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왔어. 지금 오빠 집 앞이야.” 66화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축 처져 있던 마음이 다시 팽팽해졌다.
“어, 수진아. 안 그래도 걱정돼서 연락하던 참이었어.”
“그래? 그럼 얼굴 보고 얘기하면 더 좋겠네.”
내가 보고 싶었구나. 이럴 걸 왜 연락도 없이 약 올렸어?
“내가 갈까?”
“이미 왔어. 지금 오빠 집 앞이야.”
한해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인터폰과 연결되어 있는 화면을 확인하니, 정말로 그녀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여는 대신 밖으로 나가 정원을 가로질렀다.
“수진아!”
문을 열자마자 그녀를 안으려다가 멈칫했다.
그녀의 손에 여행 가방이 들려 있었다.
“가방은 왜?”
“들어가서 얘기할까?”
평소와 다른 그녀의 분위기에 한해는 더 묻지 않고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 소파에 앉은 뒤에도 수진은 가볍게 몸을 떨고 있었다.
“날씨도 추운데 왜 말도 없이 왔어? 데리러 가도 되는데.”
“놀라게 해주려고. 오빠도 미리 얘기 안 해주고 프러포즈했잖아.”
“그래봤자 대답도 없는데 뭘.”
그는 괜히 토라진 척을 했다.
“그래서 대답해주러 왔어.”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본론을 꺼냈다.
“대답이 좀 시시하더라도, 혹은 너무 현실적이라도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한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은 조건부 예스야.”
“그 조건은?”
“함께 살아보고 결정할게.”
한해는 아까보다 조금 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했어?”
“네 입장에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겠지.”
“이해해줘서 고마워. 내 입장도 그렇지만 오빠 입장에서도 그렇잖아. 같이 지내보니 도저히 이 여자랑은 못 살겠다 싶을 수도 있으니까.”
한해는 웃음을 터뜨렸다.
“잠도 같이 여러 번 잤고, 여행도 다녀왔는데 뭘. 무서운 습관은 없던데?”
“자면서 걷는다거나 하진 않지.”
“난 어땠어? 피곤하면 코를 곤다고 배를 탈 때 동료들이 그러긴 하던데.”
“뭐 가끔 그렇긴 해도 견딜 만했어.”
“그럼 오늘은…….”
한해는 말끝을 흐렸다. 아찔한 감각이 혀를 붙든 것이다.
“응. 오빠도 동의한다면 오늘부터 여기서 지낼까 하고.”
이런 절충안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가까이 함께할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
“아니면 내 원룸에서 같이 지내도 돼. 밀접 동거 체험을 해보고 싶다면.”
수진은 농담을 했지만 한해는 웃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오늘부터 이 집에서 너랑 같이 지낸다고?
자극을 받은 신경세포들이 날뛰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담담한 척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해보자.”
“뭐야. 그 심드렁한 말투는?”
“그렇지? 심드렁하게 들리지?”
한해는 수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정말 노력해서 말한 거거든.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에 갖다 댔다.
“느껴지냐? 심장이 나대는 거?”
그녀의 손바닥에 둥둥둥 그의 심장박동이 울렸다. 그녀의 심장 역시 꼭 그렇게 팔딱이고 있었다.
한해는 그녀와 입술이 닿기 직전까지 고개를 숙였다.
“아까 좀 화가 났어.”
“왜?”
“보고 싶었는데 못 봐서.”
“어제도 봤잖아.”
“그래도 네가 고팠어.”
키스는 아닌데 그의 입술이 살짝살짝 닿았고, 그녀는 간지러운 느낌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게 나를 약올려놓고 이렇게 발칙한 제안을 하다니.”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고민이 되어서…….”
“쉿. 이제 책임질 시간이야.”
그는 입술로 입술을 막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촉감을 먼저 느꼈고 캐러멜보다 더 달콤한 미각이 이어졌다.
마법 혹은 미약처럼 그의 키스는 늘 그녀의 몸을 일깨운다.
나에게 이런 감각이 있었나 싶은, 오직 그를 통해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몸 구석구석의 감각들.
“오빠. 잠깐만…….”
평소 같았으면 그녀의 작은 반응과 부탁을 절대 놓치지 않았을 한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어떡하냐? 멈춤 버튼이 고장 났는데?”
그의 키스는 더 깊어지고 더 뜨거워졌다. 손길은 더 과감하고 집요해졌다.
“오빠. 잠깐만.”
그녀가 연거푸 말렸지만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침실이었다. 그녀는 방에 들어온 과정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환희에 마비되어 있었다.
함께 누운 그가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사랑해.”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아…… 심장이 못 버틸 것 같아.
그는 목덜미에 믿기 힘든 짜릿함을 선사했다. 그 느낌은 물처럼 흐르고 흘러 그녀를 적셨다.
어떻게 알았을까? 정말로 멈춰달라는 부탁이 아니었다는걸.
사실은 그 반대. 멈추지 말라고.
소리 없는 외침이 감각의 제국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10분? 20분? 어쩌면 한 시간?
시간과 중력의 법칙을 완전히 벗어나는 경험을 했다.
배우들 중에서도 사랑꾼으로 유명한 여배우가 술자리에서 그녀에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사랑이라는 건 열쇠와 자물쇠처럼 짝이 있어. 정말 자기 짝을 만나고 나면 알지. 구질구질 설명이 필요 없어. 그냥 딱. 백 퍼센트 알 수 있어. 그리고 깨닫게 되지. 전에 잘 맞았다고 생각했던 인연들은 진짜가 아니었음을.’한해가 완벽한 짝이라는 사실을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쿵쿵 북소리를 내는 한해의 심장 위에 고개를 뉘었다.
가빴던 호흡이 천천히 가라앉고 타오르는 열기가 몸 안에 온기로 스며들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칼 사이로 스치는 그의 손길이 나른함을 선사했다.
“난 더 이상은 필요 없어.”
그녀가 중얼거렸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쥐었다.
“나도. 너 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들은 다리를 서로 교차시킨 채 합체 로봇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꼭 붙였다.
그녀는 동물들이 뒤엉켜 장난치듯 그의 턱에 머리를 비비며 말했다.
“겁나. 이렇게 완벽한 행복이 사라질까 봐.”
“영원한 건 없지만 우리는 아주 오래 함께 할 거야.”
“너무 좋아서 무섭다는 표현, 이제는 알겠어.”
한해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곳곳에 입을 맞췄다.
배 위에서 그녀를 간지럽히며 장난치던 그가 문득 물었다.
“결혼까지 몇 퍼센트 남았어?”
“음…… 99퍼센트?”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빨리 100퍼센트로 만들어야지.”
그의 손이 다시금 파고들고, 그녀는 짜릿함에 비명을 질렀다.
옛 선조들이 왜 사랑을 놀음이라고 했는지 완전히 공감하면서.
*
강남 재건축 단지의 조합 사무실.
굴지의 건설사들이 모두 참가한 시공사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었다며 뉴스에 등장할 정도로 경쟁이 뜨거운 단지였다.
태화 건설이 결국 시공사로 선정되었고, 회사는 하루 종일 축제 분위기였다.
원래 태화건설보다 더 선호도가 높은 건설회사가 있었는데, 뒤늦게 수주 경쟁에 참여해서 1년 넘게 주민들을 설득한 홍보팀의 쾌거였다.
강은 홍보팀 전체에 특별보너스를 지급하고 직접 입주민 대표를 찾아가 인사를 나누기까지 했다.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더니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레이나하고 집 근처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요즘 만난다는 사람 같이 볼 수 있을까? 어머니가 이런 식의 적극적인 연락을?
강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저예요. 팔은 좀 어떠세요?”
“응. 괜찮아. 오늘 병원에 가서 깁스를 풀었다.”
“다행이네요, 한결 편해지셨겠어요.”
“그러네.”
“레이나하고 같이 밥 먹는 건 좋아요. 어떻게 먼저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궁금해서 그러지.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지.”
“수진이한테는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수진이는…… 넌 수진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놀랐다.
“제가 수진이를 안 좋아했다고요?”
“응. 엄마가 보기엔 그랬어.”
강은 혼란스러워져서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넌 수진이를 두려워했지. 수진이가 널 외면할까 봐 두려워했지.”
“좋아했으니까…… 좋아했으니까 잃기 싫었던 거죠.”
“아니야. 엄마가 보기엔 그 반대였어.”
평소에는 눈도 잘 마주치려고 하지 않던 어머니는 작정한 듯 말했다.
“수진이를 처음 봤을 즈음, 넌 정 붙일 곳이 한 곳도 없었지. 그 아이가 얼마나 싹싹하고 친절하게 널 대해줬니? 넌 그 아이를 잃고 싶지 않아서 좋아해버린 거야. 엄마가 본 선후관계는 그래.”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충격과도 같았다.
강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랬나? 스스로를 세뇌했던 건가?
“수진이 이야기는 됐고, 지금 만난다는 그 아이랑 같이 한번 보면 좋겠다.”
어머니의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강은 정신을 차렸다.
“말 나온 김에 오늘도 시간 괜찮으세요?”
.
.
.
그렇게 급히 만들어진 자리였다.
지난번에 먹었던 곱창이 맛있었는지 어머니는 또 곱창을 먹자고 하셨고 레이나도 대찬성이었다.
강이 어머니를 모시고 식당에 들어오자 먼저 가서 기다리던 그녀는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남자친구 어머니를 곱창집에서 처음 인사드리다니. 정말 반갑습니다.”
레이나는 특유의 친근함으로 어머니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우리 강이가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어머! 이이가 제 이야기를 어머니한테 많이 했다고요? 그건 전혀 의외네요?”
“강이가 워낙 말이 없고 속을 잘 안 내보이는 애라서. 몇 번이나 나한테 얘기한 건 정말 좋아한다는 뜻이지.”
레이나는 뜻밖의 수확을 올린 양 신이 났다.
다양한 주제로 어머니와 대화를 이어가던 그녀는 곱창전골이 다 끓자 국자와 앞 접시를 들고 한가득 떠드렸다.
“많이 드세요, 어머니! 오늘은 제가 살게요.”
“아니야. 아들 여자친구 처음 만나는 자린데 내가 사야지.”
“정말요? 그럼 제가 잘 먹겠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그녀는 한참 식사하다가 못 참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아. 소주 없이 곱창전골 먹으려니까 정말 큰 죄를 저지르는 기분이에요. 안 그러세요, 어머니?”
어머니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나는 소주를 주문했고 어머니에게도 한 잔 따라주었다.
보다 못한 강이 말렸다.
“레이나. 어머니는 술 못하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더니 쓰윽 비워버린 것이다.
강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정말 태어나서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달다. 한 잔 더 다오.”
어머니는 레이나 앞에 잔을 내밀었다.
“뭐야.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아들이 되어갖고서는!”
레이나는 강에게 핀잔을 주고 어머니에게는 술을 한 잔 더 따라드렸다.
“어머니…… 왜 술을…….”
당황한 강에게 어머니는 빙긋이 웃어 보였다.
“오랜만에 마시니 기분이 좋구나. 오늘은 좋은 날이니까.”
그녀는 술잔을 들었고 레이나를 기다렸다는 듯 건배했다. 강도 동참할 수밖에.
“어머님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레이나의 재빠른 건배사에 다들 잔을 부딪치고 비웠다.
“저도 너무 기분이 좋아요, 어머니.”
레이나는 어머니의 팔짱까지 꼈다.
“뭐가 그리 좋으니?”
“이이한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어머님이 힘든 일이 너무 많으셔서 아프고 지쳐 계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오늘 직접 뵈니까 너무 건강하고 밝아 보여서요.”
“너희를 보니까 기분이 좋아서 그래.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파.”
보통 때와 완전히 다른 어머니를 보며 놀라던 강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안 좋다고 하던데…….
“어머니. 무슨 일 있어요?”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그 표정 어딘가에서 묵직한 슬픔이 느껴졌다. 마치 멀리 어딘가로 곧 떠날 사람 같은?
레이나가 화장실에 간 틈을 타서 강이 캐물었다.
“오늘 왜 그러세요? 평소하고 너무 다르시잖아요?”
“좋아 보이지 않니?”
“건강해 보이셔서 좋긴 한데…… 뭔가 저한테 숨기는 거 있죠?”
어머니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혹시 수진이나 강이하고 연락은 하니?”
“왜요?”
“그냥…… 어떻게들 사나 궁금해서.”
“이제 둘이 신나게 연애하겠죠. 잘 지낼 거예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강의 손을 잡았다.
“그 아이들이 밉니?”
강은 지그시 이를 물었다.
“아까 어머니하고 통화한 뒤에 생각해봤는데. 어머니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해요. 내가 진정으로 수진이를 좋아했을까? 떨어지는 게 무서워 좋아한다고 내 자신을 세뇌한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이젠 다 의미 없는 얘기지.”
“맞아요. 다 지난 일이죠. 그래서 둘이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는 생선가시처럼 말이 목에 걸린 양 입술을 오물거렸다.
강이 가시를 빼주려고 했는데 마침 레이나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두 분이서 제 욕 한 건 아니죠?”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며 어머니의 눈이 또 초승달을 그렸다.
“네가 욕할 데가 어디 있니? 참 예쁘구나.”
어머니는 레이나의 손을 애틋하게 잡고 쓰다듬었다. 마치 아들을 맡기고 먼 길을 떠날 사람처럼.
*
밤이 깊도록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았다.
내 이름은 윤삼순. 오래전에 히트했던 드라마 제목과 이름이 같아서 놀림을 받을 법도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내 주변에는 나를 놀릴 만큼 친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내 나이 육십. 옛날 사람이다. 군인들이 정치를 하고, 국가가 국민을 고문해서 죽이고, 여자의 운명이 결혼에 의해 결정되던 야만의 시대에 살았다.
나는 이미 아이가 있는 남자와 결혼했다. 내 배로 낳은 아이가 있었지만 나는 두 아이를 차별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도리어 원래 있던 아이, 지은이에게 더 많은 애정을 쏟으려고 노력했다.
골절상도, 그 흔한 찰과상도 없이 지은이를 지켰다. 그러나 백화점이 무너지는 사고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 사고 이후 나는 살인자 취급을 받았다.
유난히 딸 지은이를 좋아했던 남편은 무참한 상실감을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해소했다. 그의 상실감은 끝없이 아득한 것이어서 나를 아무리 괴롭혀도 끝나지 않았다.
냉대와 폭력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병원에 갇혔지만 그곳은 병을 낫게 하는 곳이 아니라 더 미치게 하는 곳이었다.
백열등의 노란 빛과 음울한 벽에 갇힌 채 나는 죄와 벌, 그리고 죽음을 생각했다. 끝없이 반복해서 생각했다.
나는 숨 쉬고 살아 있되 살아 있지 못한 존재였다.
내 인생에 유일한 기쁨은 살아남은 아이, 강이었다. 그 아이는 아버지의 무도한 폭력을 이기고 잘 자라줬다.
뒤늦게 내가 정신을 차리게 된 것도 그 아이 덕분이다.
잠깐. 정신을 차린 게 맞나? 어쩌면 지금 나는 가장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가 아닐까?
모르겠다. 다만 더 이상은 안 된다.
나를 잡아먹은 악마가 죄 없는 아이들까지 잡아먹도록 놔둬선 안 된다.
나는 아니까. 그가 오래전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그 죄를 알면서도 눈을 감고 입을 닫았던 공범으로서 나는 이제 악마를 단죄하려 한다.
괴로운 회상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침실에서 나갔다. 그 시간이 새벽 2시 22분.
부엌으로 향했다. 대여섯 개의 칼이 꽂혀 있는 우드블록에서 가장 잘 드는 칼을 골라잡았다.
그녀는 수십 번, 수백 번 잡아본 칼 손잡이를 어느 때보다 더 힘주어 잡았다.
이것은 복수가 아니다. 이것은 속죄다. 이것은 최소한의 양심이다.
오래전부터 남편 혼자 쓰는 침실로 걸어가면서 그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여류시인의 시 한 구절을 떠올렸다.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은 춤추면서 당신을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당신이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 대디(Daddy) - 실비아 플라스(Sylvia Pl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