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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49화 (49/92)

49화

칵테일 바는 전화통화를 하기는 조금 시끄러웠다.

로비로 나와서 전화를 받을 때까지 그 짧은 순간에 강은 뭐라고 인사할지 고민했다.

오랜만이야? 오랜만도 아니잖아. 호들갑스럽고.

안녕? 이상해. 바보같아.

전화 기다렸어? 음. 너무 매달리는 느낌이야.

결국 한 음절만 튀어나왔다.

“어.”

그래놓고 나서 후회했다. 이름이라도 불러줄걸.

어, 수진아. 이렇게.

“통화 괜찮아?”

그녀 역시 인사를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태세였다.

“응. 출장 와 있어. 혼자 있으니까 편하게 통화해도 돼.”

“짐은 잘 옮겼어. 옷가지하고 화장품 정도만 빼냈으니까 당신 쓰는 물건들은 안 건드렸어.”

“필요한 거 있으면 갖고 가도 괜찮은데.”

“아니야. 내 돈으로 산 것들도 아니고.”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잖아.”

“당신이 돈으로 나를 잡아두려고 해서 하는 말이야.”

잡아두려고 한다는 표현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러나 분노로 이어지지 않도록 심호흡을 했다.

“어제 변호사하고 상담을 했어.”

“그랬구나. 뭐라고 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 감정적으로 듣지 말고 정말 진지하게 들었으면 좋겠어.”

수진의 목소리는 밤 열 시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우리 변호사는 승리를 자신하고 있어. 변호인단의 크기나 돈의 문제가 아니야. 나는 그냥 일반인이지만 당신은 사람들이 다 아는 재벌 기업의 상속자야. 이혼소송이 시작되면 당신의 유책사유를 내세울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언론에 이 사건이 알려질 수도 있어.”

아무리 침착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강은 또 고삐를 놓쳤다.

“진수진. 너 지금 나를…… 아니 우리 회사를 협박하는 거냐?”

“아니. 협박하지 않으려고 미리 대화를 나누려는 거야. 일을 크게 만들면 피해입는 건 당신과 태화건설이야. 난 당신도 당신 회사도 다치는 거 원하지 않아.”

“까불지 마. 명예훼손이라는 게 있어.”

“그것도 알아봤지. 허위사실 유포라면 모를까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그렇게 큰 문제도 아니야. 게다가 당신은 사회지도층이라고 할 만한 자리에 있으니까 더더욱 명예훼손으로 날 공격하긴 힘들대.”

“치사하다는 생각 들지 않냐?”

“맞아. 치사하지. 말했잖아. 치사해지기 싫어서 전화한 거야.”

“소송 포기하고 이혼에 합의해라?”

“응. 자기 입으로 결론을 내려줘서 고마워.”

강은 호텔 로비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서 벌써 변호사를 찾아갔어?”

“난 급해. 시간이 돈이니까. 당장 월세랑 변호사 비용 감당하는 것도 나에겐 공포야.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하고, 되도록 소송을 안 했으면 해.”

“그렇게 거지같이 돈 걱정 하면서 살 필요 없잖아! 나랑 같이 살면 그깟 변호사 몇 명이라도…….”

“이강 씨. 이래서 내가 당신하고 살 수 없는 거야.”

“너 지금 돈 걱정하고 있잖아.”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돈 걱정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건 당연한 거야. 돈 걱정하기 싫어서 결혼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니까. 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나는…….”

수진은 거기까지 말하고 말을 끊었다. 강이 남은 말을 대신했다.

“넌 사랑하는 강한해 오빠하고 결혼하고 싶은 거잖아.”

“당신 또 왜 그래.”

“솔직해지자, 진수진.”

“솔직해지면 나 놔줄 거야?”

지금껏 없었던 그녀의 반응이었다. 늘 한해 이야기가 나오면 멈추려고만 했는데.

강은 핸드폰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늦은 밤 호텔 로비의 쓸쓸한 정취가 안개처럼 드리워 있었다.

사치스럽게 꾸몄지만 사람은 몇 없이 휑한 공간. 누추하지만 사람들로 북적이는 야시장과 정반대의 느낌.

이곳은 꼭 나를 닮았네.

그는 겨우 감정을 다스리고 다시 통화를 이어나갔다.

“그래. 솔직해져봐. 널 놓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솔직한 마음을 알고 싶긴 하다.”

“지금 당신이 이 통화를 녹음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이 통화 녹취를 나중에 재판 때 증거로 쓴다고 해도 겁나지 않아. 나는 이혼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당신처럼 외도를 저지른 적이 없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한해 오빠와의 미래에 대해 당신이 묻는다면…….”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그래. 지금 초라하고 휘청거리는 나에게 한해 오빠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야. 나는 한해 오빠와 연애를 시작할 거고, 언젠가 한해 오빠와 결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확신에 찬 그녀의 목소리가 강의 고막을 찔렀다.

강은 실제로 날카로운 물체에 귀를 찔린 사람처럼 고통스러워했다.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고 몸을 뒤흔들었다. 수진에게까지 신음이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고통을 모르는 수진은 계속했다.

“당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우린 이미 부부일지도 모르지.”

우리…… 너와 한해 그 새끼가 우리?

당신. 우리. 평범한 단어들이 비수가 되어 그의 심장을 난자했다.

그는 더욱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구겼다.

누군가 그를 봤다면 심근경색이라도 일으킨 환자로 착각하고 구급차를 부를만한 지경이었다.

“이렇게도 생각해봤어. 우리 부모님이 태풍으로 돌아가셨을 때, 정말 갈 곳 없던 나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거둬준 은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당신의 마음을 받아준 이유도…… 아마 그런 부채감이 깔려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 말은 하지 마. 그러면 내가 더 초라해지잖아.

강은 입술이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그 호의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해. 당신과 아버님이 베풀어준 안락한 호의도 마찬가지로 감사해. 돈으로 갚아야 한다면 평생 갚을게. 하지만 몸과 영혼을 팔아서 갚아야 하는 빚은 이 세상에 없어.”

강은 겨우 숨을 내쉬고 목에 걸린 말을 뱉어낼 수 있었다.

“갚으라고 한 적 없어.”

“그렇다면 나를 놔줘.”

“당신을 붙잡고 있는 건 빚의 담보로서가 아니야. 내가 당신을 사랑…….”

“그만!”

수진이 소리를 질렀고, 강의 표정은 다시 무너졌다.

“이것도 폭력이야. 알아? 당신이 내 몸을 움켜쥐고, 나를 바닥에 내던지는 것만 폭력이 아니라 이렇게 사랑을 강요하는 것도 폭력이라고!”

“그럼 나는 어쩌면 좋으니?”

“나를 놔줘.”

“네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바로 그 상실감이 강의 진실한 감정이었다.

“정신 차려. 이미 당신에겐 내가 없어. 법적 부부라는 알량한 관계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고. 제발 날 잔인한 사람으로 만들지 마.”

“잔인한 건 아는구나.”

“피를 묻혀야만 끝나는 일이라면…… 피를 묻혀야지.”

“너의 피는 아닐 테니까.”

“다음 주까지 변호사가 답을 달라고 했어. 이대로라면 이혼소송을 시작할 수밖에 없어.”

강은 이를 꽉 물고 말했다.

“해봐. 그깟 소송. 피 좀 보자.”

수진은 말이 없었다.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진 것 같기도 했다.

“우리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그게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전화가 끊기고도 강은 한참 더 핸드폰을 들고 있다가 내려놓았다.

호텔 로비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다시 칵테일 바로 가서 혼자 술을 더 마실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술에 취해 감당 못 할 상황을 만들 것 같아서.

그는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토록 처절하게 외로울 때 연락할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냐?

가족도 친구도, 이럴 때 불쑥 연락해 하릴없는 대화라도 나누며 그저 인간의 온기를 얻을 만한 사람이…… 아…… 하나 있네.

그는 레이나를 떠올렸다.

내가 그랬었나? 그녀에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윽박질렀던가?

민망하긴 하지만 지금 단 한 사람이라도 호의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몇 번이나 전화를 걸까말까 망설이면서 쉽게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

.

.

레이나는 파티에 참석 중이었다.

그녀와 잠시 사귀었다가 헤어진 야구선수의 생일 파티였다. 자주는 아니어도, 이별 후에도 친구처럼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이여서 초대를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작년에 리그 최다 안타를 때려내며 스타 반열에 오른 그였기에 클럽을 통째로 빌려서 연 파티에도 적잖은 셀럽들이 참석했다.

스포츠 스타들은 물론이고 방송인, 연예인, 구단 쪽 재벌 2세들까지 흥겨운 파티를 즐겼다.

최근 일주일 정도 강의 영상을 몰아 찍느라 일만 했던 레이나는 오랜만에 흥겨운 분위기에 몸을 맡겼다.

한참 신나게 춤을 춘 뒤, 샴페인 잔을 들고 클럽 밖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었다.

“레이나 씨 맞죠?”

고개를 돌려보니 깔끔한 노타이 슈트 차림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하얀 피부에 뚜렷한 이목구비, 포마드로 깔끔하게 정돈한 머리. 자신감 있는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남자는 얼굴이 눈에 익었다.

“누구시더라?”

“이런. 제 얼굴을 모르시다니. 더 열심히 일해야겠네요. SBC 방송국 아나운서 이현민입니다.”

“아! 이제 알겠다. 어디서 많이 뵌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다이아몬드 수저 아나운서 맞죠?”

“아, 그 별명은 좀 과장되어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거 봤는데. 맞다. 아버님이 여기 구단주라고?”

“네, 그건 맞아요.”

“그 정도면 다이아몬드 수저 맞지. 반가워요.”

레이나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현민은 활짝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아까 클럽에서 노는 모습을 봤는데 역시 끼가 대단하시던데요.”

“어머. 저를 훔쳐보셨어요?”

“뭐 그렇다고 해두죠. 너무 매력적이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날라리라는 얘긴가? 하하.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파티의 여왕이라는 말씀은 들었어요.”

“끙. 부끄럽네요.”

“전화번호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지내고 싶습니다.”

현민은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까지 하며 핸드폰을 건넸다.

레이나는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참 잘생겼네. 티 하나 안 묻고 컸어. 야구단을 거느릴 정도로 부잣집에서 태어나 얼굴도 잘생기고 말도 잘하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방송국 아나운서까지 됐지.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네. 영혼도 얼굴처럼 태도처럼 반듯할 거야.

그런데 어쩌지? 난 당신처럼 다 멀쩡한 사람은 별로야. 전혀 끌리지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레이나는 활짝 웃으며 현민의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영광이네요.”

그녀는 자기 번호를 찍고 통화버튼을 누른 뒤에 돌려주었다.

“종종 연락하며 지내요. 이현민 아나운서님.”

“감사합니다. 제가 더 영광이고요. 오늘 즐거운 시간 보내고 들어가시길!”

현민은 손을 들어 하이터치까지 하고 먼저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나는 도시의 불빛들 사이로 흐릿한 별들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랬다.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은 별자리를 타고나는 것과 같아서, 자꾸 실패하면서도 평생 비슷한 방식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그녀는 강과 수진에서 이어지는 한해와 자신, 그리고 레오와 소월 등등의 고리를 떠올렸다.

어쩌면 우린 비슷한 사랑의 별자리를 타고난 사람들일지도 몰라.

어김없이 강의 얼굴이 밤하늘에 떠올랐다.

내가 당신을 뺏을 날이 오기는 올까? 만약 오지 않는다면 허무할까?

그녀는 강이 깜짝 놀랄 일을 준비 중이었다. 어쩌면 그 일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시도하는 구애의 방법이 될지도 몰랐다.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려서 깜짝 놀랐다. 금방 번호를 받아 간 이현민 아나운서인가 싶었다.

휴우. 급하기도 하지. 하지만 어쩌나? 난 아직…….

액정에 강의 번호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쓸쓸한 감상에 젖어 있던 레이나의 얼굴이 금방 환하게 밝아졌다.

음음,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웬일이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를 다 주시고.”

“뭐해.”

강의 목소리는 무심하고 지쳐 있었다.

또 그녀에게 상처받은 건가? 그래서 나에게 위안을 찾으려고?

레이나는 예전과는 다른 식으로 그를 대할 생각이었다.

“놀고 있지. 파티에 왔어. 전 남자친구가 오늘 생일이어서.”

“전 남자친구 생일?”

레이나는 야구선수 이름을 말했고 강은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클럽에서 간만에 춤도 추고, 남자들한테 번호도 따이고. 재밌네.”

“신나 보이네.”

“응. 신나게 놀고 있어. 당신은?”

“난 출장 와 있어.”

“목소리에 힘이 없네?”

“뭐…… 피곤해서 그런가.”

“일찍 자. 괜히 멀리 가서 몸살 걸릴라.”

이 정도로 얘기했으면 전화를 끊는 게 보통인데 오늘따라 강은 그러지 못했다.

당신…… 오늘 많이 외롭구나. 그런데 어떡하지? 내 작전은 오늘 밀어내는 건데.

레이나는 가슴에 차오르는 연민을 애써 부정했다.

“내가 지난번에 좀 심하게 얘기한 것 같아서 미안하다.”

“지난번에? 뭐?”

레이나는 정확히 알면서도 모른 척, 무심한 척했다.

“그…… 아니다.”

“오빠. 급한 거 아니면 다음에 통화할까? 나 잠깐 바람 쐬러 나왔는데 클럽에 들어가 봐야 해서.”

“괜찮은 남자라도 만났냐?”

“난 몰랐는데 나 좋다는 남자들이 이렇게 많네? 하하.”

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레이나는 가슴이 아팠지만 꾹 참았다.

미안해, 오빠. 하지만 내 목표는 당신의 위안이 되어주는 게 아니라 당신의 연인이 되는 거야.

“얼른 자. 안녕!”

레이나는 일부러 더 쿨하게 인사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안 좋은 마음을 애써 외면하고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정상급 디제이가 믹스해내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저마다 잘났다는 남자들의 시선을 받고, 샴페인과 위스키의 세례를 받으면서, 겉으로는 웃고 환호하면서도 레이나는 강을 지워내지 못했다.

불쌍한 당신. 그리고 불쌍한 나.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서로 사랑할 수밖에 없어.

당신은 그 사실을 언제 깨달을 건데?

그래서 마지막 선물을 준비했어. 곧 받게 될 거야.

그게 나의 마지막이야.

.

.

.

견디기 힘든 밤이네.

강은 처참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뜩 술에 취하고 싶은 유혹을 겨우 참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는 고독에 관한 사념을 멈출 수 없었다.

원래 이런 건가? 원래 인생은 혼자인 건가? 아니잖아. 수진이에겐 강한해가 있고 강한해에겐 수진이가 있잖아.

레이나는? 늘, 언제나, 손만 뻗으면 잡히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이제 지친 건가? 이제 레이나마저 날 떠나는 건가? 그럼 난…….

그래. 레이나에게도 내가 잘못했지. 많이 잘못했지. 하지만…….

강은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조급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야화를 만나면 약이라도 처방받아야겠다 싶었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버렸다.

잔인한 밤이네. 너무 잔인해.

*

-별일 없으신가요? 밤늦게 도착한 야화 작가의 메시지를 보고 수진은 아차 싶었다.

요 며칠 회사 일에 소홀했다. 야화 작가는 숙제 검사 맡듯 매일 작업한 원고를 보내주었지만 수진이 따라가지 못했다.

지금도 일상의 리듬이 엉켜버렸다. 원래는 간단하게라도 저녁을 챙겨 먹었어야 하는데 남편하고 길고 소모적인 통화를 하느라 밥시간을 놓쳐버렸다.

야화 작가에 이어 도착한 한해의 안부 메시지도 이런 상황을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수진은 속이지 않고 답장했다.

-밥 때 놓쳐서 배고파 죽겠음ㅠ 오빠는 먹었어요?

“윽. 진짜 배고프다.”

그녀는 혼잣말을 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야화에게는 뭐라고 답장을 해줘야 할지 쉽지 않았다. 그저 안부만을 묻는 메시지가 아님은 확실하니까.

고민 끝에 수진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미안해요, 작가님. 제가 요즘 너무 게을렀죠? 개인적인 문제가 있어서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었어요. 이제 정신 차리고 작품 챙기겠습니다! 그저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노트북을 켜고 야화의 소설을 열어 읽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서 편의점에서 라면이라도 사 올까 했는데 일단 작품을 다 읽은 다음으로 미뤘다.

소설 내용은 여전히 흥미진진했다. 배고픔을 잠시 잊게 할 정도로.

며칠 동안 밀린 내용을 다 따라잡고 간단하게 모니터를 쓰려는데 야화 작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러신 것 같았어요.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제가 무료로 상담해드릴게요^^아 맞다. 우리 작가님. 정신과 의사였구나.

그녀는 작품 내용에 관해 모니터를 쓴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죄송하기도 하고 얼굴 뵌 지도 꽤 되는 것 같은데 작가님 시간 괜찮으실 때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상담도 받을 겸ㅠ야화 작가는 금방 흔쾌히 답장을 보냈다.

-저는 이번 주말 저녁도 괜찮아요. 피디님만 괜찮으시면. 그렇게 야화 작가와 주말 약속을 잡았다.

밤 열 시가 넘었지만 너무 배가 고파 편의점에 가려고 막 옷을 챙기던 참이었다.

-야식 배달시켰어. 한해의 메시지였다.

-엥? 우리 집으로?-이러려고 주소 받은 거잖아.-어제도 오빠한테 얻어먹었는데 이러면 너무 미안하잖아요.-미안하면 나중에 더 잘해. 그러면 너무 좋겠네. 오빠한테 마음껏 잘해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메뉴가 궁금했지만 뭔지 물어보지 않고, 허기에 비례해 커지는 기대감을 즐겼다.

얼마 안 있어서 벨소리가 들렸다.

인터폰 화면으로 현관 앞을 확인했다. 모자를 눌러쓴 배달원이 야식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수진은 현관문을 열고 음식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를 전하고 문을 닫으려는데,

“맛있게 드세요.”

배달원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설마? 수진은 다시 문을 열어보았다. 이미 복도를 걸어가는 배달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수진은 홀린 듯 쫓아나가 그를 막아섰다.

“저기. 혹시…….”

볼캡을 쓴 배달원의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한해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아…… 뭐예요. 직접 온 거야?”

“직접 한 요리니까 직접 갖고 왔지.”

“그런데 왜 그냥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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