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햇살 때문일까. 인상파 화가의 그림 속 등장인물이 된 기분이었다.
야화는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네. 괜찮아요.”
그녀는 환한 미소를 연기한 뒤 예전처럼 물었다.
“오늘 이강 씨는 저를 마중까지 나오셨어요. 그 정도로 이 상담을 절실하게 기다렸다는 뜻일 텐데요. 지난번 상담 이후로 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아내하고 통화를 했습니다.”
야화는 속마음을 감춘 채 계속 경청했다.
“아내는 저에게 일종의 협박을 하더군요. 변호사를 선임했고 곧 이혼소송을 시작할 예정이다. 언론 플레이도 불사하겠다. 즉, 제가 불륜을 저지르고 폭력을 행사하고 집착하고…… 뭐 이런 것들을 기사화시키겠다는 얘기죠.”
“그랬군요. 많이 놀라셨겠어요.”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변호사하고 상담하면서 확인했는지, 이혼의사를 통보한 뒤에 생긴 이성과의 관계는 위자료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까지 얘기하더라고요. 강한해라는 남자하고 만남을 시작하겠다는 의사도 분명히 했습니다.”
“어떤 감정이 드셨나요?”
“배신감. 분노. 그리고…… 슬픔.”
“앞의 두 가지 감정은 전과 비슷한데 슬픔은 뭘까요? 조금 더 자세히 감정을 들여다볼까요?”
“질투와는 다른 감정이었어요. 너는 끝까지 나를 거부하는구나. 이런 느낌.”
“강한해라는 사람에게 질투심이 들진 않았고요?”
“이상하게 그런 생각은 들지 않더군요.”
“지난번 상담에서는 아내분이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장면이 자꾸 상상되어서 괴롭다고 하셨잖아요? 심리 변화가 있었던 건가요?”
“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면서…… 오히려 질투의 감정은 사라진 것 같아요.”
당신의 확신이 맞아요. 그들은 이미 시작되었어요.
“부러움과 질투의 감정은 매우 가까이 있고 어떻게 보면 구분이 안 되는 감정이기도 한데…… 부러운 감정도 없는 건가요?”
“강한해를 부러워하는 일은…… 저의 열등감이 용서하지 않아요.”
강이 어찌나 이를 세게 물었는지 빠득 소리가 들렸다.
“그렇군요. 부러워하는 감정을 애써 밀어내다 보니…… 질투의 감정도 차단되었군요.”
“슬픕니다. 견딜 수 없이 슬픕니다.”
강의 목소리는 무섭도록 가라앉았다. 어깨까지 부르르 떠는 모습이 너무 안 되어 보여, 야화는 의사로서 느끼지 말아야 할 동정심이 들 지경이었다.
그녀는 불편한 감정을 얼른 떨치고 상담을 계속했다.
“슬프다는 감정을 더 분석하면 그 안에는 절망이 깔려 있거든요. 슬픔의 본질이란 이런 겁니다.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원하지 않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상태. 그것이 슬픔의 본질입니다.”
강은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계속 이를 물고 있었다.
“내가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슬픔이 최종적인 감정이 되진 않아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슬픔 중에서도 가장 큰 슬픔은 죽음에 관한 감정이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절대로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강의 고개가 조금씩 끄덕여지기 시작했다.
“아내분과 대화하면서 이강 씨가 느낀 슬픔……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까?”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강 씨는 이미 아내분과의 이별을 인정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가요?”
끄덕이던 강의 고개가 멈추고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야화도 그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침묵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해가 움직이면서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빛의 막대기들도 이동했다. 강의 각진 턱이 햇살에 반짝였다.
“아니요. 아직은…… 아내를 놓지 못합니다.”
“머리로는 그렇지만…… 눈을 감고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세요. 어떤가요?”
제발…… 제발…… 인정해줘요. 그래야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어요. 아니, 적어도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요.
강은 천천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결국 그는 침통한 표정으로 인정했다.
“수진이는…… 수진이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요.”
“그 말은 이별을 받아들인다는 뜻인가요?”
“아니요. 그녀가 자기 발로 돌아오지 않더라도 데려올 방법이 있어요.”
야화는 가슴의 껍질이 와락 깨지는 기분이었다.
“거짓말로, 강제로 그녀를 아내로 삼은 결과가 지금 이거잖아요. 그런데 또?”
야화는 말하고 바로 후회했다. 의사로서의 언어가 아니었다.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한 말이었다.
일종의 비난일 수도 있는…… 그러나 이미 뱉어버렸다.
역시나 강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야화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그녀는 한 번도 가치판단을 한 적이 없으니까.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선생님께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마음을 알려드린 겁니다.”
“잘하셨어요. 저는 선악 판단을 해서는 안 되니까 그 부분은 미뤄놓기로 하죠. 다만 저는 환자의 마음을 치유하고 행복한 상태로 인도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이강 씨가 행복해지려면…….”
야화는 말을 끊었다. 이번에도 수진을 고려하는 마음이 섞여 있는 것 같아서.
그녀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이런 식으로 이 사람을 대했을까? 아니겠지. 그렇다면 난 잘못하고 있는 거잖아?
“말씀해주세요. 제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화는 마치 환자인 양 눈을 감고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보았다. 의사로서의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더 이상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야화는 강의 눈을 슬쩍 피했다.
더 이상 유도하거나 압박해서는 안 돼.
그녀는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부모님과의 관계는 최근에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아버지도 수진이와 이혼을 아주 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얼핏 말씀해주셨죠. 일찍 세상을 떠난 누나하고 수진 피디님이 무척 닮았다고?”
결국 우려했던 상황이 터졌다.
강의 미간이 서서히 모아졌다.
“제가 아내 직업이 피디라고 말씀드렸었나요?”
그제야 야화는 말실수를 깨달았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랬던 것 같은데요? 초반에?”
강은 여전히 미간을 풀지 못하고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야화는 기도하는 심정이 되었다.
제발…… 제발…… 깊이 생각하지 말아요.
“일단 아버님의 의견은 되도록 신경 쓰지 말고 이강 씨의 마음을 확실히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녀는 얼른 다른 이야기로 강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혹시 이강 씨는 이혼을 고려하고 있는데, 아버님의 의견과 부딪칠까 봐 두려워하는…… 그런 마음도 있나요?”
강은 미심쩍은 표정을 거두고 대답했다.
“아마…… 없진 않을 겁니다. 인정하기 부끄럽지만요.”
“어머님하고도 만나보셨으니 아버님하고도 한번 정말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눠보시죠.”
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야화는 중간의 말실수가 뼈아팠다. 그가 의심하지 않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
아직 노을이 번지기 전의 늦은 오후.
한해와 수진은 삼청동 거리를 산책했다.
예쁜 카페에서 라테 한 잔씩을 뽑아 들고, 작은 화랑에서 그림을 구경하고, 수공예로 만들어 상품과 예술품 사이 어디쯤 있는 물건들도 구경했다.
“기념으로 사줄게. 하나 골라봐.”
귀걸이 목걸이가 줄지어 걸린 가게에서 한해가 말했다.
구경하던 수진이 피식 웃었다.
“왜 그래요? 남친처럼.”
“아니었냐?”
“뭐야. 장난치지 마요.”
수진이 한해를 툭 치자, 옆에 서 있던 점원이 거들었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 오늘부로 남친여친 하세요.”
“그렇죠?”
한해는 점원에게 맞장구를 쳤고 수진은 눈을 흘겼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뭘 살지 신중하게 고르고 또 골랐다.
말한 적은 없지만, 어린 시절 그녀의 작은 꿈 중 하나였다.
나중에 커서 한해 오빠하고 연애를 하면 서울에서 예쁜 귀걸이 목걸이 같은 것도 사달라고 해야지!
작은 꿈들이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는 계절이었다.
그녀는 별이 매달린 얇은 목걸이를 골라 목에 걸어보았다.
“우와, 너무 잘 어울리세요!”
점원의 호들갑이 가라앉기도 전에 한해는 카드를 내밀었다.
“와, 남친분 진짜 박력 갑!”
“휴. 남친 아니에요.”
수진은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해보고 들으라는 듯 부정했다.
그녀는 목걸이를 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고 한해는 하염없이 그녀를 보다가 중얼거렸다.
“정말 예쁘다.”
수진은 턱을 슬쩍 들고 장난쳤다.
“내가? 아니면 목걸이가?”
한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목을 스치듯 지나 목걸이를 슬쩍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이 닿은 아주 짧은 순간에 전류가 흐른 듯 자극이 퍼졌다.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고 앞장섰다.
삼청동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니 도심의 번잡함과 본질적으로 다른 고즈넉함이 그들을 맞이했다.
우거진 나무가 푸른 터널을 이루어 도로 위를 덮었고 그들은 맑은 공기 속으로 나란한 걸음을 내딛었다.
“좋다. 계속 이렇게 걷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고 만났잖아. 배는 안 고파?”
“오빠는요?”
“아직. 너 괜찮으면 조금만 더 이따가 먹자.”
“지금 우리 정처 없이 걷는 거예요. 아니면 목적지가 있나요?”
“걷다 보면 목적지가 나오겠지.”
“또! 지난번에 영종도 휴게소도 미리 정해놓고선! 빨리 말해요. 어디로 가는 겁니까?”
“들켰네. 우리는 아주 신비로운 절에 갈 거야.”
“절? 오빠 불교예요?”
“아니. 종교는 없는데, 종교와 상관없이 가볼 만한 곳이야.”
“무슨 절인데요?”
“가면서 들려줄게.”
한해는 길상사의 유래를 발걸음에 실어 전해주었다.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김영한이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어릴 때 가난 때문에 기녀가 되었는데 스무 살이던 해 연회 자리에서 운명의 사랑을 만났다. 그가 지금도 교과서에 실려 있는 천재 시인 백석이다.
그들은 단숨에 사랑에 빠지고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백석과 자야. 자야와 백석. 그들의 사랑은 얼음장 같은 시절에 외롭게 불타오른 횃불과도 같았다.
일제강점기라는 혼돈의 시대이기도 했고 여전한 신분제 시대이기도 했다. 그들의 사랑은 그저 사랑으로는 몰라도 결혼이라는 제도로 편입될 수는 없었다.
결국 백석은 그녀에게 제안했다.
‘자야야. 우리 만주로 가자. 그곳에서 결혼해서 살자.’그러려면 백석은 집안은 물론 그가 이뤄놓은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자야의 마음은 매일 요동쳤다. 들떴다가, 슬펐다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다가, 백석에게 미안해하다가, 그를 원망하다가, 운명을 원망하다가……
그녀의 방황은 깊고도 길게 이어졌다.
해방 후 남과 북으로 나라가 갈라지면서 그들도 갈라져야 했다. 자야는 남에 남고 백석은 북으로 갔다. 그리고 영영 이별이었다.
자야는 성북동 산자락 아래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요정을 차려 엄청난 부를 일구었다. 그곳은 당대 정재계 거물들의 밤을 품어낸 역사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성공해도 자야는 행복해지지 못했다. 백석과 헤어진 뒤 그녀는 단 하루도 진정으로 행복한 적이 없었다.
매년 백석의 생일인 7월 첫째 날에는 하루 종일 식사를 하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 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다렸다.
‘백석 시인이 제일 보고픈 때가 언제입니까?’누군가 그녀에게 이렇게 물으면 핀잔을 주곤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데 때가 어딨어? 늘 그립지.’무엇이든 세월이 지나면 녹슬고 흐려지기 마련인데 백석에 대한 그녀의 마음만큼은 그대로였다.
나이가 든 그녀는 큰 스님 ‘법정’이 쓴 ‘무소유’라는 책을 읽고 감명받아 대원각을 시주하겠다고 결심했다.
만 평에 가까운 면적에 40여 채의 별실이 딸린 우리나라 최고의 요정이었다.
워낙 터가 좋고 넓은 땅이라 지금 돈도 아니고 당시 시가로 천억 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재산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말렸다. 그때지만 그녀는 이렇게 핀잔을 주었다.
‘1000억 원 갖고 왜들 난리야. 그분의 시 한 줄만도 못한데.’“그렇게 길상사라는 절이 탄생한 거야.”
한해의 설명을 들은 수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루지 못한 사랑, 운명이 찢어놓은 인연…… 그녀는 누구보다 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꿈결을 걷는 것처럼, 눈송이 같은 꽃잎이 드문드문 나무터널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제가 들어본 사랑 이야기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배에서 백석 시인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가 기억난다. 이 이야기는 몰랐을 땐데.”
한해는 아직도 기억하는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첫 부분을 조용히 암송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그의 음성이 너무 좋아 수진은 뒷부분까지 계속 듣고 싶었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못 외워.”
한해의 웃음소리가 낭만적인 감상으로 가득한 수진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다행이에요.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나서. 만약 당신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평생 행복하려고 애만 썼을 거야. 불쌍한 자야 할머니처럼.
어느새 길상가의 입구에 다다랐다.
“여기야.”
수진은 한해를 따라 합장을 하고 절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생각한 절하고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이곳이 왜 우리나라 최고의 요정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자야 할머니가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큰 선물을 남겨주고 가셨네요.”
그녀가 중얼거리자 한해가 대답했다.
“시주를 받은 법정스님도 보통 분이 아니야. 자야 할머니가 시주를 했지만 받지 않았거든.”
“이 넓은 땅을요?!”
“응. 그러니까 대단하지. 할머니가 제발 받아달라고 10년 졸라서 스님이 마음을 바꾸셨어. 그리고 이곳을 길상사라는 절로 바꾸고 자야 할머니한테는 길상화라는 법명을 주셨지. 그리고 법정 스님 본인은 정작 대부분의 시간을 첩첩산중에 있는 암자에서 혼자 지내셨어. 이 멋진 절을 놔두고.”
“와아…… 진짜 두 분 다 대단하시다.”
둘의 발걸음은 길상화 보살을 기리는 공덕비에 이르렀다. 한해가 설명해준 이야기가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절 안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백 년 된 나무들도 여럿 있었다. 곳곳에 아름다운 다리와 불탑이 어우러졌고, 작은 개울도 몇 개나 흐르고 있었다.
줄지어 매달린 연등이 바람이 느긋한 춤을 추고 있었고 담장 너머로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꼭 절에 다니는 신자들뿐만이 아니라 그저 산책을 온 시민들을 위해서도 배려를 한 듯, 절 곳곳에는 공원처럼 벤치가 놓여 있었다.
수진과 한해는 잠시 벤치에 앉아 평화로운 정적을 음미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슬쩍 고개를 기대어 이름 모를 새 소리를 들었다.
한때는 쾌락의 소굴이었던 장소가 그리움의 성전이 되었다가 부처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바뀌었구나.
백석과 자야의 사랑 이야기뿐만 아니라 공간과 역사가 주는 감동 역시 컸다.
게다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평생 그리워한 어떤 이의 무덤이기도 하고.
“아…… 가슴이 막…….”
수진은 신음을 뱉으며 한해의 팔짱을 꼈다.
“왜 그래?”
“만약 오빠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나도 자야 할머니처럼 살았을까 싶어서요. 아까부터 그 생각이 계속 나요.”
“그랬을까? 잘 살았을 것 같은데?”
“분위기 깨는 소리는!”
흘겨보는 수진을 한해가 꼬옥 품어주었다.
“그래서 여길 데려오고 싶었어.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평생의 그리움은 남들에게나 멋지지, 본인들에겐 고통이고 슬픔이잖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다고요. 말이 잘 안 나와서 어버버 했지.”
“누가 하면 어때. 마음만 똑같으면 되지.”
그녀는 한해의 팔을 잡은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가지 마. 다신.”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이마에 도장을 찍듯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 감각을 최대한 느끼려고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고 하늘로 시선을 올렸을 때, 찬란한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다.
그 아래 보이는 한해의 얼굴 역시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오빠. 나 부탁이 있는데.”
“말해.”
한해는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흠칫 놀랐다.
만약 수진이가 키스를 해달라고 하면 어쩌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부탁은 아니었다.
“아까 그 시, 마지막에는 어떻게 끝나요?”
한해는 핸드폰으로 검색한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마지막 연을 읽어주었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그녀는 지그시 눈을 감고 그의 목소리를 가슴 깊이 가뒀다.
맛있는 저녁을 먹지 않아도, 밤에 술 한잔을 하지 않아도, 어쩌면 오늘도 키스가 없을지라도 완벽한 데이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밤이 어렸다.
*
길고긴 출장이 끝났다.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향하는 차 안. 기사가 모는 리무진 뒷자리에서 강은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업무는 빈틈없이 처리해서 찜찜함이 없었지만 수진과 관련한 것들은 하나도 명쾌하지 않았다.
아직도 슬프다. 그것만은 명쾌한 사실.
‘슬프다는 감정조차 더 분석하게 되면 그 안에는 절망이 깔려 있거든요. 지금 이 상황은 정말 원하지 않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상태. 그것이 슬픔의 본질입니다.’야화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이강 씨가 행복해지려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더 이상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강은 수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진수진. 정말로 널 가질 수 없는 거야? 법적으로 너의 남편이 되고 육체적으로 너를 안아도…… 넌 내 것이 아닌 거야?’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널 놓아주면 이 슬픔도 사라질까? 나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까?’차가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답을 내지 못했다.
“올려다드리겠습니다.”
기사가 캐리어를 끌고 가려 했지만 강이 막았다.
“괜찮아요. 제가 갖고 올라갈게요. 들어가 보세요.”
그는 기사를 보내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다시 그녀가 없는 집으로 돌아왔구나. 외로움의 성전에서 오늘 밤 무엇을 할까?
쓸쓸한 시선 앞으로 승강기 문이 천천히 닫히려는데 누군가 밖에서 열림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다시 열리고 승강기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오빠! 이제 오는 거야?”
같이 사는 아내인 양 인사하는 그녀, 레이나였다.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왜는 왜야. 여기 사니까 여기 있지.”네가 여기 산다고? 너 작년에 이사 갔잖아?
강은 아찔한 현기증에 휘청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