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이태화 회장은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고 출입구만 쏘아보고 있었다.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이 곧 들어올 것이다.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그는 움찔했다. 팔짱을 끼고 힘을 너무 오래 주고 있어서 어깨가 뻐근해질 때쯤, 누군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음성이 차분했기에 오히려 더 섬뜩하게 이 회장을 자극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지긋한 나이의 신사가 영국식 슈트를 입고 앉아 있었다. 사토시였다.
이 회장은 그의 얼굴이 낯익었지만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통 나지 않았다.
“누구십니까?”
“오늘 보기로 한 사람이죠. 저랑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잖습니까.”
사토시는 VIP 고객을 상담하는 펀드 매니저마냥 친절했고, 이 회장은 어이가 없었다.
열흘이나 무시무시한 협박을 하고, 때론 비웃고, 때론 유치하게 놀리던 상대가 이런 노신사라고?
그런데 낯이 익다. 이 사람을 대체 어디서 봤지?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의외여서요.”
“제가 좀 짓궂긴 했죠? 허허.”
사토시는 이 회장 맞은편에 앉아 들더니 온 커피를 홀짝였다.
“별 생각 없이 잡은 카페인데 커피 맛이 훌륭하네요. 저는 이렇게 묵직한 바디감을 좋아하는데 이태화 회장님의 커피 취향은 어떠신지요? 커피 취향은 와인 취향을 닮는다는데.”
이런 미친놈이…… 지금 내 커피 취향이 궁금해?
“대체 왜 그런 협박을 한 겁니까?”
이 회장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정의실현이랄까요?”
사토시 씨는 싱긋 미소 지었고 이 회장은 소름이 돋았다.
“정의실현이라니…… 당신이 이 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아들이 죽을 뻔했는데, 당신 같으면 가만히 있겠어요?”
“아들이요?”
앨리스처럼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일까?
이 회장은 아무 실마리도 잡지 못한 채 목만 타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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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한해는 수진과 함께 병실에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배에서 즐기던 게임을 가르쳐줬는데 수진도 제법 빨리 룰을 익혔다.
그녀는 연속으로 두 판을 내리 이긴 뒤 팔을 흔들며 좋아했다.
한해가 포기했다는 듯 손을 들었다.
“오늘 운이 너한테 다 갔나 보다. 좀 쉬자.”
수진은 카드를 내려놓고 한해의 손을 잡고 뺨을 기댔다.
“담에는 내기하자. 아무것도 안 걸고 하니까 긴장감이 떨어지네.”
“너무 자신하지 마. 원래 초반에는 잘 따는 법이야.”
“과연 초반이어서 그럴까? 훗!”
그녀는 한해의 표정이 어딘가 쓸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빠 무슨 일 있어?”
그는 감추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꼭 말해야 할 것들. 그리고 네가 결정해야 할 일이 있어.”
수진은 가슴이 철렁했다.
“또 뭔데…… 나 이제 그냥 카드 게임이나 하면서 지내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 거야. 이 일만 지나가면.”
한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잠시 눌렀다가 뗐다.
“지금쯤 사토시 씨가 이태화 회장을 만나고 있을 거야.”
“사토시 아저씨가? 왜?”
“내가 부탁드렸거든.”
“그동안 오빠가 이태화 회장하고 연락했던 거 아니었어?”
“그랬지. 그런데 이태화 회장이 너무 만나고 싶어하더라고. 그래서 사토시 씨한테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대신 만나달라고 부탁했어.”
“아…… 그랬구나.”
“그전에도 나 혼자 고민하고 결정하기 어려운 것들도 있고 해서 조언도 부탁드렸지. 지금쯤 만났을 거야.”
“그럼 이태화 회장은 그동안 연락 왔던 사람이 사토시 씨인 줄 알고 있겠네?”
“응. 그렇게 연기를 해달라고 부탁드렸어. 지금까지 주고받은 메시지 내용도 다 보여드렸고.”
후두둑- 빗줄기가 병실 창문을 스쳤다. 날씨가 풀리면서 눈이 아니라 겨울비가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사토시 아저씨는 뭐라고 하셔?”
“처음엔 엄청 분노하셨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길길이 날뛰셨고. 하지만 강이 이야기를 하면서 진정시켰어. 다 듣고는…… 내 뜻에 따르겠다고 하시지.”
“오빠 뜻은 어떤데?”
“난 조건부로 용서할까 생각도 했어. 범죄 사실에 대한 자백을 이 회장에게 얻어내고, 다신 우리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고 했지. 약속을 어기면 그대로 경찰에 신고하려고.”
“강이 오빠 때문이구나.”
“어차피 살인 미수 정도로는 큰 형을 살지도 못해. 그 정도 처벌이 오히려 면죄부가 될 수도 있고, 도리어 나중에 출소한 뒤에 더 큰 복수를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수진은 이 회장을 용서하겠다는 한해의 반응이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설명을 듣다보니 그의 현명함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알겠어, 오빠. 그런데 내가 결정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건 무슨 얘기야?”
“오래전 이야기야.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들어.”
한해는 심호흡을 하고, 강에게 들은 충격적인 비밀을 들려주었다.
담담하게 듣던 수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런데 수진아. 이 회장이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는 없어. 강이가 대화 중에 그런 뉘앙스를 느꼈다는 건데…….”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아무리 이태화 회장이라고 해도…… 그 배의 선장은 오빠 아버지였잖아?”
“통신을 방해했을 수 있지. 혹은 거짓으로 태풍 경로를 알렸거나. 생각해봐. 그 시절 이태화 회장은 우리 마을의 최고 유지였어. 모든 사람이 그를 두려워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일했어.”
“대체 왜? 그럴 이유가 없잖아.”
한해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너를 빼앗기 위해서? 그 사람은 갖고 싶은 건 뭐든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데 어린 딸을 잃은 그에게 너는 간절한 존재였을 테니. 내 추측이긴 하지만.”
수진은 신음을 흘리며 두 팔을 교차시켜 어깨를 감쌌다. 자신을 낚아채려는 악마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듯.
“증거는 없어. 워낙 오래전 일이고. 강이가 얘기하다가 알아낸 사실일 뿐이야.”
“이태화 회장은 당연히 부인하겠지?”
“아마도. 그래서 네 의사를 물어보고 싶다는 거야. 너도 그 일로 부모님을 잃었으니까.”
그녀는 어린 시절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부모님이 태풍에 휩쓸려 희생된 뒤, 야속하게도 푸르게 갠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지.
그때는 그저 불운이라고 여겼지. 신의 장난이라고.
그게 범죄였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이태화 회장…… 한때 나의 시아버지였던 자가 우리 부모님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나를 빼앗기 위해서?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해는 그녀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 역시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증거가 없다면 그 일에 대해 벌을 줄 수도 없잖아?”
“아마도.”
“그럼 내가 벌을 주고 싶다고 해도 방법이 없잖아?”
“나를 청부살인 하려고 한 일. 원래 내가 용서하려고 했던 일에 대해 용서를 거둬야지.”
‘아…… 너무 무서워서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수진은 차가운 황무지에 내던져 진 양 과거의 기억에 몸을 떨었다.
그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몸을 틀면 아직 복부에 예리한 아픔이 느껴졌지만 내면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안아준 건지 그녀에게 안긴 건지 알 수 없는 포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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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 군은 제 아들입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망망대해에서 수많은 낮과 밤을 함께 나눈 아들이지요.”
사토시는 드디어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이 회장도 그의 얼굴을 어디서 봤는지 알아차렸다.
맞다. 그 사람이야.
한해의 뒷조사를 하던 호영이 갖고 온 서류가 있었다. 한해가 투자자로 근무하는 회사에 대한 자료였는데 그 회사의 회장이 바로…….
“당신이었군요.”
이 회장은 정교하게 짜인 미로에 갇혀버렸다.
“나의 아들 한해 군은 몹시 궁금해합니다. 오래전의 그 사고도 당신이 계획적으로 벌인 범죄인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 회장은 일단 부인했고 사토시는 그의 눈을 깊이 들어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겁먹은 눈동자가 말하고 있네. 감추고 있는 진실을 들킬까 봐 두렵다고.”
“혹시…… 보상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지불할 의사가 있습니다.”
이 회장은 다급해졌다.
“얼마든지? 얼마나?”
“수억? 아니 수십억이라도…….”
사토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회장님이 건설 쪽에서는 큰손이신지 모르겠지만 투자회사는 계열사에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내가 당장 핸드폰으로 버튼 몇 개만 눌러 이체시킬 수 있는 돈이 수백억은 되는데, 그깟 푼돈을 제시해요?”
“그럼 어떻게 용서를 구하면 되겠습니까?”
“일단은 법에 따라 죗값을 받아야죠. 분명히 당신은 최고의 변호사를 구해 어떻게든 형량을 줄이겠지. 내가 알아본 바로는 그렇다 해도 실형을 피할 순 없고 최소 3년 안팎은 교도소에서 살아야 한다던데.”
이 회장이 알아본 바로도 그랬다. 그러나 피해자인 한해가 합의를 해주고 탄원서도 제출하면 집행유예까지도 노려볼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주요 혐의를 호영에게 돌려야겠지만.
“알겠습니다. 죗값을 달게 받겠습니다.”
“그걸로 끝이라는 얘기는 안 했는데?”
사토시는 이 회장의 귀에 속삭였다.
“어느 날 교도소에서 당신이 한눈판 사이에 누군가 옆구리에 잘 갈린 칫솔을 박을 거야. 어쩌면 목 근처의 급소를 찌를 수도 있고. 당신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겠지. 그 순간이 바로 당신이 진짜 용서를 구하는 순간이야.”
이 회장은 오금이 저렸다.
“어쩌면 그 순간은 먼 훗날 교도소 문을 나선 다음에 찾아올지도 몰라. 비참한 최후를 맞기 전까지 넌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겠지. 그게 네가 받게 될 진짜 벌이야.”
이 회장은 평생 만나지 못했던 강적을 맞닥뜨렸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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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의 전화가 걸려올 때까지도 한해와 수진은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다.
굵어진 빗줄기 사이로 저녁 어스름이 짙어질 무렵 한해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수진에게도 들리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회장님.”
“한해 군. 아직 병원이지?”
“네. 그렇습니다.”
“경찰서에 다녀오는 길이네. 사토시 회장도 만났고.”
“그러셨군요.”
한해는 최대한 말수를 줄여 감정과 기분을 감추었다.
“미안하네.”
“이제야 인정하시는 겁니까?”
“내가 생각이 짧았어. 진심으로 사과하네. 병원 위치를 알려주면 내가…….”
“아니요. 오지 마세요. 우리는 법원 외에서는 마주칠 일이 없을 겁니다.”
“한해 군.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게. 변명하려는 건 아니지만, 자네도 내 입장이 되어보면 부아가 치미는 상황이었다는 걸 인정할 거야. 내 입장에서는 며느리를 다른 놈에게 빼앗긴 셈이니.”
가만히 듣고 있던 수진이 끼어들었다.
“여전히 저를 물건이나 소유물로 생각하십니까?”
“어…… 수진이냐?”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내 표현이 많이 부족했다. 미안하다. 하여튼 다 내 불찰이다. 사과한다.”
“회장님. 이런 일은 불찰이 아니라 범죄라고 부르는 겁니다.”
수진의 매서운 목소리에 이 회장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오래전 저에게도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르셨더군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회장을 떠보기 위해 기습하듯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날 태풍에 휩쓸려 난파된 배…… 그 배에 타고 있던 한해 오빠와 저의 아버지…… 모두 당신이 죽였다고요?”
“그건 정말 오해다. 절대 아니야.”
“증거가 없으니 발뺌하기도 쉽겠죠.”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마. 다들 무슨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수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혀를 끌끌 차더니 한해를 불렀다.
“한해 군. 내 얼굴을 보기 싫다면 변호사를 그쪽으로 보내겠네.”
“변호사는 왜죠?”
“아무래도 일을 좀 부드럽게 마무리하면 좋을 테니 말일세.”
“일단 전화를 끊어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저녁을 안 먹었는데 배가 고플 때 회장님이 계속 독촉하면 짜증이 나서…….”
“알겠네! 내일 다시 통화하지!”
이 회장이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수진의 얼굴은 지독한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나도 알아, 오빠. 몹시 중요한 문제니까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겠지. 하지만 지금 심정으로는 저 인간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 가능한 최고의 형량으로 벌주고 싶어.”
한해도 같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만 더 생각해보자.”
그는 잠시만이라도 수진을 이 문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 일부러 명랑하게 말했다.
“배고프다. 밥 먹자.”
*
“아침은 개처럼 밤은 고양이처럼 오는 것 같아.”
어두워지는 창밖을 보고 있던 레이나가 중얼거렸다.
강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하러 나갈 기분이 아니어서 간단하게 집에서 저녁을 시켜 먹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넘도록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아버지의 형벌에 관해 변호사에게 들은 설명이 귓가에 맴돌았다.
“살인미수죄와 상해죄는 실제 법정에서 가리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당연히 살인미수죄가 얹어지면 처벌이 훨씬 무거워지죠. 일반 상해죄의 경우 피해자와 합의만 하면 부상이 큰 경우에도 집행유예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경우에는 청부업자를 고용했다는 점에서 그럴 확률이 아주 낮고요. 그래서 더더욱 피해자의 합의가 중요합니다.”
결국 이 회장이 여생을 어떻게 보내게 될지는 한해의 결정에 달려 있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레이나가 물었다.
“혹시…… 한해 씨가 뭐라고 얘기했어?”
“아직 결정하지 못한 모양이야.”
“자기가 정말 고민이 많겠다.”
그녀는 강을 꼭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합의는 쉽지 않을 거야. 합의를 안 해준다고 해도 한해 형을 원망할 생각도 없고.”
“그치. 내가 한해 씨라고 해도…….”
강은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아버지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한해 형이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내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워.”
“나는 그런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게 인간이야. 난 당신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야.”
“형의 결정에 끼어 들어선 안 되겠지?”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 이 회장이었다.
레이나도 발신인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네, 아버지.”
“상황이 좀 급해져서 전화로 얘기를 해야겠다.”
이 회장은 인사도 없이 다급히 말했다.
“말씀하세요.”
“아까 경찰에 자수했다.”
“잘하셨어요. 그게 한해 형의 선물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아버지한테 자수할 기회를 안 주고 형이 먼저 경찰에 신고했다면…… 형량 자체가 달라졌을 겁니다.”
“그래서 전화했다. 재판을 시작하면 한해 군의 합의가 절대적이라고 하는구나.”
“설마…….”
“네가 좀 받아다오.”
“아버지!”
그를 위해 기도하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내가 보니까 한해 녀석이 너에 대한 마음은 각별한 것 같더구나. 우리 변호사도 그렇게 조언을 하고…….”
이토록 절박하게 매달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참담했다.
“한해 형한테 제대로 사과는 하셨어요?”
“그럼. 통화했지. 직접 가보고 싶었는데 병원을 안 알려주더구나.”
“형 입장에서는 만나는 일이 꺼려지겠죠.”
“너는 피도 안 섞인 그 녀석 입장만 생각해주는 거냐? 애비 입장은?”
이 회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까딱하면 실형이 나온다고! 몇 년씩 교도소에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강은 이제 더 이상 아버지가 두렵지 않았다. 마음에 있는 죄책감을 다 덜어내고 나니 공포마저 사라졌다.
“아버지 마음에 있는 재판관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아버지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죄는 얼마 만큼입니까? 저와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설마…… 무죄는 아니겠지요?”
“…….”
“판결이 내려지면 알려주십시오. 한해 형에게 부탁을 할지 말지는 그 판결을 들어보고 결정하겠습니다.”
“패륜아가 될 셈이냐?”
“아버지 입에서 패륜이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늘 아버지를 보면서 생각했던 표현이거든요.”
강은 힘을 꽉 주고 마지막 말을 뱉어냈다.
“어머니는 잘 지내고 계세요. 아버지랑 같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잘 지내세요. 궁금하지도 않으시겠지만.”
그는 먼저 전화를 끊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레이나는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명치가 꾹 눌리는 아픔을 느꼈다.
“이리 와. 불쌍한 우리 오빠.”
그녀는 강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춰주었다.
“이것만 알아둬. 오빠는 지금 인간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
“정말 그럴까? 나는 정의롭지도 않고 효심이 지극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일타강사 레이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이리 와!”
그녀는 강의 손을 잡고 침실로 데려갔다. 차오르는 연민과 애정을 좀 더 뜨거운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
수진은 병실에서 한해와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이했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좋은 주말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지는 한해를 보며 그녀는 매일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고, 그런 자신을 보며 실감하곤 했다.
나는 이 남자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서방님은 퇴원하면 뭐가 제일 먹고 싶어?”
좋게 말해 정갈하고 나쁘게 말해 밍밍한 병원 밥을 앞에 놓고 그녀가 물었다.
한해는 행복한 고민 끝에 대답했다.
“질 좋은 참치에 시원한 소맥. 아니면 지글지글 곱창에 소주 한 잔. 아…… 생각만 해도 어지러울 정도로 좋다.”
“다 먹자. 뭘 먼저 먹을지, 순서만 정하면 되겠네.”그들은 일부러 사소한 대화만 나누었다. 그러나 운명의 결정을 끝까지 회피할 수는 없었고 결국 그녀가 먼저 묻고 말았다.
“이태화 회장 어떻게 할지…… 결정했어?”
한해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