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81화 (81/92)

81화

수진은 짓궂게도 그의 귀에 속삭였다.

“하나. 둘…….”

시옷 발음이 시작되자마자 한해가 말했다.

“가지 마.”

수진은 결국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한해의 목덜미에 쪽 소리가 나게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칼에 찔려 누워 있는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냐?”

“칼에 찔려 누워 있는 사람한테 이래도 되냐?”

“알았어, 오빠. 비긴 걸로 하고 우리 이제 자자. 어젯밤에도 그랬다. 복부 쪽의 상처가 아직 덜 아물어서 그녀가 뒤에서 그를 안아주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오빠한테 백허그를 하고 자겠냐며.

포옹의 방식이 그렇긴 했다. 뒤에서 안아주는 역할은 주로 한해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그녀의 따스한 품을 만끽하다가 한해는 다시 눈을 떴다.

창밖에서 흘러들어온 달빛은 은은하게 그림자를 만들었다.

잊지 말자. 오늘 밤의 모습과 분위기를.

부드럽게 어깨를 타고 넘어온 그녀의 머리카락, 그리고 달달한 체취까지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밤이었다.

*

어머니와 아들의 아침 식사만큼 흔한 풍경이 또 있을까.

미역국에 소고기 장조림, 달걀 프라이에 밑반찬 몇 가지. 그리고 노릇하게 구운 조기 한 마리씩.

그러나 강은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함께 먹은 게 언제인지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아들이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있던 어머니가 물었다.

“맛있어?”

“네. 이런 집밥 오랜만이어서요.”

“레이나가 집에서 살림하고 그런 스타일은 아니지?”

“보셔서 알잖아요.”

어머니 삼순은 손을 휘휘 저였다.

“상관없다. 여자가 꼭 집에서 살림해야 한다는 법이 어딨어? 너는 괜찮니?”

“집에서 밥 해 먹고 싶을 때는 오히려 제가 해서 먹어요. 레이나도 잘 먹더라고요.”

“네가 요리를 할 줄 안다고?”

“간단한 것들이요. 오늘은 어머니한테 맛있게 얻어먹었으니까 다음에는 제가 해드릴게요.”

“아유 됐다. 너도 바쁠 텐데.”

강의 우려와 달리 어머니는 혼자 지내는데도 전혀 불편함 없이 안정되었다. 진작 그 집에서 모시고 나오지 못한 일이 후회될 정도로.

아침 식사를 마친 강은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일회용 커피 믹스를 꺼냈다.

“커피는 제가 타드릴게요.”

“회사 안 늦었니?”

“괜찮아요. 조금 늦게 갈 거라고 비서한테 말해두었으니까.”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만들어 한 잔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그녀는 커피를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시고는 중얼거렸다.

“요즘은 참 다 잘 나오는구나. 이런 커피도 참 맛나다.”

“좋은 세상이죠.”

강도 씩 웃으며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다.

어머니는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꼭 감싸고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아버지는 잘 지내시니?”

어머니를 신도시 아파트로 빼낸 뒤 아버지는 지금껏 한 번도 그녀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안위에만 신경을 곤두세울 뿐.

“잘 지내기 어려우시겠죠.”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지었다.

“내가 괜한 짓을…….”

“후회하세요?”

“모르겠다.”

강은 어머니의 손을 슬며시 끌어 잡았다.

어머니가 차려준 아침을 둘이 먹은 것도 너무 오랜만이지만 이렇게 손을 잡은 것도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실형을 살 수도 있어요.”

삼순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남편을 배신한 뒤 그녀는 수십 수백 번 자문했다.

그이가 죗값을 받기를 바라지? 평생 날 괴롭힌 대가를 치러야 하잖아?

나만 그랬다면 이제 도망쳤으니 그만일지 모르지만, 이 아이들의 인생까지 망치려 들었잖아?

그런데도 남편이 몰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턱 막혔다.

그러기를 바라고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잖아? 왜일까? 사람의 마음은 왜 이리 복잡한 걸까?

“혹시 아버지가 걱정되세요?”

아들의 물음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어요. 하지만 아들 된 도리로서 최선을 다해 빌고 용서를 구해볼 순 있어요.”

“누구한테? 한해에게 말이냐?”

“네.”

“그 아이하고는 사이가 나쁘지 않은가 보구나. 자주 얘기하는 거 보면.”

“네. 저는 한해 형을 믿어요. 아마 형도 그럴 거고요.”

삼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짙은 안개와도 같은 불편한 기운이 둘 사이를 스멀거렸다.

“어머니, 15년 전에 울진에서 큰 사고가 있었잖아요. 아버지가 인수했던 회사에 소속된 배가 태풍에 전복되었잖아요. 혹시 그때 일에 대해서도 아세요?”

강은 질문을 하면서 어머니의 얼굴 구석구석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녀의 미간에 바짝 힘이 들어갔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억 안 나세요?”

“왜 기억을 못 해. 수진이도 그래서 우리가 데리고 왔잖니.”

“그 일이 정말 사고였을까요?”

“무슨 소리냐?”

“아버지가 고의로 그랬던 건 아닐까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짝 조여진 미간을 풀지 않고 되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냐?”

“저랑 얘기하던 중에 아버지가 먼저 그런 말씀을 얼핏 하셨어요. 그 사고가 우연히 난 거 같으냐고. 자기가 수진이를 데리고 오려고 수를 썼다는 식으로…….”

“전에도 네가 이런 이야기 얼핏 했던 것 같은데…… 난 모르겠다. 거기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면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캐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나도 많이 의심했다. 그이가 설마 그런 짓까지 했을까? 모르겠어. 그러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야.”

“저도 그러지 않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제 더 이상 어머니에게 그 일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을 겁니다.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을 겁니다.”

“그이는 뭐라고 해?”

“당연히 부인하죠.”

“한해와 수진이도…… 알고 있니?”

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말했어요. 숨겨서는 안 될 일 같아서.”

“아버지가 많이 밉지?”

강은 남아 있던 커피를 마저 마셨다. 씁쓸하면서도 묘하게 단맛이 꼭 사람의 마음을 닮았구나 싶었다.

“밉고, 또 불쌍해요.”

이번에는 어머니가 손을 꼭 잡았다. 할 말이 백 가지는 있는데 차마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저 아들의 손등만 쓸어내렸다.

*

계절이 한겨울의 고개를 넘어갈 무렵 한해의 상처도 거의 다 아물었다.

사토시 씨가 찾아온 건 수진이 출근한 오전 시간이었다.

“오늘 날씨도 따뜻한데 산책이나 같이할까 하고.”

“좋죠. 몸이 좋아지니 병실에 있기 더 갑갑해지네요.”

“퇴원이 며칠 안 남았지?”

“네. 다음 주에는 집에 갈 수 있습니다. 집에서도 며칠 더 쉬라고 하지만요.”

“회사는 천천히 나가도록 해. 당분간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팀장님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팀장 녀석은 내 지시를 따르지.”

그들은 병원 건물 주변을 돌았다. 이제 한해에게 보조기구는 필요 없었고 보통 사람이 걷는 속도로 걸었다.

“이 회장은 또 연락 없어?”

“한 번 다녀간 뒤로는 소식이 없습니다.”

“순순히 감방에 들어갈 인간이 아닌데. 분명히 수를 쓸 거야.”

“그렇겠죠.”

“선박 전복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인하고 있지?”

“그건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일이니까요. 제가 알아본 바로는, 만약 그 일이 이 회장의 짓으로 밝혀진다면 여생을 교도소에서 보내야 할 겁니다.”

사토시는 먼 하늘로 한숨을 토해냈다.

“사실은 내가 좀 알아봤어.”

“선생님이요? 어떻게요?”

한가로운 걸음으로 느슨해졌던 긴장의 고삐가 바짝 당겨졌다.

“당시 그 배를 소유하고 있던 회사에 대한 기록을 알아봤지. 사고가 나기 1년쯤 전에 이태화 회장이 인수했고 사고가 나고 몇 달 뒤 다른 회사에 팔았더군.”

“거기까지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몰랐겠지.”

사토시 씨는 주머니에서 여러 번 접은 A4 용지를 꺼냈다. 한해에게 건네주는 대신 두어 번 흔들었다.

“그게 뭡니까?”

“당시 그 회사 직원으로 등록되어 있던 사람들의 이름과 전화번호야.”

한해는 소름이 돋았다. 사토시 씨가 친구이니 망정이지 적이었다면?

“내가 직접 연락해서 알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지나친 간섭이라고 판단했네.”

그는 진지한 얼굴로 한해를 마주했다.

“자네가 이걸 손에 넣게 되면 돌이킬 수 없을 거야. 받을 텐가 말 텐가?”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라면…….”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전히 힘이 들어간 이마에는 주름이 깊었다.

“난 옛날 사람이니까. 쿨하게 덮지 못하고 알아봤겠지.”

“만약 이태화 회장이 개입되어 있다면요?”

“아버지의 원수가 활개 치고 다니도록 놔둘 순 없지.”

한해는 걸음을 멈추었다. 유난히 희고 풍성하게 뭉쳐져 있는 구름을 쳐다보았다.

어릴 때 아버지는 그의 우상이자 미래였다.

그가 했던 모든 것들은 아버지를 닮기 위해서 한 일이었다.

아마 그 일이 아니었다면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항해사의 삶을 살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처럼 언젠가 선장이 되기 위하여.

“어릴 때 아버지가 가끔 배에 저를 태워주셨어요.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어린 한해의 눈에는 바다 위에서 보는 구름이 육지에서 보는 구름과 달라 보였다. 아빠에게도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 아들도 그렇구나. 아빠도 그래.’‘왜 그럴까요?’‘바다로 나오면 육지에 있는 것들이 그리워지거든. 그래서 구름도 더 의미 있게 보이는 거야.’그는 아버지의 설명이 딱 맞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바다에서 제일 많이 본 구름은 우리 한해 구름이야.’‘저를 닮은 구름이 있어요?’‘응. 있어. 아주 똑같이 생겼어.’‘지금도 보여요?’‘지금은 안 보이지. 지금은 아들이 여기 있으니까.’두 뺨을 감싸주던 아버지의 손, 그 투박하고 정겨운 감각이 지금도 볼에 생생하다.

“주십시오.”

한해는 사토시 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확실히 결심이 섰냐는 식으로 눈에 힘을 주었고, 한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해.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를 수 있어.”

“일단은 복수를 해야 할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사토시 씨는 종이를 건네주었다.

‘태화 해운 직원 연락처’라는 제목 아래 스무 명 남짓한 사람의 이름과 주민등록 번호, 그리고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한 번 넘으면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는 순간이었다.

.

.

.

수진은 그날도 퇴원하고 병실로 왔다. 한해는 사토시가 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제시했다. 그녀에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녀 역시 한해와 똑같은 결정을 했고 연락처를 건네받았다.

뚫어져라 종이를 노려보는 그녀에게 한해가 말했다.

“퇴원하는 대로 알아보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때까지 기다릴 게 뭐 있어. 내일 연락해볼게.”

“그 사람들이 순순히 고백할까?”

“아마도 아니겠지. 그 일을 고백한다는 건 자신도 공범이라고 인정하는 셈이니까. 최소한 방관자였다고.”

“그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한해는 잔뜩 인상을 쓰고 연락처를 쏘아보았다.

오히려 수진은 명쾌하게 말했다.

“가능성이 작더라도 다른 방법은 없어. 일일이 다 연락해보는 수밖에. 혹시라도, 단 한 명이라도 있을지 모르잖아. 긴긴 세월 양심의 부담을 털어내기를 기다렸던 사람이 있을지도.”

“만약 아무도 안 나타난다면?”

수진은 꽤나 오래 고심했다. 손가락으로 종이 위의 이름들을 쓱쓱 몇 번이나 훑어 내렸다.

“그렇다면 의심을 지울래. 이태화 회장을 믿어주겠어.”

한해도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이 일은 내가 하는 게 맞겠어.”

수진은 손에 든 종이를 흔들었다.

“왜지?”

“아무래도 이분들한테는 내가 덜 부담스러울 테니까. 선장의 아들보다는 뱃사람의 딸이 동정표를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일리 있는 말이어서 한해도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혹은 그 사람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증거들이 있다.

레이나에게 가장 강력한 증거는 잠들기 전의 분위기였다.

서로를 안고 쓰다듬고 혹은 장난치는 친밀한 시간이 얼마나 있느냐.

내가 이이를 사랑하는 건 분명해. 나는 이이에게 안겨 잘 때 기분이 제일 좋거든.

처음에는 거리를 두던 강도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왔다. 잠들기 전 그녀와 꼭 안고 있거나 가끔 그녀를 죽부인처럼 안고 잠을 청할 때도 있었다.

그와 함께 살기 시작한 뒤 모든 것이 좋았지만 침대 위의 시간은 특히 더 좋았다.

그런데 한해가 피습을 당한 뒤 그 달콤한 시간은 엉망이 되었다.

강은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운 좋게 잠이 드는 날에도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오늘도 그랬다. 전날 밤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그를 토닥여 겨우 재웠는데 아침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벌떡 일어났다.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왜 그래? 또 악몽 꿨어?”

레이나도 몸을 일으키고 그를 안아주었다.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처럼 단단한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미안해.”

“괜찮아. 다시 잘까?”

“레이나. 난 지옥에 떨어질 거야.”

그녀는 작은 지옥에 이미 떨어진 기분이었다.

이이는 좋아질 수 있을까? 지금도 이런데, 만약 아버지가 실형을 받고 교도소에 갇히기라도 하면?

아버지의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아버지를 팔아먹었다는 죄에 대해서 스스로 이미 판결해버린 걸까?

“오빠. 왜 자꾸 그렇게 생각해?”

레이나는 그의 등을 토닥이고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만약 오빠가 아버님을 위해 진실을 은폐했다 해도 똑같이 괴로웠을 거야. 아니, 더 힘들었을 수도 있지.”

“만약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면…… 난 한해 형을 못 볼 거야.”

“진실을 은폐했다면 한해 씨를 볼 수 있었을까?”

“그 경우에도 마찬가지지. 너의 말이 맞아. 어느 쪽이든 나는…….”

레이나는 그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그저 꽉 끌어안고 체온으로 위로해줄 뿐.

“세월이 해결해줄 거야. 처음부터 당신에게 주어진 선택은 최선이나 차선을 고르라는 선택이 아니었어. 최악과 차악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선택이었고 당신은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나쁜 선택을 했어.”

“넌 어때? 수많은 문제를 풀어봤잖아.”

레이나는 빙긋이 웃어 보이고는 선생님이 학생에게 하듯 토닥여주었다.

“수학은 늘 정답이 있어. 차악도 없고 최악도 없지. 나에겐 수많은 수학의 난제들보다 당신이 훨씬 더 어려웠어. 그렇게 어렵게 얻은 당신을 절대 잃을 수 없어.”

강은 멍하니 그녀를 마주 보았다.

“왜 하필 나 같은 놈한테 와서 이렇게 고생해?”

“그러게. 그러니 더 고생시키지 마.”

그녀는 다시 강을 눕히고 눈꺼풀을 내려주었다.

“우리 강이 조금 더 자. 선생님 말 들어.”

*

분명히 잠을 자긴 잤는데 너무 머릿속이 복잡해서 꿈과 현실이 뒤섞인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수진은 이제 병실에서 출근 준비하는 일이 익숙해졌다.

“얼마 안 남았네. 여기서 이러는 것도.”

한해가 비스듬히 서서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잘 갔다 와. 언젠간 이 시절도 추억으로 남겠지?”

그녀는 한해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선사했다.

“환자복 입은 오빠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안 잊을 거야!”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서는 척했지만 마음은 내내 무거웠다.

출근해서 커피를 손에 들고 책상에 앉은 뒤에도 종이 한 장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여러 번 접힌 종이를 펴서 책상 옆 보드에 고정시켰다.

정확히 19명의 이름과 연락처.

이 중 누군가는 알고 있을까? 15년 전 여름, 미친 태풍이 바다를 휩쓸었던 그날 무슨 정말로 일이 있었는지?

수진은 제일 위에 적힌 이름을 눈에 담았다. 이훈민.

그 아래 낯선 이름들이 늘어서 있었다.

좋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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