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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64화 (64/92)

64화

그의 손길은 느리고 따스하게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졌고 레이나의 맥박은 다시 속도를 높였다.

공존할 수 없는 감각들, 이를 테면 나른함과 짜릿함이 함께 그녀의 신경계를 교란시켰다.

그녀는 강의 귀에 입술을 밀착하고 촉촉한 속삭임을 불어넣었다.

“당신 침대로 갈까, 내 침대로 갈까?”

“소파는 어때?”

“내가 보고 있는데도 괜찮아?”

레이나는 거실 통창 너머 멀리 서 있는 자신의 옥외간판을 가리켰다.

“가끔은. 색다른 기분일 것 같아.”

그는 그녀의 두 팔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모아 쥐고 다른 손으로는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이 떨렸다.

“키스해줘. 멈추지 말고.”

그는 충실한 바리스타가 되어 그녀의 주문을 수행했다.

사랑을 나누기 전부터 이어진 긴 교감의 시간 내내 끊임없는 키스를 선사했다.

“사랑해.”

결정적인 순간에 파고든 그의 속삭임은 또 한 번 그녀의 눈에서 감격의 눈물을 짜냈다.

그녀는 사랑한다는 화답을 해줄 수 없을 만큼 정신이 나가 있었다. 환희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열띤 진동이 천천히 가라앉을 때까지 그는 그녀를 꼭 품고 쓰다듬어 주었다.

쿵쾅거리던 심장박동이 어느 정도 진정된 뒤에야 그녀는 입을 뗄 수 있었다.

“나도 말하려고 했는데. 사랑한다고. 너무 좋아서 말이 안 나왔어.”

“난 들었는데.”

“오빠가 그렇게 먼저 말해주면 난 큰 선물을 받는 기분이야.”

“더 많이 표현하도록 애쓸게.”

그거면 충분했다. 슬기로운 동거생활을 위해 그녀는 더 이상 필요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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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나는 침실로 쓸 방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아직 식지 않은 열기와 얼얼한 감각이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강은 각자의 방에서 자야 한다는 규칙을 내세웠지만, 그녀는 벌써부터 그 규칙을 자연스럽게 깨뜨릴 방법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그가 먼저 그따위 규칙은 이제 없애자고 말하게 만들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

침구 정리를 막 마쳤을 무렵,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오랜만입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한해의 메시지였다.

반가운 마음에 그녀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와 이게 누군가요! 얼마든지요! 통화할까요? 강은 메인 침실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집이 워낙 커서 정반대 위치에 있는 이 방에서 통화해도 강에게 들릴 리가 만무했다.

한해와의 통화를 강이 별로 신경 쓸 것 같지도 않았고.

그는 금방 전화를 걸어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한해 씨 덕분에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래요? 제가 레이나 씨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 끼워준 퍼즐을 맞춰줬잖아요.”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는지, 그는 들릴까 말까 한 웃음소리를 냈다.

“한해 씨는 어때요? 오매불망하던 수진 씨하고 마음껏 만나니까 좋은가요?”

“네. 행복합니다.”

그의 음성은 확신에 차 있었다.

레이나는 그가 말하는 행복을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수진 씨는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은 할 필요도 없었다.

한해가 물었다.

“혹시 동생 분한테 얘기를 들었나요?”

“동생? 제 동생 레오 말이에요?”

“네. 어제 홍대에서 공연하는 걸 봤어요. 인사도 나눴고요.”

“아…… 소월 씨하고 음원 발표했는데 버스킹 하러 갔었구나.”

“네. 맞습니다. 노래가 정말 좋던데요?”

“그래요? 고마워요. 잘되지도 않는 음악을 하겠다고 애가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이번에는 잘되었으면 좋겠어요.”

“잘될 겁니다. 만났다는 얘기를 안 했구나.”

“제가 요즘 레오하고 같이 안 살아서요. 요즘 강이 오빠하고 같이 지내요.”

오늘부터 동거 시작이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강이는…… 잘 지내나요? 소식을 들을 방법이 없어서.”

“본인은 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본 강이 오빠 모습 중에서는 요즘이 제일 좋아 보이네요.”

“다행입니다. 정말 잘되었네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다 한해 씨 덕분이에요.”

레이나는 말하면서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정신 나간 소리라고 하겠지. 아내를 빼앗아간 남자 덕분에 행복해졌다니. 그런데 정말로 그렇잖아.

“그렇다면 이번에는 제가 레이나 씨한테 도움을 요청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말씀해보세요.”

잠시 후, 상상도 하지 못한 부탁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레이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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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한 주가 힘들어도 주말은 신의 선물처럼 찾아온다. 반대로 월요일 역시 어김없이 찾아온다.

한해와 함께 보낸 꿈같은 주말을 뒤로한 채 수진은 출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약간의 비장함과 피곤함을 머금은, 대체적으로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오늘도 한해와 데이트를 할 테니까.

그는 수진의 퇴근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오기로 했다.

오늘 저녁은 아주 특별한 저녁이 될 터였다. 부모님 연배의 사토시-숙희 커플과 더블데이트를 하니까.

수진은 출근하자마자 주말 드라마 관련한 모니터 보고서를 써서 제출하고, 점심은 오랜만에 야화 작가와 함께했다.

야화 작가가 하루 종일 진료가 있는 날이라서 병원 근처로 수진이 찾아갔다. 빨리 먹을 수 있는 비빔밥으로 간단히 배를 채우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소설은 이제 클라이맥스로 다가가는데, 아직 제목을 못 정하겠어요. 휴우…….”

야화는 한숨이 깊었다.

“원래 붙였던 제목도 나쁘지 않은데, 작가님은 별로세요?”

“모르겠어요. 임팩트가 좀 떨어지는 것 같아서. 게다가 소설 제목과 드라마 제목을 같이 가져가는 게 좋잖아요. 드라마 제목으로는 어떠세요?”

“음. 그건 그렇죠. 드라마 제목으로 가기엔 좀 밋밋한 느낌도 들고 그러네요.”

“그것 봐요. 저도 좀 고민해볼 테니까 피디님도 고민해주세요.”

“그럼요. 저도 오늘부터 제목 고민 들어갑니다!”

그녀는 카페라테를 한 모금 마시고 양손으로 컵의 온기를 잠시 느꼈다.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던 야화가 빙긋 웃었다.

“아주 행복해 보이네요.”

“티가 나나요? 헤헤.”

“연애한다고 다 티가 나는 건 아니에요. 진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얼굴이 다르죠.”

“작가님이 정신과 의사여서 더 잘 보이는 걸 수도 있어요.”

“그럴까요?”

야화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오늘 작품 얘기 말고도 드릴 말씀이 있어요. 예전에 세션을 진행했던 환자에게 어제 전화가 왔어요.”

“환자하고 직접 연락처를 주고받기도 하나요?”

“보통은 그렇지 않아요. 다만 그 환자는 좀 특별했죠. 제가 왕진을 간 적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번호를 알게 되었죠.”

“왕진이요?”

“그 환자는 어린 시절의 학대로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어요. 마음의 갈증을 어떤 여자에게 고정시켜놓고 그 여자를 아내로 차지하려고 긴긴 세월을 애썼던 사람이에요.”

수진은 단박에 강을 떠올렸다. 그러나 비슷한 스토리라고만 생각했지 야화가 말하는 그 환자가 강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그런 왜곡된 집착의 결과가 좋을 리가 없죠. 정말 다행인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거죠. 그분은 아내를 놔주고 새 삶을 시작했어요.”

너무 비슷한 이야기여서 수진은 맞장구를 치기도 어려웠다.

“어제 전화가 와서 그러더군요. 이제 완전히 회복된 것 같다고. 고맙다고. 어쩌면 다시 연락드릴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네…….”

“피디님도 잘 아는 분이세요. 그 환자분.”

수진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설마…….”

“네. 맞아요. 태화 건설 이태화 부회장님. 한때 당신의 남편이었던 분이죠.”

수진의 어깨가 툭 떨어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너무 놀란 수진은 배신감을 느껴야 하는지 판단조차 잘되지 않았다.

“저도 처음에는 몰랐어요. 피디님도 그렇고 두 분이 저한테 하는 얘기가 너무 비슷하다 싶었는데도 두 분이 부부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어요.”

“언제 알았어요?”

“피디님이 이혼을 결심한 다음에요. 이강 씨 입에서 피디님 이름이 나오는 순간 확신했죠.”

“아아…… 잠시만요. 너무 혼란스러워서.”

수진은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작가님.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때는 이미 상담이 한참 진행된 상황이었어요. 두 분과 저의 인연을 말하는 순간 상담은 중단될 게 뻔했고…… 이강 씨는 큰 상처를 입었을 겁니다. 진료 중단은 종종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수진은 그때의 상황을 가만히 떠올려보니 납득이 갔다.

“저에게는 피디님도 중요하지만 환자인 이강 씨도 똑같이 중요했어요. 그래서 의사로서의 양심을 걸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상담을 마치려고 애썼어요.”

“혹시…… 그이가 갑자기 이혼에 동의하게 되기까지 작가님의 영향도 있었나요?”

야화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인할 수 없네요.”

“그이도 알고 있나요?”

“아니요. 이강 씨와 저의 인연은 이제 끝났으니까요. 그리고 제 상담의 결과도 흡족할 만하니까요. 이제 와서 괜히 혼란스럽게 만들어선 안 됩니다.”

“그이가…… 뭐라고 하던가요? 잘 지낸다는 이야기 외에는?”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수진 씨가 전혀 걱정할 필요 없을 만큼 좋아졌어요.”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수진은 자기 일인 양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다시 안정을 찾고, 테이블 위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야화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마워요, 작가님.”

경직되어 있던 야화의 얼굴 표정이 그제야 풀어졌다.

수진은 온통 새까만 옷을 입고 사무실을 찾아왔던 야화 작가의 첫 인상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그저 괴짜 작가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인연으로 이어질 줄이야.

소월의 얼굴도 떠올렸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지. 이렇게 이어질 줄은.

잠깐만. 만약 야화 작가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고 소월 씨의 음악을 드라마에 쓴다면, 이렇게 둘이 또 이어지는 거잖아?

수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서로 아무런 인연도 없는 것 같은 타인들의 머리 위로 가느다란 실이 연결되어 있는 환영이 보였다.

그녀는 대학에서 배웠던 영국의 옛 시인 존 던의 글 한 구절을 기억해냈다.

우리는 제각각 따로 떨어져 있는 섬이 아니라 하나의 대륙의 일부분이라고. 누군가의 죽음은 크건 작건 우리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셈이라고.

그러니 멀리서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종 소리가 들리거든 묻지 말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느냐고.

그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해 울리는 종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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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대략 80년 전후를 살고 그 세월을 날로 계산하면 대략 3만 일이 조금 안 된다.

세상이 불공평한 것처럼, 우리 생의 모든 날도 똑같은 기억을 할당받지 못한다.

한해는 확신했다. 오늘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들 중 하나이고,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날이라는 것을.

일이 끝나고 수진을 데리러 가는 동안 차창을 내리고 바깥 공기를 느꼈다. 손으로 공기의 온도를 느끼고 떠도는 냄새도 맡았다.

서서히 저녁 어스름이 깔리는 풍경도 고스란히 눈에 담았다.

다 기억하고 싶어. 오늘 하루의 모든 것들을.

수진의 회사 옥외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예상 시간보다 일찍 그녀가 나타났다.

“오빠!”

그녀는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차에 올랐다.

둘은 가볍게 키스를 나누고 잠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녀는 금방 한해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오빠 무슨 일 있어?”

“응? 왜?”

“뭐지? 어딘가 긴장해 있는 것 같아서.”

“아…… 두 분 같이 만나려고 하니까 좀 긴장했나 보다.”

“그치? 나도 그래.”

한해는 차를 출발시켰다.

수진은 한해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틀고 그를 쳐다보았다.

“왜?”

“이따가 두 분 앞에서는 오빠 쳐다보기 좀 그럴 테니까. 미리 많이 봐두려고.”

애교 섞인 그녀의 말에 한해는 빙긋이 웃었다.

배를 탈 때 사토시 씨와 나눴던 수많은 대화 중에는 사랑에 대한 대화도 있었다.

수진을 그리워하며, 그녀를 향한 감정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웠던 그는 사토시에게 물었다.

“사랑은 뭘까요?”

“사랑의 본질은 우리가 감히 이야기할 수 없이 복잡다단하지. 그러나 현상적으로 봤을 때 사랑이 시작되는 모습은 어느 경우든 다 비슷하지.”

거대한 호수에 떠 있나 싶을 정도로, 파도도 없이 잔잔한 밤바다 한복판에서 그는 물었다.

“그 현상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시작될 때 연인들은 유치하고 느끼한 소리를 잘도 하지. 다른 때라면 인상을 쓰거나 손발이 오그라드는 바보 같은 말과 행동을 하면서도 즐거워하지. 그게 사랑이 시작될 때의 일반적인 현상이야.”

요즘 자신과 수진이 주고받는 말들을 생각해보면 사토시 씨의 통찰력은 몹시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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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오래 걸리지 않아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중식당의 룸이었다.

한해는 약속시간보다 몇 분 더 일찍 룸에 들어섰지만 사토시 씨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들 와요.”

옆에 앉아 있던 숙희가 일어나서 둘을 맞이했다.

한해는 정말로 숙희가 기억하는지, 아니면 기억나는 척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서로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시작했다.

사토시 씨는 기분이 몹시 좋아 보였다. 식사를 하는 내내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이끌던 그는 자장면이 나오자 추억에 젖었다.

“숙희야. 기억나? 우리 어릴 때는 그저 극장 갔다가 짜장면 한 그릇 같이 먹는 게 최고의 데이트였는데 말이지.”

“그러게요. 그때는 이게 얼마나 맛있었는지. 대한극장 앞에 청어 굽는 골목도 기억나요.”

“아아. 그렇지. 거기 골목에 청어 구이 식당들이 모여 있었는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진이 끼어들었다.

“저는 지금까지 먹어본 생선구이 중에 숙희 사장님 식당이 제일 맛있었어요.”

“아이고,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어쩌나. 식당은 이제 문을 닫았어.”

“앗! 그래요? 또 가려고 했는데.”

“이 사람이 하도 뭐라고 해서.”

숙희가 사토시에게 눈을 흘겼다.

“아니 그럼 그 병을 앓으면서 계속 식당을 하겠다는 거야? 남은 세월 매일 같이 놀러 다녀도 모자랄 판에.”

“아유 그래서 허구한 날 당신하고 놀러 다니잖아요. 어제도 그 뭐냐. 압구정동에 그 무슨 백화점에 다녀왔잖아요. 명품관이라고 크기만 크고 내 마음에 드는 건 하나도 없드만.”

아옹다옹하는 두 사람을 보는 한해와 수진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숙희 아주머니도 치매에 대해 알고 계신 건가?

둘의 표정을 본 사토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도 알고 있어. 이미 알고 있더라고.”

한해는 왠지 마음이 묵직해졌다. 숙희를 보기 힘들어졌다.

“괜찮아요.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어. 너무 불쌍하게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해.”

오히려 숙희가 한해와 수진을 위로하는 꼴이었다.

“오늘 자네들을 보자고 한 이유는 말이야. 이걸 전해주기 위해서야.”

사토시는 품에 넣어왔던 뭔가를 꺼내 한해와 수진에게 건네주었다.

봉투를 열어본 한해는 묵직한 감동에 압도되었다.

그것은 청첩장이었다. 두 사람이 최근에 찍은 사진 아래 글이 인상적이었다.

아주 특별한 결혼식에 초대합니다.

사랑에는 너무 늦은 때가 없음을 알려준

소중한 만남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사토시 씨가 멋쩍게 덧붙였다.

“백 장도 안 찍었어. 나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이 나이에 다시 하는 결혼식에 와줄 사람이 많지 않아서.”

한해는 조금 놀랐다. 언제나 씩씩하고 단호한 사토시 씨도 멋쩍어질 때가 있구나 싶었다.

“두 사람은 꼭 와줬으면 하는데 무리한 부탁일까?”

“아니요! 꼭 갈게요!”

수진이 외치듯 말했다.

“아이고 깜짝이야…….”

숙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이 청첩장의 글은 누가 쓰신 건가요?”

수진의 목소리는 감동과 흥분으로 흔들렸다.

“내가 썼지.”

숙희가 배시시 웃었다.

“와, 정말 멋진 말이네요.”

“멋있게 말한 거지. 다 헛소리야. 너무 늦으면 재미없어. 사랑도 몸과 마음이 짱짱할 때 해야 사랑이지. 올해 결혼하고 내년에는 결혼한 것도 잊어버릴지 모르는데…….”

“이 사람이 왜 또 재수 없는 소릴!”

사토시가 역정을 냈지만 숙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아. 오늘 하루를 열심히 즐겁게 살자고 매일 아침에 생각해요. 요즘은 이 사람 덕분에 운동도 많이 하고 책도 읽고…… 애쓰고 있어. 바보가 되더라도 천천히 되려고.”

숙희의 표정이 밝아서 마음이 더 아팠다. 한해는 테이블 아래로 수진의 손을 꼭 잡았다.

“꼭 참석하겠습니다. 두 분을 위해 저희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해보겠습니다.”

그 말에 숙희가 발랄하게 맞받아쳤다.

“둘도 얼른 결혼해요. 얼마나 좋아. 하루가 아까워, 하루가.”

한해는 도망가려는 수진의 손을 꽉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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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을 집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한해는 신호대기 앞에서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잠깐 우리 집에 들를래?”

“왜?”

“깜짝 선물 줄 게 있어서.”

“선물이라면 언제든 오케이지.”한해는 무심하게 핸들을 돌리는 척했지만 그의 심장은 터질 듯이 빨리 뛰고 있었다.

차창 밖에 휘영청 빛나는 보름달을 보며 기도했다.

달님 저예요. 바다 한복판에서 당신에게 정말 많이 기도했는데. 기억하세요?

오늘은 그 어느 날보다 더 간절합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제발 성공하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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