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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82화 (82/92)

82화

수진은 제일 위에 적힌 이름을 눈에 담았다. 이훈민.

그 아래 낯선 이름들이 늘어서 있었다.

좋아. 해보자.

오전 업무가 끝나고 점심시간에 전화를 돌려볼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은 보기 좋게 틀어져버렸다.

-점심 약속 있어요? 레이나의 메시지였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까? 가벼운 거짓말로 둘러댈까?

망설이는 그녀의 마음을 엿보았는지 레이나의 또 연락했다.

-점심 약속 있으면 딱 30분만 내주면 돼요. 결국 그녀의 방문을 허락하고, 점심시간을 조금 앞둔 시간에 회사 근처 카페로 찾아온 그녀를 만났다.

“한해 씨 퇴원 며칠 안 남았죠?”

“네. 신경 써주신 덕분에 회복이 빨랐어요.”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요즘 강이 오빠가 잠을 못 자요.”

레이나는 카페라테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저도 알아요. 수진 씨와 한해 씨는 엄연히 피해자이고 그이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견뎌내고 있다는걸요.”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그녀의 태도는 전에 본 적 없이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이의 입장에서 돕고 싶어요.”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에게 이런 여자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안도하며.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결혼할 생각이에요. 그렇다면 이태화 회장님은 저에겐 시아버지가 되는 셈이죠.”

“저에게도 한때는 그랬죠.”

지금은 부모의 원수가 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이어지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제가 가족이 될 일이 없었다면 수진 씨를 찾아올 일도 없었을 겁니다. 오히려 죄를 지었으면 응당히 벌을 받아야한다며 더욱 소리를 높였겠죠.”

“이해해요.”

“사실 강이 오빠에겐 여기 온다고 얘기 안 했어요. 오빠는 모든 짐을 혼자 지려고 해요. 한해 오빠에게 합의를 부탁하지도 않을 거고요.”

“그래서 저보고 한해 오빠에게 합의를 부탁해달라?”

“네. 돌려 말하지 않을게요.”

수진은 커피를 마시려다가 내려놓았다. 입맛이 싹 달아났다.

“수진 씨. 지금 제 행동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어요.”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나 동조할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레이나 씨. 거절할게요.”

희망고문을 하고 싶지 않아 잘라 말했다. 설명 따위 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무안해질지도 모른다고 각오했지만 역시 당황스럽네요.”

레이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분을 용서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강이 오빠를 생각해서…… 그러니 강이 오빠를 용서해 달라는 말과도 같아요.”

“알아요. 무슨 말인지. 그래도 지금 당장은 그럴 마음이 없어요.”

단호한 수진의 태도에 레이나는 더 졸라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잘 알겠습니다.”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이렇게 시간 내주고 이야기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고마워요.”

수진은 그 뒤의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이를 위해줘서 고맙다고. 그저 곁에서 부와 안락함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민망하고 무리한 부탁까지 해줘서 고맙다고.

아쉬운 거 하나 없이 살아왔을 텐데…… 내가 그이의 아내로서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당신이 해주네요.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돌아서려는 그녀를, 수진이 벌떡 일어나서 안아주었다.

차마 입으로 하지 못했던 고맙다는 말, 다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복잡한 심경을 체온에 실어서 전하고 싶었다.

제대로 전달이 된 걸까?

레이나는 자기보다 한참 더 작은 수진에게 안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사무실로 돌아온 수진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비록 거절했지만 레이나의 부탁은 마음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체온마저 높아진 착각이 들었다.

어쨌든 할 일은 해야 한다.

파티션에 붙여놓은 연락처를 떼어 주머니에 넣고 회의실로 향했다.

점심시간은 한 시간 가까이 남았다. 19명에게 전화를 돌리기에는 충분한 시간.

그녀는 제일 위에 있는 이훈민이라는 사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고향 사투리를 예상했는데 서울 말씨가 들려 조금 놀랐다.

“안녕하세요? 이훈민 선생님이세요?”

“맞는데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진수진이라고 합니다. 혹시 예전에 태화 해운에서 근무하셨지요?”

“태화 해운…… 죽변에 있던 회사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말투 때문에 연락처가 바뀌었나 싶었는데 동네 이름을 정확하게 아는 걸 보니 안심되었다.

“그 회사 오래전에 없어진 걸로 아는데 무슨 일이시죠?”

“저희 아버지가 그 회사와 계약되어 있던 배를 타셨어요. 망양호라고.”

“아! 알죠. 사고가 크게 났었잖아요. 아…… 그럼…….”

“네. 맞습니다. 그때 전복 사고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이고. 그러셨구나.”

“다른 게 아니고요. 혹시 그때 사고가 그냥 태풍 때문이 아니라 통신 관련해서 문제가 있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어서요.”

“네? 정말요? 저는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실례지만 어떤 쪽에서 일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저는 출하 담당이었습니다.”

“아 그럼 잘 모르실 수도 있겠군요.”

“네. 저는 조업 끝나고 들어온 다음에 일을 했으니까요.”

“혹시 그때 일을 아실 만한 분이 계실까요?”

“흠. 하도 오래전 일이라 잘 모르겠네요. 회사 넘어간 뒤에 저도 다른 일을 하느라 그때 동료들은 한 번도 못 봐서요.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렇겠지.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첫 번째 전화는 실패.

그녀는 굴하지 않고 계속 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안 받는 사람도 있었고, 전화번호가 바뀐 사람도 있었다.

결국 통화가 된 사람은 12명. 모두 그 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수진은 통화 못 한 이름들을 노려보았다.

혹시 이 중에 누군가 비밀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그녀는 퇴근하고 병실로 돌아오자마자 한해에게 상황을 알렸다.

“대단하다, 진수진.”

“나머지 일곱 명한테 문자를 남겨놨더니 두 명은 퇴근길에 연락이 왔더라고.”

“결과는?”

“마찬가지. 잘 모르겠대.”

“역시 그랬구나.”

한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까 레이나 씨가 왔었어.”

수진은 그녀와 나눴던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었다.

“나에겐 권리가 없지. 그 일에 대해서 용서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오직 오빠뿐이야.”

변한 건 없었다. 한해가 보기에 아직 이태화 회장은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자신이 받을 벌을 두려워하고 있을 뿐.

사람들은 종종 두 가지를 혼동하지만 한해는 그렇지 않았다.

“퇴원하고 강이를 만나봐야겠어.”

“오빠 마음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어.”

“너의 태도가 옳다고 봐. 처음에는 매정하게 비춰질 수도 있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줘야지. 그게 강이를 더 위하는 길이 아닐까?”

“그래. 일단 퇴원할 때까지 며칠 더 시간이 있으니까.”

길고긴 입원 생활이 거의 끝났다.

함께 과일을 먹으면서 TV를 보다가 수진이 중얼거렸다.

“정말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 봐.”

“왜?”

“이렇게 오빠랑 병실에서 지내는 게 익숙해졌어.”

“퇴원할 때 막 섭섭할 것 같아?”

“정말 그럴지도!”

“꼭 붙어 있어서 그렇겠지.”

“우리 계속 사토시 선생님 집에서 지내는 건 염치가 없는 것 같아.”

“안 그래도 퇴원하면서 말씀드리려고 했어. 분수에 맞게 우리가 살 집을 구해보겠다고.”

“두 분은 어떻게 지내실 거래? 숙희 아주머니랑 결혼하신 다음에 말이야.”

“그것까지는 안 물어봤는데? 어디서 지내시려나?”

“지금 우리가 지내는 집도 두 분 신혼집으로는 딱인데. 정원도 있고.”

“그치. 정말 예쁘지.”

“괜히 우리 때문에 그 집에 못 들어가시는 건 아닐까?”

수진의 걱정에 한해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너는 아직도 사토시 씨를 잘 몰라.”

수진은 핸드폰으로 사진 찍어 놓은 사토시 씨의 청첩장을 띄워보았다.

아주 특별한 결혼식에 초대합니다.

사랑에는 너무 늦은 때가 없음을 알려준

소중한 만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아름다운 글 아래 두 분의 사진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숙희 아주머니는 고풍스러운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앉아 있었고 그 앞에 사토시 씨가 무릎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추는 포즈였다.

“멋있어.”

수진의 말에 한해가 덧붙였다.

“그리고 아프지.”

수진은 나이든 신부의 기억이 빠른 속도로 소실되어 가고 있다는 엄혹한 현실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빨리 나아서 다행이야. 결혼식에 사회를 봐드릴 수 있게 되었잖아.”

한해는 수진을 침대 위로 부른 다음 꼭 안았다.

“사토시 씨가 아니었다면, 아니 이 두 분이 아니었다면 나도 너와 다시 이어지지 못했을 것 같아.”

“사토시 선생님은 그 반대라고 하던데? 오빠를 보고 결단을 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감사한 일이고.”

수진은 자신을 안고 있는 한해의 팔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를 방해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 같아.”

“내 옆구리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앗 미안.”

수진이 웃자 한해는 그녀의 머릿결 속으로 코를 묻었다.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리. 너의 웃는 소리.”

“걱정된다. 싫어질까 봐.”

“점점 더 좋아지는데?”

“왜 그런 말들 많이 하잖아. 결혼해서 살다 보면 상대가 밥 먹는 소리도 듣기 싫어진다고.”

회사에서 팀장을 비롯해 기혼자 선배들이 하던 얘기였다.

“좀 싫어졌으면 좋겠다.”

한해는 그녀의 머리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지금도 네 머리 냄새가 너무 좋아서 못 떨어지고 있잖아. 좀 싫게 만들어줘 봐.”

“우리 오빠 예전엔 참 깔끔했는데.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졌을까?”

“장기간 입원의 부작용인가?”

그는 장난스럽게 그녀의 몸 곳곳을 어루만졌다.

“하지 마! 간지럽단 말이야!”

“간지러우라고 하는건데.”

“밖에 소리 들려.”

“그건 네가 조심해야지.”

그녀의 반응 때문인지 그는 더 집요하게 그녀의 육체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전에도 환자복을 입고 병원 침대에서 스킨십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해의 몸이 아직 불편한 상태여서 어느 시점에서는 서로의 열망을 눌러야 했다.

지금 한해의 태도는 그때와 완전히 달랐다.

“오빠! 어쩌려고?”

“갑자기 든 생각인데 말이야. 3년쯤 전에 대서양 한복판이었을 거야.”

그의 입술은 그녀의 귓가에 거부하기 힘든 저음을 불어넣고 있었다.

“한밤중에 번개 숲을 지나갔던 적이 있어.”

“번개 숲?”

“안 믿어지겠지만 바다 위로 수십 수백 개의 번개가 내리꽂히는 장관이 펼쳐졌어. 항로를 바꾸려면 너무 돌아가야 해서 선장님이 그냥 지나가기로 결정했지.”

“위험하지 않았어?”

“위험했지. 엄청. 지금처럼.”

그때의 장관을 더 실감나게 떠올리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감고 그의 목소리에 더욱 집중했다.

“선원들이 전부 갑판에 나와 구경하려고 했지만 선장님은 안전 문제로 선실에 들어가라고 지시했어. 나도 선실 창문으로 구경을 했지. 그건…… 번개의 축제였어.”

수진은 황홀한 광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바다 위로 내리꽂히는 무수한 번개의 기둥들. 평생 한 번밖에 기회가 없을 특별한 경험이었지.”

“갑자기 그 얘기를 왜 하는 거야?”

“지금도 그런 것 같아서. 평생 한 번밖에 못해볼 특별한 경험.”

직접 배를 타고 지구 행성을 돌아보지 못한 사람은 감히 입에 올리지 못할 이야기를 전해주던 그의 입이 신비로운 키스를 선사했다.

“병실에서 사랑을 나눠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오빠. 이러다가 쫓겨날 수도 있어.”

“그건 너에게 달렸지. 시끄럽게 굴지 않는다면 괜찮을 거야.”

“자신 없는데…….”

“쫓겨난다 해도 이젠 다 나은 것 같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그의 손이 옷을 벗겨낼 때 그녀는 저항할 수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환자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도 그녀를 자극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흥분되는 느낌에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오빠…… 이거…… 나쁜 짓 같은데?”

“원래 나쁜 사랑이 더 짜릿하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이 닿는 순간, 번개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눈을 감아버렸다. 감각의 바다를 항해하는 항해사가 되려고.

나의 육체는 바다가 되고, 나는 밤바다로 내리치는 수많은 번개들을 맞이하리라.

*

평생 잊을 수 없는 밤을 보냈다. 실제로 사랑을 나눈 공간은 병실이지만 번개들이 춤추는 바다를 배경으로 기억될 것이다.

수진은 출근하자마자 선물을 받았다.-피디님. 그때 말씀하신 노래, 일단 데모 버전으로 만들어봤습니다. 사석에서는 언니라고 부르던 소월이 정색하고 보낸 메일이었다.

야화 작가의 소설을 연재하면서 소설의 주제곡으로 음원을 붙여보지 않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화답이었다.

수진은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감상했다.

-소설 정말 미치도록 재미있던데요? 괜히 밤늦게 보기 시작해서 새벽에 다 보고 해 뜨는 거 보고 잤습니다. 소월의 찬사가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그녀가 만든 노래는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을 딴 ‘티파니’였고 소설의 분위기와도 너무 잘 맞았다.

베일에 정체가 가려진 여주인공을 위한 주제곡으로 딱 맞았다.

수진은 야화 작가에게도 노래를 보내고 소월에게 바로 답장을 썼다.

-난 이거 백퍼센트 마음에 들어요. 데모 버전이라고 했지만 다른 악기 안 넣고 그냥 이대로 어쿠스틱하게 가도 너무 좋을 것 같은데? 기분 좋게 답장을 보내고 한 번 더 노래를 들었다.

오늘은 시작부터 끝까지 다 좋을 수밖에 없는 날이었다.

한해가 퇴원하는 날이었다. 그녀는 오후 반차를 냈고, 오전 업무를 재빨리 마친 다음 바로 한해를 데리러 갈 계획이었다.

의사는 일주일 정도 집에서 더 쉬고 일상 업무로 복귀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밝혔다. 한해는 당장 내일부터 일해도 문제없을 것 같다고 했지만 수진은 무조건 의사 말을 들으라고 엄포를 놓았다.

“진 피디! 오늘부터 심사 시작이다. 막판에 며칠 밤 꼴딱 새지 않으려면 미리 봐두는 게 좋을 거야.”

팀장이 지나가면서 슬쩍 한마디 했다.

케이블 방송사 한 곳과 공동으로 드라마 대본 공모전을 실시했고, 오늘부터 1차 심사가 시작이었다.

“네네.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들어 보였다.

평소 업무와는 별도로 적지 않은 개수의 대본을 읽어야하는 일이지만 따로 지급되는 수당도 있고 기발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다만 내일부터. 오늘은 온전히 한해 오빠의 퇴원을 축하하는 하루를 보낼 테니까.

공모전으로 들어온 작품들을 일단 클라우드에 옮기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이 표시되지 않은 번호였다.

“여보세요?”

상대는 한참 말이 없었다. 끊긴 건가 싶어 한 번 불렀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진수진 씨입니까?”

거친 음성의 남자였다.

“네. 전데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커버렸군요.”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육감이 깨어났다. 순식간에 소름이 돋아 그녀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누구시죠?”

“저는 태화 해운에서 수진 씨의 아버님과 함께 일했던 김두식이라고 합니다.”그녀는 뭐라고 말조차 하지 못하고 침만 삼켰다.

지금 전화가 온 번호는 사토시 씨가 준 태화 해운 직원들 연락처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그럼 어떻게?

그녀가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이 들려왔다.

“그때 동료였던 분한테 연락이 왔더군요. 수진 씨가 저를 찾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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