
이 회장은 꼼짝 않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것으로 동의를 대신했다.
“저는 괴물이 되기 싫어서요.”
강의 목소리는 깊은 회한으로 떨리고 있었다.
“예전에 집에서 쉬다가 TV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본 적 있어요.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이라는 영화였어요. 거기 이런 대사가 나오죠. 인간답게 산다는 일은 참 힘들지만, 우리 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이 회장은 턱 근육이 실룩거릴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불호령을 내렸겠지.
감히 자식이란 놈이 아버지 면전에서 괴물 취급을 하냐며.
그러나 이미 둘 사이에는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괴물의 자식은 괴물이 되기 쉽죠. 수진이를 속이고 결혼했을 때…… 그때 저는 어린 괴물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강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버지를 돕는 일은 괴물이 아닌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입니다. 끝까지 아버지를 위하고 챙기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들어가겠습니다.”
이 회장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피했다.
부자지간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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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가 강의 전화를 받은 건 냉장고에서 귤을 꺼낼 때였다.
수진이 다가와서 핸드폰을 쓱 내밀었다.
“강이 오빠 전화네.”
이틀 뒤에 첫 공판이 있는 시점에서 강에게 전화가 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와 그녀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받을 거야?”
한해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귤이 담긴 쟁반을 물물교환하듯 핸드폰과 바꾸었다.
“응. 강아.”
그는 전화를 받으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해.”
“괜찮아. 얘기해.”
“용건부터 말할게. 내일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무슨 일로?”
“아버지하고 같이 형을 찾아가려고.”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낼 줄이야.
한해는 손끝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리다가 물었다.
“아버지가 부탁한 거냐?”
“아니. 그 반대야. 내가 아버지한테 부탁했지.”
“모레 재판 시작하는 건 알고 있지?”
“응. 더 노골적으로 말할게. 형한테 용서를 구하고 합의를 부탁하려고. 아니…… 애원하려고.”
“이미 아버님이 찾아오셨어. 썩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고.”
“그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 이번엔 다를 거야. 그러니 딱 한 번만 만나줘.”
한해는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이번에 마지막 기회를 줌으로써 강에게 갖고 있던 죄책감을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하지만 너도 이건 명심해줘. 난 너희 아버지에게 여전히 아주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어.”
“이해해. 나라도 그럴 거야. 누가 날 죽이려고 했는데, 실제로 죽을 뻔했는데, 어떻게 감정이 좋아지겠어.”
“네 앞에서 또 험한 꼴을 볼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상관없다는 거지?”
“마지막 기회를 줘. 아들로서 부탁하는 거야.”
고민의 속도에 따라 식탁을 두드리던 한해의 손끝이 딱 멎었다.
“오케이. 내일 보자.”
강은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 있던 수진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뭐래?”
“내일 만나기로 했어. 이태화 회장도 같이.”
“합의 이야기를 할 텐데. 바로 공판 전날에 괜찮겠어?”
수진은 심히 우려되는 표정이었다.
“불편하면 거절해도 돼. 오빠는 강이 오빠에게 충분히 할 만큼 했으니까.”
“불편하지 않아. 오히려 편해. 강이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어서.”
“만약 이 회장이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용서해줄 거야?”
“우리가 수도 없이 고민했던 부분이지.”
“이 회장은 늘 그 기대를 저버렸고.”
“직접 만나봐야 알겠어. 아직은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본 적도 없어서 내 마음이 어떨지 짐작이 안 가.”
수진은 한해의 어깨에 슬며시 고개를 기댔다.
“오빠 마음 가는 대로 해. 나는 늘 오빠의 결정을 지지해.”
잠시 긴장해 있던 한해는 편안하게 자세를 흐트러뜨렸다. 수진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고 물었다.
“우리 귤 먹으면서 게임이나 할까?”
“그럼 최고지!”
수진은 환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어떻게 매일 이렇게 좋을 수 있을까?
오늘은 새콤달콤한 밤이 되겠군!
*
다음 날 아침. 레이나는 오전부터 강의 영상을 세 개나 촬영하고 초밥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촬영하는 동안에는 잠시 잊었는데, 아마 지금쯤 강과 이 회장이 한해를 만나고 있겠구나 싶었다.
이야기가 잘되어야 할 텐데.
예전에 수진을 찾아가 같은 여자로서 읍소해본 적 있었다. 비록 매몰차게 거절당하긴 했지만 수진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거절이었으니까.
오늘은 거절당하지 않기를. 제발…….
연어초밥을 입에 집어넣으려는데 갑자기 비린 맛이 돌며 몸이 초밥을 거부했다.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설마…….”
멍하니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 사무실 직원이 물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어? 어…… 괜찮아야지.”
“네?”
“아냐. 아무것도.”
미루거나 망설이는 법을 모르는 성격이었던 그녀는 그 길로 같은 빌딩 1층에 있는 약국에 들러 임신진단기를 샀다.
다시 사무실로 올라오면서 얼떨떨한 기분에 걸음마저 떨렸다.
만약 임신이라면? 그런 결혼부터 해야 하나? 아버님 재판이 내일부터 시작인데?
함께 지내면서 늘 피임을 했던 건 아니었다. 임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아니겠지’라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며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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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선명한 두 줄.
수진은 변기에 앉아 하염없이 테스트기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제정신일 때는 늘 피임을 했지. 그런데 가끔 충동적으로…….
“아, 어떡하지?”
그녀는 두 손을 머리칼을 쥐었다.
아기는 천천히 가질 계획이었다. 한해와 둘이서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니까.
한창 좋을 때 피습을 당해 병원 신세를 지는 바람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했다. 물론 병원에서 꼭 붙어 지낸 시절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지만.
당장 다음 주에는 2박 3일로 대만 여행을 갈 생각이었는데.
여름에는 길고긴 휴가를 다녀오기로 했잖아…….
당황하긴 해도 아기를 지워야겠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떤 경험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충만감이 몸 구석구석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 아빠에게도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런데 발신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깨달았다.
지금쯤 심각한 만남 중이겠구나.
그녀는 메시지로 알릴까 하다가 이따 퇴근하고 집에서 깜짝 뉴스를 전하기로 했다.
한해의 반응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퇴근 시간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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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 함께 모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강은 아버지를 모시고 한해 회사 근처로 찾아가려 했지만 한해가 만류했다.
그래서 잡은 장소가 한해 입장에서는 적진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는 이태화 회장 소유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한자리에 모이자마자 이 회장은 사과를 하려 했다. 그런데 한해가 손을 들어막았다.
“식사부터 하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식전에 어르신 불편하게 만드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강은 한해의 태도가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이렇게 나와 준 일 자체가 이미 그랬지만.
식사를 하면서 오고 가는 대화 역시 매우 사려 깊었다.
수진이나 피습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언급이 없었다. 투자자로서 요즘 재계 소식에 대해서 이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한해의 모습을 보며 강은 문득 이런 생각까지 했다.
형이 내 친형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인정하기로 했다. 강이 아무리 넓어도 바다보다 넓을 수는 없다는 진리를.
느긋하게 식사를 다 마치고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시면서 본론이 시작되었다.
“어제 강이 녀석이 이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하길래 아주 감사한 마음으로 나왔다네. 지난번 병실에 있을 때 찾아가서 합의를 운운한 일은 참 지금 생각해도 부끄럽네. 오늘은 정말로 사과를 전하러 나왔어.”
이 회장이 차분하게 운을 뗐다. 한해는 호호 불어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를 청부살인 하려고 했던 사건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죠?”
“그렇지.”
“알겠습니다. 이 정도 사과라면 받아드려야죠.”
“아, 고맙네, 한해 군!”
반신반의하던 이 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난주에 통화했을 때 제가 말씀드린 일에 대해서는요?”
한해는 미소를 잃지 않고 물었고 이 회장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한해 군. 그 일은…….”
“해운회사를 통째로 먹으려고 그 순박한 뱃사람들을 노름에 빠지게 만들고, 결국 저희 아버지와 수진이 아버지가 수장된 일에 대해서는요?”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이 흠칫 놀랐다.
한해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원인이야 어쨌든 결국 도박을 해서 배까지 날린 행위는 잘못이기에, 저도 아버지가 무고한 희생자라고 우길 생각은 없습니다. 보상이나 고소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명백히 불순한 의도를 갖고 바닷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만행에 대해서는 꼭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던 강이 결국 아버지에게 물었다.
“지금 한해 형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겁니까?”
이 회장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한해가 대신 답해주었다.
“그 당시 아버지하고 함께 배를 탔던 사람을 직접 만나서 들었어.”
그는 울진에서 들은 뱃사람의 증언을 강에게 전해주었다.
강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변했다. 허공에 걸쳐 있던 그의 시선은 천천히 움직여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아버지. 지금 한해 형의 말이 다 사실입니까?”
이 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해를 노려보는 그의 얼굴엔 노기가 들끓었다.
네가 정녕 끝까지 내 무릎을 꿇리겠다 이거냐? 그 알량한 합의서 한 장을 들고?
한해는 핸드폰 녹음버튼을 눌렀다. 수진에게 들려줄 셈이었다.
“회장님. 강인권 선장의 아들로서 말합니다. 저희 아버지에게 사과하세요. 수진이 아버지에게도요.”
그는 오래전 성난 바다에 수장되었던 뱃사람들의 원한을 대신 갚아주려 하고 있었다.
선택의 기로에 선 이 회장의 입술이 꾹 다문 채로 달싹였다.
“아버지…….”
강이 애원하고 나서야 마침내 그의 입술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