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초밥이 땡기는데.” 48화한해는 딱 삼 초 동안 할 말을 잃었다가 대답했다.
“초밥 좋지.”
그날 한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연속 두 번 똑같은 메뉴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나마 초밥 종류가 많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레일 앞에 나란히 앉아 초밥을 먹던 수진이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사실 오늘 휴가예요.”
“그래서 여기까지 나와서 밥을 먹는구나.”
“오늘 이사해요.”
“정말? 미리 말해주지. 내가 도와줄 건 없고?”
“그 집에 오빠가 오는 건 좀 위험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밥 먹는 거하고 집에 들락거리는 거하고는 다르니까.”
한해는 호텔에 등장했던 의문의 여자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혼자서 힘들 텐데.”
“어차피 별로 짐도 없어요. 옷가지는 커리어 몇 개에 담아 차에 실어뒀고, 다른 짐이라고 해봤자 뭐.”
“가구는?”
“침대는 이따 오후에 오기로 했고, 필요한 것들은 천천히 사려고요.”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
“응. 그럴게요. 오늘처럼. 초밥 먹고 싶었는데 고마워요.”
“나도 맛있게 먹었어.”
한해는 거짓말을 하며 터질 것 같은 배를 쓸어내렸다.
“오빠 그거 까먹고 있었죠?”
“그거? 뭐?”
“우리 편지 주고받기로 한 거.”
“맞다. 오늘 줄까?”
“그래요. 나도 챙겨왔으니까.”
“늦게라도 주인을 찾아가서 정말 다행이다. 부치지 않은 편지는 너무 슬프잖아.”
“나도 몇 번을 버릴까 싶었는데.”
“어딨는데?”
“차에. 이런 건 짠하고 같이 교환해야죠.”
“그래. 그럼 우리 집으로 가자.”
이번에는 수진이 모는 차를 한해가 얻어 탔다. 트렁크는 물론이고 뒷좌석에도 캐리어가 가득 실려 있었다.
“어제 변호사 만난 얘기 안 해줬죠?”
수진은 운전을 하면서 상담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고민 중이에요.”
“변호사 말도 일리가 있는데?”
“네. 맞는 말이에요. 그런 방법이 아니고선 태화건설이라는 배경을 상대할 수 없을 테니까요.”
“강이는 뭐래?”
“아직 얘기 안 해봤어요.”
“강이한테 얘기해봐. 이태화 회장 입장에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모르겠어요. 그분은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라.”
한해는 사토시가 해준 말을 수진에게 해주었다.
“모든 일을 신사적으로 조용히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때론 피가 튀고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승부도 해야 하니까.”
수진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노력해보려고요. 피를 흘려야 한다면 덜 흘리고, 흙탕물도 덜 튀기게.”
그녀는 한해의 집 앞에 차를 대고 기다렸다. 집에 들어간 한해는 잠시 뒤 큼직한 상자를 들고 나왔다.
“와…… 이게 다 편지예요?”
“다 읽으려면 며칠 걸릴걸? 편지라기보다는 일기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나만의 항해일지라고 해야 하나.”
“내 편지가 너무 초라해지네.”
수진도 편지를 모아놓은 구두상자를 물물교환 하듯 건네주었다.
한해는 보물처럼 상자를 끌어안았다.
“난 하루에 딱 한 통씩만 읽을 거야.”
“왜요?”
“한꺼번에 다 읽기 너무 아까우니까.”
“어릴 때 쓴 건 엄청 유치할 텐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
“우리 약속해요. 편지 읽은 소감은 서로 말하지 않기로!”
“굿 아이디어!”
그날 밤 수진은 가구도 제대로 들여놓지 않은 새 오피스텔에서 편지를 읽었다.
한해의 편지는 봉투에 번호까지 적혀 있어서 순서대로 읽기가 편했다.
초반에 쓴 편지에는 졸지에 모든 것을 잃고 바다로 쫓겨난 소년의 두려움과 고통이 가득했다.
-그거 아니? 배에는 죽은 동물들이 꽤나 있어. 항구에 있을 때 들어왔다가 배가 떠나는 걸 모르고 그냥 갇혀버린 애들이야.
비둘기나 참새 같은 육지 새도 있고, 쥐도 종종 있지. 오늘은 고양이 한 마리가 죽은 채로 발견되어 바다에 버렸어.
문득 녀석이 내 신세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난 어쩌면 이렇게 배에서 평생을 보내야 할지도 몰라.
나쁜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매일 노력하지만 오늘 반쯤 썩은 고양이 시체를 치우면서 무너져버렸어.
수진아. 매일 너를 위해 기도하니까 오늘만은 나를 위해 네가 기도해줘.
분노와 절망의 틈바구니에서도 그녀를 향한 걱정과 그리움은 들꽃처럼 피어 있었다.
-오늘은 쿠알라룸푸르에 잠시 들렀어. 귀선 시간이 느지막하게 잡혀 있어서 시내를 느긋하게 돌아다녔지.
페르로나스 트윈 타워라는 빌딩 알아? 정말 밑에서 보면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높은 건물 두 개가 나란히 솟아있지.
그 사이로 해가 지는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 그래서 오늘 즉석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어.
편지에 즉석카메라 사진이 붙어 있었다.
스무 살쯤 되었을까? 파릇파릇한 청년 한해가 초고층 트윈타워 사이에 서 있었다.
아…… 내가 대학입시를 준비할 즈음이었겠네. 이때 오빠는 이런 모습이었구나. 이때도 잘생겼네.
수진의 손끝이 사진 위를 맴돌았다.
한해의 손끝도 그녀의 사진 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녀가 편지와 함께 넣어둔 사진 속에는 교복을 입고 찍은 그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오늘 친구하고 싸이에 올릴 사진을 엄청 찍었어. 나는 요즘 살이 쪄서 찍기 싫었는데 나중에는 그냥 에라 모르겠다 생각하고 막 찍었어.
오빠 못 본 지가 벌써 1년이 넘었어.
언제 연락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이 동생에게도 인내심의 한계라는 게 있다는 걸 알아두라고!
이러다가 나 남친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매일매일 오빠를 위해 기도해.
보고 싶어. 미치도록 보고 싶어. 오빠를 만나면 한 시간 동안 안고 있을 거야.
한해의 눈에 천천히 눈물이 고였다.
그랬구나. 우리는 똑같았구나. 서로를 그리워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그는 수진의 어린 시절 사진을 핸드폰으로 찍어 담았다. 당분간 매일 꺼내볼 것 같았다.
입술을 삐죽 내민 귀여운 소녀에게서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 있어?
마침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수진의 메시지였다.
-나 오늘 망한 것 같아. 벌써 두 시간째 오빠 편지 읽고 있어요. 아까워서. 한 글자, 한 글자가 너무 아까워서. 아직 반도 못 읽었지만 이 말은 꼭 먼저 하고 싶어서요.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나만 당신을 그리워한 게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줘서 고마워요. 우리가 얼마나 예뻤는지 알려줘서 고마워요. 한해는 몇 번이나 그녀의 메시지를 되풀이해서 읽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 아름다운 세월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너와 결혼할 거야. 피 흘리고 흙탕물이 튀더라도. 미안해지더라도. 욕을 먹더라도. 많은 것을 잃더라도.
*
하루 종일 지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다 보면 시간관념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소월은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와 햇살을 맞이했다.
“아, 따숩다. 가끔 광합성을 해줘야 해.”
혼자 작업을 하다 보니 말할 상대도 없어 이럴 때 가끔 혼잣말도 했다.
“뭐야. 혼자 중얼중얼.”
심드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레오가 서 있었다.
“너야말로 뭐냐. 오면 온다고 말을 하지.”
“심쿵하게 해주려고.”
“야. 너는 그런 스타일 아니라니까.”
“그런 얘기 지금 실컷 해. 언젠간 내 매력에 흠뻑 빠질 테니까.”
레오는 도도하게 말하고는 소월의 손을 잡았다.
“뭐야. 갑자기 왜 손 잡냐?”
“오늘부터 1일이니까.”
“웃겨. 누구 맘대로.”
“어차피 좋아하게 될 거라고 몇 번 말해.”
“아오, 이 자식을…… 명치 한 대 쎄게 칠까?”
“작업한 거나 좀 들려줘봐.”
레오는 소월의 손을 잡고 지하 작업실로 내려갔다.
소월은 문을 닫고 미디작업을 대충 마친 곡을 플레이시켰다.
“오, 이번 건 느낌 좋은데?”
레오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래? 실연의 아픔을 생생하게 담아내서 그런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소월을 보며 레오가 빙긋이 웃었다.
소월 누나. 이제 정말 내려놨구나. 다행이야.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갈게.
그는 몇 번 더 노래를 들어보더니 제안했다.
“이 부분에서 기타를 빼고 피아노가 들어가면 어때?”
레오는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고선, 키보드에 손을 얹더니 바로 건반을 두드렸다.
“코드만 짚어주는 거지. 심플하게.”
“그러다가 2절 넘어가서는 기타를 얹어주고?”
“그렇지. 바로 그거야.”
소월은 작업실 구석에 세워두었던 기타를 들고 레오와 함께 연주했다.
한 번도 같이 맞춰본 적도 없는데 함께 활동이라도 해온 듀오처럼 합이 척척 맞았다.
둘은 하이터치를 짝 소리 나게 쳤다.
“1절은 누나가, 코러스에서 내가 같이 들어갔다가 2절은 나 혼자, 그리고 그 뒤로 같이 부르면서 끝나는 건 어떨까?”
“아예 듀엣곡으로 바꾸자?”
“한번 해볼까?”
둘은 미디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놓은 반주 위에 각각 기타와 키보드를 연주하면서 즉석에서 노래를 불러보았다.
서로의 파트를 들어주다 함께 눈을 보고 노래하고 마지막에는 화음까지 이뤄내었다.
노래가 끝난 뒤 소월은 뿌듯한 가슴으로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와, 진짜 훨씬 낫네.”
“누나. 이거 나랑 같이 제대로 만들어서 한번 발표해볼까?”
“너 진짜 마음에 들어?”
“뭐가? 이 노래가 아니면 누나가?”
조금만 방심하면 훅 치고 들어오는 레오였다.
소월은 허를 찔린 듯 입술을 꾹 물었다.
레오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더 깊이 들어왔다.
“마음에 들어. 놓치고 싶지 않아.”
노래가? 내가? 소월은 여전히 헛갈렸지만 선뜻 확인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던 레오가 손을 들어올렸다. 소월은 놀라 침을 꼴깍 삼켰다.
뭘 하려고?
그는 그녀의 축 늘어진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이런 거 하지 마.”
소월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노래하는 데 방해될까 봐 그런 건데?”
레오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약 올리듯 생글거렸다.
좁은 작업실 안에서 둘의 호흡이 엉켰다.
소월은 왠지 레오를 똑바로 보기 힘들어졌다.
왜 예전에는 몰랐지? 이 녀석의 목소리가 이렇게 부드러운지. 입술이 이렇게 붉은지…….
*
알람소리에 눈을 떴다.
아…… 진수진 인생 진짜 버라이어티하다.
결혼 전에 오피스텔에서 살다가, 드넓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강과의 신혼집에서 지나다가, 일주일 넘게 호텔방을 전전하다가,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어제 새로 도착한 매트리스와 침구의 질은 신혼집에서 썼던 최고급 제품들과 비교할 수준조차 되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100억짜리 집에서 살다가 보증금 1억에 월세 50만 원짜리 집으로 왔는데 큰 타격이 없다니. 내가 둔감한 건가?
침대에서 빠져나와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이를 닦고 씻은 다음, 아침에 필요한 물건들 리스트를 적었다.
일단 커피값을 아끼려면 캡슐 커피머신을 하나 사는 게 좋겠어.
중고로 알아보니 절반 가격에 쓸 만한 물건이 있었다.
집에서 밥을 해먹을 일이 별로 없을 테지만, 사과랑 햇반, 계란 정도는 사놓고 아침을 해결하자.
가습기도 중고로 알아봐야 하고, 세탁기에 쓸 그물망, 세제…… 물은 계속 생수를 사 먹어야 하나 정수기를 들여야 하나……
일단 그 정도만 사고 최대한 돈을 아끼는 방향으로 구매 리스트를 줄여보자.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한해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옆에 있었으면 배달까지 해줬을 텐데. 짧은 메모와 함께 커피 쿠폰을 보냈다.
어쩜 지금 딱 필요한 걸 알았을까?
어젯밤 늦게까지 한해의 편지를 읽다가 잠 들었는데, 전날 밤의 벅찬 감동이 아침 인사 덕분에 되살아났다.
그녀도 답을 보냈다.
-내 맘 속에 CCTV라도 설치해놓은 건가? 출근길에 커피 마시려고 했는데! 고마워요. 당분간은 거지 신세라 선물 거절도 못 하겠네. 금방 메시지가 다시 왔다.
-주소 알려줘.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직접 못 가니까 집들이 선물 보내줄게. 가디언이 따로 없네, 우리 오빠.
100억짜리 집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충만함이 그녀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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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자마자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른 아침부터 이혼 전문 변호사와 통화하는 일이 유쾌하진 않지만, 감내해야 하는 현실이니까.
수진은 회의실에서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피디님. 생각은 좀 해보셨어요?”
“네. 진행하는 걸로 할게요.”
“잘 결정하셨어요. 어차피…….”
수진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대신. 딱 일주일만 시간을 주세요. 그사이에 마지막으로 남편을 설득해볼게요.”
“설득이 될 거라면 벌써 합의이혼으로 결정하지 않았을까요?”
“마지막으로 설득해볼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좀 다른 질문인데요. 이렇게 이혼소송을 진행하는 중에 제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외도가 되나요?”
“혹시 그때 말씀하신 그분?”
“네. 그렇다고 연인관계였다거나 이런 건 아니고요. 제 말은 같이 밥을 먹는다거나 집을 왕래한다거나 하는 일이 문제가 될까 싶어서요.”
“잘 여쭤보셨어요. 그런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당사자 간에 실질적으로 혼인이 파탄이 난 이후에 다른 상대를 만났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변호사님도 실제로 그런 사건을 다룬 적 있나요?”
“그럼요. 마침 제가 바로 직전에 진행했던 이혼소송에서도 딱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저희 고객은 남편분이셨고요.
몇 달 전에 합의의혼을 하겠다고 서로 구두로 이야기를 하고 녹취까지 했는데 아내분이 이혼을 해주지 않고 시간을 끌던 상황이었죠. 그 즈음에 남편분이 다른 여성분과 교제를 하고 숙박업소에 드나든 장면을 아내분이 사진을 찍어 위자료를 더 청구하려고 했지만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아…… 그렇군요.”
“오히려 혼인이 실제로 파탄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어 소송이 더 쉽게 진행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움츠릴 필요는 없습니다.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잘 먹고 잘 자고 행복하게 싸워야 오래 싸울 수 있습니다.”
?변호사와 통화를 마친 수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가, 강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다시 울적해졌다.
이강 씨. 우리 더 나빠지지는 말자. 지금도 충분히 나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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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 아파트는 늘 부실시공, 하자보수 문제에 시달린다.
어느 브랜드, 어느 단지든 간에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경우는 없다. 다만 얼마나 정도가 심한지, 건설사에서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하다.
건설사 대표가 직접 하자보수를 요구하는 주민들과 만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분노한 주민들과 비용을 최소화해야 하는 회사 입장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자리니까.
그러나 강은 부회장이 된 뒤 천 세대 이상의 대단지 아파트 하자보수 관련해서는 직접 업무를 챙기겠다고 선언했다.
오너가 직접 나선다는 사실 자체가 주민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고, 동시에 미리 부실시공을 막는 효과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실제 현장을 보고 여러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우는 것도 많을 거라고 믿었다.
그의 예상은 대부분 적중했다.
불만에 차 있던 주민들은 오너 아들이자 부회장이 직접 협상장에 나온다는 사실에 적잖게 누그러졌고, 이런 소문을 들은 아파트 시공 현장에서는 더욱 긴장하고 꼼꼼하게 시공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회사 쪽의 과실이 큰 경우, 강은 정말 호되게 현장 책임자들을 질책했기 때문이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주민들과의 협상장에서 막 빠져나오면서, 고객대응 부서 총 책임을 맡은 윤 이사가 연신 감탄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부회장님을 뵈었지만 이렇게 훌륭한 경영자로 성장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윤 이사는 이태화 회장의 비서로 오래 일한 경력이 있었고 강이 학창시절에 자주 만났던 사람이기도 했다.
“제가 싹수가 노란 편이었나 봐요?”
기사가 문을 열어주는 차에 윤 이사와 나란히 탄 뒤 강이 농담처럼 되물었다.
“하하하. 그런 뜻은 아니고. 워낙 생각이 깊고 신중한 성격이어서 건설회사와 잘 맞으려나 걱정하긴 했죠. 그런데 이렇게 현장까지 직접 챙기는 모습에 다들 놀라고 있습니다.”
“외관이나 고급화 관련한 요청은 천천히 진행하더라도, 지하주차장 크랙이나 결로 관련한 요청은 최대한 빨리 해결해주도록 하세요. 그리고 반드시 그때그때 주민들에게 보고를 해주시고요.”
“네네. 정확한 지적이십니다.”
윤 이사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여기까지 내려오신 김에 식사는 제대로 하셔야죠. 여기로 모시겠습니다.”
그는 미리 예약해둔 지방 맛집으로 강을 데려가서 점심을 먹었다.
밥을 먹고 곧장 오후 일정까지 마친 강은 지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격려하고 지사장이 마련한 저녁 회식 자리까지 참석한 뒤에야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넥타이만 풀고 침대에 드러누운 그의 입에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피곤하다.”
몸은 뻣뻣해질 정도로 피곤했지만 일에 몰두하다보니 오히려 마음은 편안했다.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 단순노동에 몰입하면 머리가 맑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그는 샤워를 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호텔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호텔 주위를 한 바퀴 산책하고 로비에 있는 칵테일 바에서 진토닉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씻어냈다.
바 구석에서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무명가수의 라이브를 들으며 오랜만의 평온을 맛보았다.
역시나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마자 수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야화 선생님이 그랬다.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생각을 흘려보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그는 수진의 SNS를 살펴보았다. 여행용 캐리어를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특별한 설명은 없었지만 강은 사진에 담긴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이 캐리어 안에는 너의 짐이 들어 있겠지. 이혼을 결심하고 신혼집에서 챙겨간 옷가지들 말이야.
그런데 어쩌지? 너는 결국 그 캐리어를 끌고 우리 집으로 다시 들어오게 될 거야. 언젠가는…….
그녀에게 간단한 메시지를 남겼다.
-짐은 잘 챙겨갔어? 나는 출장을 와 있어. 어떤 집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건강 잘 챙기면서 지내길 바랄게. 도움이 필요하거나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 망설이지 말고 연락하고. 그는 메시지를 보내기 전에 찬찬히 읽어보았다. 야화가 경고했듯,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내용은 아닌지 고민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그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 진토닉 잔을 비웠다.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수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