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47화 (47/92)

47화

수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변호사는 자신 있게 말을 이었다.

“대기업이 가장 꺼리는 일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기업 이미지 하락과 오너 일가의 사생활 노출이죠. 이 건은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걸린 문제입니다.”

“제 이혼을 기사화하겠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제 전략은 미디어 활용입니다. 지금 수진 씨가 말해준 남편분의 행동들은 언론에서 환장하고 달려들 먹잇감이죠. 태화건설 후계자의 불륜! 폭력! 집착!"수진은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지만 변호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했다.

“아마 태화건설 쪽에서는 엄청난 법조팀을 동원해서 재판에 임할 생각이겠지만 판단 미스! 재판을 하기 전에 여론재판에서 박살나고 두 손을 들 겁니다.”

“명예훼손으로 제 쪽에서 역공을 받을 수도 있지 않나요?”

“좋은 지적입니다. 명예훼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수진 씨가 두려워하는 건 허위사실로 상대를 비난했을 경우죠. 이럴 때는 문제가 커질 수 있죠. 그러나 언론에 공개되는 내용들이 사실이라면 형량이 훨씬 줄거나 아예 없어집니다.”

수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설명을 들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형법 제307조 1항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310조에는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예외 사유를 정하고 있고요.”

“아, 말이 어렵네요.”

“쉬운 말로 하자면, 형량 자체가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가볍다는 얘기죠. 게다가 최근 경향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무죄가 나오는 케이스도 꽤 많습니다. 실제로 전 세계에서 명예훼손을 형법상 범죄로 처벌하는 국가는 몇 나라 안 됩니다. 간통죄나 낙태죄처럼 나중에는 없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변호사님께 말씀드린 내용들은 다 사실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너무 겁먹지 마시죠. 우린 이길 수 있습니다.”

수진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운 것을 보고 변호사는 돈 얘기로 옮겨갔다.

“정확한 금액은 예단할 수 없지만 최소 1%라고 해도 그게 얼맙니까? 수십 억대는 되겠죠? 저는 끝까지 재판으로 결론내지 않고 중간에 합의로…….”

“변호사님 잠깐만요.”

결국 수진이 손을 들고 그녀를 막았다.

“제가 고객이잖아요. 변호사님은 저한테 유리한 쪽으로 재판을 진행하셔야 하고요.”

“네. 그렇죠. 그래서 확실하게 이혼소송을 이길 수 있는 필승 전략을 말씀드리고 있잖아요.”

“제가 원하는 게 그런 방식이 아니라면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돈을 원하지 않아요.”

변호사는 소송 상대가 태화건설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놀랐다.

“그럼…… 왜 소송을 합니까?”

“저는 가능한 한 서로 상처 없이 빠른 이혼을 원합니다.”

변호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서로 상처 없는 빠른 이혼이라. 그건 마치 동그란 네모 같은 말입니다. 빨리 이혼하려면 확실하게 상처를 입혀 승부를 끝내야 하거든요. 돈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무리 이혼소송이 진흙탕 싸움이라지만…… 저는 그이를…… 그리고 그이의 회사를 망신주고 싶지 않아요.”

“워워. 잠깐만요. 그게 우리의 유일한 무기라면?”

“정말 유일한가요?”

변호사는 숨을 고르고 평정을 찾았다.

“정 의심이 된다면 다른 변호사를 찾아가보시죠. 아마 저보다 더 노골적인 전략을 내놓을 걸요? 저보다 더 큰 돈을 기대할 거고요.”

“저는 정말…… 정말…….”

“정말 이혼을 원하기는 하는 겁니까?”

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분명히 이혼을 원합니다. 하지만 망신을 주고 협박하고 돈을 뜯어내는…… 이런 방식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방식밖에 없다면?

.

.

.

같은 시간.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한해에게 사토시 씨가 찾아왔다.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왔네.”

그는 모니터들이 늘어서 있는 한해의 업무공간을 둘러보았다.

“몇 달 전투를 벌여보니 어떤가?”

“솔직히 처음에는 하루 1%씩만 수익을 낸다는 목표가 쉬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쉽지가 않더군요. 원래 목표에는 한참 못 미치는 결과를 기록 중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그 결과를 보고해보게.”

따로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 없었다. 투자와 관련된 모든 수치는 한해의 머릿속에 다 들어 있으니까.

지금까지 수익률은 14%가 조금 넘어서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사토시는 누적 수익률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월 평균 수익률을 듣고 난 뒤 직접 PC에 앉아 트레이딩 프로그램을 띄웠다. 거래내역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사토시의 눈빛이 매처럼 날카로웠다.

한해는 선생님에게 숙제 검사를 맡는 학생의 심정으로 가만히 기다렸다.

“제법이네.”

PC 의자에 앉은 채 몸을 휙 돌린 사토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장이 썩 좋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상당한 실력이야.”

“요 며칠 매도 전략을 잘못 가져가서 많이 잃었습니다.”

“그러게. 지주사 주식은 더 일찍 정리했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포트폴리오에 넣지 말거나.”

구체적인 분석에 한해는 감탄했다.

“선생님은 요즘도 투자를 하십니까?”

“장은 확인해보지. 투자야 우리 팀에서 하는 거고.”

“팀이요?”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고 들렀네.”

사토시는 의자를 권했고 옆에 서 있던 한해는 마주 보고 앉았다.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내 재산 대부분은 각국에 흩어져 있는 부동산이야. 그래도 적지 않은 규모로 금융투자도 하고 있다네. 사무실은 역삼동에 있고 팀장 하나, 팀원 넷. 모두 다섯 명이 관리하고 있지.”

“그렇군요. 몰랐습니다.”

“주로 채권에 투자하기 때문에 다들 그쪽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지. 그런데 팀장은 주식 쪽으로 투자영역을 확대하겠다는 의견을 오래전부터 밝혀왔지.”

“선생님 생각은요?”

“나는 쭉 반대해왔지. 최근 몇 년간 상당히 보수적으로 자산운용을 하는 전략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팀장 녀석이 답답했는지 일을 그만두겠다는 거야.”

사토시는 한숨을 깊이 쉬었다.

“일해보겠다는 사람 의욕을 내가 너무 꺾었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녀석이 원하는 대로 투자 영역을 확대해볼까 해. 그래서 자네를 찾아왔네.”

그는 명함을 하나 꺼내 한해에게 건네주었다. ‘SH 인베스트먼트 팀장’이라는 직함과 세 글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우리 팀장한테는 자네 얘기를 해두었어. 국내 주식 파트를 맡아줄 담당자로 한번 일해볼 생각 있나?”

“제가요?”

“어차피 지금 하고 있는 일이잖나.”

“규모가 다를 텐데요.”

“굴리는 돈의 자리수가 달라지긴 하겠지. 그래도 기본은 채권으로 가져갈 셈이니 무서워할 액수는 아니야.”

한해는 명함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전화를 걸어서 한번 만나보게.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니 팀장한테 일임하겠다고 했어. 다른 후보들도 여럿 있으니 다 만나본 다음에 고민할 테지.”

“아, 그렇다면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보수라든가 근무 환경이라든가 이런 것도 팀장한테 듣도록 해. 난 잘 몰라.”

사토시는 무릎을 쓱쓱 문지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그 친구 말이야. 수진이.”

“네.”

“언제 숙희네 한번 같이 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좋아할 거예요.”

한해도 일어나서 사토시를 배웅해주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나가는 그에게 정중하게 감사인사를 했다.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내가 고맙지. 잘해줘서.”

사토시는 한해의 어깨를 잡은 채로 잠시 마주 보았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물러설 수는 없어. 알고 있지?”

“수진이 일 말입니까?”

“응. 태화건설 2세라고 했나?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야.”

한해는 며칠 전에 걸려온 이태화 회장의 전화를 떠올렸다. 아직 이혼소송도 시작 안 했는데, 미리 겁을 주려했던 걸까?

“각오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신사적으로 조용히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때론 피가 튀고 흙탕물을 뒤집어쓰는 승부도 해야 하는 법일세.”

한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었다. 예의와 동정은 잠시 내려놓고, 싸운다.

.

.

.

같은 시간. 강은 야화의 진료실에 앉아 있었다.

야화는 강의 표정을 살피다가 물었다.

“오늘은 어딘가 좀 급해 보이시네요.”

“상담이 끝나는 대로 공항에 가야 해서요. 출장을 떠납니다. 그래서 말인데…….”

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제안을 꺼냈다.

“혹시 화상통화로도 상담을 진행할 수 있을까요?”

“출장에서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한 일주일은 걸릴 텐데 그사이에 두어 번 더 뵙고 싶어서요.”

“일단은 저와 진행하는 이 세션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하네요.”

“많은 의지가 됩니다.”

“하지만 화상으로 진행하기는 좀 곤란할 듯싶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면밀히 관찰하면서 상담을 진행해야 하는데 화면으로는 잡아낼 수 있는 반응들이 있으니까요.”

“그럼 조금 더 무리한 제안을 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혹시 제가 출장 가 있는 곳에 와주실 수는 없을까요? 왕진이라고 해야 할지.”

야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의사들이 왕진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저 같은 정신과 의사가 그러는 경우는…….”

“진료비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원래 진료비의 열 배 정도?”

야화는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강을 관찰했다.

“저와의 상담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군요.”

“그게 나쁜 겁니까?”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죠. 게다가 이강 씨는 아내분에게 집착하는 심리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잖습니까. 이 상담 자체에도 그런 경향을 보이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이 시간은 이강 씨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저에게 선생님과의 시간은…… 신경안정제 같은 느낌입니다.”

야화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죄송합니다. 표현이 너무 솔직하셔서. 만약 그렇다면 효과는 얼마나 지속되는데요?”

“몇 시간은 확실하고. 길면 며칠. 그래서 제안을 드린 겁니다. 불안해서요.”

“왕진이라…… 그건 이따가 상담이 끝나고 스케줄을 확인해보도록 하죠. 아내분이 이혼소송을 할 거라는 얘기까지 했죠.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요?”

“호텔에서 지내다가 집을 따로 구했다고 연락이 왔더라고요.”

“아…… 그러면 일단 별거 생활은 길어지겠군요.”

“짐을 빼간다고도 연락이 왔어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어땠나요?”

“아까 신경안정제라고 표현했잖습니까. 그런데 수진이와 관련한 일에는 듣지 않아요. 아내가 짐을 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볼까요?”

“저는 진심으로 사과하고 잘해보려고 하는데 아내는 저를 떠날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요.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가 일고…… 배신감도 느끼고.”

강은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가 남은 감정을 다 털어놓았다.

“질투심도 여전합니다.”

“그 남자분에 대한 질투?”

“네. 저는 알아요. 아내는 집에서 나간 뒤에도 그 사람을 여러 번 만났을 겁니다. 저를 떠날 궁리만 하면서요.”

“불륜을 의심하는 건가요?”

“어느 정도는요. 냉정하게 생각하면 아닐 것 같은데…… 솔직히 털어놓자면…… 어떤 장면이 예언처럼 떠오르곤 해요.”

찬찬히 듣고 있던 야화가 손가락을 곧게 세웠다.

“잠깐만요. 어떤 장면이 예언처럼 떠오른다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건 무슨 뜻일까요?”

강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픈 상처를 내비칠 때의 표정이었다.

야화는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고, 결국 강이 입을 열었다.

“둘이 엉켜 있는 장면이요. 그 장소는 침대일 때도 있고 바닷가일 때도 있어요. 가끔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떠오르기도 하고요. 너무나도 생생해서…… 손이 떨릴 정도예요.”

야화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건 심각한데요. 한 번이라도 실제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나요?”

“그 정도로 노골적인 스킨십은 아니지만 비슷한 장면은 몇 번 본 적 있지요. 어릴 때 둘이 애정 섞인 눈빛을 주고받던 광경을 옆에서 보면서 괴로워하기도 했고.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혼여행 중에 둘이 만났던 장면도 직접 봤고요.”

“혹시 아내분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도 그런 상황이었나요?”

“네. 그런 장면이 눈앞에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야화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뿐 말이 없었다.

“약이라도 처방받아야 할까요?”

“그건 조금 더 상담을 진행해보고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사실 출장을 가는 이유도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의도도 있습니다. 아내와 같이 있던 집에 혼자 지내다 보니 마음이 더 괴로운 것 같아서요.”

“그럴 수 있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선생님이 말씀하신 숙제를 해봤습니다.”

“숙제? 혹시 어머님 말씀인가요?”

“네. 어머니하고 둘이 식사를 했어요.”

강은 그날 느낀 감정과 가능성에 대해 한참 이야기를 했다.

“딱 한 번이었는데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자주 함께 시간을 갖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훨씬 좋아질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관계가 좋아진다고 해서 그게 아내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 믿고 계속 노력해주시죠.”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길에 아내한테 문자를 보냈거든요. 차분한 마음으로 아주 좋게 써서 보냈어요.”

그는 야화에게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오늘도 병원에서 상담치료를 받고 왔어. 효과가 있는 모양이야. 마음이 꽤나 편해졌어. 당신이 기꺼이 나에게 돌아올 정도로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밖에 있더라도 잘 챙겨먹고 건강 잘 챙기길 바라. 언제나 너를 생각하고 너를 사랑해.

“아내는 메시지를 읽고도 한참 동안 답을 안 했고 저는 초조해졌어요. 그때 또 아내와 한해가 같이 있는 건 아닌가 의심도 들었고요. 결국 한참 뒤에 답이 왔는데 그게 저를 미치게 만들었죠.”

-나 지낼 곳을 구했어. 내일이나 모레 짐을 옮길 생각이야. 당신 출근한 동안 들를 테니 신경 안 써도 돼. 야화는 가만히 메시지를 뜯어보았다. 그 아래 강이 보낸 답도 보였다.

-마침 잘됐네. 나 일주일 정도 출장 갈 예정이거든. 편하게 짐 옮겨.

“아내분의 문자가 이강 씨를 미치게 만들었다고 하셨는데 좀 더 자세히 감정을 살펴볼까요?”

“보셔서 알겠지만 저는 진심으로 아내를 걱정하고 애정을 담은 문자를 보냈는데, 아내는 고작 짐을 빼겠다는 냉정한 문자를 보냈잖아요. 저의 성의가…… 사랑이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어요. 아내가 오히려 일부러 더…….”

그때를 떠올리면서 강의 음성에 힘이 들어갔다. 야화는 손을 들어 막았다.

“잠깐만요. 이건 정신과 상담의 영역은 아닌 것 같지만 말씀드릴게요. 지금 이강 씨는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고 있잖아요. 이강 씨에게 폭행을 당하고 외도 사실도 알게 되어 집을 나간 아내분인데, 다정하고 애정 넘치는 마음을 갖기 어려운 상황 아닐까요?”

꽤나 격한 반응에 강은 이를 지그시 물었다.

“남녀의 차이를 떠나 이건 인간 대 인간으로 너무 이기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경고장이라도 드리고 싶네요.”

“네. 맞아요. 경고장 받을 만합니다. 저도 알아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그러는데 수진이한테만 자꾸 그렇게 이기적이 되고, 감정이 격해지네요.”

“수진이? 아내분 성함이 수진인가요?”

“네. 왜요?”

“제가 아는 분하고 이름이 같아서요. 뭐 흔한 이름이니까.”

“아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준지도 오래되었네요.”

야화와 강은 같은 사람의 얼굴을 동시에 떠올렸다.

야화는 단순히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요즘 소설에 대해 수진의 피드백이 뜸해 서운하던 참이었다.

강은 수진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나는 널 이토록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다시 원망하는 감정이 샘솟았고, 야화의 경고를 되새기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내가 또 일방적으로 사랑의 감정을 강요하고 있는 건가?

그는 야화가 출장지로 와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

하루 휴가를 낸 수진은 오랜만에 신혼집을 찾았다.

출장 중이니 편하게 짐을 빼라는 메시지를 받았지만 왠지 강이 집에 있을 것 같아 심장이 떨리기도 했다.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르고 들어간 집은 약속대로 비어 있었다.

그녀는 잠시 거실을 둘러보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번이 마지막일까? 이제 다시 이 집에 올 일은 없을까?

고작 몇 달을 살아서 그런지 집 자체에 대한 정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쓸쓸한 기분으로 일어난 그녀는 벽에 걸린 결혼사진을 마주했다.

결혼사진을 찍을 때의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 14년 만에 살아 돌아온 한해 때문에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으니까.

그녀는 사진 속에서 자신만만하게 서 있는 강을 보며 물었다.

당신 어떡할래? 재판이 시작되면 당신과 당신 회사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망신을 주라는데. 그래도 재판까지 가야겠어? 나 이제 놓아주면 안 돼?

문득 궁금해졌다. 이혼한 부부들은 결혼사진을 어떻게 처리할까? 집안 깊숙이 처박아놓을까 아니면 불태우기라도 할까?

견디기 힘든 슬픔이 그녀를 휩쌌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가구와 전자제품은 갖고 갈 물건이 없었다.

여행용 커리어에 옷가지를 채우고, 화장품을 따로 담고, 서재에 있던 책도 정리하고, 추억의 작은 물건들을 살피던 그녀의 바쁜 손이 멈췄다.

아아…… 옅은 탄식과 함께 결국 눈물이 차올랐다.

*

사토시 씨의 금융자산을 관리하는 ‘SH 인베스트먼트’의 사무실은 역삼동 테헤란로에 있었다.

한해는 정장을 입고 팀장을 만나 간단한 면접을 보았다.

천재 공학도 같은 인상을 주는 팀장은 무척 말이 빠르고 표정이 없는 타입이었다.

그는 쉴 새 없이 투자기법과 전략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국내 기업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질문들도 거리낌 없이 했다.

한해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바로 대답을 했고, 그때마다 팀장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30분 넘게 속사포처럼 빠르게 이어진 질문세례에서 겨우 살아남았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면접 결과는 며칠 안으로 알려드리죠. 다른 분들도 몇 분 더 계셔서.”

“네. 꼭 함께 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강한해 씨가 마음에 드네요. 이력도 아주 특이하고. 바다를 누비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투자를 보는 시야도 아주 넓은 것 같고.”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한해는 정중히 인사하고 사무실을 떠났다.

면접 때문에 오늘은 오후에만 일을 할 생각이었다.

아직 점심 먹기에 이른 시간이었지만 나온 김에 혼자 회전초밥을 먹고, 운동 삼아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 대략 30분쯤 시간을 예상하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에 수진에게 전화가 왔다. 조건반사처럼 미소가 지어졌다.

“응, 수진아.”

“집에 있어?”

“아니. 오늘은 밖에 볼일이 있어서. 지금 일 보고 들어가는 중이야.”

“점심은 먹었고? 안 먹었으면 같이할까?”한해는 금방 아홉 접시나 초밥을 먹었지만 거짓말을 했다.

“그래. 그러자. 뭐 먹고 싶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