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한해는 한걸음에 문 앞으로 달려가 물었다.
“누구세요?”
“저예요.”
수진의 목소리를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답을 들을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수진의 손에는 큼직한 화과자 선물세트가 들려 있었으니까.
“로비에 있는 베이커리에서 선물을 좀 샀어요.”
방에 들어온 수진을 사토시가 맞이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토시라는 이름으로 오래 살았고, 한국 이름은 인걸입니다. 편한 쪽으로 부르시면 됩니다.”
그는 깍듯이 목례를 했고 수진은 몸을 숙여 인사했다.
“진수진이라고 합니다. 저는 다른 이름은 없어요.”
배시시 웃는 그녀를 보며 사토시도 전염된 듯 미소 지었다.
“한해 군이 거짓말을 했네.”
그가 나무라듯 말하자 수진이 되물었다.
“네? 무슨 거짓말이요?”
“한해 군은 수진 씨가 속 깊은 매력이 있다고 했는데, 겉으로 보기에도 매력이 철철 넘치는데?”
수진은 더 환하게 웃었다.
“이건 오래두고 천천히 먹을 수 있으니까 하나는 선생님 드시고요. 다른 하나는 숙희 사장님 갖다 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양손에 든 화과자 세트를 내밀자 사토시는 눈을 번쩍 떴다.
“정말 놀랍네. 이건 숙희가 너무 좋아하는 건데. 내가 화과자를 주면 눈빛부터 달라질 정도로.”
그는 연신 수진에게 감탄했다.
“숙희 입맛까지 어떻게 알았을까?”
“우연히 맞춘 거예요.”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둘의 환담을 보고 있던 한해가 끼어들었다.
“여기 계속 서 있지 말고 들어가서 앉죠.”
사토시는 거실 소파로 수진을 안내했고, 한해는 주인처럼 차를 끓여냈다.
“한번 맛 좀 볼까?”
사토시는 수진이 사온 화과자를 차와 곁들였다.
홍시처럼 생긴 부드러운 과자를 한입 베어 물고 엄지를 치켜들었다.
따뜻한 홍차와 포슬포슬한 과자, 그리고 잔잔한 음성으로 이어지는 대화.
첫 만남은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먼저 본론을 꺼낸 사람은 사토시였다.
“요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어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저 걱정해주는 거야 생판 모르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거고. 나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고 싶은데.”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처음 뵙는 분한테 신세부터 질 수는 없습니다.”
사토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해가 말한 대로네. 도움받기를 싫어한다고. 수진 씨 말대로 우리가 실제로 만난 건 지금이 처음이지만 난 마치 우리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처럼 느껴져요.”
“무슨 말씀이실까요?”
“배에서 한해 군을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
“그때 이야기는 제가 잘 몰라서요.”
“물질적인 성공은 더 이상 이룰 게 없을 만큼 이루었는데도, 가정도 갖고 자식도 어느 정도 자랐는데도,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때였어. 바다를 떠돌며 죽도록 몸을 혹사하다 보면 뭔가 깨닫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배를 탔지.”
“깨달음을 얻으셨나요?”
사토시는 대답 대신 한해를 가리켰다. 대화에 끼지 않고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한해가 눈을 크게 떴다.
“이 친구가 나의 깨달음이었어. 우린 다들 이런 생각을 자주 하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떨까? 이미 내가 내렸던 결정과는 다른 결정을 내릴까?”
수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에게 속아 한해가 죽었다고 믿고, 강과 결혼을 결정하고 혼인신고를 했던 그 순간…… 만약 한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절대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겠지.
“한해 군은 아주 오래 전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직전의 내 모습이었어. 나는 한해 군을 지켜보며 두 번째 인생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기분을 느끼고 있지. 그리고 오늘 수진 씨를 보니…… 더욱 놀라울 뿐이고. 나는 둘을 응원하고 싶네. 실례가 되지 않는 선에서.”
“그랬군요. 저희를 좋게 봐주셔서 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한해 오빠와 저는 상황이 다릅니다.”
수진은 예의 바르게 선을 그었다.
“그때 한해 오빠는 말 그대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버린 상황이었지만, 저는 지금 그렇지 않아요. 위태로운 상황이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저 혼자서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녀는 힘주어 말했다.
한해는 의외였다. 지난번만 해도 사토시의 도움을 받을 것처럼 보였는데.
“수진 씨 혼자서 태화 그룹을 상대로 소송전을 벌인다?”
사토시는 현실적인 상황을 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해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저도 처음에는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시작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일어날 힘도 없을 만큼 지쳐 쓰러져버린다면…… 그때는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청하겠습니다.”
사토시는 박수를 세 번 쳤다.
“이 정도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젊은이들이 똑똑해. 우물쭈물하다가 세월에 떠내려갔던 늙은이들보다 훨씬 똑똑하구만.”
그는 화과자를 하나 더 집어먹고 뭔가를 결심하는 표정이 되었다.
“달다. 숙희가 좋아하겠어.”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나 좀 다녀올게.”
“지금 나가신다고요?”
한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있으면 숙희네 식당이 문 닫을 시간이니, 이거 갖다 줘야겠어.”
한해와 수진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손님을 남겨두고 방주인이 나가버린다?
“자네들은 적당할 때 알아서 나가.”
수진은 사토시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이혼소송을 시작하는 상황에서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이런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참고로 난 두어 시간 정도는 족히 걸릴 거야.”
사토시는 싱긋 웃어주고는 화과자를 챙겨나갔다.
졸지에 호텔 방에 둘만 남은 한해와 수진은 잠시 어색하게 침묵을 지켰다.
“불편하면 먼저 가도 되고.”
“아니에요. 지금 편하게 쉬고 있어요. 이제 좁은 오피스텔로 들어가면 이런 넓은 곳에서 지낼 일도 별로 없을 테니까.”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둘은 가끔 서로를 돌아보고, 눈이 마주치면 웃거나 시선을 떨구거나 했다.
“방은 구했어?”
“네. 회사에서 가까운 곳으로 구했어요.”
“지낼 만한 곳이야?”
“그럼요. 결혼 안 한 직장인들이 흔히 지내는 그런 주거용 오피스텔이에요. 취직하기 전에 살던 원룸에 비하면 너무 좋죠. 이번 주말에 이사해요.”
“역시 진수진. 빠르네. 짐은?”
“그이가 없을 때 갖고 나가겠다고 말해뒀어요. 여기 오는 길에 문자를 했는데…….”
수진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나 지낼 곳을 구했어. 내일이나 모레 짐을 옮길 생각이야. 당신 출근한 동안 들를 테니 신경 안 써도 돼. 그녀의 메시지에 강의 답장이 와 있었다.
-마침 잘됐네. 나 일주일 정도 출장 갈 예정이거든. 편하게 짐 옮겨. 의외였다. 이렇게 순순히 편의를 봐주다니. 생각의 변화가 생긴 건가? 무슨 일이라도 있나?
멍하니 생각에 잠긴 그녀를 보던 한해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한해는 그녀를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흔들리는 건가?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초조해하지 말자. 나의 초조함이 수진이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
그녀의 심리를 캐묻는 대신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온기에 수진이 흠칫 놀랐다.
그는 가만히 손을 잡고 있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뭐야…… 같이 명상이라도 하자는 거야?
수진도 눈을 감아보았다. 묘한 기분이 그녀를 휩쌌다.
나란히 손잡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현실의 형태들이 조금씩 지워지고 미지의 공간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지금 뭐하는 거예요?”
“손잡고 있잖아.”
“왜 잡았는데요?”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서.”
“뭐 이 정도는…….”
시각이 막히니 청각과 촉각이 예민해졌다. 수진은 한해의 손마디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오빠 손 오랜만에 잡아본다. 생각보다 크네요.”
“거친 손이지. 마디도 굵고 상처도 많고.”
“살아남은 손.”
“그 표현 마음에 든다. 살아남은 손.”
“좋다. 이렇게 눈 감고 있으니. 명상하는 것 같아요.”
“난 예전에 너랑 손잡고 걸어 다니던 생각을 하고 있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푸름을 경쟁하던 하늘과 바다 옆으로 뻗은 길을 떠올렸다. 고향 마을은 나무도 참 많았다.
붉고 단단한 육체를 자랑하는 해송, 바람이 불면 오래된 노래를 부르는 대나무 숲, 이름 모를 들꽃으로 가득한 수풀이 함께 걷던 길의 동무들이었다.
보고 싶다. 미치도록 보고 싶다.
“이혼절차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울진에 같이 가요.”
신혼여행을 다녀오면서 들렀지만 강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고향의 푸름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무효.
“그러자. 꼭.”
상상만 해도 행복해.
눈감은 수진의 머릿속에는 미래의 어느 날이 펼쳐져 있었다.
손잡고 항구를 걷고 있다. 작은 태양들을 매단 오징어잡이 배들을 지나면 방파제가 늘어선 부둣가가 나온다.
눈부신 햇살이 물결 위로 부서지고 산란한 빛의 파편을 쪼아 먹으려는 갈매기들이 파도 위를 선회하고 있다.
가끔 머리를 어깨에 기대도 보고, 하릴없는 농담에 웃어도 보고, 저녁에 뭘 먹을지 의견이 갈리면? 가위바위보로 결정하면 어떨까.
“지금도 많이 참고 있어.”
한해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데려왔다.
“이혼할 때까지 기다릴 거야. 몇 년이 걸리든 간에. 하지만 너를 안고 입 맞추고 싶은 마음은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해해요. 나도 참고 있으니까.”
“그럼 큰일이네. 너무 아슬아슬하잖아.”
“그러게요.”
농밀한 정적이 시작되었다.
눈을 감고 오래 있다 보니 예민해진 그녀의 감각이 어떤 움직임을 잡아냈다.
여전히 손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한해가 일어나는 것 같기도 했고, 얼굴 바로 앞에 숨결이 맴도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모든 느낌이 착각 같기도 했지만 확인하려들지 않고, 그녀는 끝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밤이었다.
*
이혼 전문 변호사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변호사를 혼자 힘으로 찾겠다고 나선 수진은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저마다 빠른 이혼, 유리한 이혼을 장담하는 변호사들의 프로필을 훑다보니 합의이혼에 성공한 사람들이 로또 맞은 사람보다 더 부러워졌다.
도와주겠다는 사토시 씨의 제안을 받아들일걸 그랬나, 몇 번이나 후회했는지 몰랐다.
결국 그녀는 가장 차분하게 생긴 변호사를 낙점하고 점심시간에 사무실을 찾았다.
4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변호사는 짙은 남색 투피스 정장 차림에 또렷한 눈빛의 소유자였다.
“안녕하세요? 변호사 박혜원입니다.”
그녀는 인사를 하고 명함을 건넸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고객들에게는 인생을 통 털어 손에 꼽을 비극이지만 그녀에게는 매일 점심메뉴를 고르는 일 같은 일상일 테니.
그렇게 생각하니 수진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혼소송을 시작하려고요.”
“네. 간단하게 상황을 말씀해주세요.”
“남편이 결혼 전에 거짓말을 했고, 결혼 후에도 폭언과 폭력, 집착, 그리고 외도를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폭력의 양상은 어땠나요?”
“반복적이지는 않았어요. 두어 번. 한 번은 저를 길에 팽개쳐서 다치기도 했고요.”
“증거는 있나요? 상처를 찍은 사진이라든가. 주변 목격자라든가.”
“목격자도 있고, 그날 바로 병원에 갔던 진료기록이 있어요.”
수진은 핸드폰에 담아온 진료기록 사진을 보여주었다.
“음. 많이 놀라셨을 텐데 잘하셨어요. 또 다른 유책사유가 있다면? 다 말씀해주세요.”
“남편이 외도도 저질렀어요.”
“증거가 있을까요?”
“외도상대가 시인했어요.”
“상대 여자분을 만난 적이 있나 보죠?”
수진은 레이나와 집에서 마주친 기억을 떠올렸다. 침대 위에 흐트러져 있던 그녀의 머리카락도.
“네. 통화도 했고요.”
“그래요?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데. 재판을 하면 그분이 증언을 해줄까요?”
“그건 모르겠어요.”
“알겠습니다. 사유는 충분한 것 같고요. 혼인 기간은?"수진은 말하기 부끄러웠지만 솔직히 털어놓았다.
“몇 달 안 되었어요.”
“그렇군요.”
수진의 표정을 읽은 변호사가 위로해주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혼하는 부부들도 있으니까요.”
“저희도 신혼여행 때부터 좋지 않았어요.”
“다만 이렇게 빨리 이혼하는 경우 재산분할 부분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라고 하면…… 무슨 뜻일까요?”
“이혼하면서 부부의 재산을 나눌 때는 재산형성 과정과 기여도를 꼼꼼하게 살펴보는데, 혼인 기간이 짧은 경우엔 결혼 전 각자의 재산을 그대로 갖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수진 씨의 직업은?”
“드라마 제작사에서 기획피디로 일하고 있습니다.”
“급여생활자이시군요. 오케이.”
변호사는 메모를 해가면서 물었다.
“결혼 전 두 분의 재산 상황이 어떨까요?”
“제 경우에는 살던 집 보증금하고 예금, 펀드 전부 해서 2억 남짓이요.”
“남편분은요?”
“남편은…….”
수진은 또 망설였다. 아내인 그녀조차도 남편의 재산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집이 남편의 소유였어요.”
“시세는?”
“백억 정도?”
차분함을 넘어 따분해 보이던 변호사의 표정이 변했다.
“백억이요?”
“분양가가 그렇다고 했는데, 제일 위층이라 더 비쌀 수도 있겠네요.”
“죄송하지만 어디인지…… 제가 확인을 해보고 넘어가야겠네요.”
수진은 집주소를 알려주었고 변호사는 핸드폰으로 시세를 확인한 뒤 입을 떡 벌렸다.
“두 달 전 저층 실거래가가 107억이네요.”
“그런가요?”
“어…… 이 정도면 재산 규모라면 좀 다르게 접근해봐야겠는데요.”
나른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변호사는 자세를 고치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남편에게 또 다른 재산도 있나요?”
“자세히는 모르는데 보유하고 있는 주식이 대략 천억 원 정도 된다고 들었어요.”
변호사는 입을 떡 벌렸다.
“처…… 천억이요?”
“더 될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릅니다.”
“아니, 남편분이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건설회사 임원이에요. 직책은 부회장.”
“부회장이요? 수진 씨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나요?”
“아니에요. 비슷해요. 시아버님 회사거든요.”
“와우. 로얄패밀리구나. 제가 알 만한 회사인가요?”
“태화 건설이라고 들어보셨나요?”
변호사의 손에서 펜이 떨어졌다. 그녀는 의심가득한 눈으로 수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진수진 씨 남편분이 태화건설의 2세다?”
“네. 외아들이에요.”
변호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동공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핸드폰으로 ‘태화건설 2세 결혼’이라는 검색어로 검색을 해보았다.
기사를 확인하고서야 의구심이 모두 풀렸다.
“진짜네요! 저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어요?”
“인터넷으로 검색했어요.”
“아하…… 어쨌든 저를 찾아온 걸 보면 합의가 안 되었으니 소송을 시작하시려는 거일 테고. 그렇죠?”
“네. 저는 합의하고 싶었는데 남편은 반대하고 있어요. 소송을 불사하겠다는 태도예요.”
변호사를 고개를 내저었다.
“엄청난 소송이 되겠군요. 개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혼자 감당하긴 쉽지 않을 테고.”
혹시나 하고 걱정했던 일이 현실로 펼쳐지고 있었다. 소송을 못 맡겠다 이건가?
그런데 변호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저에게는 전략이 보입니다.”
변호사는 눈을 반짝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유책사유가 분명합니다. 혼인 기간은 짧지만 이혼소송에 대한 부담감을 최대화시키면 합의 과정에서 적지 않은 위자료와 재산분할을 기대해볼 수 있습니다.”
쏟아져 나오는 법률적 용어에 수진은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난 재산분할 따위 관심이 없는데. 백억이고 천억이고 원래부터 내 돈이 아니었잖아.
결혼은 판타지로 착각할 수 있지만 이혼은 현실이구나.
“태화 건설 쪽에서 수진 씨에게 물을 유책사유가 혹시 있을까요? 아까 외도를 의심한다는 표현을 쓰셨는데…… 그럴 만한 구체적인 사건이나 대상이 있었나요?”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아니요. 남편이 의심하는 저의 외도 상대는 바로 남편이 저에게 결혼 전에 했던 거짓말의 이유이기도 해요.”
수진은 셋에 얽힌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사실 관계 위주로.
그녀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말했지만 변호사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네요. 결론은 그 사람하고 연애를 하거나 잠자리를 갖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거죠? 바꿔 말하면 태화 건설 쪽에 그런 증거는 없다는 거죠?”
“전혀요. 제 핸드폰을 지금 당장 제출하라고 해도 할 수 있어요. 굳이 스킨십이라고 한다면 손을 잡은 정도?”
“그거야 전혀 문제될 게 없고요. 입맞춤이나 이런 게 증거사진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는 거죠? 블랙박스 화면이나, 주고받은 메시지도?”
“입맞춤을 한 적이 없으니 증거사진이 있을 리가 없죠. 메시지를 공개해야 한다면…….”수진은 한해와 나눈 메시지를 띄운 핸드폰을 건넸다.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이었기에 변호사는 금방 확인하고 폰을 돌려주었다.
“이게 전부라면 뭐. 아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적잖게 흥분했다.
“저한테 필승 전략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