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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53화 (53/92)

뭐야. 타임슬립이라도 한 거야? 53화

강은 아찔한 현기증에 휘청거렸다.

뭐야. 타임 슬립이라도 한 거야?

레이나의 옷차림을 보니 타임 슬립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예전처럼 바로 아래층이 아니라 중간층을 눌렀다.

문이 닫힌 승강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 다시 이사 온 거야?”

“응. 한 집이 비어 있길래 이사 왔지.”

“언제? 그런 말 없었잖아?”

“이사는 그저께 왔어. 어제오늘 짐 정리를 다 마쳤네. 마침 오빠가 출장 기간이었던 거고.”

“아니…….”

당황한 강에게 레이나는 찡긋 윙크했다.

“우리 며칠 전에 통화했던 기억 안 나? 내가 마지막 선물을 준비했다고 했잖아.”

“선물이라니…….”

“와이프는 집 나가고 혼자 외로워서 엉엉 울고 있을 오빠가 불쌍해서 이 몸이 이사까지 와줬는데, 이 정도면 선물 아냐?”

“야…….”

강이 뭐라고 하려는데 승강기가 멈추었다.

“출장 다녀오느라 고생했어. 푹 쉬어.”

레이나는 발랄하게 손을 흔들고 사라져버렸다. 다시 승강기 문이 닫히고 강은 혼자 집으로 올라왔다.

대체 레이나 너는…….

그는 집에 들어와 짐을 풀었다. 출장 가기 전과 마찬가지로 온기 없는 집이었다. 그러나 마음만큼은 출장가기 전과 달랐다.

자꾸 헛웃음이 나왔다. 몇 층 아래 레이나가 있다고 생각하니 어이없기도 하고 어딘가 안심이 되기도 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이런 위로가 되는구나.

짐을 다 풀고 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일찍 올라오느라 아침을 안 먹었더니 빈속이 점심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아 발을 까닥거렸다.

오늘 회사에 출근할 필요는 없고 집에서 쉬면 될 테니 점심을 어떻게 한다…….

조금 의외네. 내가 아는 레이나라면 그냥 인사만 하고 내릴 리가 없는데.

그는 폰을 들어 레이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밥 먹었어? 점심 같이할까? 메시지를 보내고 기다리는데 왠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또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나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 초조한 기분이 들었던 적은 별로 없는데. 초조함이란 주로 수진이에게 느꼈던 감정이잖아.

전화를 걸어볼까? 아냐. 왠지 매달리는 것 같군.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왜 이런 문제로 신경을 쓰고 있는 거야?

그녀에게 답장이 온 건 10분도 더 지나서였다.

-마침 점심을 준비하려던 참인데. 같이 먹을 거면 내려와. 부끄러운 안도감이 그의 가슴에 바람처럼 불고 지나갔다. 혹시 거절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는 캐주얼한 옷차림으로 레이나의 집에 내려갔다.

“이리 와서 같이 좀 거들어.”

레이나는 샌드위치를 만드는 중이었다. 펼쳐놓은 재료들을 보니 꽤나 거창했다.

햄과 치즈는 기본이고 계란프라이와 아보카도, 몇 가지 소스와 야채들도 있었다.

“샌드위치 만드는데 뭘 이렇게 거창하게 해?”

강은 핀잔을 주면서도 비닐장갑을 착용했다.

“배달시켜도 금방 올 텐데.”

“시켜먹는 거하고 또 다르지. 재료의 퀄리티가 넘사벽이잖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의 속마음은 달랐다.

당신이 점심을 먹자고 연락이 온다는 쪽에 내 자신과 내기를 걸었거든. 이겼네. 이렇게 같이 준비하고 싶었어.

사실 아까 마주친 것도 우연이 아니야. 출장 끝나고 오늘 올라온다고 했잖아.

나는 1층 로비에 있는 카페에서 교제를 준비하면서 기다렸어. 당신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승강기를 따라 탄 거야.

아까 당신이 점심 먹자고 보낸 메시지도 이미 확인하고선 일부러 10분 이상 기다렸다가 답장한 거야.

나는 이렇게 열심이고 치밀해. 왜냐고?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당신을 뺏지 못하면…….

그냥 안 뺏을래.

“아보카도는 찌그러지기 쉬우니까 이렇게 넣자.”

레이나가 슬그머니 스킨십을 유도하면서 강을 도와주었다.

“어차피 빵으로 누르면 찌그러지잖아.”

“오빠는 어차피 죽을 거 뭐하러 열심히 살아?”

“아휴. 그게 적절한 비유냐? 비유란 대상의 가치가 비슷해야 성립하는 법이야. 인생하고 아보카도하고 같냐?”

“나 일타강사 레이나야. 누굴 가르치려 들어.”

“너 수학 선생이잖아.”

“모든 학문은 서로 다 통해. 오빠는 수학이 얼마나 인생과 맞닿아 있는지 모르지?”

“말은 잘해…….”

강은 짜증난다는 식으로 투덜대면서도 정작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둘은 나란히 서서 샌드위치를 완성했다. 레이나는 직접 믹서로 생과일주스를 갈아 만든 다음 텀블러에 넣었다.

“그걸 왜 텀블러에 넣어? 어디 갖고 갈 거야?”

“이렇게 날이 좋은데 집에서 먹으려고? 집에서 먹을 거면 샌드위치를 안 만들었겠지.”

“뭐야…… 그럼 내가 안 왔으면?”

“왔잖아.”

강은 뭔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샌드위치는 넉넉한 2인분, 어쩌면 세 명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내가 연락할 거라고 확신한 건가?

레이나는 샌드위치와 텀블러를 종이가방에 담더니 강에게 쓱 내밀었다.

“들어.”

어디서 명령질이냐고 대들려다가 귀찮아서 그냥 들고 따라나섰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강 시민공원으로 나가는 입구가 있었다.

평일 낮이라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그들은 한적한 잔디밭에 자리를 깔고 샌드위치를 먹었다.

선선한 바람이 레이나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흔들면서 샴푸향이 밀려와 강의 코끝을 간질였다.

전에는 몰랐는데 그녀의 목덜미가 무척이나 희고 부드러워 보였다.

센 이미지로만 그녀를 기억했는데, 밝은 햇빛에 드러난 진짜 그녀의 모습은 또 달랐다.

“이렇게 밖에서 밥 먹는 건 처음인가?”

“응. 맨날 집 안에서 만났지. 아니면 호텔. 우린 그런 사이였으니까.”

레이나의 마지막 말이 강의 귀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런 사이…….

“맛은 어때?”

“예상보다 훨씬 더 맛있네.”

“맛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보통 그렇잖아. 몸에 좋은 재료들은 맛이 심심하니까. 만들면서 보니까 몸에 좋은 재료들이 잔뜩 들어가길래 맛은 별로 기대 안 했어.”

“나랑 같이 먹어서 더 맛있는 거야.”

강은 속으로 동의했지만 겉으로는 멀리 한강을 가로지르는 수상 스키로 시선을 옮겼다.

둘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면서 느긋하게 샌드위치를 먹고 주스를 마셨다.

“왜 안 물어보냐?”

“뭘?”

“너는 늘 나랑 수진이랑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해했잖아.”

“아, 그랬나? 내가 그랬구나. 바보같이. 이제는 안 그러려고.”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너는 정말로 돌아섰구나.

며칠 전 클럽에서 그의 전화를 끊어버렸던 너의 모습…… 그날만 그랬던 게 아니었구나.

“그렇게 날 밀어낼 거면 아랫집으로 이사는 왜 온 거냐?”

“말했잖아. 외로운 처지가 된 오빠가 불쌍해서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그리고 나 전세로 들어온 거 아니야. 6개월짜리 월세를 한꺼번에 미리 냈어.”

“그럼 몇 달 뒤에 다시 나간다고?”

“오빠가 날 안 잡으면.”

레이나다운 대담한 대답에 강은 반갑기까지 했다.

“협박처럼 들리네.”

“응. 협박이야. 그 동안 늘 내가 매달리는 쪽이었으니까 마지막으로 협박 한 번 해보고 끝내려고.”

그녀는 입가에 묻은 주스를 혀끝으로 닦아냈다.

전에 느끼지 못한 이미지였다. 강렬한 햇살이 워낙 흰 그녀의 피부를 아예 투명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았다.

“수진이하고 이혼할까 생각 중이야.”

레이나가 묻기 전에 강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소송 진행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현재 상황은 그런데…… 소송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어서.”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이제 알았어?”

“그러게 말이야.”

강은 쓸쓸하게 자신을 조소하며 자리에 누웠다.

“다른 건 다 잘하면서 사랑만 못해.”

레이나도 옆에 털썩 누웠다. 그녀는 도발적인 손길로 강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 손길…… 얼마 만에 닿는 타인의 손길이지?

오래 동안 죽어 있던 감각이 되살아났고, 그는 햇살처럼 강렬한 생명력을 느꼈다.

그 역시 손을 뻗어 레이나의 뺨을 감쌌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아니.”

입술이 닿기 직전, 그녀의 손길이 그를 부드럽게 밀어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움직이던 그가 놀라서 멈칫했다.

“불륜녀 역할은 이미 너무 많이 했으니까.”

그녀는 여전히 누운 자세로 찡긋 윙크했다.

“당신이 위로라는 말의 뜻을 잘못 알아들었나 봐.”

“레이나…….”

“그동안 당신은 수진 씨 때문에 생긴 부정적인 감정을 나를 통해 해소했어. 어떻게든 당신을 갖고 싶었던 나 역시 그런 역할로라도 당신과 계속 만나고 싶었고. 그러나 이제는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런 식의 관계는 발전이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레이나는 조곤조곤 말했고 강은 학생처럼 경청했다.

“나는 당신을 발전시키고, 우리의 관계를 발전시킬 거야. 그전까지 육체적인 관계는 미뤄둘 거야.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걸…… 당신은 멍청한 학생이 아니니까 잘 알겠지.”

그녀는 다시 그의 뺨을 감쌌다.

“쉬운 말로 요약하자면, 당신이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기 전까지 우리 입술이 도장을 찍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씀!”

경쾌하게 몸을 일으킨 다음 물었다.

“질문?”

강은 고개를 저었다. 다 알아들었으니까.

갑자기 갈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남아있던 주스를 모두 들이켰다.

“질문 없으면, 우리 자전거나 탈까?”

레이나가 그를 일으켰다.

자전거 대여소를 향해 손잡고 걷던 중에 강이 물었다.

“키스는 안 되고 손잡는 건 괜찮고?”

“손잡는 건 친구끼리도 하잖아. 뭐 포옹까지는 오케이.”

강은 사랑의 감정을 지배하는 간단한 법칙을 절감했다.

지금처럼 레이나에게 키스하고 싶은 적은 없었지. 사랑의 감정은 막으면 부풀어 오르는구나.

그들은 2인용 자전거를 탔다. 강은 오후의 햇살 속으로 부지런히 페달을 놀렸고 레이나는 많이 웃었다.

금빛 물결이 흐르는 강변을 달리고, 유채꽃이 가득한 서래섬을 돌고, 다리 아래 그늘에서는 잠시 쉬기도 했다.

공원 한쪽에서 열리는 도깨비 시장에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사서 빨아먹었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입가에 하얀 크림이 묻었다.

그녀는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현자 같은 소리를 했다.

“일타 강사들 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들은 얘기야. 타인에게 뭔가를 기대하면 늘 배신당한다는 사실, 그럼에도 타인의 온기 없이는 늘 쓸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 이율배반적인 두 가지 명제를 동시에 인정해야 진짜 행복을 맞이할 수 있대.”

강은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쓸쓸하지는 않은 오후였다.

*

정신과 육체는 서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요즘 매일 아침 실감했다.

한해의 아침은 두 배쯤 더 활기차졌다. 기분 탓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수치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에 하는 운동만 해도 그랬다.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무게를 들고, 더 빨리 달리고, 더 빨리 회복했다.

그리고 또 좋은 일이 생겼다.

“강한해 씨? 이렇게 전화를 한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겠죠?”

어느 상쾌한 아침에 걸려온, SH 인베스트먼트 팀장의 전화였다.

“합격입니다.”

한해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팀장과 통화하는 동안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이 눈앞을 스쳤다.

오직 부자가 되겠다는 결심 하나로 고독한 선실에서 홀로 공부했다.

나를 바다 한복판으로 던져버린 가난에 맞서 이기겠어. 이 세상에서 살아남겠어.

돈이란 무엇인지. 돈은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불려야 하고,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공부했다. 수십, 어쩌면 백 권이 넘는 책을 읽고 모의투자를 거듭했다.

그리고 사토시 씨와의 만남. 수진과의 재회. 개인투자자로서 새로운 인생. 그리고…….

“고맙습니다.”

한해는 감사를 전했다.

“제가 고맙죠. 한해 씨 같은 인재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혹시 사토시 선생님의 영향이 있었나요?”

“있었죠. 사토시 회장님 때문에 안 뽑으려고 하다가, 한해 씨의 실적이 너무 뛰어나서 겨우 뽑힌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제가 사토시 회장님을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세 번이나 사표를 냈다가 붙잡혔다는 얘기, 안 하시던가요?”

팀장은 심각했지만 한해는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축하드리고요. 내일부터 출근 가능한가요?”

“네. 좋습니다.”

“그럼 내일 오셔서 팀원들하고 인사하시죠.”

팀장은 지난번 면접 때와 마찬가지로 건조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한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고의 전문가들과 팀을 이루어 일하게 되었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엄청난 경험이 될 테지.

오래전 드넓은 인도양 한복판에서의 기억을 소환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갑판에 나와 사토시 씨와 나란히 서서 망망대해를 보던 중이었다.

“투자의 세계도 바다와 같아. 우리는 다 안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 기껏해야 선물 옵션에 투자기법 몇 가지를 책으로 배웠다고 투자의 바다를 다녀봤다고 생각하지 마. 그건 겨우 해수욕장에서 물장구친 정도니까.”

첫 출근을 앞둔 한해는 또 한 번의 새로운 항해를 떠나는 기분이었다.

몇 달 동안 하루 종일 일했던 2층 의자에 얼떨떨한 감정을 식히면서 앉아 있었다.

트레이딩 프로그램이 깔린 PC들, 벽처럼 세워진 모니터, 쉴 새 없이 매수 매도 버튼을 눌렀던 마우스…….

뿌듯한 감상에 젖어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놀랍게도 강의 전화였다.

긴장의 고삐를 다시 조이고 전화를 받았다.

“어, 강아. 아침부터 무슨 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받네.”

목소리에도 온도가 있다면 영하 10도쯤 되는 목소리였다.

“그럼 호들갑이라도 떨어야 했었나?”

“호들갑이 아니고 미안한 마음은 조금 있는 줄 알았지.”

“미안한 마음은 네가 나한테 가져야 할 마음 아닐까? 난 송장 취급을 받고도 아직 사과를 못 받았는데?”

“나와. 사과받으러.”

한해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무슨 꿍꿍이냐?

.

.

.

평일 오전. 아직 사람이 몰려들기 전의 카페는 한적한 분위기 속에 뉴에지 풍의 피아노 연주가 찰랑였다.

넥타이까지 멘 슈트 차림의 강과 편안한 맨투맨 티셔츠 차림의 한해가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아 있었다.

“고마워. 여기까지 와줘서.”

카페는 태화건설 본사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태화건설 부회장님이 친히 사과해주시겠다는데 이 정도야.”

한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머금었다가 넘겼다.

“좋아 보이네. 몸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강은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가볍게 인상을 썼다.

“넌 좀 피곤해 보인다.”

“응. 요즘 좀 그래. 형도 지금 내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겠지만. 어쨌든.”

강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들었다.

“미안해. 멀쩡하게 살아 있는 형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제법 예를 갖춘 사과였다.

“단지 그 거짓말에 대해서만 미안해? 그 뒤에 네가 저지른 일은? 수진이를 속여서 결혼하고 괴롭힌 일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였기에 한해는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 뒤의 일들에 대해서도…… 사과할게. 미안해.”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한해를 응시했고 오히려 한해가 살짝 당황했다.

뭐야? 너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거냐?

“정말 사과하려고 불렀어? 그뿐이야?”

“사과도 하고. 수진이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

역시…… 수진이 얘기를 할 줄 알았어.

“아주 중요한 이야기니까 신중하게 생각하고 솔직하게 대답해줘야 해.”

강의 얼굴에는 손톱만큼의 웃음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해는 오래전 지금하고 비슷한 강의 표정을 본 적 있었다.

수영 대결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였다. 수진이 강에게 인공호흡을 해줘서 살아난 해프닝이 있었고, 며칠 뒤에 강이 한해를 찾아와서 물었다.

‘형. 수진이 좋아해?’겨우 고등학교에 막 들어갔던 한해는 자신의 감정이 남녀 사이의 감정인지 확신하지 못해 얼버무렸다.

그때 강의 표정이 꼭 이랬다.

“네가 얼마나 진지한지는 확실히 알겠으니까, 무슨 얘기인지 말해봐.”

한해도 자세를 고쳐 앉고 들을 준비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무슨 대답이든 얼버무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강은 떨지 않으려고 꾹 누른 티가 나는 음성으로 물었다.

“요즘 수진이 만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그는 이혼 과정에서 큰 문제가 되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응. 만나.”

분노할 줄 알았던 강은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마저 드리워 있었다.

“다행이다.”

한해는 귀를 의심했다. 자동적으로 미간이 모아졌다.

“뭐가 다행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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