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선상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다.
하객들은 모두 특별한 경험을 했다며 좋아했고 크루즈에서 찍은 사진들을 SNS에 올리기 바빴다.
그중 절반은 크루즈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소월과 레오는 그들을 위해 간판 위에서 즉석 공연을 펼쳤다.
“저희가 나중에 얼마나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어떤 무대 위에 서더라도 오늘만큼 로맨틱한 공연은 없을 겁니다.”
레오의 말에 소월도 덧붙였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수십 명의 관객들이 고개를 돌렸다.
완전히 어두워진 밤바다는 평온하게 물결치며 배를 쓸어주고,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환한 별들이 밤하늘에 가득했다.
“그래서 밤 노래를 몇 곡 준비해보았습니다.”
그녀는 레오와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며 나긋나긋한 선율을 선사했다.
오후의 불꽃놀이가 몰고 왔던 흥겨운 느낌과는 완전히 다른 애프터 파티였다.
오늘의 주인공인 사토시와 숙희 부부는 제일 앞자리에서 공연을 즐겼다.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둘은 서로에게 슬며시 몸을 기대고 무릎을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려 박자를 맞췄다.
한해와 수진 커플은 뒤쪽에 앉아 노래도 듣고 잡담도 나누었다.
“오빠. 참 재미있는 광경이다.”
“뭐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커플 앞에서 이제 막 시작하는 커플이 노래하고 있잖아.”
그녀는 가슴 벅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지금 인생의 지혜를 배우고 있어.”
“혼자 배우지 말고 나도 좀 가르쳐주라.”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숙희 아주머니는 치매가 시작되었고 망나니 아들도 있지. 보통 사람 같으면 발목을 잡힐 만한 불행이지.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운이지. 모든 게 다 좋을 수는 없으니까 불행에 발목 잡히지 않고 행복만 보고 가는 거야.”
한해도 인정한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계속 말했다.
“사토시 아저씨도 마찬가지지. 결혼에 이미 한 번 실패했고 주변에는 한해 오빠 외엔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없을 만큼 외롭지. 하지만 엄청난 재력가시잖아. 사랑하는 사람의 여생을 든든하게 받쳐주겠지.”
한해는 수진의 귀에 슬며시 입술을 대고 간지럽히듯 물었다.
“그럼 우리에게 좋은 것과 나쁜 건 뭘까?”
수진은 킥킥대며 대답했다.
“이렇게 장난치는 건 좋아.”
“또?”
“이제 오빠랑 같이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것도 좋고.”
말을 하면서도 수진은 스스로 뭉클해졌다.
한해는 늘 감추어야 할 존재였다. 그와 재회했던 건 다른 남자와의 결혼식장이었고 유부녀라는 신분으로 그와 허락된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는 누구에게나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 거라고. 내 남자라고.
언젠가…… 내 남편이라고 소개할 날도 있을까?
“나쁜 건 뭐야?”
“오빠의 세계에 내 세계가 영향을 받는다는 거?”
“무슨 뜻일까?”
“이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받아들어야 할 숙명이겠지.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그 일에 휘말리고. 오빠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나도 신경 쓰이고.”
“그건 나도 그래. 또?”
“불안이 생겼어. 오빠를 혹시 또 잃으면 어쩌나 싶은 불안.”
기분 좋은 미소가 만연한 한해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아직도?”
“너무 소중해서 그래.”
그녀는 한해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체취는 편안함을 선사하는 마법의 향료 같다. 지금은 바다 냄새까지 섞여 새로운 기분으로 인도했다.
“나도 소중해. 진수진. 네가 너무 소중해.”
그는 힘주어 그녀를 안았다.
“오빠도 얘기해줘. 나랑 연애해서 좋은 것과 나쁜 것.”
“좋은 걸 다 얘기하자면 오늘 밤에 잠을 못 잘 텐데?”
“그럼 딱 세 가지만.”
“음…… 너랑 있으면 행복한 삶이 어떤 삶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
그건 정말로 대단한 칭찬이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그녀 역시 한해와 재회하기 전에는 무엇이 행복한 삶일까 고민하고 행복해지려고 노력했다.
그와 함께 있으면 고민도 노력도 필요 없다.
오직 당신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지.
그녀는 한해의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두 번째는?”
“음식은 더 맛있어지고 노래는 더 달콤해지지.”
그것도 인정. 똑같은 음식이라도 혼자 먹을 때와 한해랑 같이 먹을 때는 맛이 천지차이. 유명한 레스토랑이 아니래도 좋았다.
그래서 살이 찌는 건 부작용이지만.
“마지막으로 하나 더.”
“침대가 외롭지 않아서 좋아.”
한해는 회상에 젖어들었다.
“처음 배를 탔을 때는 침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선실에서 잠을 잤어. 몇 년을 그랬지. 엉망이 된 매트리스 스프링에 눌려 몸에 멍이 들 정도였으니까.”
“불쌍해……”
“14년 동안 선실에서 지냈어. 어떤 밤은 말이야 나랑 바다 밖에 없는 착각이 들어. 이 문을 열고 나가면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나 혼자 바다에 둥둥 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수진은 마치 과거의 한해에게 해주듯 그의 몸을 어루만졌다.
“다른 사람들은 육지에서의 삶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걸 생각하며 견뎠지. 그런데 난 육지의 삶이 없었어. 나에겐 그 좁은 침대가 삶의 전부였어.”
가만히 듣고 있자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수진은 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막았다.
“그만. 나 울 것 같아.”
“그래서 너와 같이 자는 모든 밤은 기적처럼 소중해. 오늘 밤도 그럴 거고.”
“오늘 이 배에서 자기로 한 거 너무 잘했다.”
“왜?”
“오빠의 트라우마를 없애줄 기회잖아.”
“괜찮아. 그 시절도 내 인생의 일부니까. 너를 실컷 그리워할 수 있어서 좋았어.”
.
.
.
밤이 깊었다. 파티는 끝나고 사람들은 배정받은 객실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수진과 한해도 방에 들어왔다.
결혼식 전에 짐을 갖다놓으러 잠깐 들어왔던 객실이었다.
호화로운 크루즈 안에서도 사회자와 들러리 자격으로 가장 좋은 객실을 배정받았는데 침실과 거실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큼직한 침대는 물론이고 테이블과 소파, 샤워기와 욕조가 딸린 욕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압권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였다.
아까 잠깐 들어와 짐만 놓고 나갔을 때는 몰랐는데 테라스 밖으로 나가보니 분위기가 끝내줬다.
수진은 넋을 잃고 밤바다를 응시했다.
바다 위의 호텔이라는 크루즈의 소개 글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빠는 지겹게 봤겠다. 배에서 보는 밤바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객실에서는 한 번도 자 본 적 없어.”
바다로 시선을 던지는 그녀와 달리 한해는 바다를 등진 채 객실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해를 막아섰다.
“오빠 피곤해?”
“넌 안 피곤해? 긴 하루였잖아. 아까 보니까 하품도 엄청 하던데.”
“안 피곤하다면 거짓말이지. 그런데 있잖아…….”
그녀는 한해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나 오늘 밤이 너무 좋아.”
“뭐야. 수학여행 온 애들처럼.”
“진짜 딱 그 기분이다. 좋아하는 남자애랑 둘이서만 수학여행 온 기분이 이럴까?”
한해는 웃음을 터뜨렸다.
은은하게 출렁이는 밤바다의 파도, 눈부시게 점멸하는 별들, 신비로운 색으로 빛나는 보름달까지, 모든 것이…….
“정말 너무 좋아.”
“수진이가 이렇게 배를 좋아하는 줄 몰랐네. 여름휴가 때 크루즈 여행이나 할까?”
“그런데 나 좀 서운해졌어.”
“갑자기?”
“소월 씨랑 매일 같이 이렇게 로맨틱한 밤을 나눴다고 생각하니까.”
한해는 또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엉뚱한 소릴 하고 그래.”
“엉뚱하긴! 같이 별 본 적 있어 없어?”
“있지.”
“거 봐. 오로라는?”
“있지.”
“아…… 대박. 나 막 질투 나네.”
“바다 위로 뛰어오르는 청새치 떼도 본 적 있고, 전설 속에나 있을 법한 거대한 알바트로스도 봤지. 바다에서 보는 별똥별은 또 얼마나 멋진데.”
수진이 샐쭉하게 입을 내밀었다.
“오빠 왜 그래? 나 약 올리려고 작정했어?”
“그때마다 네 생각을 했어.”
악화일로를 걷던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이렇게 멋진 장관을 수진이랑 같이 보면 얼마나 좋을까. 늘 그 생각이 들었어.”
그의 말이 정말인지 확인해볼 필요는 없었다.
14년 동안 배를 타면서 쓴 수백 통의 편지를 다 읽어봤으니까.
지금 한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이렇게 생생하게 그 장면들이 그려질까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이미 편지를 읽으며 한 번씩 상상해봤던 장면들이었으니까.
“질척거리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하나만 더 물어볼게.”
“얼마든지.”
“배에서 키스해본 적 있어?”
한해는 귀여워죽겠다는 눈으로 수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이제부터는 대답이 바뀌겠네.”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입을 맞췄다.
적당한 습기를 머금은 두 쌍의 입술이 포개졌다가 긴 키스로 이어졌다.
밤바다는 평화로웠지만 그들의 키스는 그렇지 않았고 점점 격렬한 쪽으로 이어졌다.
입술에서 퍼지지 시작한 열기는 점점 아래로 내려와 그녀를 뜨겁게 만들었다.
한해는 살짝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촉촉하게 속삭였다.
“맛있어.”
“뭐가?”
“이 밤이.”
“난 오빠 입술이 더…….”
그녀는 그를 테라스 의자에 앉히고 허벅지 위로 올라가 키스를 나누었다.
“진수진. 오늘 좀 뜨겁네?”
“오빠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아닌 것 같은데…….”
셀 수 없는 별의 관객들에게 보란 듯이 그들의 스킨십은 점점 더 짙어졌다.
그의 손길은 노련하게 그녀의 어깨선을 타고 내려왔다.
지독한 흥분이 그녀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파도소리가 실제보다 크게 들리고 그에 맞춰 호흡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행위를 잠시 멈추고 그가 물었다.
“들어갈까?”
그는 침실을 가리켰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특별하지만 더 특별한 밤을 만들고 싶어.”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긴긴 세월 외로움의 공간이었던 배는 오늘밤을 기해 로맨틱을 넘어서 에로틱한 공간으로 기억될 터였다.
*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온 지도 몇 달이 흘렀다.
초반에는 혹시 들킬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은 극도로 자제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가끔 외출을 했다. 물론 강이 동석한 상황에서만.
오늘은 레이나도 함께 저녁을 먹었다.
“많이 드세요, 어머니.”
레이나가 옆에 붙어서 어머니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며 강은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레이나의 성격을 볼 때 아버지 이 회장에 대해서도 최대한 노력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실형을 받는다면 교도소에 면회라도 갈 태세였다.
가만히 음식을 오물거리던 어머니가 강에게 물었다.
“아버지 재판은 아직 시작 안 했지?”
“네. 다음 주에 첫 공판이에요.”
“그렇구나.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다른 사람 같았으면 실형을 피하기 힘들 텐데, 아버지는 뭐 아시잖아요. 워낙 수완이 좋은 분이다 보니.”
“비싼 변호사들을 엄청 썼겠구나.”
“네, 사건 크기에 비해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렸죠.”
어머니는 레이나의 손을 끌어 잡고 손등을 쓰다듬었다.
“네가 고생이 많다.”
“별말씀을요. 제가 하는 게 뭐 있나요.”
강은 어머니에게 레이나 대신 알려주고 싶었다.
이 사람은 최선을 다했어요. 어떻게든 한해 형의 합의서를 받아내려고 수진이를 찾아가서 굴욕을 당했어요. 할 만큼 했어요.
어머니가 잠시 화장실에 갔을 때 강은 지나가듯 레이나에게 말했다.
“안 어울려.”
“응? 뭐가?”
“겸손한 거 말이야. 특히 우리 부모님 앞에서.”
“저절로 겸손해지는데 어떡해?”
“넌 당당하고 자기 자랑 막 하는 캐릭터가 어울려. 아빠 도와주려고 애쓴 이야기도 막 하라고.”
“그러게. 평소의 나 같으면 다 얘기했을 텐데.”
그녀는 강의 뺨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이강이라는 남자가 나를 완전히 바꿔놓았나 봐.”
“이것 봐. 이런 캐릭터 안 어울린다니까.”
“그럼 이런 캐릭터는?”
레이나는 테이블 위로 몸을 숙여 입을 맞췄다. 놀란 강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람들 많은 식당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이제 레이나 같아?”
제멋대로 씩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강은 아득해졌다.
“레이나. 네가 너다울 때 너는 세상에서 제일 섹시한 여자야.”
“뭔가 철학적인 얘기네.”
“나 때문에 변하지 말라고. 그럼 미안해질 것 같아.”
“난 당신이 날 변화시켜줘서 고마운데?”
사랑스러운 그녀의 미소를 보며 강은 하루 빨리 결혼하고 싶어졌다.
이미 청혼은 했다. 그것도 그녀가 먼저. 늘 그를 기다리고 원했던 쪽도 그녀였고, 프러포즈마저 그녀의 차지였다.
결혼만은 내가 주도해서 빨리 진행하고 싶은데.
동거라는 이름으로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는 더 미안해지고 초조해졌다.
지금 어머니에게 하는 레이나의 태도를 보니 아버지가 실형을 사는 동안에는 결혼하기 더 힘들 것 같았다.
결혼식을 준비하려 해도 이런 대답이 나올지 몰라.
‘아버님은 차디찬 감방에 갇혀 계신데 우리가 웨딩마치를 울리자고? 아버님 나오시면 제대로 모시고 하자.’이 회장이 실형을 피해야 할 이유가 또 생긴 셈이었다.
*
비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이글거렸으니까.
첫 공판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지금 이태화 회장은 오직 재판에 이기는 데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그에게 등을 돌린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일은 눈앞의 전투에서 이기고 난 다음이었다.
퇴근을 준비하던 그의 집무실로 비서가 들어왔다.
“부회장님이 찾아오셨는데요?”
꽤나 오랜만의 방문이었다. 이 회장은 반쯤 걸쳤던 트렌치코트를 다시 벗었다.
“들어오라고 해.”
잠시 후 강이 들어와 꾸벅 인사했다.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연락하면 오지 말라고 하실 것 같아서요.”
“그걸 아는 놈이 이렇게 불쑥 찾아와?”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 회장은 소파에 몸을 묻고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은 아버지가 끽연의 즐거움을 잠시 누리는 동안 마주 앉아 기다렸다.
“무슨 얘기냐.”
“모레 재판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 얘기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로펌에서 잘 준비했고 큰 문제없을 거다.”
“그렇게 한가한 상황이 아닌 걸로 아는데요.”
“네가 뭘 알아? 다 잘될 거다.”이 회장은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누가 봐도 뺨이 홀쭉할 정도로 살이 빠진 모습이 그가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강 역시 아버지의 심리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합의가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한해 형에게 합의를 받아낼 방법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이 회장의 입에서 일정하게 흘러나오던 연기가 덜컥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