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하다면서.” 50화
수진은 어이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랬지. 위험하다고 했지. 법을 잘 몰랐으니까 왠지 그럴 것 같아서.
“맛있게 먹어.”
약 올리려고 그러는 건지 그냥 가려는 한해의 손목을 잡았다.
“괜찮아요.”
“누구 맘대로 괜찮아?”
“변호사가 그랬어요.”
한해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알고 있었어. 판례가 여러 개 있더라고. 이혼의사가 오간 후에 벌어진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성실의무를 물을 수 없다고 했나? 만에 하나 문제가 되는 경우에도 최소한의 위자료만 지급한다고.”
“그런데 왜 얘길 안 했어요?”
“법은 법이고. 너 마음이 불편할까 봐.”
한해다운 대답이었다.
“저녁 먹었어요?”
“아니.”
먹었는데 나 때문에 안 먹었다고 하나?
한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수진은 못 본 척했다.
“같이 먹어요. 이렇게 보내는 게 마음이 더 불편하니까.”
“정 그렇다면.”
한해는 못 이기는 척했고 그 모습이 얄미웠던 수진은 가슴을 팍 때렸다.
“지금 싫은데 같이 먹어주는 거예요?”
“아냐. 그럴 리가.”
그는 여전히 웃음기를 거두지 않았다.
수진은 한해와 함께 집에 들어와서 갖고 온 음식을 싸구려 소반에 펼쳤다.
그가 직접 만든 요리는 명란 계란말이와 오돌뼈였다.
“뭐야. 이거 완전히 술안주잖아!”
“싫어?”
그 반대였다.
“너무 좋아서요.”
수진은 술안주라고 해놓고선 술도 없이 먹기 시작했다. 한해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며 가끔 장단 맞추듯 음식을 집어먹었다.
“맛은 어때?”
“이렇게 흡입하는 거 보면 몰라요?”
“예전에 배 탈 때 음식을 자주 만들었는데 제일 인기 좋았던 메뉴들 중에 골라봤어.”
“와. 배에서 이런 거 먹으면 진짜 더 맛있겠다.”
“수십 번은 먹은 것 같다. 그때마다 기도했는데.”
“나를 위해서?”
“아니. 나중에 내가 한 요리를 너랑 같이 먹는 날이 오기를.”
한해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수진은 음식을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맛있었다.
“전에 오빠 집에서 하루 신세질 때 라면 끓여줬잖아요. 막 해물 엄청 넣어서. 그것도 정말 맛있었는데.”
“이 정도 요리라면 수십 가지는 만들 수 있으니까 기대해.”
“우리 오빠는 싫어할 여자가 없겠네.”
“그러게. 나 좋다는 애들이 꽤 있더라.”
수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니 이 오빠가 오늘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네.
그래도 배부르게 먹여준 게 어딘가. 이렇게 빨리 달려와 준 것도 고맙고. 깜찍한 장난도 귀여웠어.
“자, 이제 배가 좀 찼으니 소주 한 잔?”
수진은 한해가 음식과 함께 포장해 온 소주를 꺼냈다.
그녀 혼자 가끔 편의점 도시락이나 먹으려고 산 플라스틱 소반은 술상으로 변했다.
수진은 핸드폰으로 잔잔한 느낌의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켰고, 맑은 소주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고작 이 정도가 전부였다. 단출한 안주와 소주 한 병, 핸드폰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노래. 그리고 그대와 나.
수진은 한참 대화에 빠져 있다가 깨달았다.
이게 전부네. 이거면 충분하잖아. 더 이상 행복할 필요는 없어. 그저 감사해.
이제 둘 사이의 연애가 법적으로 문제될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두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수진은 그가 고맙고 믿음직스러웠다.
“아, 술기운 때문인가?”
“왜? 어지러워?”
“약간. 어디 기댔으면 좋겠는데 의자가 없네요.”
한해는 잠깐 뭔가를 생각하다가 그녀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몸을 착 붙여 앉더니 그녀의 머리를 자기 어깨에 툭 얹었다.
“이런 의자는 어때?”
수진은 피식 웃고는 가만히 기대고 앉아 있었다.
평온한 척했지만 그녀의 심장은 만들어진 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뛰고 있었다.
얼굴은 어찌나 붉게 달아오르는지.
“우리 수진이 몸이 안 좋은가?”
“왜요?”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그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있지만 아파서 그런 건 아닌데.
“몸은 괜찮아요.”
“아 그래? 난 또 어제 이사하느라 힘들어서 몸살기라도 있는 줄 알았지.”
“몸살이라도 있으면 간호라도 해주게?”
“꼭 안고 재워주려고 했지.”
수진은 그에게 끌려가는 기분이 들면서도 저항할 수 없었다.
아, 이런 게 연애질인가? 나는 처음 해보잖아. 멈출 수가 없네.
“사실은 몸살기가 좀 있어요.”
한해는 인상을 쓰고 그녀를 보다가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우리 수진이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그녀는 놀림을 당하는 것 같아 이를 지그시 물었다.
지금껏 참고 당하기만 했던 그녀는 강에게 보여주고 말해주고 싶었다.
봐봐. 나 지금 당신이 그토록 끔찍해하는 한해 오빠와 같이 있어.
이건 단순히 당신에 대한 복수가 아니야. 우리의 결혼이 끝났다는 선언이라고.
나를 비난한다면 그렇게 해. 이제 난 욕 먹고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으니까. 나쁜 여자가 될 수밖에 없다면 나쁜 여자가 될 테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빼앗겼던 내 진짜 삶과 사랑을 되찾을 테니.
“오빠. 오늘 같이 있어줘요.”
그녀의 결론이었다.
한해는 그녀의 복잡한 신경을 아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술상을 치우고 간단하게 씻은 뒤 침대에 누웠다.
침대가 좁아서 둘이 누울 자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수진은 한해의 품에,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인 양 안겼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뛰던 가슴은 모두지 진정할 줄을 몰랐다.
따뜻하고 든든하다. 이 세상 그 어떤 거짓도 폭력도 나에게 닿을 수 없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가 짜릿하게 소름이 돋았다가 입안이 달콤해지기를 무한 반복하는 밤이었다.
강한해 씨. 당신은 알까? 지금 내가 얼마나 떨리는지?
내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는 날개를 달고 마구 날아다니는 기분이란 말이야.
어둠 속에서 그의 음성이 그녀의 귓속으로 흘러내렸다.
“수진아.”
“네.”
딱 한 음절을 발음하는데도 그녀의 목소리는 떨림을 숨길 수 없었다.
“우린 둘 다 남들이 당연하게 누려야 할 것들은 너무 오래 참으며 살았어.”
“맞아요. 나도 오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행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어.”
“나는 있는데. 많은데.”
“난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확신했거든.”
그의 손길이 그녀의 머리칼을 천천히 쓸었고, 그 느낌은 파도처럼 그녀의 신경에 밀려왔다.
어둠과 정적 속에서 그녀의 감각은 몇 배나 더 예민해졌다.
“이렇게 너를 안아주고.”
그의 입술이 정수리에 닿는 느낌. 처음이다.
“이렇게 너의 체취를 확인하고.”
정수리에서 뺨으로 그의 입술이 미끄러지는 느낌. 역시 처음이다.
“이렇게 너의 뺨에 입 맞추고.”
수진은 기절할 것 같았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그런데 그의 입술은 더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이마에 툭 가볍게 부딪치고는 끝이었다.
“잘 자라고 뽀뽀해주는 날이 올 거라고 믿었어.”
후우…… 수진은 그에게 들리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그는 머리를 계속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타이르는 듯했다.
그녀는 술에 취한 척 먼저 선을 넘어버릴까 몇 번이나 고민하다가 그냥 품을 파고들었다.
법적으로는 괜찮더라도 아직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으니.
그래도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볼륨을 낮춰놓은 핸드폰에서는 쇼팽의 야상곡이 시작되었다. 녹턴 2번의 애잔한 선율이 부드러운 강물처럼 흐르고 또 흘렀다.
그녀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몇 번이고 다짐했다.
당신을 잃지 않을 거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악마가 나타난다 해도 당신을 빼앗기지 않을 거야. 한 번 빼앗긴 걸로 족해.
*
타앙- 소리와 함께 골프공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태화 회장은 나이에 비해 근력이 무척 좋았고, 한창 나이인 강도 골프로 그를 이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지방 출장을 가 있는 강을 이 회장이 찾아왔다. 좋아하는 골프장에도 들를 겸.
라운딩을 마친 뒤 시원한 아이스티 한 잔씩을 놓고 아버지와 아들이 마주 앉았다.
아침 태양도 밝고 바람도 선선하고, 완벽한 날씨였다.
“수진이하고는 가끔 연락하냐?”
“네. 며칠 전에 통화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이 회장은 마치 업무를 보고받는 태도였다.
강은 가감 없이 현재 상황을 전해주었다. 그녀가 변호사를 선임할 계획이고, 다음 주에 소송이 시작될 거고, 소송 중에 기사화도 고려하고 있다는 말까지.
“그렇게 하면 수백억 위자료라도 뜯어낼 수 있을 거라고 변호사가 바람을 넣었나 보지?”
이 회장은 아이스티를 꿀꺽 마셨다.
“수진이하고 얘기를 해본 결과…… 돈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바보 같은 놈. 그런 말에 속아 넘어가다니.”
“소송을 안 하고 합의를 해주면 재산분할 없이 그냥 이혼하겠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그렇게 말하겠지.”
강은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수진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이 회장에게는 어림없었다.
“너도 너지만 나는 그 아이 못 보낸다.”
“누나하고 닮아서요?”
“그저 닮았다는 말로는 부족해. 나중에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지금은 왜 안 됩니까?”
“너는 아직 나의 비밀을 감당할 만큼 강하지 못하니까. 지금도 넌 그냥 이혼을 해버릴까 망설이고 있잖아. 나약한 자식.”
강은 흠칫 놀라 아이스티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왜? 마음을 들켰냐?”
“저도 그렇고 우리 회사도 그렇고 언론에 안 좋은 이슈로 다뤄지면 이미지 손실이 막대합니다.”
“풉.”
이 회장은 웃음을 터뜨리며 잔을 내려놓았다.
“그건 옛날 얘기지. 요즘 사람들은 기업인의 사생활과 기업의 가치를 철저하게 분리해서 생각한다.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들을 볼까? 형제끼리 소송하고 의절하고, 자식이 마약하고 자살하고, 불륜에 혼외자식에…… 문제가 없는 재벌가가 있냐? 그렇다고 그 회사가 망해?”
강은 재벌 2세 모임을 떠올려보았다. 아버지의 말대로 태반이 문제투성이 집안이었다.
“중요한 건 회사의 실적이야. 요즘 사람들 재벌가에서 외도하고 이혼하는 정도 문제로 주식을 던지고 불매운동 하지 않아.”
강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대꾸하지 않았다.
이 회장은 그의 속마음을 다 읽은 눈빛으로 눈알을 굴리다가 중얼거렸다.
“그 이유가 아닌 것 같은데?”
“그 이유도 있고…… 또…… 이런 식으로 수진이를 잡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이가 우리 집안 외에 다른 건 모조리 포기하도록 만들어야지.”
이 회장은 파이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사람이 왜 자꾸 딴생각을 하는 줄 아니?”
그는 파란 하늘을 향해 연기를 높이 뿜어 올렸다.
“다른 선택이 있기 때문이야. 선택할 게 없으면 딴생각을 하지 않아. 그저 주어진 길을 걸어갈 뿐이지.”
“수진이의 다른 선택을 막을 길이 있습니까?”
“있지. 되도록 쓰면 안 되는 방법이긴 하지만.”
언제나 거침없이 말하던 이 회장도 말끝을 흐렸다.
말이 끊긴 부자의 침묵 사이로 이름 모를 새 소리가 지저귀었다.
강은 수진이 전화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난 당신도 당신 회사도 다치는 거 원하지 않아.’어쩌면 나도 같은 마음일까? 그녀를 가질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녀를 다치게 하고 싶진 않잖아?
“수진이는 손 안 댈 거야.”
이 회장은 여전히 아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어차피 그 아이에게 여러 가지 선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한해가 전부잖아? 뭐 어쩌면 지금도 같이 있을지도 모르지. 처음엔 무서웠겠지만 지금쯤은 깨달았을지도. 둘의 관계를 드러내는 편이 이혼을 더 빨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이를 꽉 다문 강의 턱이 실룩거렸다.
“어쨌든 그놈만 없어지면 다시 갈 곳 없는 처지가 되는 거잖아?”
“아버지. 지난번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는데 어쩌시려는 건지…… 걱정됩니다.”
“무슨 걱정? 내가 그놈을 죽이기라도 할까 봐?”
이 회장은 골프 코스 너머 먼 산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수십 년 맨바닥에서 사업을 일으키는 동안…… 걸리적거리는 녀석들이 꽤나 있었지. 내 손에 피를 묻힌 적은 한 번도 없어.”
이 회장은 아들에게 주름진 손을 들어 보이고는 찡긋 윙크했다.
“그러니 걱정 마라. 허허허.”
강은 또다시 혼돈에 빠졌다. 이런 이야기까지도 야화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
꿈을 꾸었다. 너무나 환상적인 배경이어서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자각몽이었다.
첫 무대는 결혼식장이었다. 그녀는 눈부신 웨딩드레스 차림. 곁에는 똑같이 하얀 턱시도를 입은 한해가 서 있었다.
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꿈의 배경은 무대는 호텔.
벽과 지붕은 온통 하얀색이었고,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눈이 멀어버리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새파란 색이었다.
여긴 어디지? 지중해 연안의 국가 같은데? 그리스?
상관없어. 어디면 어때. 오빠와 함께 있는데.
창마다 드리운 커튼이 산들바람에 산들산들.
둘은 하얀 시트가 깔린 푹신한 침대에 누워 서로를 어루만졌다.
“사랑해.”
되풀이해서 고백해도 또 하고 싶은 말. 사랑해.
꿈에서조차 오빠를 안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촉감은 너무 생생해 현실 같았다.
꿈과 현실이 뒤섞이는 경험이랄까.
입을 맞추고 서로의 살결을 느끼고 체온을 나누고…… 격렬한 움직임 속으로 호흡이 뒤엉켰다.
잠깐만. 이거 분명히 꿈인데 왜 진짜 같지? 막…… 만져지잖아?
수진은 그제야 멈추고 싶지 않은 꿈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지중해의 호텔이 아니라 원룸 오피스텔이었지만 한해의 품인 건 꿈과 똑같았다.
아…… 맞다. 나 어제 오빠한테 안겨서 잤지.
한해는 아직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 포근함을 또 언제 느낄지 모르니 조금 더 즐겨볼까?
그녀는 한해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조금 더 용기를 냈다. 한해의 셔츠 속에 손을 넣어보았다.
와…… 단단하다……
“어디까지 하려고?”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뭐야! 안 자고 있었어요?”
“응. 아까 깼지.”
“그런데 눈 감고 자는 척했어요?”
“자는 척한 적 없는데?”
“아…… 나도 지금 막 깼어요. 잠결이라서…… 꿈인 줄 알고 그랬던 거고.”
“그랬다니? 막 내 옷에 손 넣고 그런 거?”
“아 진짜 황당하네.”
수진은 괜히 화난 척 침대에서 나가려고 했는데, 한해가 손을 잡더니 쉽게 품으로 데려왔다.
참 이상한 일이지. 강 오빠는 그냥 손만 잡아도 뼈까지 아팠는데, 한해 오빠는 이렇게 휙 잡아끄는 데도 아프기는커녕 손목까지 달달한 것 같아.
“우리 수진이 밥 좀 많이 먹어야겠다. 몸이 이렇게 가벼워서야.”
“나 은근 속살 많은데.”
“그건 안 봐서 모르고.”
그는 보석을 품듯 그녀를 꼭 안았다. 이 촉감이 금방 꾼 꿈같아서 수진은 스르륵 눈을 감고 여운을 즐겼다.
“아까 너무 선명한 꿈을 꿨어요.”
“정말? 나도 생생한 꿈을 꿨는데.”
둘은 서로 먼저 꿈 내용을 말해보라고 티격태격하다가 가위바위보를 했고 한해가 졌다.
“음. 나는 사실 이 꿈 여러 번 꿨어. 우리가 결혼하는 꿈인데, 결혼식은 곧장 신혼여행지로 이어져. 아마도 산토리니섬 같아. 꿈속 이미지가 너무 선명해서 내가 찾아봤거든. 벽과 지붕은 온통 하얀색이고, 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눈이 멀어버리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새파란 색.”
수진은 소름이 쫙 끼쳤다.
“잠깐만요! 그 꿈을 오빠가 꿨다고?”
“지금도 꿨고 예전에도 여러 번 꿨어.”
“나도 똑같은 꿈 꿨는데! 이거 너무 소름이다…….”
“정말이야?”
“아 너무 꼭 붙어 자서 그런가!”
“그런가 보다. 나는 지금 그 생각도 난다. 내가 배 타기 전에 같이 잤던 날.”
“아…… 내가 무섭다고 같이 있어달라고 해서…….”
“응. 세상에서 제일 슬픈 밤이었는데.”
그날 밤의 기억 역시 둘 다 선명하게 기억했다.
수진은 그날 밤 키스를 하려고 했다. 첫 키스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오빠와 연결된 인연의 끈이 그냥 툭 끊어져버릴까 봐.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겨우 그조차도 못했다.
“우리 참…… 너무 많이 슬펐다.”
“이제는 그러지 말아요. 아직 힘든 일들이 많이 남았지만 웃으며 힘들어합시다.”
“그러려고 지금도 같이 있잖아. 이제 우리 수진이 곧 출근해야겠네.”
“아니에요. 좀 일찍 일어났으니까 아직 여유 있어요.”
“그렇다면 조금만 더 조몰락거리고 있을까?”
한해는 그녀의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하지 마요. 머리 감지도 않았는데.”
“좋아. 네 살냄새. 세상에서 제일 좋아.”너무 달다. 당신의 목소리는 머리가 쨍할 정도로 달아.
“강한해 씨. 지금 밤 아니거든요? 아침 해가 떴어요. 그런 말 이제 하지 말기.”
“원래 사랑은 아침에 나누는 사랑이 진짜라고 배웠는데?”어느새 파고든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