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74화 (74/92)

74화

너구리 사냥? 뭐야 이건…….

메시지를 보낸 번호를 확인했더니 연락처에 저장조차 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이 회장은 ‘너구리 사냥’이라는 표현을 언제 썼는지 금방 기억해냈다.

강한해 그놈을 손봐주면서 썼던 말이지. 호영이한테 한 말 같은데.

누군가 알고 있다. 우리 둘만 나눴던 대화에 대해.

그의 집무실에서는 신도시 개발을 앞둔 브리핑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일반 빌딩이나 아파트 공사와는 규모부터가 다른 그룹 차원의 사업이 될 터였고, 부회장인 강을 비롯해 주요 임원들이 모두 참석했다.

이 회장은 아들 강을 관찰했다. 그는 발표자로 나선 전무에게 무서울 만치 집중하고 있었다.

-너구리 사냥하러 갈래요? 이 문자, 강이 네가 보냈냐?

임원 회의가 끝나고 참석자들이 나가는 동안에도 이 회장은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아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평소처럼 깍듯하게 행동했고 미심쩍은 말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켕기는 게 있다면 저렇게 할 순 없을 텐데…….

이 회장은 아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마침내 그가 나가자 비서를 불렀다.

“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가 어디 있는지 알아봐.”

비서는 이 회장을 3년째 모시면서 아무리 엉뚱한 부탁이라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네, 회장님.”

그는 잠시 고민했다.

호영이한테 말해야 할까? 이상한 문자가 왔다고?

잠깐만…… 우리가 그 대화를 나눈 곳이 어디였지? 또 누가 들었을까? 여기 집무실이었나? 혹시 도청장치가 있는 건가?

의심으로 범벅이 된 생각에 한참 잠겨 있는데 비서가 들어왔다.

“공중전화 위치 확인했습니다. 차로 가면 10분 안에 도착합니다.”

“차 준비시켜.”

이태화 회장은 바로 내려가서 차를 타고 인근 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 앞에서 내렸다.

발신인 표시가 뜰 테니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놈인지 불시에 알아내고 싶었다.

그는 직접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허무하게도 상대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이런 맹랑한 녀석을 봤나.”

그는 두툼한 수화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다시 집무실에 돌아온 그는 또 다른 용의자를 의심했다.

강이 녀석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녀석이 우리 대화를 알 방법이 없잖아? 혹시 지호영 네가?

그는 호영에게 전화했다.

“네, 회장님.”

“나한테 이상한 문자가 왔어. 너구리 사냥이나 하러 가자고. 딱 그 말만.”

“너구리 사냥이요?”

호영이 놀라서 되물었다. 이 회장은 그의 목소리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너냐?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냐? 아니면 정말 너도 모르는 거냐?

“그 이야기…… 회장님이 저한테 해주신 얘기 아닙니까?”

“기억하는구나. 우리 둘밖에 없었잖아. 난 널 만날 때 항상 둘이서만 만나니까.”

“회장님. 혹시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오직 너한테만 한 얘기가 다시 돌아서 나한테 왔으니.”

호영은 잠시 말이 없었고 이 회장 역시 침묵을 견뎠다. 청각을 곤두세워 상대를 염탐하는 중이었다.

“정말 외람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그날 너구리 사냥 이야기를 하셨을 때 저 말고 한 명이 더 있었습니다.”

“말도 안 돼. 난 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널 만났어.”

“사모님이 문 밖에 서 계셨습니다.”

이 회장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랬던가? 맞다. 그랬지. 우리가 얘기를 끝내고 나갔을 때 귀신처럼 문밖에 우두커니 서 있었지.

“더 이상 추측하는 건 회장님께 불경한 일이 될 것 같아 삼가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누구에게도 너구리 사냥 이야기를 전한 적이 없습니다. 제 말이 거짓말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겠습니다.”

호영이 맹세할 필요도 없었다. 이 회장의 직감은 이미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그녀가 배신했다.

그는 호영과 전화를 끊고 바로 비서를 불렀다.

“차 대기시켜. 잠깐 집에 다녀와야겠어.”

그는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집무실을 떠났다.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가면서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에게 전화하는 행위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집에서 저녁을 먹는 일은 일 년에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그럴 때도 늘 요리사에게 직접 연락해 저녁을 준비하라고 했다.

늦게 들어갈 때도, 일찍 들어갈 때도, 심지어 외박을 할 때도 아내에게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계속 이어지던 통화 대기음은 결국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메시지를 남겨달라는 기계음으로 이어졌다.

“이런 개 같은…….”

분노와 초조함이 욕설로 튀어나왔다.

회사 정문 앞에 대기 중인 차를 타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사이 또 전화를 걸었지만 아내는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는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운전기사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 보이는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눈도 안 마주치고 운전만 했다.

이 회장은 메시지를 남겼다.

-어디야? 왜 전화를 안 받아? 이거 보는 대로 바로 전화해. 아내는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지하주차장에 차가 멈추자마자 바로 집으로 올라왔다. 황급히 집 안으로 달려 들어왔지만…….

아내가 사라졌다. 살아 있는 시체처럼 누워 있던, 그녀가 대부분의 인생을 보냈던 침실은 텅 비어 있다.

넓은 저택에 달려 있는 문이란 문은 모조리 열어봤지만 아내는 없었다.

“강이 엄마! 야! 윤삼순! 너 어디 있어?”

고함을 지르며 집 안을 돌아다니는 그에게 가사도우미가 다가왔다.

“사모님 외출하셨어요.”

“뭐? 무슨 외출? 어디로 간다고 했어?”

“행선지까지는 말씀 안 하셨고요. 짐을 좀 챙겨 가시는 것 같던데요?”

“이런 미친…….”

그는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또 아내에게 전화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까 보낸 메시지들 옆의 1자가 사라져 있었다.

“뭐야. 읽었어?”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던지려다가 겨우 참고, 대신 거실에 세워져 있던 중국 도자기를 집어 던졌다.

“회장님!”

가사도우미가 비명을 질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천만 원에 달하는 가격 따위도 상관없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그는 옆에 나란히 놓인 다른 도자기마저 집어 던졌다.

“회장님…… 왜 이러세요…….”

겁에 질린 가사도우미가 주저앉았다.

“그년이 언제 나갔다고?”

“오늘 아침이요.”

“혼자?”

“네.”

“최근에 뭐 이상한 건 없었어?”

가사도우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요즘에 이상한 거…… 이상한 거…… 모르겠습니다, 회장님. 정말 저는 모르겠습니다.”

이 회장은 주먹을 부르르 떨다가 집을 나왔다.

그는 지하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차에 올라탔다.

“회사로 돌아갈까요?”

기사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감히. 네 따위가 감히…….”

이 회장은 중얼거리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를 거는 대신 다시 메시지를 남겼다.

-죽고 싶지 않으면 바로 연락해. 어쩌면 다행이었다. 아내가 눈앞에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

.

.

오후의 모든 일정을 미뤘다. 이 회장은 집무실에 틀어박혀 파이프 담배로 긴장을 태워 없앴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 그냥 흘러갔다.

아내가 혼자 이런 일을 계획했을 리는 없지. 그러나 마음은 충분히 무르익었을 거야. 나에 대한 증오는 충분히 쌓여 있었으니. 이미 봤잖아.

그는 얼마 전, 아내가 칼을 쳐들고 그를 찌르려고 했던 밤을 떠올렸다.

호영이와 이야기했던 내용을 듣고 그 정보를 활용해 나에게 복수하려는 걸까? 그 정도의 분별력과 실행력이 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고 대답하고 부정하고 새로운 답을 찾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는 힘들어. 분명히 누군가 조력자가 있어. 아내가 먼저 손을 뻗었거나 아니면…….

누가 아내를 이용하고 있는 걸까?

혹시 사업상 문제는 아닐까? 나한테 이 정도까지 치밀한 협박을 할 한 놈은…… 없다. 그렇다면…….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하얀 종이 위에 만년필로 몇 개의 이름을 적었다.

윤삼순. 진수진. 이강.

나를 협박할 만한 자들의 이름이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며느리의 이름. 써놓고 보니 가족의 이름이네.

맹수가 연민을 품지 않듯 그 역시 비애 따위는 잊고 살아왔다. 그러나 세 개의 이름 앞에서 슬프고 서러웠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모두 내 책임이겠지. 그러나……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어.

그는 이름 하나를 더 추가했다. 강한해.

이 중에 범인이 있다. 아니면…… 설마…… 설마…….

이놈들인 한 편이 된 건 아니겠지? 그 정도는 아닐 거야.

아무리 그래도 서로 뺏고 뺏기는 관계였는데…….

그는 오늘 하루를 엉망으로 만든 한 줄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너구리 사냥하러 갈래요? 이제 수진이를 다시 찾아오는 일은 물 건너갔다.

감히 나를 협박하는 놈이 누군지 알아내야 해. 그리고 처절하게 깨우쳐줘야지.

이태화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말이야.

*

“이렇게 앉아서 산책하게 될 줄은 몰랐어.”

한해는 상처에 무리가 가지 않는 속도로 왼손을 천천히 올려 휠체어를 밀어주는 수진의 손을 잡았다.

“곧 오빠 발로 걸을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격려의 말과 함께 복도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입원하고 처음으로 병원 건물 밖으로 나와 보는 날이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추운 날씨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녀가 한해의 옷깃을 여며주었다.

“춥지 않아?”

“아니. 너무 좋은데?”

한해는 환자복 위로 두터운 패딩을 걸치고 무릎 담요까지 덮고 중무장을 했다.

“그동안 답답했지?”

“너 아니었으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을지도 몰라.”

워낙 몸 쓰는 일을 좋아하고, 거의 매일 운동과 산책을 빼놓지 않던 한해였기에 꼼짝도 못 하고 침대에 누워 있었던 일주일은 더더욱 끔찍했다.

“고마워, 수진아.”

“뭘. 내가 이런 상황이었어도 오빠가 똑같이 해줬을 텐데.”

한해는 빙긋이 웃었다.

“왜 대답을 안 해? 나 안 돌봐줄 거야?”

“넌 이렇게 되면 안 되지. 처음부터 다칠 일이 없어야지.”

한해는 가만히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난 네가 다치면 못 견딜 거야. 내 팔다리가 부러지고 배에 칼이 들어와도 견딜 텐데…… 네가 다치는 건 못 견뎌.”

수진은 그의 머리에 입을 맞춰주었다.

“막 머리 감았더니 우리 오빠 좋은 냄새 나네.”

“매일 안 감겨줘도 돼. 귀찮은데.”

“오빠 잘생긴 얼굴 보는 게 좋아서.”

“흠…… 휠체어 타고 산책할 때 결정적인 단점이 있네.”

“어디 불편해?”

“몹시 불편한 게 있어. 네가 안 보이잖아.”

수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한해가 로맨틱과 느끼함의 경계를 서성일 때면 너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벤치 근처에 휠체어를 세우고 한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실컷 봐.”

“우와! 진수진이다! 거꾸로 해도 진수진!”

그녀는 몸을 세우고 그와 가볍게 입 맞췄다.

“빨리 낫고 싶어.”

한해가 아이처럼 칭얼댔다.

“다 나으면 뭘 제일 하고 싶은데?”

“알면서.”

“으이구! 갇혀 있다 보니까 점점 더 음흉해지는 것 같아.”

“아닌데. 그전에도 어땠는지 알면서.”

수진은 볼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그와 동거를 시작한 날부터…… 하루라도 그냥 얌전히 잔 날이 있었나?

“무슨 생각해, 진수진?”

“병원 오기 전에 오빠랑 같이 지냈던 생각.”

이번에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더 많이 사랑할 거야.”

겨울 햇살을 머금은 그녀의 뺨이 투명하게 빛나던 그 순간, 핸드폰도 함께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수진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왜? 누군데?”

궁금해하는 한해에게 액정을 보여주었다.

‘이태화 회장님’. 예전 시아버지의 번호는 이제 그렇게 저장되어 있었다.

산책을 하면서 느긋하게 풀어졌던 한해의 표정이 다시 빳빳하게 굳었다.

“올 것이 왔네. 받아봐.”

수진은 심호흡을 하고 인사했다.

“네, 회장님.”

“아가. 오랜만이다.”

“그러네요. 잘 지내셨어요?”

“나야 늘 똑같지. 회사 일이라는 게 줄어드는 법이 없으니.”

“네. 건강 잘 챙기면서 일하세요.”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안부를 주고받았다.

“강이한테 얘기 들었다. 요즘 강한해 그 친구하고 만난다면서?”

“네.”

수진은 최대한 짧고 강하게 대답했다.

“얼마 전에 안 좋은 일을 당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좀 회복은 한 거냐?”

“네. 회복하고 있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한번 찾아가 보마.”

“네? 굳이 그러실 것까지는…….”

“사실 얼마 전에 그 녀석 얼굴이나 보자고 연락 한번 했었다. 만나지는 못했지만.”

“저는 잘 모르겠네요. 아버님이…… 아니 회장님이 왜 여길 오시려는지.”

“혹시 지금도 같이 있니?”

수진이 한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표정만 보고도 한해는 어떤 상황인지 짐작했다.

“네. 같이 있어요.”

“한해 군하고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

수진은 입 모양과 손짓으로 이 회장의 제안을 전했고, 한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요.”

그녀가 핸드폰을 넘겼다.

“네, 강한해입니다.”

“다행이군. 목소리는 건강한 것 같네.”

“몸도 건강합니다. 칼에 찔린 자리만 빼고는요.”

“그런 일을 당하다니, 참 유감일세.”

한해는 당장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이 그래놓고선 무슨 유감이죠? 나를 죽일 셈이었어요? 왜 그랬어요?

그러나 다 짜둔 계획을 그르칠 수 없었기에, 화를 누그러뜨렸다.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하셨습니까?”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한번 만나고 싶어서.”

“저 역시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회장님을 만날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 약혼녀한테도 다시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허허…… 약혼녀라면…… 수진이를 말하는 건가?”

“호칭도 신경 써주시죠. 이제 그쪽의 며느리가 아닙니다.”

이 회장은 잠시 말이 없다가 대화를 끝냈다.

“잘 알겠네. 수진 양하고 인사나 하고 끊도록 하지.”

한해가 다시 수진에게 전화를 건넸다.

“네, 회장님.”

“한해 그 친구가 너를 약혼녀라고 부르는구나.”

“네. 맞습니다.”

“흠…… 그래. 알겠다. 그리고 말이야. 혹시 그 사람하고 최근에 연락한 적 있니?”

“그 사람이요? 누구 말씀이신지…….”

잠시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이 회장은 수진의 속마음을 엿보려 했고 그녀는 감추려 했다.

“아니다. 그럼 됐다. 잘 지내라. 다시 볼 일이 있을 거다.”

“그런 일…… 저는 다시 볼 일 없었으면 하네요. 건강하십시오.”전화가 막 끊기려고 할 때 수진이 다시 그를 불렀다.

“회장님.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