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주차장에 들어선 강은 시동을 끈 뒤에도 잠시 차 안에서 감정을 추스른 다음 내렸다.
“이런 우연이.”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레이나가 맞은편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반가워요, 윗집 아저씨.”
밝게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이 축 처져 있던 그의 감정을 풍선에 매단 듯 끌어올렸다.
그는 레이나 앞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안아보는 건 괜찮다고 했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빠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여?”
강은 대답 대신 그녀를 와락 안았다. 체격이 훨씬 컸음에도 그가 그녀에게 안기는 느낌이었다.
“뭐야. 동정심 유발 작전이야?”
“불쌍하긴 하냐?”
“왜 이래. 사람 마음 약해지게.”
“조금만 이러고 있어줄래?”
레이나는 낯선 감정에 흔들렸다.
당신, 그 냉랭하고 안하무인 이강 맞아? 예전에 수진 씨에게 상처받았을 때와는 반응이 달라.
그저 안아달라고…… 그 정도는 언제든 해줄 수 있지.
레이나는 그의 등을 쓸어주었다. 오래오래.
*
여름의 열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차고 맑은 가을 아침이 찾아왔다.
직접 운전을 해서 회사로 출근하던 강의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힐긋 액정을 확인하니 미리 적어놓은 스케줄 메시지가 떠 있었다.
‘숙려기간 종료일.’
그는 신호가 바뀐 줄도 모르고 멍하니 핸드폰을 보다가 뒤차가 경적을 울리고 나서야 차를 출발시켰다.
다시 신호 때문에 차가 멈췄을 때 수진에게 메시지를 썼다.
-축하해. 오늘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네. 그는 전송버튼을 차마 누르지 못하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부회장님.”
“아침에 일정 뭐가 있지?”
“임원회의 전까지는 스케줄 없습니다.”
“그럼 임원회의 30분만 미뤄줘.”
“네, 부회장님.”
비서와 전화를 마친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냐. 아침부터.”
“지금 잠깐 시간 괜찮으시면 찾아뵙겠습니다.”
“한 달 만에 전화해서는 한다는 소리가 대뜸 찾아오겠다고? 미리 약속도 안 잡고?”
“바쁘시면 비서 통해 약속을 잡겠습니다.”
“와.”
이태화 회장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강은 아버지의 이런 태도가 익숙했기에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그대로 이태화 회장을 찾아갔다.
한 달 전 이혼 의사를 밝힌 뒤 왕래도 연락도 없었던 부자지간이었다.
경영자로서의 업무는 전자 결제를 통해 이루어졌고, 회사 행사에는 비서들끼리 일정을 조율해 둘 중 한 명만 참석하는 식으로 마주치지 않게 했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나를 아버지로 여기긴 하냐?”
“아직도 노여움이 많으시군요.”
“노여움이라기보다는 실망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지.”
“오늘 더 실망하시겠네요.”
강은 머뭇거리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수진이하고 이혼했습니다.”
무심한 척 앉아 있던 이 회장의 표정이 꿈틀 움직였다.
“한 달 전에 합의 이혼했고 오늘 숙려 기간이 끝났습니다.”
강은 불호령이 떨어질 일을 각오했다. 지난번처럼 아버지의 손이 날아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게 고작이었다.
뭐지 이 반응은? 강은 당황해서 뒤에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그래. 수진이는 홀가분해 하더냐?”
강은 귀를 의심했다.
“홀가분이요?”
“수진이가 그렇게 이혼하고 싶어했다면서?”
“그건 그런데…… 아버지는 이혼을 극구 반대하셨잖습니까?”
“자식 이기는 부모 있냐?”
보통의 아버지였다면 드디어 변했다고 좋아했겠지만, 강은 아버지의 태도 변화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뭔가 있다. 이런 상황을 모조리 뒤집어버릴 뭔가를 꾸미고 있어.
“법적으로는 남남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짧게나마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던 사람이다. 인연을 끊지 말고 도와줄 일 있으면 도와주고 챙겨주고 해라.”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부처님 같은 시아버지로 오인할 태도였다.
강의 의심은 점점 더 부풀어 올랐다.
“왜 이러세요? 또 뭘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 회장은 가만히 강을 마주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10초도 못 버티고 눈을 피했겠지만 강은 물러서지 않았다.
“요즘 들어 내가 너무 물러 보였나 봐. 알아서 잘들 할 줄 알았는데.”
이 회장의 느릿느릿한 말투는 공포를 자아냈다. 차라리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다면 이토록 찜찜하지는 않았을 텐데.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려므나. 이미 그렇게 해버렸지만.”
이 회장의 집무실을 떠나는 강의 발걸음은 끈끈이가 달라붙은 듯 무거웠다.
뭔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어.
역시나 문이 닫힐 때쯤 이 회장의 혼잣말이 들렸다.
“선택의 여지를 줘서는 안 돼.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강은 돌아서서 아버지를 다그쳤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선택에 대한 말이었지, 아마?”
“그러니까요. 선택의 여지를 줘서는 안 된다는 말.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야. 아예 선택을 할 수 없다면 잘못된 선택을 할 일도 없지.”
이 회장은 뱀을 연상케 하는 인상으로 웃었다.
“걱정 마라. 아버지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아버지. 제발 이제 제 인생에 관여하지 말아주세요.”
강은 진심으로 부탁했다.
이 회장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걸맞게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은 쇼팽의 야상곡.
숙희는 주위를 둘러보며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휴, 무슨 이런 데를 데리고 와서. 편하게 우리 식당에서 밥이나 먹지.”
사토시는 면박을 주는 대신 차분하게 말했다.
“그놈의 생선구이. 지겹지도 않아? 가끔 이런 데 와서 눈 호강도 하고 입 호강도 하고 그래야지.”
“나는 신기하고 좋은데 다른 손님들한테 내가 민폐…….”
숙희는 멋진 옷을 입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턱짓했다.
“다들 봐요. 얼마나 근사하게 차려입었는지. 나같이 늙고 초라한 늙은이는 이런 데 오면 안 된다니까. 안 쫓겨난 게 다행이지.”
“자네를 쫓아내면 내가 이 레스토랑을 쫓아낼 텐데?”
“그게 무슨 소리래요?”
“이 식당이 있는 건물이 내 건물이라는 뜻이야. 감히 누가 누굴 쫓아내.”
“좋겠네요. 돈이 썩어 넘칠 만큼 많아서.”
사토시는 메뉴판을 숙희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최고급 스테이크 메뉴가 정리되어 있는 메뉴판을 한번 쓱 본 다음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니까 오빠가 알아서 시켜줘요.”
“그래도 좀 봐봐. 이런 거 배우는 것도 사는 재미잖아.”
사토시는 그녀 옆으로 의자를 당겨 앉은 다음, 메뉴를 하나하나 손으로 짚어가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한참 설명을 듣던 그녀가 감탄했다.
“외국물 많이 먹은 건 알았지만 어쩜 이런 걸 다 안대요?”
“별것도 아니야. 고르긴 했어?”
“나는 이걸로 먹어볼래요. 림아이 스테이크?”
“립아이 스테이크.”
“아하. 그거랑 으깬 감자, 구운 야채.”
“탁월한 선택이야.”
“잠깐만요. 이게 2만 원이 아니라 20만 원? 아이고!”
“호들갑 떨지 말고 맛있게 먹어.”
사토시는 종업원을 불러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샴페인도 한 병 주문했다. 숙희가 샴페인 가격을 안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창밖으로 짙어져가는 어둠과 그만큼 더 반짝이는 불빛들이 춤추듯 움직였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숙희가 중얼거렸다.
“좋다.”
“진작 좀 다니자니까.”
“그이 장례 치르느라 요즘 뭐 정신이 있었나요.”
“그게 벌써 두 달 전인데.”
“30년을 넘게 같이 산 사람을 보냈는데 벌써 두 달이라니요.”
숙희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지만 사토시에게는 묵직하게 다가왔다.
“내가 마음이 너무 급했나 보다. 미안해.”
“뭐가 그리 급한데요?”
“우리는 이팔청춘이 아니야. 남은 세월이 별로 없다고.”
“그 말도 맞는데요, 그래도 이팔청춘처럼 대해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인걸 오빠는 알잖아요. 내가 젊었을 때 얼마나 이뻤는지.”
“이뻤지. 아주 이뻤지. 올리비아 핫세처럼.”
“참나. 농담으로 했는데 그렇게 진담처럼 말하면 어떡해요. 무안하게.”
“농담 아니야. 지금도 이뻐. 내 눈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씀을 하고 이러실까?”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서 그래?”
숙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감정을 잘 다스리던 사토시는 화를 낼 뻔했다.
“아니 나이가 몇 살인데 자기 생일도 못 챙겨!”
“엥? 오늘이…….”
저만치에서 기다리던 직원에게 사토시가 눈짓했다.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탐스러운 생크림을 뒤집어쓴 케이크를 들고 왔다. 눈덩이처럼 하얀 케이크에 불붙은 초 여섯 개가 꽂혀 있었다.
“어머머…….”
숙희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직원이 케이크를 놓고 한 발 물러서자 사토시는 손가락으로 생크림을 쓱 떠서 숙희의 코에 묻혔다.
“생일 축하해.”
“아니 이 아까운 크림을 왜 사람한테 묻혀요?”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사토시는 천연덕스럽게 숙희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안았다.
“아이고, 왜 이래요 사람들 보는데?”
“저기 봐.”
사토시가 가리킨 곳에는 직원이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자, 두 분 여기 보시고요!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직원은 아직 인화가 안 된 폴라로이드 필름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꾸벅 인사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 식사도 곧 준비해드리죠. 맛있게 드십시오!”
숙희의 얼굴에선 얼떨떨한 표정이 가실 줄 몰랐다.
“아니 이걸 다 인걸 오빠가 준비한 거예요?”
“그럼 누가 했겠어?”
잠시 뒤 그는 선명하게 인화된 폴라로이드 사진을 숙희에게 건네주었다.
둘은 30년쯤 함께 산 노부부 같았다. 숙희의 코끝에 얹힌 하얀 크림도 선명했다.
“재미있게 나왔네요.”
하염없이 사진을 보고만 있는 그녀를 사토시가 다그쳤다.
“아 뭐해. 얼른 안 불고.”
케이크 위의 초가 한참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까워서…… 불고 나면……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것 같아서요.”
“빨리 불어!”
결국 사토시가 큰 소리를 내고 나서야 숙희는 초를 껐다. 그러고도 케이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마 만이야?”
“뭐가요?”
“이렇게 생일 파티 해본 거.”
“몰라요. 기억 안 나요.”
“이제부터는 매년 할 거야.”
“아휴, 애들도 아니고 무슨 생일 파티예요.”
“애들 때 못 했잖아.”
“그건 좀 그래요.”
숙희는 배시시 웃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사토시는 숙희에게 나이프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너무 힘줘서 자르려고 하면 오히려 나이프가 잘 안 먹어. 그러니까 이렇게 살살…….”
“이렇게요?”
처음에 쑥스러워하던 숙희는 재미를 찾은 듯 웃으며 식사를 했다.
그들은 무려 40년 전, 핸드폰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의 연애를 추억했다.
웃고 떠들면서 스테이크를 다 먹었을 때쯤 숙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가만있어보자. 내가 이렇게 근사한 데를 왜 왔을까?”
사토시의 얼굴에서 한줌도 남김없이 웃음이 사라졌다.
“그게 뭐가 중요해. 또 올 건데. 매일같이 좋은 데 근사한 곳에 데리고 다닐 거야.”
몇 조각 남지 않은 스테이크를 포크로 툭툭 건드리던 숙희가 중얼거렸다.
“오빠도 다 알죠?”
사토시는 이를 지그시 물었다.
“하긴 오빠는 워낙 똑똑한 사람이니까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지.”
“숙희야…….”
“언제 알았어요?”
“내가 그려준 그림을 기억 못 할 때부터.”
“그랬구나. 그런데 왜 말을 안 했어요?”
“처음에는 단순히 건망증인가 했어. 그리고 확신이 들었을 때는…… 너무 충격이 클 것 같아서 언제쯤 얘기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어. 오늘 얘기하려고 했는데…….”
“충격은 뭐…….”
“자네는 언제 알았어?”
“나도 몇 달 안 됐어요.”
“진수도 알아?”
“아니요. 좀 천천히 말하려고요. 병원에 갔더니 몇 년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몇 년…… 이 사람아. 다들 여든 살 아흔 살까지 사는 세상인데…….”
“미련 없어요. 인생이 좀 모질었어야지.”
사토시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루를 열흘처럼, 일 년을 십 년처럼 살자.”
숙희는 슬그머니 손을 뺐다.
“그러지 말아요. 치매 환자 뒤치다꺼리하면서 말년 보낼 셈이에요?”
“아니. 그럴 생각 없어. 나는 사랑하는 여자 곁에서 말년 보낼 거야.”
숙희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왜 이래요. 똑똑한 사람이…….”
“똑똑하긴. 멍청하게 살았지. 이제는 그렇게 안 살 거야. 절대로.”
그는 다시 숙희의 손을 잡았고, 그녀가 뿌리치려 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숙희의 주름진 눈가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후식을 갖고 온 직원은 방해하지 않고 흐뭇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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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간.
시골 마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영국 세단이 해안도로에 등장했다.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호텔 주차장에 멈춘 차에서 한해와 수진이 내렸다.
누가 봐도 연인의 모습이었지만 둘은 따로 숙소를 잡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파도는 쉼 없이 밀려들고, 푸른 하늘에 오렌지 색 노을이 섞여들고, 바다를 가로지르는 고기잡이배들은 환하게 등을 밝히는 길.
수진은 한해의 손을 꼭 잡고 방파제 옆길을 걸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내려오자고 해서.”
“좀 갑작스럽긴 했지만, 내려오니까 나도 너무 좋은데?”
“나는 그냥 좋다고 말하기엔 가슴이 너무 꽉 차 있어요.”
“가슴이 꽉?”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 그 하나하나가 다 막…… 벅차고 슬프고 두렵고 동시에 두근거리는…….”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나?”
“오늘이 그날이에요. 법적으로 자유의 몸이 된 첫날.”
한해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갑자기 수진에게 연락이 왔다. 고향에 1박 2일로 내려갔다 올 수 있겠냐고.
금요일인 오늘, 급하게 오후 반차를 내고 함께 내려온 길이었다.
4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그녀는 갑작스러운 여행을 제안한 이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고, 한해도 묻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어.”
“캐묻지 않고 참아줘서 고마워요.”
“강이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있겠구나.”
“성격상 그렇겠죠. 따로 연락 온 건 없었지만.”
한해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더 힘주어 손을 잡고 걸을 뿐이었다.
식당들이 줄지어 있는 곳은 정박한 어선들 건너편에 있었다.
그들은 같은 감상에 젖었다.
노을 지는 항구의 풍경만큼 아름다운 풍경이 또 있을까?
아담한 등대 아래로 방향을 바꿔 지나가는데 기다렸다는 듯 불이 켜졌다.
한해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기억나? 우연히 여기서 마주쳤을 때 한참 걸었잖아. 지금처럼.”
“기억하죠. 그때는 언덕으로 올라갔다가 여기로 내려왔죠.”
“그날도 지금처럼 마침 등대에 불이 들어왔어.”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그때 나는 궁금했어. 하필 지금 등대에 불이 들어온 게 좋은 징조일까? 그린라이트일까, 레드라이트일까?”
“우리 오빠 별 생각을 다했네.”
수진은 미소 띤 얼굴로 등대를 쳐다보았다.
조금씩 짙어지는 밤하늘처럼 은은한 음성이 그녀의 귀를 울렸다.
“수진아.”
그녀는 이별과 재회를 거듭하고 마침내 떳떳하게 앞에 선 남자를 마주 보았다.
“바다. 하늘. 노을. 등대. 그리고 어린별들. 이것보다 완벽한 조건이 있을까?”
조건? 무슨 조건?
그녀는 예전에 키스하려던 한해를 밀어내며 자신이 했던 말을 잊고 있었다.
‘첫 키스를 이렇게 하려고요? 나는 첫 키스는 조금 더 로맨틱했으면 하는데. 뭐 두 번째나 세 번째, 혹은 167번째 키스라면 지금도 너무 좋을 것 같아. 하지만 첫 키스잖아요.’기억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의 다음 동작이 알려주었으니.
그는 눈으로 그녀의 눈을 사로잡고, 손끝으로 그녀의 턱을 결박했다.
“오빠…… 잠깐…….”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위로 포개졌다.
촉촉하게 시작되어 매끈하게 이어지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감각의 소용돌이.
완벽한 황홀. 14년이 걸린 첫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