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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65화 (65/92)

65화

밤은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해는 원래도 급히 차를 몰지 않았지만 수진이 옆에 타고 있을 때는 더 조심스럽게 운전했다.

그녀는 차 안에 넘실대는 재즈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흘렸다.

잃어버리기 전에는 소중함을 알기 힘든 것들이 있지. 다시 찾아보니 알겠어.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만약 한해 오빠와 결혼하면 어떨까? 강이 오빠와의 결혼생활처럼 답답하진 않겠지?

“무슨 생각해?”

한해의 목소리에 그녀는 흠칫 놀랐다.

당신과의 결혼 생활에 대해 생각했다고 말할 순 없지.

“달이 예뻐서.”

“좋은 사람들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달도 별도 예쁘고. 그리고 너랑 함께 있고. 더 바랄 게 없네.”

“고마워. 나도 오빠랑 헤어지기 싫었는데 더 있자고 해줘서.”

한해는 겉으로는 웃고 있으면서도 왠지 긴장한 얼굴로 운전했다.

얼마 안 있어서 집에 도착한 그는 주차장에 차를 대고 그녀를 위해 차문을 열어주었다.

“친절하기도 해라!”

그녀가 내리자 귀부인을 에스코트하듯 손까지 잡아주었다.

“오빠 오늘 왜 그래?”

“뭘?”

“왜 이렇게 친절해?”

“원래 친절하잖아.”

“오늘따라 과하게 친절한 느낌이야.”

그는 대답도 설명도 하지 않고 대문을 열었다.

맙소사.

그녀는 마당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나무들마다 전구들이 휘감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와…… 예쁘다.”

그녀는 탄성을 지른 다음에야 빛의 정원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아니 이걸 언제 다 준비했어? 아직 크리스마스는 꽤 남았는데?”

한해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잡고 정원 한복판으로 이끌었다.

“뭐야. 왈츠라도 추려고?”

그녀가 웃음을 거두기도 전에 그는 무릎을 꿇었다.

“수진아. 나랑 결혼해줄래?”

선선한 밤바람이 뺨을 스치지 않았다면 꿈일까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뭐지? 지금 프러포즈한 거야?“

그녀는 너무 놀라서 눈만 껌벅였다. 한해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잘 맞을지 모르겠다.”

그는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반지는 끼지도 헐렁하지도 않게 꼭 맞았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상상했던 순간이었다. 프러포즈를 상상할 때마다 수많은 이벤트 중에서도 꼭 고전적인 방식, 바로 지금 한해가 택한 방법이 자꾸만 떠올랐다.

“오빠…… 나 지금 너무 당황해서…….”

“당장 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좀 급한 건 나도 아니까.”

그녀는 이혼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다는 사실과 그가 너무 오래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사실을 동시에 깨달았다.

“오빠. 일단 일어나.”

“대답은 기다릴 수 있지만, 일어나려면 키스가 필요한데.”

“어휴……”

이 남자, 점점 능글맞아. 그런데 그게 또 싫지 않아.

그녀는 무릎 꿇은 한해의 머리를 감싸고 위에서 아래로 입을 맞추었다. 빛의 정원에서, 오래오래.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일까? 아니면 더 있을까? 더 이상은 없다고 해도 감사해.

고전적 청혼의 정석을 반달이 흐뭇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샤워를 하고 나온 그녀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다시 좁은 원룸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의 반쪽은 한해의 집 정원에 두고 왔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사토시 아저씨와 숙희 아줌마의 결혼 소식을 듣고, 이어서 한해의 프러포즈를 받았다.

오늘이 결혼의 날이었던가?

방금 전 한해의 모습을 생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냉정을 되찾으려고 애썼다.

혼자 누군가 상의할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너무 어릴 때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떠올렸다.

엄마, 아빠. 나 한해 오빠한테 청혼을 받았어요.

응. 엄마 아빠가 아는 그 한해 오빠 말이야.

두 분은 완전 찬성이겠지? 어릴 때부터 한해 오빠를 좋아하셨으니까.

수진은 부모님 생각을 계속하다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얼른 다른 사람을 떠올렸다.

바로 전화를 걸까 하다가 시간이 좀 늦어서 망설여졌다.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야화 작가에게 메시지를 남겼고 10분도 안 있어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에요, 피디님?”

“쉬고 계신데 죄송해요. 좀 늦은 시간이죠?”

“아니에요. 안 그래도 글 쓰는 중이었어요.”

“작가님한테 상의 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어…… 혹시 계약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피디가 작가들에게 진지한 태도로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고. 제 개인적인 일이에요.”

“얼마든지요. 피디님한테 빚진 것도 있잖아요.”

“에이. 빚이라니요.”

“개인적인 일이라면…… 제가 맞춰볼까요? 한해 씨와 결혼 문제?”

수진은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와. 어떻게 아셨어요?”

“아무래도 매일 환자들과 대화하는 게 직업이다 보니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죠.”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작가라면…… 과학적인 역술가쯤 되는 셈일까?

“맞아요. 한해 씨한테 프러포즈를 받았어요.”

“우와! 축하해요!”

“그런데 바로 승낙을 하지 못했어요.”

“마음이 복잡하군요.”

“네. 그래서 작가님 생각이 났고요.”

“피디님을 도와드릴 수 있어서 기뻐요.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 피디님 마음은 어땠나요?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수진은 방금 전의 생생한 감정을 상기해보았다.

“감격. 단 하나의 감정만 고르라면 감격이었어요.”

“감격이라. 조금 자세히 들여다볼까요?”

“저는 중학교 때 사춘기가 왔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친남매처럼 지냈던 한해 오빠한테 남자로서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기 시작했죠.”

“그 또래 아이들에게 자주 있는 일이죠.”

“맞아요. 그 또래 아이들은 많이 앞서나가죠. 저도 그랬어요. 한해 오빠하고 뽀뽀를 하면 어떤 기분일까, 한해 오빠하고 사귈 수 있을까? 그러다가 결혼까지 생각이 미치곤 했어요.”

그녀는 14년 전 사춘기의 열기를 회상했다.

“결혼식 장면도 상상해보고, 그전에 어떤 프러포즈가 제일 멋질지도 생각해봤죠. 그런데 저는 그때부터 고전적인 프러포즈를 많이 상상했어요. 은은하게 불이 켜진 정원에 나무들마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전등이 휘감겨 있고. 그 가운데 한해 오빠가 무릎 꿇고 반지를 끼워주는…….”

그녀는 손을 들어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확인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원룸 보증금만큼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에 눈이 부셨다.

“정말 어릴 때 꿈꿨던 그 프러포즈를 받았어요.”

“감격 맞네요.”

“네. 맞아요. 소름 끼칠 정도의 감격.”

“그런데 뭐가 걱정인가요? 왜 대답을 머뭇거리는 거죠?”

“제 처지가 떠올랐어요.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혼을 해도 되나 싶었어요.”

“안 될 건 뭐가 있죠?”

“두려워요. 한번 실패를 해서 그런지 또 결혼생활이 잘 안 풀릴까 봐.”

수진은 옅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해해요. 그럴 수 있죠. 한해 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기다려주겠대요.”

“그럼 된 거 아닌가요?”

“너무 미안해서요. 이미 14년을 기다렸는데 또 기다려야 한다니…….”

“미안함에 떠밀리듯 결혼해서는 안 되죠.”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 거예요.”

“이강 씨와 결혼할 때는 어땠나요?”

“그때는 정말 고민을 많이 했죠. 결국은 그렇게 되었지만.”

“과거의 잘못을 확실하게 복기해야 또 실패하지 않죠. 괴롭겠지만 그때의 감정을 되짚어봅시다. 이강 씨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건 명확해요. 강이 오빠가 고마웠어요. 갈 곳 없는 고아였던 저를 거두어주고, 제가 어른이 되고 학교를 마칠 때까지 보호자로서 지켜줬으니까요.”

“계속 보호를 받고 싶었나요?”

“아니요. 그건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오빠의 지나친 보호가 결혼을 망설이게 만들었죠.”

“한해 씨는 어떤가요?”

“많이 달라요. 사실 철모르는 어린 시절을 빼고 나면, 한해 오빠와 함께 한 시간은 극히 적어요. 겨우 최근 몇 달이죠. 그리고 한해 오빠는 저와의 거리가 유연해요.”

“무슨 뜻일까요? 거리가 유연하다?”

“강이 오빠는 절 자기 안에 품고 싶어 했죠. 하지만 한해 오빠는 함께 있고 싶어 해요. 제가 일을 할 때는 완전히 놔주고, 제가 기대고 싶을 때는 어깨를 빌려주고, 안겨 있고 싶을 때면 품을 내어주죠.”

“그게 진정한 존중이죠. 수진 씨를 완전한 인격체로 존중해야만 취할 수 있는 태도죠.”

“네. 저도 그렇게 느껴요.”

“그렇다면 뭐가 두려운 거죠? 이강 씨처럼 수진 씨를 삼키려는 결혼도 아닌데.”

“변할까 봐요.”

여기부터가 괴로운 부분이었다. 수진은 등을 웅숭그리고 마른세수를 했다.

“강이 오빠도 연애할 때는 그러지 않았어요. 결혼한 다음부터 저를 소유하려고 들었죠.”

“한해 씨도 결혼한 다음에 변할까 봐 두려운 거군요.”

수진은 야화가 앞에 있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답은 결혼 전에는 알아낼 수 없을 겁니다. 그저 예상만 할 뿐이죠.”

“예상 적중률을 높일 방법이 있을까요?”

“있죠. 아주 확실한 방법이.”

수진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지만 두 번은 의심하라.

이태화 회장 역시 자주 상기하는 격언이었다.

청부업자 주호영에게 보고를 받는 장소가 문제였다. 밖에서 만나자니 다른 사람들 눈에 띌까 봐 신경이 쓰이고, 회사로 부른 건 한 번이면 족했다.

만에 하나라도 나중에 범행이 들통 나서 수사를 받게 되면 제일 먼저 회사 CCTV부터 뒤질 테니까.

예전에도 알던 사이라 우연히 한 번 회사에 들렀다고 둘러댈 수 있지만, 방문한 기록이 두 번이나 있다면 핑계가 궁색해진다.

장소를 바꿔가면서 만나기 위해 오늘은 집으로 그를 불렀다.

이태화 회장의 서재에서 호영은 사진을 건네주었다.

“녀석의 집은 삼성동이더군요.”

한해가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여러 날 미행해서 찍었는데, 수진과 함께 드나드는 사진도 섞여 있었다.

“보시다시피 며느님도 자주 방문을 하고요. 그래도 며느님을 다시 찾아오시겠다는 거죠?”

“찾아오겠다는 얘기가 아닐세. 제 발로 다시 오게 만들겠다는 거지. 내 앞에서 무릎을 꿇도록.”

“알겠습니다.”

이태화 회장은 모욕감을 느꼈다. 호영의 잘못은 없지만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호영은 그의 표정을 읽었다.

이 분노를 풀어드려야겠군.

“속상하신 기분은 백번 이해합니다. 저도 지켜보면서 당장 혼쭐을 내주고 싶었으니까요.”

이 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어떻게 이런 집에서 살지?”

“확인해봤더니 시가가 50억이 훌쩍 넘더라고요.”

“누군가 뒤를 봐주는 게 틀림없군.”

“등기부 등본을 떼어봤습니다. 역시나 집주인은 강한해가 다니는 SH 인베스트먼트의 최대 주주 사토시 회장으로 나옵니다.”

“회장이 자기 명의로 된 집을 말단 직원에게 내준다?”

이 회장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만약 사토시라는 사람이 강한해의 뒤를 봐주고 있다면…… 저희 쪽에서 돈으로 강한해를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산이 상당하니까요.”

“그 사람하고 강한해하고 무슨 인연이 있을까?”

“그것까지 알아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태화 회장은 다그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겁을 좀 줄까요?”

“옛날 방식으로?”

“네. 오래되었지만 제일 효과적인 방식이지요.”

이태화 회장은 잔뜩 인상을 쓴 채 치욕의 기억을 떠올렸다.

직접 전화해서 만나자고했는데 거절했지.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 녀석이…….

“무난하게 두들겨주는 정도만 해도 겁먹고 도망갈 겁니다.”

“그래?”

“저희 애들 중에 제일 잘 치는 애들 몇몇 골라놓겠습니다.”

이 회장은 손톱으로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호영아.”

“네, 회장님.”

“담배 연기 자욱한 곳을 왜 너구리굴이라고 부르는지 아냐?”

“글쎄요?”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동네 뒷산에서 너구리 사냥을 하곤 했어. 나도 여러 번 동네 형들을 따라 가봤지. 너구리를 잡는 방법은 간단해. 이놈들이 굴을 만들어놓고 숨어 지내는데, 불을 피워 너구리굴 안으로 연기를 흘려 넣으면 놈들이 튀어나오지.”

“아, 그래서 너구리굴이군요.”

“오랜만에 너구리 사냥 한번 해볼까?”

“알겠습니다. 사냥 준비하겠습니다.”

은밀하고도 위험한 대화를 나눈 둘은 서재에서 나왔다.

이태화 회장의 아내가 문 앞에 귀신처럼 서 있었다. 초점을 완전히 잃은 눈으로.

그녀의 팔은 아직 깁스를 풀지 못하고 목에 매달려 있어서 기괴함을 더했다.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고 살아온 호영조차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 사모님. 깜짝 놀랐습니다.”

그녀는 반쯤 벌린 입으로 뭔가를 우물거렸다.

“자네는 그만 가봐.”

이태화 회장의 말에 호영은 공손히 인사하고 집을 나갔다.

둘만 남은 집에서 이 회장은 아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뭐하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뭐하는 거예요?”

“사업차 얘기하는 것까지 당신한테 말해야 하나?”

“사업이 아닌 것 같던데?”

이 회장은 독 오른 눈으로 아내를 노려보았다.

“엿들었어?”

“비극은 저 하나로 족해요. 애들을 제발 내버려둬요.”

“이게 어디서 참견이야!”

이 회장의 고함이 대리석 동굴 같은 집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

프러포즈의 마법일까.

한해는 이틀째 지면에서 발이 한 뼘쯤 떨어진 기분으로 지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출근해서 맹렬히 일을 하고…….

사랑의 감정과 상관없는 일상의 시간에도 가슴이 벅찼다.

아직 수진의 대답은 없다. 오고 가는 안부 메시지, 하릴없는 말장난 속에서도 프러포즈와 관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도 그녀도.

다만 오늘 저녁 약속을 변경하긴 했다.

원래는 야구장에 가서 치킨과 맥주를 즐기며 야구를 보기로 했다. 한해를 위한 ‘육지에서 안 해본 일 해보기 시리즈’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메시지가 왔다.

-오빠. 오늘 좀 피곤해서 그런데 야구장 데이트는 담에 할까? 몸이 안 좋다는데 굳이 야구장에 갈 이유는 없었다.

-그러자. 급한 일도 아닌데. 어디 아파?-아냐. 아픈 건 아니고. 밖에 나오고 싶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집에서 쉬고 싶어?-응. 그게 낫겠어. 보고 싶은 마음은 한 가득이지만 조르지 않았다.

-언제든 오빠가 필요하면 불러. 달려갈게.-고마워. 짧은 답변을 보면서 한해는 마음이 서늘해졌다.

뭔가 속상한 일이 있나 걱정도 되었지만 캐묻는 것 같아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데이트가 기다리는 퇴근길과 혼자 집으로 들어가는 퇴근길의 기분은 천지 차이.

집에 들어간 한해는 원래 야구장에서 먹기로 했던 치맥을 영화를 보면서 먹었다.

“별로다.”

얼마 전에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인데도 재미가 하나도 없어 중간에 꺼버렸다.

“진짜 맛없네.”

불변의 진리라는 치킨도 몇 조각 먹다가 냉장고에 넣어버렸다.

남은 맥주도 김이 빠져 싱크대에 부어버리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저녁 내내 수진은 연락이 없다.

와…… 연애가 이런 거구나.

그냥 몇 시간 연락이 없는 걸로도 사람 마음이 추락해버리네.

이제 참을 만큼 참았다 싶었다.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알아보려고 메시지를 썼다.

-저녁은 먹었어? 전송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이것은 텔레파시?!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축 처져 있던 마음이 다시 팽팽해졌다.

“어, 수진아. 안 그래도 걱정돼서 연락하던 참이었어.”

“그래? 그럼 얼굴 보고 얘기하면 더 좋겠네.”내가 보고 싶었구나. 이럴 걸 왜 연락도 없이 약 올렸어?

“내가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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