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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54화 (54/92)

“수진이가 외롭지 않을 테니.”  54화

분노할 줄 알았던 강은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마저 드리워 있었다.

“다행이다.”

한해는 귀를 의심했다. 자동적으로 미간이 모아졌다.

“뭐가 다행이냐?”

“수진이가 외롭지 않을 테니.”

하아…… 이강…… 너 갑자기 뭐냐.

“예상은 했어. 수진이가 경고처럼 말했거든. 형하고 다시 만날 거라고.”

“그런 얘기를 한 줄은 몰랐어.”

차라리 강이 펄쩍 뛰며 화를 냈다면 모르겠는데, 이렇게 순하게 나오니 도리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미안하다.”

이번에는 한해가 사과했다. 하지만 강은 받아주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뭐가 미안한데?”

“아직 법적으로는 너의 아내니까.”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어. 껍데기, 허울뿐인 관계지.”

뭐지? 대체 안 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수진이 말로는 절대 이혼을 안 해줄 거라고…….

“요 며칠 생각을 많이 해봤어. 내가 고민했던 내용까지 형한테 다 말할 필요는 없을 거고. 결론만 얘기하려고. 그전에 몇 가지 확인도 할 겸 보자고 했어.”

“솔직하게 말해줄게. 뭐든.”

“그래. 고마워.”

강은 남아 있던 에스프레소를 다 비웠다. 입가에 묻은 진한 커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수진이하고 어떻게 할 생각이야?”

조금의 휘어짐도 없이 그대로 날아드는 직구였다. 한해는 밀리지 않고 받아쳤다.

“사랑할 거야.”

애써 평정을 지키던 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랑하겠다고…….”

‘감히’라고 붙인 말은 한해의 귀에까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 뒤에 또 뭐가 있어야 하냐?”

“그냥 사랑? 고작 그러려고 내 아내를 뺏겠다는 거야?”

“수진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야. 뺏긴 뭘 뺏어. 그리고 굳이 그 표현을 쓰겠다면, 네가 나에게 뺏어간 수진이를 다시 찾은 거지.”

“끝까지 책임질 생각은 없다? 또 그때처럼 힘든 일이 생기면 내팽개치고 숨어버리겠다?”

이번에는 한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입조심해라.”

“표현이 거칠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실제로 그랬잖아. 아니야?”

“내팽개쳤다…… 아무것도 없는 17살 애가 어떻게 한 여자의 인생을 책임지지?”

“다시 물어볼게. 무슨 일이 있어도 수진이를 책임질 수 있어?”

“그런 표현부터가 수진이에겐 어울리지 않아. 수진이는 내가 자신을 책임져주길 바라지 않아. 자기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책임지는 아이니까. 넌 그런 아이를 소유하고 가두려 했어. 거기서부터 잘못된 거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까?”

강은 지그시 이를 물었다.

“그냥 사랑할 거야. 네가 말한 책임이 결혼을 말한 거라면, 그래. 나는 수진이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내 아내를…….”

“너는 처음부터 자격이 없었어. 이제 그만 놔줘.”

“내가 놔주면 신나게 사랑하겠네?”

“네가 놔주지 않는다 해도 사랑할 거야.”

강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한해는 테이블 위로 몸을 굽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강이야.”

그는 오래전 예뻐하던 동생을 부르던 식으로 이름을 불렀다.

“이제 그만 수진이를 놔줘. 너도 수진이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잖아.”

강의 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믿어. 네가 진심으로 수진이를 사랑한다고. 그 사랑이 일방적이고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렇지 네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지는 알아.”

“네가 뭘 알아…….”

“알아. 예전에도 알았어. 그래서 수진이를 부탁한 거고. 넌 나 다음으로 수진이를 위해줄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그녀를 위해서 이제 그만 놔줘라.”

강은 잡힌 손을 거칠게 뺐다.

“이래라저래라 충고하지 마.”

“충고처럼 들렸다면 미안하다. 부탁이었어.”

“내 결론은…… 내 결론은…….”

강은 차마 결론을 입 밖으로 내진 못하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뒤 몸을 일으켰다.

“수진이한테는 말하지 마. 내가 직접 얘기할 테니까.”

“강아!”

한해의 부름을 무시하고 그는 자리를 떴다.

지금 저거…… 이혼에 합의하겠다는 얘기 맞지?

상상도 하지 못한 수확이었다.

한해는 당장 수진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자기가 직접 말하겠다는 강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아직까지 그는 수진의 남편이니까.

몸을 옥죄던 매듭들이 툭툭 끊어져나가듯 홀가분해지는 동시에, 카페를 나가는 강의 뒷모습이 안쓰러워 마음이 아팠다.

아까 했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한해는 정말로 강이 수진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 온도와 간절함은 자신의 사랑에 못지않다고 믿었다.

그는 카페 유리창 너머로 점점 멀어져가는 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너에게도 사랑이 행복이 평화가 찾아들기를 진심으로 기도할게.

슬며시 감은 눈꺼풀 안쪽으로 바다가 그려졌다.

눈부신 햇살 속으로 달려가는 소녀와 뒤를 쫓는 두 소년.

파란 하늘보다 더 파란 웃음소리, 그리고 차례로 바다로 뛰어들며 일어나던 하얀 물보라.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강아.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

.

.

오후의 햇살을 손에 쥐어보았다.

야화는 진료실의 블라인드를 무척이나 신경 써서 조절했다.

빛은 사람의 감정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늘 적당한 햇살로 진료실 안을 밝히고,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조명으로 밝기를 맞췄다.

이렇게 상담 사이에 시간이 뜰 때면 책을 읽거나 소설을 썼는데, 오늘은 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블라인드를 위로 다 올리고 창문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로 기분을 끌어올리려고 했다.

진수진 피디와 환자 이강이 부부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시작된 고민은 출장 가 있는 강을 만나고 온 날부터 더욱 깊어졌다.

환자인 강에게는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지만 수진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을까?

‘피디님. 사실 당신의 남편이 저에게 진료를 받고 있어요.’그러나 그런 행위 자체가 의사로서 비밀유지 의무를 저버리는 셈이라 조심스러웠다.

창밖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병원이 있는 건물 바로 앞이 지하철역이어서 늘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다.

사람들 틈에 수진과 강, 그리고 얼굴을 모르는 한해가 스쳐 지나가는 착각이 들었다.

둘의 내밀한 고백을 모두 들은 야화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다.

강은 말할 것도 없고 수진 역시 강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 사람이 제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그 사람이 외도를 저지르고 저를 아프게 하고 숨 막히게 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가 두 번째라는 사실이 문제. 사랑의 감정은 두 번째까지 배려해주지 않는다. 첫 번째에 모두 쏠리는 불공평한 감정이다.

강에게도 수진이 두 번째였다면. 그래서 그들이 연인이 아니라 친구였다면 평생 좋은 관계로 남았을 텐데.

-작가님! 이번 원고도 정말 재미있어요. 정치 스릴러와 로맨스. 각기 다른 두 장르의 밸런스가 아주 좋은 느낌? 아까 점심시간이 좀 지나서 온 수진의 메시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그녀는 건강한 사람이다. 아마 한해라는 남자가 곁에 없다고 해도 그녀의 정신건강에는 문제가 없었을 거다.

슬픔이라는 감정과 우울증이라는 질환은 엄연히 다르니까. 그녀는 슬프고 외로울 때는 있겠지만 아픈 사람은 아니야. 그러나 강은…… 아프다.

야화는 자신이 강에게 한 말을 떠올리며 고민했다.

많은 환자들이 의사에게 그러하듯 그는 나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그가 이혼을 하도록 내가 종용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는 심각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가진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고 변명할 수 있나? 수진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는 의사로서 오직 환자의 건강을 위해 진료했나?

지금이라도 돌이켜야 할까? 강에게 연락해서 사실대로 고백해야 하나?

‘지난번에 제가 했던 상담은 없었던 걸로 해주세요. 그리고 저는 더 이상 이강 씨를 진료할 자격이 없답니다.’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그녀의 고민도 일단 멈췄다.

“선생님. 다음 환자분 오셨습니다.”

“네. 들어오라고 하세요.”

야화는 다시 블라인드를 내렸다.

*

이태화 회장의 집무실.

강은 예고하지 않고 찾아와서 30분을 넘게 기다렸다가 아버지를 독대했다.

“이렇게 급하게 온 걸 보니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게로구나.”

아버지는 이번에도 아들의 마음을 읽어냈다.

“네. 그렇습니다.”

“미안해서 끝까지 못 가겠어? 수진이가 상처받고 힘들어할까 봐?”

“아버지…….”

“아니지. 그것보단 이런 심정이겠지. 수진이가 지금도 너를 미워하지만 더 미워하면 어쩌나…… 그게 두려운 거지?”

“뭐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어쨌든 소송을 하지 않고 이혼을 할까 합니다.”

이 회장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책상이 아니라 달걀 껍질이었으면 몇 번만에 박살이 났을 테다.

“이유 따위는 묻지도 말아라 이거냐?”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득실을 따져봤을 때…… 득보다 실이 훨씬 더 큽니다.”

“별로 잃을 게 없다고 지난번에 설명해줬을 텐데?”

“얻을 것도 없습니다.”

“수진이를 계속 네 아내로 둘 텐데, 그게 득이 아니야?”

“껍데기뿐입니다.”

“어차피 누구도 타인의 영혼은 소유할 수 없어. 지금 우리 꼴을 봐라. 이런 중요한 문제를 아버지에게 통보하는 꼴이라니.”

“네. 그건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다만 영혼이 서로 통할 수는 있지요. 수진이를 계속 법적인 아내로 둔다 해도 그녀의 영혼은 조금도 저를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이혼을 하면…….”

강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닫았다. 아버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뭐냐. 계속해봐. 차라리 이혼을 하면 친구로라도 지낼 수 있을 것 같냐? 유행가 가사처럼?”

“아니요. 차라리 이혼을 하면 제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행복이라는 표현이 나오자 이 회장의 손끝이 딱 멈췄다.

그는 낮은 신음을 흘리고는 일어섰다.

“행복이라. 행복…….”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넓은 집무실을 천천히 걸어 다녔다. 그러다가 강의 뒤로 다가가서는 어깨에 손을 턱 올렸다.

“불행하니?”

강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네.”

“애비는 어떤 것 같으냐?”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의 행복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내가 그래 보였어? 어떤 면에서?”

“사업도 무서운 기세로 확장하시고…….”

강은 지금껏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어린 시절의 그늘을 꺼냈다.

“연애도 하시고 여행도 다니시고…… 골프에…… 심지어 다른 곳에서 살림을 차리시고 저와 배다른 형제까지 낳으신 걸로 압니다. 많은 즐거움을 누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하. 그게 즐거움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구나.”

그는 강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강아. 나는 말이다. 너희 누나가 죽은 이후로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다.”

우려했던 이야기가 나와 버렸다. 그러나 언젠가는 극복해야 할 고비이기도 했다. 계속 외면하다가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결국 아버지는 저를 증오하셨던 거네요.”

이 회장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뒤에서 강의 어깨를 주물렀다.

강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말씀해보세요. 아버지는 결국 평생 저를, 어머니를 증오하면서 사셨어요. 그렇죠?”

“아니. 그러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아…….”

강은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결국 증오하는 마음이 컸다는 말씀이잖습니까? 인정하세요! 그래서 그 미움을…….”

강은 차마 다음 이야기를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저를 때리고 어머니를 때리고…… 미쳐서 정신병원에 갈 정도로 때리고…… 그렇게 푸셨잖아요!

“그건 어쩔 수 없었지. 너희 어머니가 그 백화점에 가지 않았다면, 네가 장난감을 사겠다고 떼를 쓰지 않았다면, 지은이는 잘못되지 않았을 거야.”

이 논리 앞에서는 강은 한없이 죄스러워졌다. 마치 손오공을 제압하는 머리띠처럼, 강의 죄의식을 자극해 꼼짝 못 하게 만드는 치트키였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차라리 제가 죽어버렸어야 하는데.”

강은 처음으로 그 일에 대해 사과했다.

“이제 와서 그딴 소릴 해봤자 뭘 해. 네가 정말로 미안하다면, 네 누나를 닮은 수진이를 빼앗아 올 노력이라도 해.”

“아버지!”

강이 일어서려고 했지만, 이 회장은 노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힘으로 그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가만히 있어, 이 새끼야!”

갑자기 튀어나온 거친 욕설에 강은 얼어붙어버렸다.

“가만히 내 말 끝까지 들어. 건방지게 아버지 말에 끼어들지 말고!”

이제 그곳은 더 이상 이태화 회장의 집무실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맞고 짓밟히고 학대당하던 방으로 변했다.

강은 매 맞는 아이가 되어 입술을 달달 떨고 있었다.

“너 수진이가 어떻게 우리 집에 들어온 건지나 알고 있어?”

“아버지…… 설마…….”

“네 따위가 조른다고, 내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고아 아이를 집에 데리고 있었겠니?”

강은 귀를 막아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데리고 온 아이인데 네 마음대로 뺏겨?”

“아버지. 그때 일은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도 말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네놈 멋대로 수진이를 보낼 수는 없다는 건 명심해라.”

“이혼하겠습니다.”

강은 아버지가 내리누르는 힘을 이기고 일어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아버지를 마주 보았다.

“아버지가 그런 이유로 수진이를 집안에 데리고 있겠다면…… 저는 더더욱 이혼하겠습니다.”

“이 새끼가!”

이 회장은 손을 들어 강을 때렸다. 만만치 않은 힘이었지만, 아버지의 뺨을 맞고 강은 깨달았다.

이제는 아니구나. 이제 아버지는 힘으로 나를 제압할 수 없는 노인이 되었구나.

“이 자식이 애비를 노려봐!”

이 회장은 다시 강의 뺨을 때리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강이 손목을 턱 잡아버렸다.

“노려보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불쌍해서 봤습니다.”

이 회장이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이 자식이…… 이 자식이…… 감히…….”

강은 공손히 허리 굽혀 인사했다.

“제 뜻을 알려드렸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 회장은 그를 잡지 못했다.

강은 당당하게 걸어서 집무실을 나가는 듯했지만, 등 뒤로 문을 닫자마자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다.

그는 등을 문에 기댄 채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숨마저 가빠져 일부러 심호흡을 해야만 했다.

집무실 밖에서 업무를 보던 이 회장의 개인 비서가 힐긋 돌아보았지만 왜 그러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닫힌 문틈으로 강은 들었다. 상처 입은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미안하지 않았다. 오래전 딸을 잃은 아버지에게는 너무나도 미안했지만, 광기에 사로잡혀 괴물이 되어버린 노인에게는 미안하지 않았다.

.

.

.

야화 작가의 소설은 중간 정도까지 완성이 되었다.

수진은 잠시 통화를 했다.

“진료를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쓰세요?”

“진료만 하니까요. 저는 다른 일이 없습니다. 가족도 없고 취미도 없고 친구도 없지요.”

하긴. 야화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블랙이었던 독특한 분위기를 떠올렸다.

“완결이 나면 웹소설 플랫폼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회사에서 동시에 판권 계약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

“그 정도 수준이 되나요?”

“지금까지는 너무 재미있는데요?”

“매번 저 힘나게 하려고 좋은 얘기만 해주시는 거 아닌가요?”

“아이고 작가님! 제 성격 몰라서 그러세요? 아닌 건 아니라고 하죠.”

둘은 함께 웃었다.

작품 이야기를 좀 더 나누던 중에 야화가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남편분하고 일은 어떻게 되어가나요?”

“남편 입장은 변함이 없고요. 저는 어쩔 수 없이 내일 이혼소송을 시작하려고요.”

“아…… 안타깝네요.”

“그러게요. 합의할 가능성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쉽지 않네요.”

“남편분도…….”

야화는 말끝을 흐리고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힘내세요, 피디님.”

“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작가님도 파이팅!”

수진은 전화를 끊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할 일도 많은데 이제 소송 시작이다. 과연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소송을 이어나갈 수 있을까?

손에 쥔 볼펜을 휙휙 돌리기 시작했고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결국 볼펜이 손에서 툭 날아가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선명하게 뜬 이름. 이강.

한때는 ‘강이 오빠’, ‘남편’이라는 이름으로도 저장되어 있었는데.

수진은 핸드폰을 들고 회의실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소송 준비는 잘돼가?”

“우리 변호사가 내일 소장 접수한대.”

“그렇군. 그전에 잠깐 만날까?”

“내일부터 서로 소송할 사이인데 오늘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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