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안에서 기다리세요.” 84화
아직 이름을 모르는 남자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늦은 오후에 서울에서부터 손님이 찾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어서들 와요. 내가 일어나지 못하는 처지라 이해를 좀 해줘요.”
남자의 건강은 꽤나 안 좋아 보였다. 방 한쪽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전문 의약품도 그의 상태를 짐작케 했다.
“안녕하세요? 통화했던 진수진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그의 눈은 언제 꺼질지 모르는 힘없는 촛불처럼 광채를 잃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의 음성은 가느다랗게 떨렸다.
“저는 강인권 선장의 아들 강한해라고 합니다.”
한해까지 인사를 마치자 남자는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박승욱이라고 합니다. 이제 곧 사라질 이름이지만요.”
곁에 서 있던 아들은 조용히 방을 나갔다. 곧 다가올 죽음을 인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기 싫은 듯.
“저는 두 분의 부친들하고 같이 배를 탔습니다.”
한해는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아빠의 동료들 중에서 혹시 얼굴이 기억나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낯설었다.
“망양호의 선원이셨다고요?”
“네. 저에게는 큰 형님뻘이셨지요.”
죽음의 그림자 따위는 얼씬도 하지 못했던 청춘을 잠시 떠올렸던 것일까? 누렇게 뜬 그의 눈에 잠시 생기가 돌다가 사라졌다.
“두 형님 모두 늘 저에게 잘해주셨고…… 두 분은 그때 너무 어려서 기억이 안 나겠지만 댁에도 몇 번 놀러 갔었습니다. 저녁도 같이 먹곤 했었는데…….”
그는 한해와 수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멋지게 컸군요.”
한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신가 봅니다.”
“네. 갈 날은 받아놨고. 그래서 그런지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합니다. 저 녀석이 눈에 밟혀서 그렇지.”
승욱은 닫힌 방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수진은 그가 알고 있는 진실을 빨리 듣고 싶었지만 몸 상태가 워낙 심각해 보여 재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커튼을 반쯤 열어놓은 창밖에서 기울어진 오후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승욱이 본론을 꺼냈다.
“궁금하지 않았습니까? 강 선장님께서는 직접 배를 샀는데 왜 굳이 선박회사에 속해서 항해를 했을까요? 본인이 선주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을 텐데.”
한해가 대답했다.
“제가 잘 모르는 영역이어서…… 단독으로 조업하실 때보다 회사와 계약을 맺고 일하는 편이 유리한 것들이 많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봤습니다.”
“그런 경우도 있지만, 망양호는 상황이 달랐어요.”
그는 숨쉬기가 힘든 듯 천천히 끊어서 말했다.
“이태화 회장은 처음에는 울진에 아무 관심도 없었어요. 서울에서 워낙 큰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으니까요. 사업이 휘청했을 때 처자식을 숨겨놓은 곳이 필요했고 별 연고도 없었던 울진을 고른 것뿐이죠.”
거기까지는 수진과 한해도 잘 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울진에 가끔 들르면서 특유의 사업가 기질이 발동했어요. 금융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순진한 뱃사람들을 상대로 대부업을 벌였죠.”
그의 증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 회장은 교묘한 수법을 얹었죠. 서울에서 꾼을 몇몇 데리고 와서 도박판을 벌인 겁니다.”
수진은 자기도 모르게 한해의 손을 잡았다.
‘제가 드릴 말씀이 두 분이 원하는 내용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유족이 듣기에 좋은 말은 아니라는 겁니다.’여기 오기 전 승욱이 왜 그런 경고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생전 배만 타고 우직하게 일만 하던 뱃사람들은 그야말로 눈이 뒤집혔지요. 창고 곳곳에 하우스처럼 도박판이 벌어졌습니다. 누군가는 따고 누군가는 잃고, 또 다음 날에는 승자와 패자가 바뀌기도 했지만 자릿세와 이자를 걷어가는 이 회장은 늘 승자였죠.”
한해가 잔뜩 인상을 쓰고 물었다.
“이태화 회장이 고작 그런 돈을 벌려고 대부업과 도박을 들여왔다고요?”
“아니죠. 큰 사업을 하던 사람인데. 이 회장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어요.”
거기서부터는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인지 승욱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제가 아는 한 가장 건실한 뱃사람이었던 두 분도 결국 도박에 빠져들었습니다.”
수진도 한해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푼돈으로 시작했다가 조금씩 돈을 빌리기 시작했고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어지자 선장님께서는 배를 담보로 잡히셨어요. 그러다가 배를 빼앗길 처지가 되었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락을 구했다.
“더 들으시겠습니까?”
둘은 동시에 서로를 돌아보았다.
괜찮겠어? 눈으로 허락을 구했고 역시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님뿐만 아니라 망양호의 선원들도 여럿이었어요. 도박이란 전염성이 강한 병과도 같았고 저희에겐 항체가 전혀 없었어요.”
그는 야윌 대로 야윈 자기 팔을 쓱 보더니 냉소를 흘렸다.
“처음에는 마음껏 돈을 빌려주던 업체가 조금씩 태도를 바꾸었죠. 선장님과 선원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결국 배의 소유권이 이태화 회장의 회사로 넘어가기 직전이었어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그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선장님 이하 선원들은 배를 찾기 위해 무리해서 조업을 나갔어요. 그래도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회사에서는 배를 뺏기 위해 선원들을 회사 직원으로 빼돌렸죠. 저도 그중 한 명이었고. 그런 식으로 이 동네 배들을 싹쓸이하려는 게 이 회장의 작전이었어요.”
이제 한해는 완전히 이해가 갔다. 기업사냥꾼들이 멀쩡한 회사의 부실을 키우고 헐값에 인수한 뒤 이익을 보고 팔아넘기는 수법과 똑같다. 그 대상이 회사가 아니라 배들이었을 뿐.
이 회장은 심심풀이로 그런 짓을 벌인 걸까? 아니면 사업 자금에 보태려고 한 짓일까?
승욱의 증언은 계속되었다.
“점점 더 일손이 모자란 상황에서도 강 선장님은 위태롭게 조업을 나갔죠. 어떻게든 배를 지키기 위해서. 그날도 그랬을 겁니다.”
수진은 오금이 저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운명의 그 날, 아버지와 동료들의 절박한 심정이 전이된 탓이었다.
“그날은 참……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항해를 금지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태풍 경로가 바뀌었고 속도도 너무 빨라졌죠. 그리고 망양호는 돌아오기엔 너무 멀리 나가 있었고요.”
빚더미에 짓눌려 있던 선장과 선원들은 본능적으로 직감했겠지. 이런 날씨에 이렇게 멀리 나가면 위험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박함에 떠밀려 앞으로 더 앞으로 나아갔으리라.
“그리고 결국 그런 사고가 났죠.”
승욱은 몇 번 기침을 했고, 아빠의 기침 소리를 들은 아들이 따뜻한 물을 갖고 들어와 건네주었다.
한해도 수진도 말이 없었다.
그날 사고 후 채무독촉이 이어졌던 상황도 이제야 확실히 이해가 갔다.
“저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어요. 제가 형님들을 배신하지 않고 계속 같이 배를 탔다면 그날 사고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이 생각을 몇 번을 했는지 모릅니다.”
수진은 아픈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제가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좋은 말씀을 전해드리지 못해 두 분께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용기 내어 연락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드립니다.”
수진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제 곧 한해 씨와 수진 씨의 아버님을 만날 겁니다. 아드님 따님 모두 너무 멋지게 잘 자라주었다고 전해드릴게요. 좋아하실 겁니다.”
승욱은 촉촉이 젖은 눈으로 미소 지었다.
한 번 더 감사 인사를 드리고 방을 나가려는 둘에게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혹시 두 분이 각별한 사이신가요? 평소에 형님들께서 사돈 맺자고 농담을 많이 하셨는데.”
한해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네. 저희 결혼할 사이입니다.”
그 말에 승욱은 모든 근심이 사라진 사람처럼 좋아했다.
“좋은 소식 알려드려야지. 형님들 볼 면목이 생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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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은 먼바다를 보며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춥겠다.”
한해가 담요를 들고 나와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시선을 나란히 했다.
오늘 밤 숙소는 그들의 고향집에서 멀지 않은 펜션이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되었지만 흔들의자에 앉은 그들은 수평선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확인했고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었다.
“정말 괘씸하지만…… 이 회장에게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는 없겠어.”
수진이 말에 한해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들의 대화는 느리고 조심스럽게 이어졌다.
“난…… 아빠를 원망하지 않아. 오빠는?”
“응. 도박에 빠진 일이 잘못이라 해도 너무 값비싼 대가를 치렀어.”
수진은 에덴동산을 떠올렸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이들을 유혹한 뱀이 그녀의 상상 속에서 혀를 날름거렸다.
한해는 아직 마음을 결정을 내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오빠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네가 나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합의해주지 않을 거야. 그렇게라도 벌을 줄 수밖에 없어.”
수진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회장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어. 15년 전 우리 부모님의 일하고 상관없이, 나를 해치려고 한 일조차도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한해는 수진의 뺨을 감쌌다.
“하늘에 계신 두 분을 위해서라도 우리 더 행복하게 살아야 하니까. 나쁜 일은 너무 오래 붙잡고 있기 싫어.”
“난 몰랐어. 아빠들끼리 우리를 두고 그런 얘기를 한 줄은.”
“나도 아빠한테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는데.”
수진은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추워.”
“들어갈까? 밥 먹으러 가야지?”
“조금만 더 있다 들어갈래.”
그녀는 먼바다 어딘가에서 잠든 아빠와 연결되어 있는 기분을 조금만 더 느끼고 싶었다.
아빠. 보고 있어요? 아빠 딸 이렇게 커서 한해 오빠랑 같이 내려왔어요.
아빠가 왜 그렇게 허무하게 바다로 끌려 들어갔는지 이제 알게 되었어요.
의문점이 풀려 후련하기도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은 여전해요.
아빠를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저도 늘 실수하고 잘못된 선택도 하니까요.
그러니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나는 늘 아빠를 그리워하고 사랑하니까.
이마 위로 한해의 입술이 내려앉는 촉감이 느껴졌다. 한 번 더 느끼고 싶어 눈을 감았고 그는 어김없이 또 선물을 주었다.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에 총총 별들이 등장했다.
인생의 챕터 하나가 저물고 또 다른 챕터가 시작되는, 아침 같은 밤이 열리고 있었다.
*
오랜만의 조찬 모임이었다.
한해 사건이 불거진 이후 이 회장은 거의 모든 모임에 발길을 끊었다. 다시 사교활동을 시작한 건 호영에게 제안을 넘긴 뒤부터였다.
굴지의 회사들을 이끄는 기업가들은 최근 넘치는 유동성에 대한 열띤 토론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짓눌려 있던 공포로부터 벗어난 이 회장은 다시 활기차고 공격적인 모습을 되찾았고 대화를 주도했다.
한해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그가 원자재 투자에 대해 역설하던 중이었다.
다른 사람의 전화라면 받지 않았을 텐데, 그는 참석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응. 한해 군. 오랜만이네.”
“그러네요. 합의해달라고 그렇게 귀찮게 하시더니, 갑자기 연락이 없으셔서 의아했습니다.”
“허허. 내가 그랬지? 성급한 마음에 자네를 귀찮게 하는 것 같아 자숙하던 중이네.”
그의 속마음은 달랐다.
호영은 당연히 제안을 받아들 거다. 한해와의 합의와 상관없이 실형을 피할 수 있다. 그에게는 카드가 한 장 더 있는 셈이었다.
한해는 이 회장의 입장 변화를 간파한 듯했다.
“자숙하는 느낌이 아닌데요? 뭔가 읍소 전략에서 뭔가 새로운 전략으로 갈아타신 모양인데?”
변호사들의 말이 맞다. 이 녀석 보통이 아니다.
이 회장은 다신 한해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오해하지 말게. 난 언제든 자네를 찾아가 용서를 구할 용의가 있으니.”
“정말 구하고 싶으신 건 용서가 아니라 합의서겠죠.”
“아직 분이 안 풀린 것 같구만. 이해하네.”
“저 울진에 와 있어요.”
“아 그래?”
“오래전 회장님이 울진에서 한 짓을 전해 들었어요. 순진한 뱃사람들을 도박판으로 이끌고 대부업으로 항구를 집어삼키셨다고요.”
이 회장은 겁이 날 지경이었다. 이 녀석…… 어떻게 그 옛날 일을 알아냈을까?
“아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대체 누가 나를 음해하는지는 모르겠…….”
“됐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그 일은 묻어두겠습니다.”
“한해 군! 자꾸 이렇게 억울하게 만들 건가?”
“대신 합의는 없습니다. 죗값을 치르시죠.”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법정에서 뵙죠.”
이 회장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한해 군…….”
그의 이름을 부르는 동시에 전화는 끊겼다.
이 회장은 조찬 모임장의 다른 테이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카드 하나를 잃었다. 겨우 다시 회복한 에너지가 사라지듯 힘이 쭉 빠졌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호영의 연락처를 띄웠다.
아직 재판까지는 한 달 넘게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사업가는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하고 이 회장은 더욱 그런 편이었다.
당장 전화해서 확답을 듣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가 뒤이어 분노가 끓었다.
녀석이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해? 개가 주인을 초조하게 만들어?
그는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듯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넌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그래야지. 암.
.
.
.
그날 밤, 자정이 다 되어서야 호영에게 연락이 왔다.
이번에도 도청을 두려워한 이 회장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호텔 사우나로 그를 불렀다.
24시간 영업을 하는 사우나 휴게실에서 호영을 만났다.
서로의 핸드폰을 확인하고 테이블에 올려두고, 가운만 걸친 채로 대화를 나누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호영의 태도는 전과 다름없이 충직하고 공손했다.
“죄송하긴. 당연히 고민 많이 할 문제지.”
이 회장은 속마음을 감추고 친절하게 그를 대했다.
“더 죄송한 일은…… 아무래도 그 제안은 못 받아들이겠습니다.”
호영의 대답에 이 회장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생각을 많이 해봤습니다. 돈의 문제가 아니더군요.”
멍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이 회장을 놔둔 채 호영이 계속 말했다.
“회장님이 제시하긴 금액의 두 배, 세 배를 얹는다고 해도 제 결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겨우 5년이야.”
이 회장의 음성이 휘청거렸다.
“겨우 5년이라고 이 새끼야. 날 위해서 겨우 그걸 못 해줘?”
“5년이 겨우라면…… 회장님이 다녀오시면 되지 않습니까?”
“호영아. 어차피 넌 실형을 살아야 해. 청부를 지시한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실행한 너 역시 실형을 피할 순 없다고! 어차피 들어가는 거 조금만 더 있다가 나오면…….”
“아니요.”
호영이 이 회장의 말을 잘랐다.
“저는 실형을 받지 않을 겁니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에서 이미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다 체크해봤어. 강한해가 합의를 해주지 않는 이상 실형을 면하긴 어렵다고!”
“강한해가 합의를 해줬으니까요.”
이 회장은 입안의 침이 한꺼번에 말라버리는 경험을 했다.
이건 대체 무슨 소리지?
“회장님이 저에게 마지막 제안을 하시고 그다음 날 강한해 군을 만났습니다.”
“왜? 네가 왜 그놈을 만나?”
이 회장은 숨이 가빠오는 불쾌감에 가슴을 손으로 잡고 물었다.
“사과하려고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합의서 이야기를 하더군요.”
“뭐라고?”
“제 사과에 진정성이 느껴진다고. 저에게는 합의서를 써주겠다고…….”
“이런 개 같은…….”
이 회장은 한해의 수를 뒤늦게 읽었다.
진정성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 거야. 철저하게 나를 고립시키려고, 청부업자에게도 합의를 해주면서 나만 고립시키려는 의도였겠지.
“죄송합니다, 회장님. 저도 이제 적은 나이가 아니고 교도소에 들어가기엔 부담이 너무 큽니다. 실형을 피할 수도 있고, 만약 살더라도 감형이 많이 될 겁니다.”
이 회장이 버럭 소리쳤다.
“이 새끼야! 너 혼자 살겠다 이거냐?”
“혼자 살겠다고 제안하신 건 회장님이 먼저 아닙니까?”
“이게 감히 어디서 말대꾸야?”
이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한해하고 한 편이 되었다 이거냐? 좋아. 법정에서 짓밟아주지. 네놈이 시인하지 않아도 원래 계획대로 할 거다. 일류 변호사들 솜씨나 구경하라고.”
“회장님. 우리 사이의 믿음이 고작 이 정도입니까?”
“믿음은 개뿔! 개가 주인을 물려고 하는데 몽둥이로 혼내줘야지!”
“회장님 왜 저를 슬프게 하십니까?”
“법정에서 보자!”이 회장이 돌아서려는데 등 뒤에서 나지막한 혼잣말이 들렸다.
“이 사진을 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텐데.”
사진? 무슨 사진?
이 회장은 몸을 돌렸다.
호영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을 들고 태연하게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안 돼…….”
결국 이 회장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