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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51화 (51/92)

51화

어제는 일방적으로 당했다.

꾹 참고 거리를 지켜주던 한해는 수진의 허락에 기다렸다는 듯 도발했다. 그녀는 달콤함에 취해 이리저리 끌려다닌 기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녀도 조금 여유가 생겼다.

마치 키스할 것처럼 분위기를 잡는 한해에게 그녀가 한 수 던졌다.

지금 뭐예요? 내 입술이라도 훔치려고?”

“왜 안 되나?”

“첫 키스를 이렇게 하려고요?”

그녀의 노골적인 대사에 한해는 움찔했다.

“이렇게…… 지금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나는 첫 키스는 조금 더 로맨틱했으면 하는데.”

그의 손이 그녀의 턱에서 스르륵 미끄러졌다.

“뭐 두 번째나 세 번째, 혹은 167번째 키스라면 지금도 너무 좋을 것 같아. 하지만 첫 키스잖아요.”

“그러네.”

그러네? 아니 이 남자 뭘 믿고 이렇게 귀여워?

어제는 박력 오늘은 귀염이라는 건가?

이런 모드 설정이 설마 철저하게 계획된 건 아니겠지?

수진의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해는 침대에서 쓰윽 빠져나갔다.

“출근할 때 오빠가 태워줄게.”

“정말요?”

잠시 흐뭇해졌던 수진은 문득 깨달았다.

강이 차를 태워줬던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수십 번? 백번도 넘을 것 같은데.

학교로. 약속장소로. 직장으로.

예전에 같이 일했던 드라마 작가 중에 여행전문가 수준으로 세계 곳곳을 누비던 사람이 있었다.

그 작가와 밥을 먹다가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가 본 곳 중에서 최고의 여행지가 어디였냐고.

“제가 가장 많이 들어본 질문이에요. 제 대답은 늘 똑같았죠.”

그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가면 에펠탑도 그저 고철 덩어리일 뿐이고 노르웨이의 피오르도 그냥 관광지일 뿐이죠. 하지만 서로 좋아하는 사람과 가면 이름 없는 산도 절경이 되고 뒷골목 노점의 음식도 맛있는 추억이 되지요.”

결국 사람이고 마음인 것입니다.

그날 그의 결론이었고, 오늘 그녀의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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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선선하고 햇살은 맑았다.

잔잔하게 깔리는 보사노바 음악은 제목을 몰라도 멜로디가 친숙해 흥얼거리기 쉬웠다.

방향제를 따로 달아놓지 않은 차 안에서는 두 사람의 몸에서 나는 향이 섞여 새로운 향을 만들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운전을 시작한 한해가 처음 한 말을 수진이 바로 받았다.

“어, 그거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비좁은 방에서 먹고 자고 출근 준비를 하고 나오는데도 불편하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이천 원에 파는 작고 예쁜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을 챙겨 차에 오르는 동안에도 뭔가가 맘속에서 살랑거리는 기분.

분명히 출근길인데도 차를 타고 어디 놀러 가는 듯한, 그래 이건 이상한 기분이야.

“이제 나도 매일 이렇게 출근해야 할지도 모르겠네.”

한해는 며칠 전에 본 면접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사토시 씨가 있는데 붙여주지 않을까요?”

“사토시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붙으면 축하주 사줄게요.”

“떨어지면 위로주 사줄 거고?”

“엇. 둘 다 내가 사면 불공평하지. 붙으면 오빠가 사요. 떨어지면 내가 살게.”

“오케이.”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었다. 양손으로 핸들을 잡고 있던 한해는 오른손을 슬며시 내려 수진의 손을 잡았다.

“왜 이래요. 심장 떨리게.”

“미안. 커피인 줄 알았어.”

수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오빠가 이렇게 웃긴 사람인 줄 왜 예전엔 몰랐지?”

“웃길 기회를 안 줬으니까.”

그러네요. 운명은 우리한테 웃을 기회조차 주지 않았죠.

수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왜 아메리카노가 달지? 아무래도 내 감각이 이상해졌나 봐.

“우리 속도 조절 좀 하는 게 좋겠어요.”

“무슨 뜻이지?”

“매일 이렇게 만나다가는 큰일 나겠어요.”

“큰일? 그게 무슨 뜻일까?”

“알면서 얄밉게 그러지 마요. 나 처음 연애하는 기분이라 정신을 못 차리겠으니까.”

“완전 사기꾼이네. 결혼까지 한 사람이 연애를 처음 해본다니.”

“아 진짜 명치 한 대 때리고 싶다.”

“나는 진짜 처음이야. 머리에서 발 끝까지 전과는 다른 기분으로 살아나는 느낌. 나도 정신 못 차리겠어.”

“우리 주말엔 만나지 말고 쉬어볼까요?”

“왜 그런 힘든 제안을?”

“무서우니까. 감정의 속도가.”

한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다리는 거, 그리워하는 건 내가 제일 잘하는 거니까.”

내가 문제네. 내가 잘 버텨야 할 텐데. 보고 싶어서 쪼르르 달려 나가면 안 될 텐데.

금요일 아침, 그녀의 행복한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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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출근해서 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저 즐겁기만 했다.

어젯밤 야식으로 시작된 한해와의 투닥거림을 떠올리면 자꾸 웃음이 나왔고, 그에게 안겨 있던 순간을 음미하면 몸이 간질간질해졌다.

가끔씩 주고받는 메시지는 디저트처럼 달콤했다.

-나 면접 떨어졌나 봐. 왜 연락이 안 오냐.-위로주 얻어먹으려고 이러는 거 아님?-일단 위로주 먹고 나중에 붙으면 축하주 두 번 사주면 안 될까?-ㅋㅋㅋㅋㅋㅋ 신박한데?-우리 수진이 점심은 뭐 먹냐?-나한테 결정권이 없어요. 팀장님이 선택하겠지. 왠지 부찌?-팀장이 부대찌개 좋아함?-조상 중에 놀부 아니면 흥부가 있는 것 같아요.-나 30초 동안 이게 무슨 소리인지 고민함.-유머 센스 좀 길러요. 돈 벌 생각만 하지 말고. 문제는 퇴근한 뒤였다.

그와 함께 지냈던 어젯밤이 환영으로 되살아났다.

그는 없어도 있는 존재였다. 14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멍하니 침대에 누워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가장 궁금한 건 이거였다.

오빠도 내 생각을 할까? 내가 보고 싶을까?

그 질문 역시 14년 동안 했던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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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돈과 숫자와 씨름하다가 밤을 맞이했다.

한해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정원에 앉아 하루를 마무리하며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뭐라고 답할까?

지금까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은 언제였습니까?

바로 답할 수 있지. 어제였거든. 혹은 오늘까지.

하늘로 탁 트인 정원에 앉아서도 그는 좁디좁은 그녀의 방을 떠올렸다.

함께했던 어젯밤이 환영으로 되살아났다.

그는 어디에 있더라도 그녀와 함께였다. 14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밤하늘에 가장 빼어난 별 북극성을 보며 어딘가 존재할 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바다 위에서 떠올린 그녀의 모습은 북극성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동경해도 직접 만날 수는 없는 존재.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리움이 그리움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녀를 만날 수 있어.

그는 폰을 들어 메시지를 썼다.

-보고 싶어.

그리움이 넘쳐흘러 다른 감정을 모두 덮어버려, 다른 말을 붙일 필요가 없었다. 오직 보고 싶었다.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고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은 그다음.

그러나 그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그 역시 동의하는 바였기에.

나도 무서워. 감정의 속도가.

그는 보고 싶다는 말을 지우고 이렇게 써서 보냈다.

-잘 버티고 있니? 뭘? 이라고 물어본다면 우린 생각이 다른 거겠지.

-응. 아니. 버티기 힘들어요. 그녀의 답장을 보며 한해는 짜릿했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루만 더 참아보자.-하루! 그래요. 일요일엔 우리 산책이나 같이해요.-그래. 숙희 사장님 가게에서 생선구이를 먹어도 좋고.-아 생각만 해도 머릿속까지 고소해진다.-난 일찍 자려고.-지금 잔다고요?-깨어 있어봤자 너무 힘들기만 해서. 수진은 답장 대신 전화를 걸어왔다.

“뭐가 힘든데요?”

“알면서.”

“나 몰라. 알려줘요.”

“널 보고 싶은데 참는 게 힘들어.”

그녀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행이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네. 억울할 뻔했어.”

그녀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일찍 자려던 한해의 계획은 실패했다.

그들은 서로의 음성을 갈구하며 늦은 밤까지 수다를 떨었다. 1년 뒤에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시시한 내용이었지만 상관없었다.

*

금요일 밤은 유튜브도 넷플릭스도 웹툰도 끼어들 수 없었다.

한해와 한 시간 넘게 통화한 걸로도 모자라 그를 생각하다가 잠들어버렸다.

토요일인 오늘은 야화와의 약속이 있어 그나마 나았다.

시내에 있는 중식당에서 그녀를 만났다.

둘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야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피디님.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하시더니, 아주 좋아 보이는데요?”

“아…… 그런가요?”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맞다. 걱정할 만한 일이 있지. 그 사실은 여전히 변함없지.

수진은 만나자마자 우울한 대화는 하고 싶진 않아서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작품 이야기만 나눴다.

“작가님한테 이런 거 털어놔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개인사를 꺼낸 건 디저트가 올라온 뒤였다.

“사실 저 이혼소송을 준비 중이에요.”

야화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 그래요? 피디님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던 것 같은데…….”

“네.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많이 힘드시겠어요.”

“아니요. 이혼 결정을 내리기 전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아요.”

“그렇다면 이혼하는 게 맞겠네요.”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너무 괴롭고 혼란스러워서 작가님한테 상의드려볼까 생각도 했어요.”

“얼마든지요.”

“지금은 괜찮아요.”

야화는 가만히 수진의 얼굴을 관찰했다.

“정신적인 고통과 혼란을 혼자 극복해내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혼자가 아니어서요.”

“피디님의 이야기가 자꾸 궁금해지네요. 의사로서도 작가로서도 말이에요.”

수진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보냈다.

“작가님한테까지 시시콜콜 말씀드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은데요.”

“이런. 전 피디님하고 꽤나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제 이야기도 다 털어놓곤 했는데.”

그러고 보니 야화 작가도 자신이 겪었던 사랑의 환희와 슬픔, 그리고 이별까지 다 말해준 적 있었다.

“그럼 들어보실래요?”

“기꺼이!”

수진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이렇게 시작했다.

“오래전 어느 바닷가 마을에 소년과 소녀가 살았답니다.”

그녀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야화의 얼굴은 점점 굳어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강’과 ‘한해’라는 독특한 이름이 튀어나왔을 때 야화는 옅은 신음을 흘렸다.

“왜 그러시죠?”

수진이 이야기를 잠시 끊었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계속 들려주세요.”

야화는 손까지 내저으며 수진을 재촉했다.

*

의사에게는 비밀유지의 의무가 있다. 진료 과정에서 알게 된 환자의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노출시켜서는 안 된다.

이건 상식이나 양심의 문제뿐만 아니라 의료법 제19조에 떡하니 적혀 있고 이를 어기면 3년 이하의 징역형이나 벌금형에 처하는 범죄가 된다.

이번 일은 정말 애매하군.

야화는 기차역 플랫폼에 앉아 고민에 빠졌다.

어제 진수진 피디와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진수진 피디와 이강 씨가 부부라니. 게다가 이강 씨가 태화건설의 후계자라니.

상담을 하던 중에 수진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는 당연히 동명이인인 줄 알았는데, 바로 그녀였다.

이 사실은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계속 모른 척 둘을 대해야 하나?

보통 연인이나 부부 사이가 파탄 났을 때 양쪽의 이야기가 판이하게 다른 경우가 많은데, 강에게 들은 내용과 수진에게 들은 내용은 꽤나 많이 일치했다.

그녀는 수많은 상담을 진행해온 경력으로 둘의 이야기를 조합해보았다. 한 여자와 두 남자. 그리고 그들 곁의 또 다른 연인들. 소설로 쓰고 싶은 이야기가 그려졌다.

-오고 계십니까? 강으로부터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가 출장 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겠다고 하니 그는 무척 좋아하며 차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야화는 정중히 거절하고 이렇게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네. 곧 기차를 탈 예정이에요. 도착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도착하는 역으로 마중 나가 있겠습니다.-아니에요.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그러지 마세요.-최소한의 호의마저 거절하진 말아주세요. 서로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야화가 뜻을 굽혀 마중을 승낙했다.

기차가 도착했고, 자고 올 생각이 없었던 야화는 따로 짐 없이 핸드백만 들고 기차에 올랐다.

강에게 말해줘야 할까? 당신의 아내가 나와 함께 일하는 피디라고. 그녀의 상황도 다 들었다고.

기차가 출발하고 속도를 높이면서 야화의 고민도 가속도가 붙었다.

수진이 마음을 바꿔 강에게 돌아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이미 그녀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아니, 원래 사랑하던 사람에게 돌아갔지.

강이 마음을 바꿔 수진을 놓아줄 가능성은? 제로는 아니다. 다만 그녀 없는 그의 삶이 무너지지 않을지…….

이미 진료를 시작한 환자이기에, 그가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특정한 선택을 유도해선 안 된다. 그건 의사로서 책무를 저버리는 일.

그렇다면 수진 없이도 남은 생을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까?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

야화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차는 도시의 영역에서 자연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경계를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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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약속한 대로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야화를 차에 태웠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별말씀을요. 마침 시간이 났습니다.”

리무진 형태의 대형 세단을 운전하는 그의 모습을 야화는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수진으로부터 그가 재벌 2세라는 사실을 듣지 못했다면 의아했겠지만, 기사를 쉬게 하고 직접 차를 몰고 왔구나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신호대기에 차가 멈추자 강은 야화를 돌아보며 웃었다.

“매일 진료실에서만 보다가 밖에서 선생님을 만나니까 색다른 느낌이네요.”

야화도 미소를 보였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사실 환자와 상담자가 진료실이 아닌 공간에서 만나는 일은 정신과적 치료에 있어서 기피하는 일이긴 해요.”

“아…… 그런가요?”

“이강 씨가 많이 불안해하시는 것 같아서 예외적으로 온 겁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더 감사하군요. 그렇다면 제가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는데…… 좋지 않은 아이디어군요.”

“진료가 다 끝난 다음에는 모를까, 그전에는 안 됩니다.”

야화는 냉정하리만큼 잘라 말했고 강은 기분 나쁘게 듣지 않고 수긍했다.

“어디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요?”

“최대한 진료실과 비슷한 환경에서 말씀을 나누는 게 좋겠어요.”

“음. 그러면 회의실로 가시죠.”

강이 그녀를 이끈 곳은 태화건설 지방 지사 건물이었다.

일요일이라 출근한 직원은 없었고, 경비업체 직원이 회의실 문을 열어주었다. 열 명 넘게 들어갈 수 있을 만한 너른 회의실이었다.

야화는 직접 블라인드를 조절해 회의실 안의 밝기를 진료실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강을 마주 보고 앉은 그녀의 심경은 무척이나 복잡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보통 상담을 시작하기 전에 첫 질문은 가볍게 시작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미안해요. 속으로라도 먼저 사과부터 할게요. 저는 당신의 아내를 만났어요. 당신이 나에게 해주지 않은 이야기들까지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모르는 일들까지도 알고 있어요.

그녀는 절망했다. 강의 눈을 마주 보는 일조차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결국 상담을 망쳐버리고 말 거야.

첫 질문도 꺼내지 못한 채 안색이 파랗게 질린 야화를 보며 강이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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