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55화 (55/92)

“소송…… 하지 마.” 55화수진은 핸드폰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소송 준비는 잘돼가?”

“우리 변호사가 내일 소장 접수한대.”

“그렇군. 그전에 잠깐 만날까?”

“내일부터 서로 소송할 사이인데 오늘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소송…… 하지 마.”

위잉…… 귀가 먹먹해지는 느낌에 수진은 질끈 눈을 감고 침을 삼켰다.

“뭐라고?”

“이혼소송 하지 말라고.”

“그게 무슨 뜻이야?”

“합의해줄게.”

서서 전화를 받던 수진은 회의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쓰러졌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뀌었어?”

“갑자기 아닌데.”

강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잠깐 볼 수 있을까?”

“그래. 만나서 들어봐야 할 얘긴 거 같네.”

“점심때 내가 그쪽으로 갈게.”

통화를 마친 뒤에도 수진은 얼떨떨한 기분에 잠겨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혹시 강에게 안 좋은 일이라도?

.

.

.

걱정은 기우였다. 회사 근처 카페로 찾아온 그의 얼굴은 꽤나 밝아 보였다.

“정말 오랜만에 좋아 보인다. 당신 얼굴.”

“고마워. 당신한테 좋은 소리 듣는 것도 오랜만이네.”

강은 잔잔하게 웃으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진은 그의 시선을 피하거나 밀어내지 않았다.

이 남자가 이렇게 그윽하게 바라보는 일이 다신 없을지도 모르니까.

“우리 와이프는 언제 봐도 예쁘네.”

다정한 말투에 수진은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우리 와이프라니…… 그러네. 나 아직은 당신 아내 맞네.

말투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소 긴장했던 그의 시선은 그저 한없이 사랑스러운 존재를 흠모하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1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녀를 봐주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수진은 홀린 듯 중얼거렸다.

“당신의 이런 다정함은 나에게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

“칭찬인지 뭔지 모르겠다.”

“누군가 당신의 다정함을 듬뿍 받고 고마워할 사람이 있을 거야. 분명히.”

“그게 너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강은 과거형으로 말했다.

“이런 푸념하려고 불러낸 건 아닌데.”

그는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가 다시 진지해졌다.

“며칠 동안 밤낮으로 고민해봤어. 아니, 그전부터…… 네가 집을 나간 뒤부터 고민했지. 그 마음을 다 전하려면 꼬박 며칠 동안 토로해야 할 테고.”

“들어줄 수 있어.”

“아니야. 결론만 말할게. 너의 껍데기라도 잡으려 했던 마음…… 집착…… 이제 버리기로 했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수진은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부인하고 싶었나 봐. 아니면 하루라도 더 우리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을지도.”

“우리가 부부관계를 정리한다고 인연이 사라지는 건 아냐.”

“바보 같은 소리.”

강은 깊이 심호흡을 했다.

“요즘 한해 형하고 만난다고 들었어.”

“알고 있구나.”

“너도 예고를 했잖아. 한해 형도 그러더라.”

“당신이 한해 오빠를 만났다고?”

“응. 너한테는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어. 내가 직접 얘기하겠다고. 그래서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야.”

수진은 뭉클해졌다.

지금 그녀 앞에 있는 사람은 최악의 남편, 불안한 존재 이강이 아니었다. 성숙하고 침착한 어른이었다.

“같은 사람이 맞아?”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속마음을 강은 한 번에 알아들었다.

“아니. 같은 사람 아니야. 이제야 정신을 차린 거지.”

그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진심으로 사과할게. 거짓으로 너의 사랑을 얻고 결혼했던 일, 미안해. 외도를 저지르고 도리어 당신을 의심하고 집착하고…… 최악의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해. 나는 당신의 남편이 될 자격이 없었고, 지금 당신을 잡을 자격도 없어. 인정해.”

그의 눈에 잔잔한 눈물이 고였다.

“내가 너무 늦었지?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 너 시간 될 때 같이 법원에 가서 이혼서류 제출하자.”

수진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빠…….”

남편이 아닌 오빠라는 표현이 강을 흔들었고 고여 있던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내 얘기는 끝났어. 더 할 얘기 없으면…….”

눈물을 보이기 싫었던 모양인지 그는 급히 일어났다.

젖은 눈에도 불구하고 싱긋 웃으려 했지만 작별 인사도 제대로 맺지 못했다.

“건강하게 잘…….”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가 그냥 돌아섰다.

수진은 이토록 강에게 마음이 쓰였던 적이 없었다.

좋은 사람이었구나. 부부의 인연이 아니었을 뿐이지. 어쩌면 나에겐 과분한 사람이었을지도.

이 사람 괜찮을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제발…….

점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애타게 보고만 있던 수진이 달려갔다.

“여보.”

그녀는 한 번도 쓴 적 없는 호칭으로 그를 불러 세웠다.

우뚝 멈춘 그는 되돌아보지 않았고 수진이 앞으로 가서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기어코 수진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미안해. 같이 살면서 몇 번 안아주지도 못해서.”

“아냐. 당신은 나한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 건 잘못이 아니니까. 그건 운명이니까.”

왜 그런 말을 해…… 차라리 날 비난하지.

수진은 가슴이 아파 미칠 것만 같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안아봐도 돼?”

“많이 늦었네.”

젖은 얼굴로 씨익 웃고 나서, 강은 그녀를 와락 안았다.

카페 안의 손님들이 보건 말건 둘은 그렇게 안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수진은 귓가를 적시는 그의 음성에 전율했다.

“내 사랑. 내 영혼. 나의 인생.”

아아…… 나는 이 목소리를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

“잠시나마 나의 아내로 있어줘서 고마웠어.”

그녀도 뭐라고 말을 해주려고 했지만 형언키 어려운 감정이 목구멍을 콱 막고 비키지 않았다.

한참 그녀의 등을 쓸어주던 그는 다시 떠나갔다.

혼자 남은 수진의 볼에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잘 지내요. 건강히. 법원에서 만나서는 울지 않도록, 나 조금 더 울다가 갈게.’거짓말처럼 창밖에도 빗방울이 스치기 시작했다.

온통 젖어버린 오후의 이별이었다.

*

“골드웰 보고서 읽어봤습니까? 이번에 KD 에너지 솔루션 관련해서 나온 거.”

SH 인베스트먼트 사무실. 팀장은 두툼한 보고서를 손에 들고 흔들었다.

“네. 봤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문을 내요?”

질책을 듣고 있는 사람은 한해였다. 사무실의 원래 분위기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질책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전혀 아니었다.

고작 팀원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소수정예 투자그룹 SH 인베스트먼트의 원칙이 그랬다.

직급,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존댓말을 쓴다.

상급자의 결제는 없다. 모든 투자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최종적으로 이루어진다.

팀장은 오직 매분기 실적만을 평가하고 전체적인 포트폴리오 비중을 조정할 뿐 팀원들의 매일 업무에 대해 지시하지 않는다.

팀장을 포함해 사무실내 누구든 다른 사람의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반대로 누구든 다른 사람의 이의에 대해 묵살할 권리를 갖는다.

팀장은 입사한 지 며칠 안 되는 팀원 강한해의 투자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중이었고, 이건 사무실에서 매일 벌어지는 흔한 풍경이기도 했다.

“현재 실적만 놓고 보면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게 맞겠죠.”

한해도 팀장의 이의 제기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다만 니켈 광산 두 곳에 공격적으로 투자했던 프로젝트들이 다음 분기부터 실적으로 나옵니다. 대대적인 주가반등을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한해가 관련된 자료를 팀장에게 건네자 팀장은 쓱 읽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투자가 있었어? 알겠어요.”

그게 끝. 한해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일을 시작했다. 매일 이런 식이었다.

업무는 바쁘고 늘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지만 대우는 파격적이었다. 기본급은 일반적인 투자회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소수 정예인 만큼 인센티브가 엄청났다.

입사 첫날 팀장이 간단하게 저녁을 함께 먹으며 이런 말을 했다.

“작년에 내가 받은 인센티브가 일반 은행의 행장 연봉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건 팀장님이라서 그런 거 아닌가요?”

“잘 모르시는 말씀. 작년 한 해에 내가 우리 사무실에서 인센티브가 제일 적었다는 거! 강한해 씨도 입사 전에 개인투자자로서 보여준 실적 정도만 내주면 연봉 몇 배의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퇴근은 이른 대신 점심시간은 따로 없었다. 밥을 먹으러 나가면 점심 장을 놓치게 되는 셈이어서 다들 간단한 음식을 배달시켜 먹으면서 일을 했다.

한해의 오늘 점심은 케밥.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딱 10분만 걷다가 올 생각으로 막 일어서려는데 폰이 울렸다. 강의 메시지였다.

-수진이 만났어.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한해는 고개를 갸웃하고 답장을 보냈다.

-아직 못 들었는데?-그래? 곧 연락하겠지. 합의해주겠다고 했어. 드디어…… 한해는 맥이 풀렸다.

이제 다 끝났다. 수진이의 발에 채워졌던 족쇄가 풀린다.

-고맙다, 이강.-수진이한테 잘해달라는 말도 웃길 거 같고. 형한테는 무슨 말을 해도 이상할 것 같아.-이해해. 그렇겠지.-또 볼 일이 없기를. 강은 야멸차게 메시지를 끊었다.

한해는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였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안 되겠지. 그리고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겠지.

-너의 건강과 건승을 응원할게. 형식적인, 그러나 진심을 담은 인사로 마무리했다.

한해 회사 밖으로 나와 근처 공원 벤치에 잠시 앉아 있었다.

이제 다 끝났다. 더 이상 서로 미워하고 경계하고 공격할 필요는 없다.

며칠 전에 강을 만났을 때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수진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일찍 전격적으로 합의의사를 밝힐 줄은 몰랐다.

왜 수진이한테 아직 연락이 없을까?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공원을 걷는 직장인들이 여럿 보였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커피를 마시며 걷는 사람들도 있었고, 몇몇은 혼자 생각에 잠겨 걷기도 했다.

수진이도 지금쯤 어딘가를 걷고 있을까?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가 없었던 긴긴 세월 그녀의 곁에는 늘 강이 있었으니까. 이번 이혼은 단순히 법적인 부부관계를 정리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긴 세월의 인연을 끊어내는 의식일 테니.

내가 모르는 감정들, 내가 간섭해서는 안 되는 감정들이 얼마나 많을까.

수진이가 충분히, 편하게, 마음을 정리했으면 좋겠어.

아무래도 오늘 저녁을 같이 먹기에는 무리겠어.

그는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강이한테 연락받았어. 강이도 그렇지만 너도 마음이 편치 않겠구나. 나 신경 쓰지 말고 충분히 마음 정리하고 연락해. 나는 언제나 널 기다리고 있으니까. 잠시 후 그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 수진아.”

“오빠…….”

그녀는 울고 있었다. 한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그는 이 순간마저도 고마웠다. 같은 하늘 아래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 울고 있는 그녀와 함께해줄 수 있다는 것. 언제든 그녀에게 달려가 어깨를 빌려줄 수 있다는 것.

“미안해요. 지금 뭐라고 말할 상태가 아닌데도…… 오빠한테 전화하고 싶었어.”

“응. 말하지 않아도 돼.”

“그냥 마냥 홀가분하고 좋을 줄만 알았는데. 강이 오빠한테 미안하고…… 걱정도 되고 그래요.”

“네가 좋은 사람이어서 그래.”

“아니. 나는 나쁜 사람이지. 나 때문에 다 벌어진 일들인데.”

“바보 같은 소리. 이건 누구의 책임도 아니야. 이제 와서 또 강이 탓을 하는 것도 무의미하고.”

“고마워요. 이런 상황까지 다 감내해줘서.”

“어디야?”

“회사 앞을 걷고 있어요. 좀 걸어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아서.”

한해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역시 그랬구나. 내 생각이 맞았어. 이쯤 되면 우린 텔레파시로 통하는 걸까?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무리겠지?”

“배려해줘서 고마워요.”

“너무 많이 울지 말고. 예쁜 눈 퉁퉁 부을라.”

“이미 부었어. 에휴. 나 회사 어떻게 들어갈지 모르겠어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서 컵을 눈에 대고 있어.”

한해의 현실적 조언에 수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좋다. 그녀의 웃음소리만큼 달콤한 소리는 세상에 없지.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휘리릭. 인생이 책이라면 새로운 챕터로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

“많이 드세요.”

강은 그릇에 곱창전골을 잔뜩 담아 건넸다.

“고맙다, 강아.”

어머니는 윗사람한테 그릇을 받듯이 굽신거렸다.

평생 아버지에게 얼마나 시달렸으면 이렇게 1년 365일 주눅이 들어 있을까.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강은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운 식당이 아니라 허름한 분위기의 곱창 맛집이었다. 어머니가 곱창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모시고 온 참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전골 국물을 떠먹는 어머니를 보다가 강이 물었다.

“입맛에 맞으세요?”

“응. 아주 맛있다.”

“얼마만의 외식이에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고 정신상태가 불안한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었다.

일주일 만에 처음 나왔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거야. 한 달 만이라고 해도 놀랍지 않지.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가 나온 뒤 어머니는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아예 외출을 하지 않고 집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아마 내 결혼식이 어머니의 마지막 외출이 아닐까?

“엄마.”

그는 일부러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라고 불렀다.

“응?”

“나 결혼하고 한 번도 밖에 안 나왔죠?”

“그런가…….”

제발 아들하고 얘기할 때 눈 좀 맞춰요!

그녀가 너무 불쌍해서 갑자기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주 나와야 기분이 나아져요. 햇살도 쬐고 사람들도 구경하고.”

이번에도 그녀는 푹 숙인 고개를 주억거릴 뿐.

“나 수진이하고 헤어지기로 했어요.”

그제야 어머니는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응. 이혼하기로 했어요.”

당당하게 말하는 강의 목소리에 옆 테이블 사람들이 돌아보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랬구나.”

어머니는 다시 힘없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들이 이혼한다는데, 그게 고작이에요?

강은 또 뭔가가 솟구쳐 올랐지만 어머니는 피해자이지 가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했다.

문득 소름이 끼쳐 몸을 떨었다.

만약 내가 끝까지 수진이를 놓아주지 않고 괴롭혔다면…… 수진이도 이렇게 일그러졌을까? 나는 괴물이 되었을까? 아버지처럼?

잘했어. 백번 잘한 일이야.

그는 곱창전골을 한입 가득 넣고 씹어보았다.

고소하다. 짭쪼름하다. 텁텁하다. 녹진하다.

한 가지 맛이나 촉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입안에 가득했다. 아마 인생도 그러리라.

기쁨과 슬픔도 양면처럼 붙어 있고, 만남과 이별도 고리로 이어지고, 선과 악도 뒤섞여 있겠지.

그래도,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밥을 꼭꼭 씹었다.

.

.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머니를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강은 차 안의 적막이 싫어 카스테레오를 켰다. 라디오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땐 난 어떤 마음이었길래 내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그대는 또 어떤 마음이었길래 그 모든 걸 갖고도 돌아서 버렸나.

왜 하필 이런 노래가……

라디오 주파수를 바꾸려던 강의 손길은 차마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볼륨을 높였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그는 슬픔을 피하지 않고 직면했고 다친 감정은 피를 흘렸지만 그 피마저 겁내지 않고 흐르도록 내버려두었다.

내 가슴 안에 다른 이에게 줄 사랑이, 남아 있긴 할까?

“잔나비의 노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잘 들으셨나요? 광고 듣고 돌아올게요.”

라디오에서 광고가 나오는 동안 집에 도착했다. 노래 때문인지 기분이 몹시도 쓸쓸해져버렸다.

주차장에 들어선 그는 시동을 끈 뒤에도 잠시 차 안에서 감정을 추스른 다음 내렸다.

“이런 우연이.”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레이나가 맞은편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반가워요, 윗집 아저씨.”

밝게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이 축 처져 있던 그의 감정을 풍선에 매단 듯 끌어올렸다.

그는 레이나 앞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안아보는 건 괜찮다고 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