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푸른빛으로 침잠하던 그녀의 눈빛이 다시 별처럼 반짝였다.
“그럼 말해도 되겠다.”
한해는 뭐든지 말해도 좋다는 식의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그 미소는 금방 허물어져버렸다.
“조금 늦었지만 대답할게. 나도 오빠랑 결혼하고 싶어.”
그녀는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녀 뒤로 번지는 빛이 한해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다가 온 경험 때문일까. 그는 프러포즈를 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있다가 다시 떠올렸다.
“왜 말이 없어?”
“너무 감격해서 마비가 왔나 봐.”
“혹시 오빠 마음이 바뀌었어?”
“지금 너무 원망스러운 게 뭔지 알아? 팔짝팔짝 뛰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거야.”
“뭐야…….”
한해의 반응을 기다리며 조마조마하던 수진의 얼굴이 활짝 폈다.
“나도 아쉽다. 지금 막 오빠 껴안고 뽀뽀하고 싶은데.”
한해가 그녀 쪽으로 몸을 살짝 틀었다.
“최대한 조심해서 해봐.”
그녀는 한해의 뺨을 가볍게 감싸고 천천히 입술을 포갰다.
촉촉하고 부드럽고 쫀득하고…… 우리 남편의 입술은 너무나 좋은 촉감을 가졌구나.
행복감이 가득 차오르는 상황에서 미안한 마음도 그늘처럼 드리웠다.
프러포즈도, 결혼식도, 오빠는 처음이지만 난 그렇지 않네.
그만큼 더 사랑할게. 내가 더 많이 좋아할게.
천천히 입 맞추는 연인들 뒤로 금빛 햇살이 드리웠다.
*
일주일간의 간병 휴가는 끝났다.
회사에서는 좀 더 쉬어도 좋다고 했지만 수진은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침 일찍 병실에서 짐을 꾸린 수진은 한해가 걱정되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그녀를 떠밀었다.
“얼른 가. 늦겠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괜찮아. 이제 혼자 움직일 만해.”
“응…… 알았어.”
알았다고 하면서도 수진은 떠나지 못했다.
그녀는 헛갈리기 시작했다.
오빠는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가 아닐까?
“금방 다녀올게.”
“뭘 다녀와. 오늘 하루 정도는 집에서 편하게 자.”
“왜 그래? 나 서운해지려고 해.”
“병실에서 너무 오래 지내니까 불편할까 봐 그렇지.”
“1인실인데 뭐가 불편해. 간병인 침대에서 자는 건데.”
“아무리 그래도 병원에서 자는 게 집이랑 똑같냐. 이러다 너까지 아프면 어떡해. 날도 이렇게 추운데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되지.”
분명히 위해주는 말인데도 수진은 괜히 마음이 시렸다.
“알았어.”
그렇게 아쉽게 병실을 떠났다.
손을 흔들고 병실을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한해는 눈을 떼지 못했다. 문이 닫히고서야 그는 시선을 돌렸다.
“애기 같아.”
그녀를 걱정해주며 오늘은 집에서 편하게 자라고 했지만 막상 혼자가 되자 겨울바람 같은 썰렁함이 병실을 휘감았다.
피습을 당한 날부터 지금까지 일주일 넘게 한 몸처럼 붙어 있었다. 목숨을 위협했던 상처도, 갑자기 대지를 급습한 한파도, 모두 그녀가 막아준 것만 같았다.
아파야 하는데도 아프지 않았고 추워야 하는데 춥지 않았다.
중상을 입고 병원에 누워 있지만 그녀가 곁에 있는 삶을 전자라고 하고, 그녀 없이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후자라고 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전자일 것 같아.
그는 TV를 켰다. 하릴없이 떠드는 예능프로그램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영화 채널로 넘어갔다.
“오빠. 그거 보자 그거!”
옆에서 재잘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오늘 밤, 수진이 없이 견딜 수 있을까?
아직 해가 다 솟지도 못한 아침부터 밤의 어둠이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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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는 생각보다 많이 밀려있지 않았다. 동료와 팀장이 신경 써서 도와준 덕분이었다.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일을 시작하는 평범한 일상도 일주일 만에 경험하니 특별하게 느껴졌다.
팀장이 회의실로 그녀를 불렀다.
“남자친구는 괜찮아?”
늘 장난기가 넘치던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처음엔 정말 심각했는데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어요. 워낙 건강한 사람이어서요.”
“휴우. 정말 다행이다.”
“팀장님께서 많이 배려해주신 덕분이에요.”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 회사 에이스 피디님한테.”
“야화 작가님 좀 만나고 올게요.”
“그래. 다음 달부터 연재라고 했지?”
“네. 대표님이 원고 보셨을 텐데.”
“안 그래도 너 없는 중에 회의했어.”
수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구두로는 판권을 계약할 것처럼 분위기가 조성되긴 했는데, 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아직 듣지 못했다.
“뭐라고 하세요?”
“뭐라고 했을 것 같냐?”
“아, 약 올리지 말고요!”
“판권 계약하기로 했다.”
수진은 주먹을 번쩍 쥐고 소리칠 뻔했다.
만약 회사에서 판권을 구입하지 않기로 결정한다면 지금껏 노력한 결과물을 다른 제작사에 넘기는 꼴이 되니까. 소설만 연재하고 드라마로 제작되지 않을 수도 있고.
“계약서 너한테 보내놨어. 작가님한테 확인 부탁해.”
“응? 없던데요?”
“지금 막. 여기 들어오기 전에 보내놨지.”
“서프라이즈로 준비하셨구나! 팀장님 최고!”
“대표님이 작가님하고 너랑 한번 보자고 하더라.”
“빨리 이 소식을 전해드려야겠어요!”
수진은 계약서를 확인하고 곧장 야화 작가에게 보내주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맞춰 그녀의 병원 근처로 달려갔다.
간단한 점심을 먹으면서 둘은 기쁨을 나누었다.
“저는 처음부터 피디님 믿었어요.”
“와, 감동이다. 사실 이 바닥이 그렇잖아요. 될듯하다가 엎어지는 일이 많아서. 처음부터 믿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소설은 처음 써봤는데 저한테도 좋은 경험이었어요.”
“저도 이런 식으로 일 진행한 건 처음이었는데 끝까지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도록 열심히 뛰겠습니다.”
야화는 한해의 안부도 잊지 않고 물어보았다.
“한해 오빠는 너무나도 씩씩하게 잘 견디고 있어요. 곧 회복할 일만 남았죠. 제가 문제예요.”
“수진 씨가 왜요?”
“저는 오빠 혼자 있으면 힘들고 외로울까 봐 돌봐준다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저보고 오늘 집에서 편하게 자라고 하는데, 막상 오빠를 하루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제가 허전한 거 있죠.”
“지금 제 앞에서 너무 무자비하게 알콩달콩하던데요?”
“아…… 그랬나요?”
수진은 혀를 쏙 내밀고 멋쩍게 웃었다.
“대체 누가 한해 씨를 그렇게 했을까요?”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여서 그런지 야화는 자기 일처럼 궁금해했다.
수진은 이태화 회장이 범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그들만의 비밀이니까. 다만 이 정도로 말해주었다.
“우리 넷이서 지금 범인을 찾고 있어요.”
“와, 진짜 희한하다. 그렇게 맺어졌다가 헤어졌다가 다시 맺어진 두 커플이 친하게 지내다니.”
“사실 한 커플 더 있어요.”
수진은 소월과 레오 커플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멍하니 듣고 있던 야화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피디님, 저 있잖아요. 다음 아이템으로 이 이야기 써봐도 될까요?”
“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피디님과 그 세 커플의 이야기 말이에요. 처음에 잘못 이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써보고 싶은 생각이 마구 드네요.”
“뭐 저작권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니까 이름 정도만 바꿔준다면…….”
“오홋. 좋아요. 나중에 한해 씨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꼭 알려주세요.”
야화 작가의 눈이 묘한 빛으로 반짝였다.
수진은 왠지 그녀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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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수진은 결국 병원으로 퇴근했다.
“집에서 좀 쉬라니까.”
한해는 그녀를 걱정하면서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나 여기 와서 싫어? 다른 여자라도 부르려고 했어?”
“무슨 소리야, 그게.”
“나 집으로 돌아가?”
“왜 또 그래.”
일부러 토라진 척하는 수진을 보며 한해는 달콤한 웃음이 나왔다.
“나 웃으면 안 되는 거 알면서 자꾸 웃길 거야?”
“그럼 빨리 좋다고 해줘.”
“좋아. 너무 좋아. 오늘 밤에 혼자 지낼 생각에 먹구름 낀 하늘처럼 기분이 칙칙했는데, 네가 연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온 세상이 밝아진 기분이야.”
“어쩜…… 우리 서방님.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할까?”
수진은 몇 번이나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들은 함께 TV를 보고 주제를 가리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일주일 내내 붙어 있었는데도 대화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수진은 야화 작가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우리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고? 재밌겠는데?”
“아직 소설 결말은 안 난 셈이지.”
“내가 칼에 찔리는 장면은 차마 못 읽을 것 같아.”
“칼에 안 찔리도록 바꿔달라고 할까?”
“그럼 재미가 없지. 참고 읽을게.”
“강이 오빠한테서는 연락 안 왔어?”
“응. 이 회장 쪽도 그렇고 서로 인내심 테스트하는 거지. 못 참고 튀어나가는 사람이 지는 게임이랄까.”
한해는 몹시 궁금해졌다. 야화 작가가 쓰겠다는 소설의 제목이.
*
며칠 동안 의문의 상대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미칠 노릇이었다.
엔간한 위험과 비난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달려온 이 회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괜히 임원들에게 소리 지르기 일쑤였고 불안증은 불면증으로까지 이어졌다.
오늘도 그는 중요한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고 회사를 나왔다.
아내가 떠난 집은 저주받은 곳 같아 더 이상 들어가기 싫어졌다.
“옥수동으로 가자.”
그의 지시를 받은 기사는 익숙한 듯 차를 몰았다.
옥수동 언덕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세워진 고급 빌라는 그의 오랜 연인 혜영이 사는 집이었다.
10년도 더 전에 모임에서 만난 그녀의 호감을 사기 위해 그는 회사에서 새로 지은 빌라 한 채를 선물했고 종종 그곳에서 지냈다.
처음부터 결혼에 뜻이 없었던 혜영은 선물 받은 집에 살면서 그가 원하면 언제든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도 그는 미리 연락도 없이 옥수동 집을 찾아갔고, 카페를 하는 그녀가 돌아오기도 전에 혼자 집에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며칠째 제대로 잠을 못 잤던 탓인지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떠올리기도 싫은 악몽을 꾸고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밤 열 시가 다 되어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혜영이 옆에 누워 있었다.
“어…… 언제 왔어?”
“한 시간쯤 전에? 안 좋은 꿈을 꾸셨나 봐요. 끙끙 앓으시던데.”
“그럴 일이 있어.”
“저녁도 못 드시고 주무셨잖아요? 나와서 좀 드세요.”
그녀는 부엌에 미리 차려놓은 식사를 이 회장에게 대접했다.
밥을 먹고 난 뒤 디저트처럼 위스키를 여러 잔 마셨다.
“술상을 따로 차릴까요?”
“아냐. 요 며칠 계속 마셔서.”
“회장님 이런 모습 처음 뵙네요. 뭐랄까…… 정말 힘들어하시는 모습?”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술을 마시다가 중얼거렸다.
“멈출 수 있는 때를 지났다면 그냥 계속 달리는 수밖에 없어.”
“네?”
“넌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인생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겠다는.”
“있죠. 그럴 때 회장님을 만났잖아요.”
“그랬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세요?”
“아니. 그런 생각을 해봤자 소용없는 나이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너무 늦은 나이 같은 건 없어요.”
그녀는 위로를 건넸지만 이 회장은 받지 않았다.
“그런 건 다 듣기 좋은 말이나 지껄이고 돈을 벌어보려는 사기꾼들이 하는 소리고.”
혜영은 이 회장에게 다가가 뒤에서 안아주었다.
“제가 안마라도 해드릴까요?”
동시에 이 회장의 핸드폰이 드르륵 진동했다. 호영의 전화였다.
그는 혜영의 팔을 뿌리치고 거실 소파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뭐 좀 나온 게 있어?”
이 회장의 목소리 톤이 훅 올라갔다.
“두 개 다 확인해봤습니다. 회장님한테 메시지를 보내는 그 폰은 대포폰이더군요.”
“대포폰?”
“명의자를 찾을 수 없는 핸드폰이요. 위치추적도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경찰력을 동원하면 모를까……”
“경찰은 안 돼.”
이 회장의 음성이 다시 무겁게 내려앉았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기분이 다시 번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 번호를 추적하긴 어렵습니다.”
“그 사람은? 강이하고 만나거나 그러진 않았어?”
“부회장님은 이틀 내내 회사와 집, 그리고 외부 미팅 외에 개인 일정은 없었습니다.”
이 회장은 주먹으로 소파를 내리쳤다.
“아무것도 건진 게 없다는 얘긴가?”
“죄송합니다, 회장님.”
“죄송? 이게 나만의 문제냐? 죽어도 우리 둘이 같이 죽는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사이에 또 연락은 없었는지요?”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어.”
“또 연락이 오면 알려주십시오. 놈이 하는 말 안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이 회장은 핸드폰을 내동댕이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전화를 끊었다.
부엌에서 그릇을 치우던 혜영이 묵묵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
폭풍전야.
아버지에게 첫 공격이 들어간 지 일주일이 흐르는 동안 강이 느끼는 심정이었다.
‘날 제일 먼저 의심하겠지만 아버지의 신중한 성격상 다른 가능성을 확인한 뒤에 마지막으로 날 찾겠지.’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연락이 없을 줄은 몰랐다.
죄책감도 심했다. 친구들과 함께 아버지를 공격한다는 행위가 패륜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어머니를 보호하는 일이기도 했다.
언제나 곁을 지켜주는 레이나, 그리고 그를 용서하고 친구로 받아준 수진과 한해. 그들이 없었다면 시도조차 못 했을 일이었다.
그는 집무실에서 도면을 보고 있었다. 낡은 상가를 허물고 세울 20층짜리 상업용 빌딩의 설계도였다.
건축학 전공자가 아닌데도 그는 누구보다 더 제대로 도면을 이해했고 숨어 있는 문제점을 짚어낼 줄 알았다.
실무자 출신의 CEO라면 모를까, 그룹 총수의 후계자가 직접 도면을 볼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좋아서 하는 일이었다.
그는 정확한 게 좋았다. 은유와 상징으로 뒤덮인 시나 소설을 읽다보면 녹아서 질척거리는 눈을 걷는 기분처럼 상쾌하지 않았다.
반대로 정확한 수치만이 정렬해 있는 설계도면을 보고 있으면 단단한 땅 위로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기분이 들었다.
노크소리와 함께 비서가 문을 살며시 열었다.
“부회장님. 레이나 씨라는 분이 오셨는데요?”
예정되어 있지 않은 것들을 싫어하는 그였기에 미리 약속을 잡지 않은 방문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그와 레이나의 관계를 모르는 비서가 더욱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도면 안에 그려진 수많은 사각형처럼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풀어졌다.
“들어오라고 해요.”
비서가 안심하며 레이나를 안내해주고 문을 닫았다.
“우와. 우리 자기 엄청 열심히 일하고 있네?”
발목까지 내려오는 캐시미어 블랙 코트를 입은 그녀는 워낙 큰 키가 더욱 커 보였다.
보통 화려한 색감을 좋아하는 그녀였는데 오늘은 블랙을 탐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온다고 연락을 하지.”
강이 흐뭇하게 웃으며 그녀와 포옹했다.
“이런 충동적인 내가 싫어?”
그녀는 강의 귓불을 지그시 물었고 강은 웃음을 터뜨렸다.
“너 땜에 내가 웃는다.”
“드디어 우리 자기님 집무실을 구경해보는구나!”
레이나는 넓은 집무실을 산책하듯 돌아다녔다.
“딱 건설사 대표 집무실 같다.”
“별로 멋은 없지?”
“나도 뭐 수학 선생이라 인테리어는 잘 모르겠지만 도형으로 치면 직육면체 느낌이긴 하네.”
“인정.”
강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차? 커피?”
“아냐. 아침에 커피 마셨으니까 됐어.”
“어쩐 일로 왔어?”
“자기 집무실에 구경 오고 싶다고 여러 번 얘기했잖아.”
“별로 볼 것도 없는데 뭐.”
“상상하고 싶어서. 자기 보고 싶을 때 지금 이 모습을 떠올리려고.”
그녀는 다시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시내가 다 내려다보이는 펜트 층의 집무실에서…….”
소파에서 일어난 그녀는 강에게 다가와 그의 무릎에 앉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설계도면을 보고 있는 섹시한…….”
그녀의 손길이 그의 뺨을 타고 쇄골로 내려왔을 때, 그의 감각이 아찔하게 달아올랐을 때,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비서를 뒤로한 채, 기습방문을 감행한 이 회장이 등장했다.
강은 레이나를 무릎 위에 앉힌 채 굳어버렸다.
하필 지금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