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전화가 막 끊기려고 할 때 수진이 다시 그를 불렀다.
“회장님.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당신의 번호를 지울 겁니다. 그리고 수신 거부를 걸 생각입니다.”
그녀의 음성은 응축된 분노로 단단해졌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수진…….”
그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때는 아버님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의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었고, 지금은 회장님이라는 호칭으로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아휴, 진 빠져.”
벤치에 털썩 앉아 폰을 내려놓자 한해가 물었다.
“눈치 못 챈 거 같지?”
“모르겠어. 워낙 독사 같은 사람이라. 속을 알 수가 없어.”
“강이한테 바로 연락해줘.”
“그래야겠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강의 연락처를 띄웠다.
*
어쩌면 간절히 기다려왔던 순간인지도 몰랐다. 과연 죽기 전에 이런 일이 가능할까 회의적이기도 했다.
강은 아버지를 회피할 생각만 하며 살았다. 맞서 대결할 생각이나 더 나아가 이길 생각은 꿈에도 해 본 적 없다.
그러나 지금 그는 물러설 수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
이것은 그와 아버지 둘만의 전쟁이 아니었다. 부당하게 평생을 부정당하고 짓밟혀 온 어머니를 위한 대리전이기도 했다.
그는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창밖의 낯선 풍경에 시선을 걸어놓고 있다가, 전원이 꺼져 있던 핸드폰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디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이거 보는 대로 바로 전화해.-죽고 싶지 않으면 바로 연락해. 어머니 삼순의 핸드폰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이후 아직 새 메시지는 없다.
그는 아버지가 보낸 메시지를 보며 그가 지금 어떤 심리상태일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예상해보았다.
핸드폰으로 위치를 추적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경찰에 정식으로 수사 요청을 하지 않아도 요즘은 구글에 접속해 있는 것만으로 위치가 확인 가능하니까.
그는 어머니의 핸드폰 전원을 다시 껐다. 어머니의 핸드폰은 오직 이동 중에만 전원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하기로 원칙을 정했으니까.
이번에는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응. 수진아.”
“우리 예상대로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하셨어.”
“역시 그랬구나.”
“오빠한테는 아직 연락 없고?”
“아직. 한해한테도 연락하셨어?”
“아까 나랑 통화하면서 잠깐 바꿔줘서 통화했어. 병원에 오시겠다는 걸 말렸어.”
“잘했어. 아직 한해 형이 직접 만날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 오늘 형 컨디션은 괜찮고?”
“응. 산책하려고 나왔어.”
“그래. 잘 살펴봐주고, 혹시 또 연락 오면 알려줘.”
수진과 통화를 마친 그는 또 다른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10분쯤 뒤에 도착해요. 잠시 후 택시는 신도시의 아파트촌으로 들어섰다. 태화 건설에서 지은 아파트도 아닌 어느 평범한 아파트 주차장에 택시는 멈춰 섰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강이 택시에서 내렸다. 더없이 비장한 기분이 회오리바람처럼 그를 에워쌌다.
전쟁이다.
마스크로 얼굴을 충분히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강은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는 눈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평범한 주민처럼 보안카드를 찍고 공용현관 안으로 사라졌다.
그가 탄 승강기가 멈춘 곳은 14층.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왔다.
“강이야.”
집 안에 있던 삼순이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네. 별일 없었죠?”
“그냥 TV나 보면서 가만히 있었지.”
“조금만 견뎌주세요.”
“아니야, 강아. 견딜 필요 없어.”
삼순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반박했다.
“네?”
“여기 오기 전까지가 견디는 세월이었지.”
그녀는 별 가구도 없는 아파트를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편하다. 그냥 그 집에서 나왔다는 사실 만으로도 편해. 난 이제 견딜 필요가 없게 되었어.”
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정도였구나. 그 정도로 괴로운 세월을 혼자 견뎌내셨구나.
그는 어머니를 꼭 안았다.
“다신 견디면서 사는 일이 없도록 해드릴게요.”
그는 또 다른 아찔함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내가 끝까지 수진이를 놓지 않았다면? 가질 수 없는 존재를 기어코 가지려고 운명에 거역했다면?
나도 아버지처럼 괴물이 되었겠지.
그는 수진뿐만 아니라 한해와 레이나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웠다.
움켜쥘 뻔했던 비극을 그대들이 빼앗아 던져버렸구나.
.
.
.
이상한 밤이 찾아왔다.
이태화 회장에게 집이란 그저 어딘가에 존재하는 장소들 중 하나였다. 일이 끝나면 집에 들어간다는 당연한 습관 자체가 없었다.
일 때문에 출장을 가거나 야근을 하는 날이 아니더라도, 그는 내키는 대로 외박을 했다.
다른 여자와 함께 호텔에서 자거나 아예 다른 살림을 차려놓고 몇 달씩 지낸 적도 부지기수.
아내 삼순의 존재 역시 집과 마찬가지였다. 그저 존재하는 무엇일 뿐, 그에게 아내란 필요하지도 않고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하지도 않는 존재였다.
지금 그는 아내조차 없는 집에 혼자 서 있다.
집에 상주하던 가사도우미는 주인의 광기를 목격한 후 방에 들어가 숨죽이고 있다.
그는 진열장에서 위스키를 꺼내 안주도 없이 마시기 시작했다.
수진에게 들은 매몰찬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렸다.
-당신의 번호를 지울 겁니다. 그리고 수신 거부를 걸 생각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그가 변명하기 전에, 읍소하기도 전에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정말로 수신 거부를 했는지 확인차 전화를 걸어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수진이는 지금 상황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연기일까?
그 아이 옆에는 한해가 있다. 서로 비밀을 감추는 사이가 아니겠지.
둘이 같이 나를 속이고 있는 걸까?
이제 강이 녀석을 확인해봐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의심이 가는 사람은 아들 강. 가장 유력한 용의자이니만큼 가장 조심해서 접근해야 한다.
잔에 남은 위스키를 비우려는데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슬슬 정리하셔. 딱 여섯 글자가 문제의 그 번호에서 날아들었다.
어제에 이어서 꼬박 하루 만에 다시 연락이 왔다.
이 회장은 바로 발신버튼을 눌렀다.
통화대기음이 들린다! 핸드폰이 켜져 있다는 뜻!
그러나 전화는 끝까지 받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회장님. 요즘 음성통화 하는 거 별로예요. 우리 손으로 대화해요.
“이런 미친…….”
이 회장은 잔을 움켜쥐었다. 잔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들부들 떨면서 위스키를 채웠다.
-뭘 정리하라는 거냐?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위스키를 마시고 메시지를 보냈다.
금방 답장이 왔다.
-이사 가셔야 하니까요. 이사? 무슨 소리인지 몰라 인상만 쓰고 있는데 이번에는 첨부 파일로 평면도가 도착했다.
-건설회사 회장님이니까 얼마나 살기 편한지 딱 보면 아시겠죠? 상대가 보낸 평면도는 서울 동부구치소 독방이었다.
“빌어먹을 자식이!”
이 회장이 주먹으로 대리석 테이블을 내리쳤다.
-너 뭐하는 놈이냐?-저 아세요? 제가 몇 살인 줄 알고 반말이세요? 독방 가기 전에 뒈지고 싶으세요? 어린놈의 새끼가……. 이 회장의 머리털이 바짝 섰다.
나보고 어린놈의 새끼라고? 보통 녀석이 아니다. 감히 나한테 어떻게…….
-태화야. 존댓말로 공손하게 물어보면 알려줄게. 형이 누군지. 이 회장은 눈에서 불을 내뿜으며 답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누구신지요? 딱 10초 뒤 도착한 메시지는 인생 최악의 모멸감을 선사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ㅋ’의 향연.
하나하나가 화살처럼 그의 심장에 날아와 박혔다.
-아 진짜 멍청하네. 시킨다고 하냐? 이렇게 바보 같은 놈이 어떻게 재벌 회장이 되었을까? 이 회장은 메시지를 보며 자문해보았다.
강이 이런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까? 녀석이 제 아비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강은 이런 유치하고 폐륜적인 말투를 쓸 것 같지 않았다.
분노와 공포가 쓰나미로 몰려왔고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동해 맞섰다.
-아내를 데리고 있습니까? 다시 그를 비웃는 메시지가 날아들었고 예상 못 한 말도 이어졌다.
-미안해요, 태화 씨. 제가 장난 좀 쳤어요. 뭐지? 당신이야?
협상의 달인이었던 이태화 회장은 상대에게 속절없이 끌려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절 찾지는 말아요. 다시 돌아갈 생각 없으니까요.-당신이야? 삼순이?-삼순이요?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저는 사순이인데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감히! 이 미친놈이 장난을 쳐!”
이 회장은 손에 쥐고 있던 위스키 잔을 테이블에 내리쳤다. 잔이 깨지면서 그의 손을 베었고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흘렀다.
아픈 줄도 모를 만큼 그는 모멸감에 마취되어 있었다.
-태화야. 나 웃겼어? 사순이 웃겼어?-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해주시죠. 그 사람의 행방을 안다면 알려주시고요.-진작 이렇게 고분고분 나오시지. 그럼 문제가 간단했을 텐데. 제가 원하는 건요……. 상대는 시간을 끌다가 두 글자의 답을 보냈다.
-자수. 다른 말은 없었지만 뒤이어 음성 파일이 도착했다.
그가 호영과 청부살인 모의를 하는 내용이었다.
이 회장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자식. 증거를 갖고 있어! 그냥 무턱대고 하는 협박이 아니야.
-이태화 회장님. 제가 참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어요.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 마지막 메시지가 도착하고 더는 연락이 없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죠. 유리에 벤 손에서는 여전히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그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실질적인 위협이다. 정말로 나를 감방에 집어넣을 수도 있는 위협.
증거뿐만이 아니라 증인도 있다.
알 수 없는 번호로 메시지를 계속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날 호영과의 대화를 녹음하고 흘린 사람이 아내라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바보 천치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안심하고 집에서 얘기했던 건데…….
완전히 한 방 먹었다.
그는 늘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떠돌던 아내를 떠올렸다.
당신…… 최후의 일격을 위해 평생 연기를 했던 거야?
이 미친 메시지들 모두 당신이 보낸 거야?
그는 호영에게 전화했다.
“네, 회장님.”
“내가 번호를 두 개 줄게. 혹시 명의가 누구로 되어 있는지, 그리고 위치 추적이 가능한지 알아볼 수 있나?”
“명의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만 위치 추적은 구글 아이디와 비번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통신사를 통해서 하는 방법이 있잖나?”
“그건 수사기관에서 요청을 해야 가능합니다.”
“아는 경찰 없어?”
“관계를 맺고 있는 경찰들이 몇 있긴 합니다만…… 요즘은 개인정보 보호법이 워낙 강화되어서 기록이 다 남아요. 통신사에서 자료 빼 오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얼마면 돼?”
“회장님. 요즘 경찰 쪽에 돈을 잘못 썼다가는 나중에 그게 빌미가 되어 문제가 커질 수도 있습니다. 혹시 찾으려는 사람이…….”
“아내가 사라졌어.”
“아…… 그렇다면 그 협박 메시지와도 연관이 있겠군요.”
“이상한 메시지를 보내는 놈이 아예 음성 파일까지 갖고 있어.”
“혹시 사모님이 직접 그 메시지를 보낸 건 아닐까요?”
“그 생각도 했는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알아보자는 거야.”
“사모님이라면 위치추적도 가능하겠네요. 대신 가족인 회장님께서 실종신고를 하셔야 합니다. 회장님이시라면 수사기관에서 특별히 조치를 빨리해줄 겁니다.”
“원래 바로 하는 거 아냐?”
“아닙니다. 실종신고의 90% 이상이 단순 가출로 밝혀지거든요. 가출이 아니라 납치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대부분의 경우에는 며칠 기다렸다가 수사가 시작됩니다.”
이 회장은 가사도우미의 말을 떠올렸다.
‘사모님 외출하셨어요. 행선지까지는 말씀 안 하셨고요. 짐을 좀 챙겨 가시는 것 같던데요?’납치가 아니라 명백한 가출이다. 솔직히 말하면 수사기관에서 절대 수사하지 않겠지.
“알겠네. 내일 바로 경찰에 신고하도록 하지. 아내가 납치당한 것 같다고.”
“저도 문제의 핸드폰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때 이 회장은 아차 싶어 급하게 호영을 불렀다.
“호영아. 경찰은 안 되겠다. 만에 하나 그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 일이 드러날 수도 있잖아.”
“흠…… 사모님을 계속 못 찾고 있으면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지금 협박을 당하고 계시잖습니까?”
“아냐. 경찰에는 알리지 않는 편이 낫겠다. 대신 강이 녀석에게 미행을 붙여놔라.”
“아드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혹시 녀석이 일을 꾸몄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만약 아드님이 사모님을 밖으로 모셨다면…… 뵈러 갈 수도 있겠군요. 알겠습니다.”
“호영아. 이거 우리 둘의 인생이 걸린 문제야. 알지?”
“네. 회장님. 서둘러 알아보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이 회장은 강에게 연락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아들일까? 내 아들이 나에게 이토록 끔찍한 문자들을 보냈을까?
그는 자신이 아들에게 한 짓은 까맣게 잊은 채, 의심과 배신감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다가 엉망으로 찢어진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나의 운명을 암시하는 것인가?
그가 가장 싫어하는 기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력감이 조여오고 있다.
하루 빨리 아내를 찾아내야 하지만 경찰에는 신고조차 할 수 없는 난처함.
기분 나쁜 감정이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그의 모가지를 칭칭 감고 똬리를 틀고 있었다.
*
겨울의 절정을 병원에서 맞이할 줄은 몰랐다.
창을 통해 반짝이는 햇살은 오히려 여름보다 더 순도가 높아서, 바깥 온도가 영하 10도를 오르내린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었다.
“겨울이 오면 너랑 같이하고 싶은 것들이 정말 많았는데.”
한해는 수진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그는 침상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고 언제나처럼 그녀가 곁을 지켰다.
“스키 타러 가고 싶다는 얘기는 했고. 또 뭘 하고 싶었는데?”
그녀는 침대 아래에 앉은 자세로 그를 쳐다보았다.
“온천에 가고 싶었어. 일본 료칸도.”
“료칸 가봤어?”
“아니. 주로 먼데 나가는 배를 타서 일본 항구에는 거의 들를 일이 없었으니까. 사토시 씨한테 얘기만 많이 들었지.”
“다 나으면 가자.”
“눈이 덮인 개인 정원에서 둘만 들어가는 탕에서 온천을 즐길 수 있대.”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가봤구나.”
한해의 실망한 표정이 엔간히도 귀여워 수진은 웃음이 나왔다.
“으휴. 안 가봤어. 오빠랑 같이 가고 싶어서 알아봤거든.”
“그럼 료칸은 나랑 처음이겠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말이지만 수진은 아쉬운 감정에 발이 걸렸다.
“하긴 당연한 마음이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모든 것에 있어서 처음이고 싶은 마음. 삶의 아름다운 첫 경험들을 독점하고 싶은 마음.”
그녀의 목소리가 우울해졌다.
한해는 변명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부인할 수는 없다.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었나 봐.”
“본능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런 마음조차 없다면 인간이 아니겠지.”
“인간이 본능대로만 살지는 않잖아. 두 번째라고 해도 감사해. 세 번째라 해도 상관없어. 너와 함께 뭔가를 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지.”
“미안해할 일은 아니지만 미안해.”
“뭐가?”
“오빠는 많은 것들이 나와 처음이겠지만 난 그렇지 않으니까.”
그녀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고 시선도 아래도 떨어졌다. 한해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우리 약속 하나 하자. 과거 때문에 미안해하지는 말자.”
그녀는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그래도 섭섭하지?”
“섭섭한 감정은 아니고 아쉬움. 아주 약간의 아쉬움. 이를테면 무지개를 손으로 잡을 수 없어서 아쉬운 감정하고 비슷해. 그러니 그마저도 행복한 감정이야.”
“정말? 하나도 안 섭섭해?”
“응. 하나도.”푸른빛으로 침잠하던 그녀의 눈빛이 다시 별처럼 반짝였다.
“그럼 말해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