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수진은 거울로 한해를 보며 말했다.
“아까 우연히 봤어. 어머님이 오빠에게 귀엣말하는 거.”
한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뭐라고 하셨어요?”
역시나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이라면 굳이 더 이상 캐고 싶지 않았다.
“눈 오는 날을 조심하래.”
“뭐라고요?”
“아까 어머니가 본 그 날 말이야. 내가 응급실에 실려 가고 네가 슬프게 울었다는 날. 밖에는 눈이 내렸대.”
“아…… 그런 거였구나.”
수진의 머릿속에도 어느 끔찍한 날의 전경이 그려지는 듯했다.
“한참 길게 말씀하시던데요?”
딱딱해졌던 한해의 표정이 풀렸다.
“그래. 그 뒤에 한 얘기가 사실 더 중요하지. 어머니가 그러더라. 네가 어릴 때도 안 쓰던 존댓말을 왜 쓰냐고.”
심각해졌던 수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나 말 편하게 해도 돼요?”
“처음부터 그러라고 했잖아.”
“그때는 너무 어색해서……. 좋아요. 아니, 좋아. 그럼 이제 옛날처럼.”
수진은 자동차 기어봉에 얹혀 있는 한해의 손을 자기 손으로 감쌌다.
“눈 오는 날엔 우리 집 밖에서 아예 안 나가는 거야.”
이번에는 한해가 웃음이 터졌다.
“그게 뭐야. 그런 식으로 피할 수 있냐? 집에서 치킨을 먹다가 닭뼈가 목에 걸릴 수도 있는 거고. 갑자기 지진이 날 수도 있고. 재수가 없으려면 끝도 없어.”
“듣고 보니 그건 그러네. 내가 아는 사람은 화장실에서 미끄러져서 골반뼈가 나간 사람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아까 어머니가 본 그날은 너 때문에 생긴 비극이 아니라 너와 헤어졌을 경우에 생긴 비극이었을 거야. 이렇게 함께 하니까 괜찮아.”
“그래도 조심해. 까불지 말구.”
“아쭈? 오빠한테 까불지 말라고? 너 갑자기 막 편해졌다?”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그래. 이 정도면 오랫동안 오빠 오빠 해줬지.”
“오빠님. 해봐.”
“그건 나중에 예쁜 짓 하면.”
“예쁜 짓? 어떤 거?”
“이런 거.”
수진은 운전하는 한해의 뺨에 천천히 입맞춰주었다. 그리고 귀엣말을 속삭였다.
“사랑해.”
그녀의 고백은 감각을 일깨우는 번개와도 같았다. 오감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감지하지 못하고 있던 현재 상황이 눈과 귀로 들어왔다.
빗줄기는 제법 거세져서 와이퍼가 부지런히 물을 쳐내야 했다.
흐린 하늘은 일찍 어두워졌고 차가 뜸한 도로는 고요했다.
“나도 사랑해. 사랑해, 수진아.”
그리고 한 번 더. 또다시.
“죽음도 무섭지 않을 만큼 사랑해.”
그는 고속도로 오른쪽으로 빠지는 졸음쉼터로 차를 세웠다.
“갑자기 왜?”
“참을 수가 없어서.”
수진의 몸 위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 또한 감각이 선명할 대로 선명해져 있었다.
차를 두들기는 빗소리, 창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 그리고 제목을 알 수 없는 재즈 음악까지 온통 로맨틱한 것들 뿐인데.
이 남자가 또 감당 못할 달콤함을 퍼붓고 있네.
그녀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며 내려앉았고, 바로 그 순간 입술에 달달한 촉감이 내려앉았다.
스며든다. 모든 감각이 촉감으로 치환되어 스며든다. 빗소리도 음악도 맞닿은 가슴의 심장박동도.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거야. 네가 걱정하는 그 날은 오지 않아.”
잠시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남자의 낮은 음성이 그녀의 귀에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이 오는 날엔 밖에 나가지 않고 너랑 붙어 있을래.”
“응. 눈 오는 날은 외출금지야. 하루 종일.”
“그럼 하루 종일 할 게 없겠네. 이렇게 꼭 붙어 있는 것 말고는.”
다시 키스. 그의 손은 조금 더 용감해졌고 그녀는 막을 생각이 없었다.
“이번 겨울에는 매일 눈이 왔으면 좋겠다.”
죽음의 예언을 애써 부정하기라도 하듯 한해는 거침없었다.
수진 역시 그랬다.
맹세컨대 이토록 오래 짜릿함이 지속되었던 경험은 없었다.
나는 비극을 거부한다. 공포에 질려 도망칠 생각도 없어. 차라리 지금 더 사랑할래.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에 젖어드는 대지를 곁눈질로 보면서.
*
기사가 운전하는 차로 출근할 때면 뒷자리에서 업무를 보거나 눈 감고 명상을 했지만, 직접 운전을 할 때면 비슷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서울의 아침은 늘 바쁘다. 테헤란로는 특히 더 바빠 보인다.
서울 한복판에 왜 먼 나라 이란의 수도 이름을 딴 도로가 있는 걸까? 그것도 비행기 활주로마냥 넓은 대로가.
귀찮아서 검색을 하진 않았는데, 엉뚱하게도 야화와 상담을 하며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선생님은 혹시 아세요? 왜 테헤란로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야화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하고 우리나라 서울하고 자매결연을 맺었는데 기념하는 의미로 이름을 붙였을 겁니다.”
“와, 그런 걸 어떻게 다 아세요?”
“제가 취미로 글을 쓰거든요. 그래서 이것저것 쓸데없이 아는 게 많아요.”
“쓸데없진 않잖아요.”
“몰라도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으니까요. 그런 걸 쓸데없다고 하죠.”
“그런 식이라면 사랑도 쓸데없는 거네요. 사랑 같은 거 안 해도 일상생활에 지장은 없으니까.”
강의 말에 야화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많이 편안해 보이세요.”
“그렇습니까?”
“저와 상담한 지 두 달이 넘었는데 오늘이 제일 편안해 보이세요.”
강은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주 금요일에 완전히 정리가 되었어요. 숙려기간도 다 끝났고 이제 수진이와 완전히 남남이 되었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많이 힘드셨겠어요.”
“주말에는 아무래도 쓸쓸해지더군요. 지금은 한결 낫네요.”
“왜 나아졌을까요? 며칠 시간이 흘러서?”
“그것보다는……. 출근을 하면서 사람들도 보고 뭔가 바쁜 모습들을 보니 저도 활기가 도는 것 같습니다.”
야화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그래야죠.”
“오늘은 임원회의가 마침 없어서 이렇게 아침에 상담을 할 수 있지만요. 회사에 가서 바쁘게 일하다 보면 기분은 더 나아질 것 같습니다.”
“꼭 일 때문인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레이나 씨하고는 요즘 어때요?”
“지난번에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옛날 여친 같기도 하고, 여자 사람 친구 같기도 하고.”
“레이나 씨와 내연관계를 유지했을 때는 남녀간의 감정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도리어 그런 감정도 사라진 걸까요?”
“아니요. 그 반대예요.”
강은 오래 동안 자신의 마음을 헤집어보며 고민했던 결론을 신중하게 내놓았다.
“사람들이 그런 고민을 많이 하잖습니까. 이 사람은 내 인연일까 아닐까. 레이나와 오랫동안 알고 지내다가 깨달았어요. 인연이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지금 나에게 소중한 사람, 나를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이 인연이구나.”
야화는 마음이 흐뭇해졌다.
“계속해보세요. 그래서요?”
“레이나가 그런 사람이에요. 저는 그동안 그런 대접을 그녀에게 해주지 못했지만.”
“그분이 이 말을 들으면 정말 좋아하겠네요.”
“그렇다고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아닙니다. 아직 수진이 생각이 많이 나기도 하고.”
“질투심이나 배신감은?”
“많이 덜해졌어요.”
“그럼 이제 슬픔의 감정만 치유하면 되겠네요. 좀 어떤가요?”
강은 비스듬하게 닫혀 적당한 빛만 허락하고 있는 블라인드로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블라인드를 좀 걷어봐도 좋을까요?”
야화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강은 창 앞으로 가서 블라인드를 끝까지 걷었다. 찬란한 햇살이 그의 몸을 껴안았다.
늠름한 체격과 조각 같은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동안 너무 해를 피하고 살았나 봐요.”
그는 시린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덕분에 피부는 좋아졌겠지만.”
농담까지 하는 강을 보며 야화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중요한 환자 한 명을 잃게 되겠구나.
.
.
.
레오는 이미 음원을 발표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지만 소월은 처음이었다.
“와, 진짜 올라갔네?”
그녀는 컵라면을 건져 먹으며 감탄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PC방. 둘의 듀엣곡 음원이 막 등록된 음원사이트 화면을 보고 있었다.
“반응은 어때?”
“첫날에 무슨 반응이야.”
“보통 첫날에 반응이 제일 많이 오지 않아?”
“그건 잘나가는 아이돌이나 그렇고. 우리가 기댈 게 뭐가 있냐. 기획사가 있어 팬클럽이 있어. 입소문밖에 없지. 노래 들어본 사람들이 좋다고 소문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힝. 노래는 진짜 좋은데.”
“그럼. 당연하지. 누가 만들었는데.”
레오가 거만한 표정으로 자기 어깨를 툭툭 털었다.
“어휴. 저 잘난 척.”
소월이 투덜거렸다.
레오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우리 서로 공약 하나씩 걸까?”
“무슨 공약?”
“우리 노래가 음원 차트 20위에 진입하면?”
“헐. 그게 가능하냐?”
“그러니까 공약 걸자고.”
“지금 마음 같아서는 네 소원 다 들어줄 수 있어.”
“내 소원이 뭔 줄 알고.”
“뭐든.”
“정말 약속하는 거지?”
“응. 너도 걸어야지.”
“난 너한테 프러포즈할래.”
소월은 들고 있던 컵라면을 놓칠 뻔했다.
“뭐라고? 프러포즈? 결혼할 때 하는 거?”
“왜? 비혼주의자야?”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 말을 무슨 PC방에서 라면 먹을 때 하냐.”
“윤소월. 내가 지금 프러포즈했냐? 우리노래가 음원차트 20위에 들면 하겠다는 거지.”
“어차피 들 일은 없겠지만……. 그래. 거절도 내 자유니까.”
“그거야 뭐 알아서 해.”
“그런데 레오 너 웃긴다. 사귀지도 않고 무슨 프러포즈냐?”
“사귀고 있잖아.”
소월은 컵라면을 내려놓았다.
“안 되겠네. 레오. 너 자꾸 까불어.”
그녀는 발끈했지만 목소리가 그리 단호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좁은 연습실에서 매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서로의 체취가 익숙해지고 가끔 건반 위에서 손이 스치기도 했다. 몸이 맞닿을 때면 흠칫 놀라기도 했다.
이번에 작업한 곡이 순도 백 퍼센트의 러브송이기에 서로를 보며 노래할 때면 없는 감정도 끌어올려야 했고, 적어도 노래하는 동안에는 레오가 연인이라고 감정이입 하기도 했다.
예전부터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던 레오는 더했다. 종종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키스라도 할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하기도 하고 밥을 먹으러 갈 때면 차 조심하라며 그녀를 쓱 안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그녀도 혼란스러웠다.
정말 이 녀석에게 마음이 생긴 걸까?
“윤소월. 너야말로 왜 까불어. 사랑 앞에서.”
레오는 그녀의 턱을 손가락으로 받쳤다.
“너…… 뭐하는 거야.”
“싫으면 거부해봐.”
그는 언제든 거부 의사를 밝힐 시간을 준다는 식으로, 아주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고 입술은 열망을 물고 있었다.
그녀는 몇 초간의 순간에 묻고 또 물었다.
‘윤소월. 너 괜찮아? 감당할 수 있어?’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툭 닿았다.
항해사로 일하면서 딱 한 번 선박이 다른 배에 부딪친 사고가 난 적 있었다. 견습 기간에 벌어진 고참 항해사의 실수이긴 했는데 아주 살짝 부딪쳤는데도 철렁하는 느낌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지금도 그렇다. 이건 사고다.
이 녀석. 어릴 때 내가 머릿결이 좋다고 매일 쓱쓱 만지고 놀던 꼬마였는데. 언제 이렇게 커서 남자가 되어버렸지?
입술을 겹친 채 가만히 있던 그는 그녀의 입술을 열려고 했다.
정신이 번쩍 든 소월이 몸을 뒤로 빼며 그를 밀어냈다.
“뭐하냐?”
“몰라서 물어?”
“여기 PC방인 거 안 보여?”
“다들 자기 게임하느라 정신없는 거 안 보여?”
정말 그랬다. 다들 키보드가 부서져라 두드리며 화면을 볼 뿐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방에서 스킨십하고 막 그래도 되냐?”
“안 된다는 법 있어?”
정말 그랬다. 금연이라는 표시는 붙어 있었지만 뽀뽀 금지라는 표시는 안 보였다.
“그래도 더 이상은 안 돼.”
“왜?”
“나 금방 라면 먹었잖아!”
레오의 작은 얼굴 절반이 웃음으로 변했다.
“귀여워, 윤소월.”
그는 그녀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다시 다가왔다.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말은, 여기까진 괜찮다는 거지?”
소월은 부정하지 못했다.
배가 다가온다. 쿵 하고 부딪치겠지. 내 심장도 쿵 떨어지겠지.
.
.
.
“많이 먹어. 모자라면 얼마든지 더 시키고.”
레이나는 불판 위에 사랑스럽게 정렬한 꽃등심을 보며 호탕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소월이 꾸벅 인사하자 레이나는 레오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넌 안 감사하냐?”
“나야 늘 누나님에게 감사하면서 살지. 누나님이 아니었다면 내가 계속 음악을 할 수 있었을까?”
“알면 다행이고.”
“그래서 말인데 이왕 이렇게 동생 응원해주는 거 동생이 잘되어야지 더 보람 있지 않겠어?”
레오는 능청스러운 말을 잘도 했다.
“아이돌 하겠다고 기획사에서 고생하다가 개털로 나왔지. 혼자 음악 하면서 음원 내봤자 몇 년째 반응도 없지. 군대까지 갔다 와서 마지막 도전이라고 지금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이번에도 안 되면 이건 천하의 레이나에게도 불명예 아니야?”
“너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냐? 불안하다.”
“누나 인플루언서잖아. 그치?”
“인플루언서의 정의가 뭔데?”
“누나 SNS 팔로워들 엄청나잖아. 엔간한 연예인들보다 훨씬 더 많잖아.”
사르르 녹는 꽃등심에 감동했던 소월은 느닷없는 팔로워 타령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음원 홍보 좀 해줘라.”
소월은 다 씹지 않은 고기를 꿀꺽 삼켰다.
레이나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웬일이냐? 그동안은 홍보해주겠다고 해도 신세 지기 싫다고, 자기 힘으로 해보겠다며 도도하게 거절하던 녀석이?”
레오는 맥주를 호기롭게 마시고 컵을 탁 내려놓았다.
“사랑의 힘?”
듣고만 있던 소월이 나섰다.
“야. 너 언니 앞에서 무슨 망발이야.”
“뭐가 망발이야. 내가 없는 말 했어?”
레이나는 레오와 소월을 번갈아 보았다.
“요 녀석들…… 왜 둘이 말이 달라?”
“아니에요, 언니! 우린 그냥 누나 동생, 친구 사이예요.”
소월이 부인했지만 레오는 거만하게 소월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우리 자기 왜 그래? 자기는 친구 사이에 막 뽀뽀하고 그래?”
레이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졌다. 귀여운 녀석들. 알았어. 빡세게 홍보 들어간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소월의 귀에 레오가 속삭였다.
“공약 잊지 마.”
좋다. 달달한 속삭임이 좋고 입에서 녹는 고기도 좋고 시원한 맥주도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월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솔로로 꽤나 오래 살았던 그녀는 커플 데이트에 낀 처량한 기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
“언니. 고기 좀 드세요.”
그녀는 레오와의 달달함은 뒤로 미루고 레이나에게 신경 쓰려고 했다.
레이나는 고기를 한 점 먹고는 소월을 빤히 응시했다.
“우리 동생 복도 많지. 이렇게 착한 아가씨를 여친으로 딱!”
소월은 이번에는 여친이라는 표현에 발끈하지 않았다.
“나 신경 쓰지 말고 둘이 알콩달콩 고기 먹어.”
레이나가 그렇게 말할수록 소월은 더 미안해졌다.
“아니에요, 언니. 저는 언니랑 더 친해지고 싶어요.”
“그럴 틈이 없을 텐데. 왜냐하면 나도 누가 오기로 했거든.”
그 말에 소월과 레오 둘 다 눈을 번쩍 떴다.
“너희들하고 아주 인연이 깊은 사람이야. 한 번도 본 적 없겠지만 연결되어 있다고나 할까? 내가 얘기해준 적 있을 텐데…….”
알쏭달쏭한 레이나의 말이 끝날 때쯤 식당 문이 열리고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뚝 솟은 키에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돈된 헤어스타일, 그리고 완벽한 비즈니스 슈트까지.
그의 모습은 식당에서 가장 우월해 보였다.
레이나가 손을 들어 강을 불렀다.
미소 띤 얼굴로 다가온 강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강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