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야화 작가의 소설은 어느덧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수진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덕에 소설 계약도 이루어졌고 연재날짜도 잡혔다.
수진은 미리 움직이는 차원에서 각색 작가도 찾기 시작했다.
지상파 TV밖에 없던 시절은 저 멀리 갔다.
종편과 케이블이 등장하고, 넷플릭스를 비롯한 스트리밍 플랫폼이 대거 출현하면서 콘텐츠 확보 경쟁은 전쟁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해졌다.
검증된 기성 작가나 유망주 신인 작가들과의 인맥을 두루두루 맺어놓는 것도 기획 피디의 중요한 업무이자 능력이었다.
오늘 저녁 약속 역시 그런 의도에서 마련한 자리였다.
그녀가 만나려고 했던 감독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 출신으로 두 편의 영화를 찍고 난 뒤 드라마 연출자로 데뷔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저녁을 먹으면서 야화 작가의 소설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취소 연락이 왔다.
-진수진 피디님. 오늘 꼭 알현하고 싶었는데 지난번 드라마 제작했던 대표님이 돌아가셔서요. 오늘은 문상을 가야 하니까 다음 주에 피디님 되는 시간에 언제든 맞추겠습니다. 메시지를 받고 확인해보니 거짓 핑계는 아니었다. 수진은 잘 모르는 사람이긴 한데, 그 감독과 작업했던 제작사 대표의 부고 소식이 뉴스로 검색되었다.
어쩔 수 없지. 다음 주에 만나서 부탁할 수밖에.
수진은 드라마 극본 공모전에 당선된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읽느라 점심시간을 날렸다.
딱히 허기도 느껴지지 않아 점심은 생략하고 한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 약속이 취소되었으니 시간 괜찮으면 밥 같이 먹자고.
몇 시간이 지나도록 답장이 없었다.
장난기가 발동해 보채듯 몇 개의 문자를 더 보내고, 지난번 여행에서 찍은 사진도 보냈다.
그러다가 점점 감정이 차올랐다. 별생각 없이 쓰기 시작한 메시지가 장문의 러브레터가 되었다.
다 써놓고 읽어보니 민망하기도 했지만, 솔직한 감정을 전해주고 싶어 그냥 전송 버튼을 눌렀다.
한해의 답장이 온 건 한 시간도 더 지나서였다.
예전에 같이 배를 탔던 선장님들 중에 도인으로 불리는 분이 계셨어.
마치 해탈한 종교인처럼 세상일에 초연한 분이셨는데 태풍이 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런 스타일이었지.
한번은 엄청난 태풍에 배가 뒤집힐 뻔했다가 겨우 살아난 적이 있었는데, 선장님은 천천히 개는 하늘을 보면서 나한테 행복하냐고 물어보더라.
나는 행복하다고 했지. 큰 사고 없이 폭풍이 지나가서.
선장님이 그러더라.
사람들이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는 이유는 폭풍 때문이라고.
우리가 행복한 이유도 폭풍 때문이라고.
위험과 불행을 겪어봐야 행복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수진아. 나는 너를 다시 만나고 완벽하게 이해했어. 행복이 어떤 감정인지.
너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은 그 어떤 폭풍을 견뎌냈을 때보다 더 행복해.
달콤하고 설레고 따뜻하고 편안해. 세상의 좋은 감정은 모두 너와 함께 있을 때 만들어지고 세상의 나쁜 감정은 모두 너와의 이별에서 생기는 것 같아.
그러니 내 곁에 있어줘.
정신없이 바빴는데 네가 나를 웃게 해줬어. 너의 메시지와 사진, 편지……
나 역시 너랑 똑같은 생각을 했어.
원래 미신은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널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
어머니가 괜히 이상한 소리를 해서 미안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잘 넘겨줘서 고마워.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참치 회 어때? 그 선장님이 몇 년 전에 항해를 그만두시고 참치 집을 열었거든. 일본 참치가 아니라 무려 스페인에서 비행기로 실어 온 참치를 낸다고!
-너와 함께 참치 뱃살을 입에서 녹이고 싶은 한해 오빠가.
수진은 눈과 입이 동시에 촉촉해지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참치가 먹고 싶은 건지, 그의 입술이 고픈 건지 알 수 없었다.
*
악몽을 꿨다.
강은 어두운 밀실에 갇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괴물의 눈 같은 빛이 번득였다.
괴이한 소리도 들렸는데, 숨소리인지 우는 소리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누구 없어요? 저기요! 아무도 없나요?”
애타게 외쳤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코앞에 바싹 다가온 음험한 기운.
조금씩 주위가 밝아졌고 괴물의 형상이 드러났다.
벌레와 쥐를 뒤섞은 것 같은 흉측한 짐승이 침을 흘리고 있었다.
강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꿈속에서도 꿈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고 고통스러웠다.
주말 아침을 아주 더럽게 시작했네.
그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녀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의사가 그랬다. 동물 모습을 한 괴물이 등장하는 꿈을 자주 꾼다고.
어머니의 꿈이 나에게 전이된 것일까?
강은 찜찜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이를 닦고 샤워를 하고, 특별히 향이 강한 바디로션을 발랐다.
몸이 말끔하게 정돈되었는데도 정신은 흐트러진 상태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난 김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보통 때 같았으면 다음에 통화하자고 넘겼을 텐데.
찜찜한 기분에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다.
통화대기음이 계속 이어지다가 거의 끊길 때쯤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도련님.”
어머니가 아니었다. 집안일을 봐주는 가사도우미 이모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니는 안 계세요?”
“저 그게…….”
머뭇거리는 태도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인데요? 어디세요?”
“병원이에요.”
“병원? 병원은 왜요?”
강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 사모님이 외출을 나갔다가 넘어지셔서 다치셨어요.”
외출이라니. 집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어머니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병원이 어딥니까?”
“아유. 오지 마셔요, 도련님. 곧 집으로 갈 거예요.”
“그럼 저도 집으로 가겠습니다.”
.
.
.
가족 간의 폭력만큼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일이 또 있을까?
팔에 깁스를 두르고 침대에 누운 어머니는 이마와 눈에도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아마 팔이 부러지지 않았다면 병원에 가지도 않았겠지.
강에게는 매우 익숙한 모습의 상처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넘어졌어.”
“어디서 어떻게 넘어졌어요?”
어머니를 쉬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당장은 추궁할 수밖에 없었다.
“공원에 산책을 나갔다가. 계단에서 굴렀어.”
어머니는 시선을 피했다.
“어머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시고요.”
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버지한테 맞은 거잖아요?”
어머니는 큰일 날 소리를 한다는 식으로 눈을 부릅떴다.
강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아버지는 분명히 어머니에게 사과를 한다고 했는데…….
이런 게 아버지의 사과란 말인가?
폭력의 역사는 꽤 오래전에 멈추었다. 강이 어른이 된 뒤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는 일은 없었다.
완전히 끝난 줄 알았는데.
강은 분노와 비참함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
“무슨 일 때문이에요?”
“아니라니까.”
“뭐가 자꾸 아니래요. 내가 그 상처 몰라요? 얼굴을 주먹으로, 몸은 골프채로. 우리가 매일 맞던 그 방식으로. 아니에요?”
어머니의 동공이 길을 잃고 흔들렸다.
그 모습에서 강은 대답을 얻었다.
“한 번 더 물어볼게요. 아버지가 왜 때렸나요?”
어머니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침실에서 나온 강은 어머니가 혼자 쓰는 방에 들렀다.
한때 문학소녀였던 어머니가 좋아하는 책들이 가득한 서재였다.
그는 가지런히 꽂힌 책을 보며 생각했다.
나의 탄생은 차치하고,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머니의 삶은 어땠을까?
국어 선생님이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는데, 어머니는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었을까?
벽을 따라 빈틈없이 세워진 책의 행렬에서 한 권의 책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어머니가 제일 최근에 읽은 책일까? 아니면 자주 빼내 보는 책일까?
그 책은 ‘실비아 플라스’라는 미국 시인의 시집이었다. 책이 책장에서 살짝 튀어나와 있었던 것처럼, 특정한 페이지가 접혀 있었다.
접혀 있는 페이지를 펴고 시 한 편을 만났다. 제목은 ‘아빠(Daddy)’.
어려운 단어나 표현은 거의 없어서 그 자리에서 읽을 수 있었다.
시의 대상이 아버지인지 남편인지 헷갈리기는 한데, 어쨌든 한 남자의 사악한 실체를 깨닫고 처단하는 내용이었다. 시어 하나하나가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듯 강렬했다.
시는 이렇게 끝이 났다.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하아…….”
강은 책상에 시집을 내려놓고 휘청거렸다.
그는 어린 시절 종종 아버지한테 맞고 울다 지쳐 잠들었다. 그때마다 꿈꾸었던 어두운 환상이 처음 보는 작가의 시 안에 묘사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의 환상은 그저 꿈으로 끝나지 않았다. 늦은 새벽, 부엌에서 칼을 빼 들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이건 마치 내가 쓴 시 같잖아.
실비아 플라스라는 시인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권위적이었던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녀가 8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즈음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녀는 시를 쓰기 시작했고, 역시 시인인 남자와 결혼하지만 남편은 곧 외도로 그녀를 떠났고 그녀의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다.
그녀는 겨우 서른이 갓 넘은 나이의 어느 겨울날, 가스를 틀어놓은 오븐에 머리를 박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은 실비아 플라스라는 낯선 이름의 시인과 어머니의 삶이 겹쳐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 역시 그 사이 어디쯤 단단히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수진에 대한 집착이 문제가 아니었구나.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진단이 맞아. 부모에게 받은 트라우마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행복한 자아로 살아갈 수 없어.
그는 얼마 전까지 모든 문제가 해결된 양 안도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어머니와 밥을 몇 번 같이 먹고, 아버지에게 진솔한 대화를 시도했던 것으로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나?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지.
그는 시집을 꽂아두고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울었다.
“강이야. 왜 그래…… 왜 그러니…….”
어머니가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되물었다.
‘어머니? 아버지를 죽이고 싶어요? 그러지 않고선 어머니가 살 수 없을 것 같아요?’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누워만 있다가, 깁스를 하지 않은 손으로 아들의 등을 쓸어주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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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에서 나온 강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 이태화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골프장에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냐?”
“어머니를 어떻게 하신 겁니까?”
“내가 뭘 어떻게 해. 얘기는 들었다. 산책을 나갔다가 계단에서 굴러 다쳤다고.”
“아버지. 제가 모를 줄 알아요?”
강은 분노를 숨기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꽉 누른 음성에 분노를 고스란히 실었다.
“흠…….”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멀리서 전해졌다.
“요즘 네 엄마와 자주 만나는 것 같더니. 네놈이 부추겼냐?”
“네? 뭘요?”
“네 엄마가 이혼서류를 들이밀더라.”
“뭐라고요?”
“말 그대로다. 이혼을 하자고 눈을 똑바로 보고, 아주 간만에 제정신으로 말하던데.”
강은 너무 혼란스러워서 잠시 말을 잊었다.
“이혼 따위 절대 해줄 생각이 없어. 왜냐? 일단은 귀찮고. 두 번째는 재산분할이 골치 아파. 같이 산 지가 오래되어서 지분도 꽤나 많이 갖고 갈 거고 그럼 경영권을…….”
“아버지!”
강은 치가 떨렸다.
“그래서 그 지경이 되도록 어머니를 때리셨나요? 아직도 어머니의 부주의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누나도 어머니의 자식이에요.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어떤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네가 다 안다고 까불지 마라.”
이혼에 대해 말할 때는 남의 얘기하듯 무신경하던 이태화 회장의 음성이 바짝 조여졌다.
“자기 자식이 아니니까 그랬지.”
어머니가 이혼하자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 몇 배 더 쎈 주먹이 강의 머리를 후려쳤다.
“지은이는 네 엄마의 자식이 아니다.”
“아버지…….”
“그 사람은 지은이를 낳다가 죽었어. 그 당시에는 드물지 않은 일이었지. 나는 지은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 혼자 지은이를 키우다가 네 엄마를 만나 결혼했고 너를 낳았다.”
“아니 그럼…….”
“자기 자식이면 그렇게 어린 애를 혼자 놔뒀겠어?”
아버지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강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동안 이해가지 않았던 것들의 실마리가 이제야 잡히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그토록 부당한 비난에 대해 어머니가 아무 말도 못 하더라니.
“다음에 얘기하자. 사람들이 기다린다.”
이 회장은 툭 전화를 끊어버렸고 강은 바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건 무엇일까?
아버지는 남은 생을 어떻게 살 생각일까? 어머니는 정말 아버지와 이혼할 생각일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놔줄 생각이 없는데?
그렇다면 아버지는 끝까지 어머니를 가두고 괴롭힐 생각일까? 끔찍한 죄책감의 감옥에?
아들로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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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토요일 저녁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았을 텐데.”
강의 음성은 여느 때보다 훨씬 낮게 깔렸다.
레이나의 시선은 그의 불안한 눈동자를 좇았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는 그를 위해 레이나가 올라왔다. 간단한 치즈 안주와 스페인 와인을 들고.
그녀는 한 단어도 허투루 흘리지 않고 강의 고백을 다 들어주었다. 그의 아픔은 고스란히 그녀에게 전이되었고, 그런 면에서 그는 거듭 사과할 만했다.
“미안해, 레이나.”
“아버지 얘기는 대충 들은 적이 있는데, 어머니와 그런 과거가 있었던 줄은 몰랐네.”
“여생을 위해서라도 두 분이 따로 사는 게 맞는 것 같아.”
“휴. 어렵다.”
레이나는 긴 한숨을 내쉬고 그만큼의 와인을 마셨다.
“두 분이 극적으로 화해할 가능성은?”
“우리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질문은 하지도 않을 거야.”
“그렇다면 오빠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어떻게든…….”
의지와 현실의 괴리 속에서 강은 몸부림쳤다.
레이나는 자기 일인 양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이토록 강렬한 연민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빠. 한 가지만 알아뒀으면 좋겠어.”
그녀를 보는 강의 눈에는 상처 입은 아이의 눈빛이 가득했다.
“오빠의 잘못이 아니야.”
레이라는 마음이 급해졌다.
파르르 떨리는 이 남자의 입술을 어떻게 진정시켜줄 수 있을까?
그녀는 몸을 굽혀 입을 맞췄다. 정지에 가까운 느린 키스였다.
그의 입술 위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저녁 어스름 같은 포근함을 느꼈다.
예전에 우리의 키스는 늘 뜨겁고 짜릿했지만 옳지는 않았어.
그런데 지금 이 키스는 옳아.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위안이야.
촉촉하게 맞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다시 강조했다.
“오빠 잘못이 아니야.”
“정말 그럴까?”
“나는 학원 강사지만 아이들을 제대로 대하기 위해 따로 교육학을 공부했어. 가정 폭력은 많은 경우에 대물림되지. 그런데 오빠는 그 추악한 유산을 거부하고 있는 거잖아. 오빠는 피해자야. 가해자가 되기 전에 깨달았다고. 끔찍한 유전을 멈췄어.”
“고마워.”
“오빠가 어머니를 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그리고 이태화 회장님에 대해서는…… 솔직히 오빠 말만 듣고는 어떤 분인지 내가 알 수도 없겠지.”
“맞아. 자식인 나조차도 아버지를 잘 모르겠어. 상처를 입고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랄까.”
“다시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라.”
강은 어쩔 수 없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레이나는 다시 그를 꼭 품어주었다.
“술은 이럴 때 마시라고 있는 거야.”
그녀의 권유에 강은 두어 잔의 와인을 말없이 마셨다.
“너무 우리 집안 얘기만 했네.”
“괜찮아. 내가 도움이 되었다면 그걸로 족해.”
“도움 정도가 아니라 오늘 밤 너는 나의 구세주였어. 네가 아니었으면 답답해서 손가락 하나쯤은 물어뜯었을지도 몰라.”
“내가 오빠의 손가락을 구했네.”
“고마워. 너무 고마워서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고 싶은 심정이야.”
“정말? 내가 부탁하는 건 뭐든?”
레이나는 천천히 와인을 마시면서도 강의 시선을 붙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부탁은 어떨까?”
잔을 내려놓고, 입술에 묻은 와인을 혀끝으로 닦아내는 동작이 느리면서도 우아했다.
“오늘 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