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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79화 (79/92)

79화

그들은 일부러 사소한 대화만 나누었다. 그러나 운명의 결정을 끝까지 회피할 수는 없었고 결국 수진이 먼저 묻고 말았다.

“이태화 회장 어떻게 할지…… 결정했어?”

한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에겐 그를 용서할 권리가 없어.”

그는 폭풍우 치는 바다를 상상했다.

제법 큰 고깃배였다 해도 태풍 앞에서는 모래 알갱이 같은 가련한 존재였을 테지.

태풍이 갑자기 경로를 바꾸었다는 경고 무전을 받지 못했거나, 혹은 잘못된 내용의 무전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위기를 헤치며 바다에서 살아남았던 뱃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태풍을 피하지 못했고 그대로 수장되었다.

“난 증거를 더 찾아봤으면 좋겠어.”

“너무 오래된 일이라. 남아있을까?”

“증인은 있을지도 모르지.”

“증인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증인만으로 법적 처벌이 가능할까?”

“법적 처벌만 벌이 아니니까.”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수진은 정확히 알지 못했으나 되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이 회장을 만날 수밖에 없겠다.”

“응. 나도 오빠랑 같이 이태화 회장을 만나봐야겠어.”

수진은 마음이 서늘해지다 못해 얼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얼마 전까지 시아버지였던 사람이 이제는 피앙세를 청부살해 하려 한 가해자가 되었다. 어쩌면 그뿐만 아니라 부모의 원수인지도.

“오빠가 이태화 회장을 굳이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은 이해가 가는데 왜 그렇게까지 피했어? 내가 아는 오빠는 일이든 사람이든 회피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러게. 왜 그랬을까?”

한해는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대답했다.

“본능적으로 알았던 걸까? 나에게 너무나도 끔찍한 존재라는 사실을.”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에는 한해가 물었다.

“넌 어땠어? 넌 그 사람을 어릴 때부터 봤잖아.”

수진은 심호흡을 길게 하면서 오랜 기억을 환기했다. 뭉게구름처럼 모인 장면과 감각을 중얼중얼 전해주었다.

그의 느낌은 검은색 중에서도 더 검은색. 절댓값에 가까운 어둠과도 같았다.

그의 본질이 궁극의 악에 가깝다는 것을 어린 수진도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미묘하게 안도했다.

“그 사람이 나를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았어.”

“어떤 면에서?”

“옛날 영화 중에 킹콩 나오는 영화 있잖아. 무시무시한 괴물 킹콩을 그 영화의 주인공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아. 왜냐면 자기를 해치지 않는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거든.”

“킹콩이 그 여자를 좋아하잖아.”

“응. 킹콩은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지만 여자는 본능적으로 알지. 나도 그랬던 것 같아. 이태화 회장은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 없지만 난 그냥 알았어. 아, 이 사람이 나는 지켜주겠구나.”

“자기 딸 때문이었겠지. 널 죽은 딸의 환생으로 여겼으니까.”

“그랬겠지. 그때는 전혀 몰랐지만.”

수진은 괴로운 듯 입술을 슬며시 물었다가 놓았다.

“고백하자면 그래서 그냥 맞서지 않고 조용히 있었던 것 같아. 비겁하게도.”

한해는 배를 천천히 어루만져보았다. 아직 퇴원하려면 열흘은 더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때까지 기다리면 너무 늦어진다.

맞서야 할 시간이다.

그는 수진에게 툭 던지듯 물었다.

“연락해볼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로펌 ‘대서양’은 오랜 세월 태화 건설의 법무 파트너였다.

건설업이 워낙 법적 분쟁이 많기에 태화건설 사내에도 법무팀이 있었지만, 그 안에서 해결하기 힘든 사건들은 ‘대서양’에 의뢰했다.

최고의 승률을 자랑한다는 슬로건처럼, 로펌 본사 빌딩은 단단한 유리 성채처럼 생겼다.

제일 위층은 단 두 개의 사무실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표변호사 집무실과 VIP 의뢰인 접견실.

이태화 회장은 서울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접견실 창밖으로 하염없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곳곳에 태화 건설에서 지은 빌딩과 아파트들이 보였다. 그가 발 딛고 서 있는 24층짜리 로펌 사옥 역시 태화 건설의 작품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인간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어. 뭔가를 만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더 많이 만들수록 인간은 신에 가까워지지. 영어로 신을 창조자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야.

그런 의미라면 나는 그 누구보다 신에 가까운 사람이지. 이 거대한 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했으니.

이런 나에게 고작 풋내기들이 덤벼?

꽤나 오랜 기간 움츠려 있었던 그의 심경이 변하고 있었다.

괴물보다 괴물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어둠이 무서운 것처럼, 혹시라도 법의 처벌을 받으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그를 움츠러들게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협박 문자도 일조를 했고.

그러나 경찰에 가서 자수를 해버리고, 협박 문자를 보낸 자를 만나고, 집을 나간 아내와 아들 강이 한 편이라는 사실까지 모두 확인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적이 누군지 알았다. 나는 내가 누군지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남은 일은…….

싸워서 이기는 일뿐.

“아이고.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등 뒤에서 로펌 대표 신광식 변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태화 회장은 느긋하게 몸을 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셨습니까, 회장님?”

로펌 대표가 꾸벅 인사하고 악수를 청했다.

이 회장은 악수를 받으며 농담을 건넸다.

“잘 지냈으면 여기 안 왔겠죠?”

“하하하. 회장님의 여유와 유머 센스는 정말 제가 죽었다 깨나도 못 따라가겠습니다.”

신 대표는 드넓은 접견실 가운데 놓인 가죽 소파로 이 회장을 안내했다.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

이 회장의 성격을 잘 아는 그는 바로 본론을 시작했다.

“변호사들한테 의견을 들으셨겠지만 일단 합의만 받고 나면 어떻게든 집행유예로 만들어볼 여지가 생깁니다.”

“합의를 못 받으면 실형이 불가피하다? 전혀?”

“그렇습니다. 사건 정황을 보니 합의를 받아낸다 해도 아예 실형을 피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데…… 그 정도는 제가 직접 나서서라도 해보겠다는 겁니다.”

“그 녀석이 굉장히 까다롭게 굴고 있어요.”

“당연히 그렇겠죠. 아직 병원에서 퇴원도 하지 않았으니까. 재판까지는 시간이 충분합니다. 아직 수사도 마무리 안 되어 기소도 안 된 상황이니까요.”

“기소를 피할 방법은?”

“그건 어렵습니다. 강한해라는 분하고 혹시 어떤 인연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며느리와 불륜 관계를 맺은 녀석이지.”

“그 얘긴 들었습니다만 내연관계를 입증할 증거가 없어서 재판에서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지. 내가 그렇다고 믿었으니까. 홧김에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주장하면 감형이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역으로 형량이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청부를 계획한 기간이 꽤 길어서 상당히 계획적인 범죄로 보일 겁니다.”

“그렇다면 감형 요인은 합의와 선처가 전부다?”

“탄원서를 공들여 준비하면 제일 좋고요. 그래서 피해자 강한해 씨와 어떤 인연인지 여쭤본 겁니다. 혹시 저희가 이용할 만한 다른 특별한 관계가 있는지.”

이 회장은 고민에 빠졌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잠시 사업이 어려웠을 때 와이프랑 애를 바닷가 마을에 피신시킨 적이 있었어요. 강한해는 그 마을에 원래부터 살던 아이였고. 우리 강이랑 친구처럼 지냈지.”

“그 뒤로도 강한해 씨와 꾸준히 연락하고 지내셨고요?”

이 회장은 말이 계속 목젖 언저리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그때 그 일을 털어놓아야 할까? 털어놓는다면 어디까지?

아니야.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할 필요가 뭐가 있어. 그건 너무 오래 전 일이야.

“그 뒤로는 서로 연락이 없었지. 따로 얼굴을 보거나 하는 사이는 아니었고.”

“알겠습니다. 그럼 특별한 인연은 없는 걸로 알겠습니다.”

신 대표는 조금 음성을 낮추고 말했다.

“그리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합의 관련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하셔야 합니다. 이게 어느 정도는 사람 기분에 달린 문제라 일단 강한해 씨가 퇴원을 한 후에……”

이 회장의 핸드폰 진동 소리가 신 대표의 말을 끊었다.

“받으십시오.”

신 대표는 누군지 모르는 발신인에게 차례를 양보했다.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한 이 회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 녀석 원래 양반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신 대표에게 발신인을 보여주었다.

강한해.

신 대표는 번쩍 눈을 뜨고 말했다.

“괜찮으시다면 스피커폰으로 통화하시죠. 녹음 버튼도 누르시고요.”

이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키는 대로 했다.

“어. 강한해 군.”

“통화 괜찮으십니까?”

“나야 괜찮지. 자네는 몸이 좀 어떤가?”

“지금 제 몸 상태를 여쭤보신 겁니까?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이 이렇게 정확히 들어맞는 순간은 없겠군요.”

한해는 농담을 하면서도 목소리가 서늘했다.

이 회장 맞은편에 앉은 신 대표는 두 손을 아래로 누르는 시늉을 했다. 저자세를 주문하는 신호였다.

“미안하네. 내가 정말 그때 정신이 나가서.”

“이상하군요. 그때라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마치 우발적인 범죄같이 들리는데요?”

한해는 또박또박 이 회장의 발언을 꼬집었다.

“회장님. 정신이 나가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제삼자에게 문학적인 비유까지 들어 설명까지 해가면서 오랜 기간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저지른 범죄였습니다.”

통화 내용을 스피커폰으로 함께 듣고 있던 신 대표가 자기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법적인 지식과 논리까지 갖춰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태화 회장에게 전혀 주눅 들지 않는다.

이 젊은이는 대체 누굴까?

“하여튼 미안하게 되었네.”

한해의 논리를 다시 반박하지 못하고 이 회장은 말을 얼버무렸다.

“어쨌든 이렇게 전화해주어서 고맙네. 아무래도 병원에서 나를 보는 건 불편할 테니, 자네 퇴원하는 대로 내가 찾아…….”

“아니요.”

이번에도 한해는 칼같이 이 회장의 말을 잘랐다.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시간 되는대로 오세요.”

“엇. 병원으로 오라는 얘긴가?”

“네.”

“그래도 괜찮겠나?”

“대신 그 문제도 같이 이야기하도록 하죠. 저 말고 다른 피해자도 같이 있을 테니까요.”

“그 문제?”

“14년, 아니 이제는 15년 전. 당신이 수를 써서 망양호를 침몰시켜 선원들을 죽게 만든 사건 말입니다.”

귀 기울여 듣고 있던 신 대표가 너무 놀라 몸을 뒤로 젖혔다.

이 회장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건가?”

“부인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당신을 만날 이유가 없고요.”

장기로 치면 장군, 체스로 치면 체크메이트를 받은 셈.

이 회장은 고민에 빠졌다.

합의는 반드시 필요해! 아니면 감옥에 들어가야 한다고!

-어느 날 교도소에서 당신이 한눈판 사이에 누군가 옆구리에 잘 갈린 칫솔을 박을 거야. 어쩌면 목 근처의 급소를 찌를 수도 있고. 당신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겠지. 그 순간이 바로 당신이 진짜 용서를 구하는 순간이야. 사토시의 협박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알겠네. 일단 만나서…….”

“알겠다는 건 무슨 뜻이죠? 15년 전 망양호 침몰 사건을 인정한다는 뜻입니까? 분명히 짚고 넘어가죠.”

“그건 태풍 때문에 배가 침몰한 사건 아닌가. 내가 어떻게 그런 사건을 일으키나? 신도 아닌데.”

“그 방법은 당신이 잘 알겠죠. 망양호가 소속되어 있던 선사를 당신이 샀으니까요. 저희 아버지는 그 회사에 소속된 망양호의 선장이었고.”

“오해야. 그런 오해도 만나서 풀어보자.”

“그 사건을 알고는 계시는군요?”

“알고는 있지. 끔찍한 비극이었으니까…….”

“좋습니다. 일단 통화는 이 정도로 하고 만나서 이야기 나누시죠.”

“언제 어디로 가면 되나?”

“내일쯤 뵙죠. 병원 호실은 문자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한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화면이 깜박이는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이 회장과 신 대표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정말입니까? 15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정적을 깬 신 대표의 음성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무슨 소립니까. 저 녀석이 당치도 않은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 회장은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회장님.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미리 법적으로 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이 회장은 미칠 것 같았다. 강한해가 눈앞에 있다면 직접 칼로 찌를 수도 있을 만큼 증오심이 차올랐다.

피라미 같은 녀석이 나를 끝까지 궁지로 몰아?

“아니에요. 오해예요.”

“알겠습니다. 가실 때 최고 에이스 변호사를 붙여드리겠습니다.”

병원 이름과 호실을 알려주는 한해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 회장은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드디어 녀석을 만나는군.

15년 만의 재회를 떠올리자 피의 온도가 조금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

.

.

통화를 마친 한해는 녹음버튼을 눌러 통화 내용을 저장했다.

옆에 있던 수진이 물었다.

“왜 갑자기 그 얘기를 했어? 만나서 얘기하지.”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는 것 같더라고.”

“그게 왜?”

“누군가 옆에 있다는 뜻이지. 이 회장 같은 인간이 나와의 통화를 누군가와 공유한다면 그게 누구겠어?”

“변호사?”

“그렇지. 그리고 이 회장은 변호사에게는 오래전 그 일을 털어놓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 그래서 먼저 공격한 거야. 이 회장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동시에 둘 사이에 불신의 씨앗을 던진 거지.”

“와…… 오빠 진짜 대단하다.”

그의 냉철한 태도에 수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는 학교에서 책으로 지식을 쌓은 사람과 달랐다. 타고난 강인함이 수많은 경험을 통해 더욱 단련된 느낌이랄까.

“녹음은 왜 했어?”

“재판에서 쓸 수도 있을 테니까. 제삼자들끼리의 대화는 증거로 쓸 수 없지만 본인이 참여한 대화나 통화는 몰래 녹음해서 증거로 쓸 수 있어. 게다가…….”

한해는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 회장도 내 번호가 뜬 걸 보고 분명히 녹음을 했을 거야. 변호인이 녹음하라고 시켰을 수도 있지. 그쪽에서 이번 일이 우발적인 범행인 것처럼 말하길래 내가 일부러 조목조목 반박했어.”

“게다가 오빠가 끝까지 저희 부모님 일을 불쑥 꺼내는 바람에 그쪽에선 통화 파일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겠네.”

“그렇지. 하지만 나로선 쓸 만한 카드 한 장을 얻은 셈.”

그는 손에 쥔 핸드폰을 흔들었다.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해가 왜 이 회장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고 사사건건 따졌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빠 이렇게 무서운 사람이었어?”

“내가 무서워?”

“카리스마가 막…….”

“이리 와.”

한해가 장난스럽게 명령했다. 수진 역시 장난을 받아주며 순순히 그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왔는데요?”

이 회장과 통화할 때만 해도 무겁게 내려앉아 있던 분위기가 급반전되었다.

그는 차가운 눈빛을 반짝이며 두 글자를 내뱉었다.

“키스.”

이건 어떤 종류의 역할극일까?

그녀는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뗐다.

“아니. 그런 건 키스가 아니지. 제대로 해봐.”

냉정하게 말하는 한해를 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는 제멋대로인 보스의 역할인가? 그렇다면 나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틀고 최대한 깊이 교감할 수 있는 각도를 만들어 입을 맞췄다.

천천히 집요하게, 제멋대로인 보스에게 짜릿함을 선사해주었다.

혼이 빠질 정도로 키스한 다음 그의 뺨을 스치듯 입술을 옮겨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작은 그쪽 마음대로였지만.”

그녀는 가볍게 깨물며 느릿하게 속삭였다.

“언제 끝날지는 제가 정하죠.”

그녀가 주도하고 그는 속절없이 따라가는, 새로운 감각의 스킨십이 이어졌다.

“누가 보면 쫓겨날 상황인데.”

한해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환자복을 입은 그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고, 수진은 그의 앞에 선 채로 뜨거운 장면을 연출 중이었다.

“그래서 더 짜릿하지 않나요?”

“환자를 이렇게 흥분시켜도 되는 건가?”

“잘 참아봐요.”

그녀는 자신의 역할을 어렴풋이 잡았다. 냉정한 보스를 오히려 휘어잡고 복종하게 만드는 마성의 비서?

보스도 비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쉽다. 키스로만 끝나기엔 너무 달아올랐는데.

“이제 어떡할 거야?”

“그러게요. 나도 못 멈추겠는데 어쩌죠?”

“멈추는 건 그쪽에서 하겠다고 했으니, 그쪽에서 책임져야지.”

“어떻게 책임지면 될까요?”

“이번에는 내가 리드해볼까.”서로의 등에 둘러져 있던 손이 자리를 옮기고 장난스러운 대사를 흘리던 입에서 뜨거운 호흡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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