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45화 (45/92)

45화무슨 일을 해달라는 걸까. 한해는 가만히 기다렸다.

소월은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약속해줘. 어색하게 대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 더 이상 그를 마주 볼 자신이 없는지 시선을 피했다.

“늘 씩씩하게 인사를 나누던 항해사와 갑판원이었던 그때처럼 남아주겠다고.”

“그럴게. 약속할게.”

“선을 넘어 오빠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일은 사과할게요.”

존댓말로 거리를 두는 그녀였다.

“사과할 필요 없어.”

“대신 그 잘난 사랑…… 꼭 이뤄줘요.”

그녀는 다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야 내가 덜 초라해질 것 같으니까.”

입으로는 미소 짓고 눈으로는 우는 그녀를 보며 한해도 먹먹해졌다.

“그 쿠폰은 좀 아깝다.”

소월이 젖은 눈 아래 콧잔등을 찡그렸다.

“쿠폰?”

“오빠 집에서 하루 잘 수 있는 쿠폰.”

“아…… 맞다.”

그녀는 한해를 꼭 끌어안았다.

“당신을 좋아했던 것만큼 당신의 사랑을 응원할게요.”

한해도 힘주어 그녀를 안아주었다.

“나도 너의 사랑을 응원할게.”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흩뿌리는 차향은 은밀하고 달콤했다.

*

강은 이틀 연속으로 야화의 진료실을 찾았다.

어제는 상담이 중간에 끝나버렸다. 어린 시절 끔찍한 기억과 맞닥뜨린 그는 더 이상 상담을 계속할 상태가 아니었다.

다시 나타난 강을 보며 야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이런 말 하는 건 처음 같은데, 용기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어제 진료실을 뛰쳐나갈 때 이강 씨의 뒷모습은 다신 여기 오지 않을 것 같았어요. 포기하지 않고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중간에 뛰쳐나가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을 대면하고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해 진료를 포기하는 환자들이 꽤 많아요.”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강의 음성에는 선명한 결기가 드러났다.

“어제 느꼈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강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버지의 잔혹한 폭력을 처음 목격한 날이었어요. 그전에도 낌새는 있었지만 불안이 현실로 증명되는 그런 순간 있잖아요. 어머니는 노예처럼 맞고 학대당했고 말리던 저 역시 짓밟히고 말았지요. 저는 겨우 꼬마였는데요.”

“그 뒤로 이강 씨의 반응은 어땠나요?”

“아버지의 폭압에 길들여져 갔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배당했다고 할까요.”

“그 과정에서 이강 씨의 기분은 어땠나요?”

“무력감을 느끼고 동시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설정한 목표를 어떻게든 이루려고 했군요. 이를테면 대학입시처럼.”

“네. 맞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깊이 들어가 보도록 하고요. 오늘은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뒤로도 아버지의 폭력에 어머니가 희생당하는 모습을 많이 봤다고 하셨는데 그때 이강 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어머니는 저를 사랑해줄 여유가 없었고 제가 사랑할 대상이 되어주지도 못했어요. 저를 보는 어머니의 눈빛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강은 다시 괴로워하며 말을 멈췄고 야화는 인내심을 갖고 다그치지 않고 기다렸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강의 입이 다시 열렸다.

“도망쳐.”

“아…….”

환자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입장인데도 야화는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만큼 어린 시절 강이 불쌍했다.

“그래서 저는 늘 기다렸어요. 마음을 줄 수 있는 대상을. 제가 도망치지 않아도 될 사람을. 나를 보며 밝게 웃어주는 얼굴을.”

“그 대상이 바로 지금 아내분이었군요.”

“네. 맞아요. 어린 시절 아버지 사업이 잠깐 어려웠을 때 시골 마을에 전학을 가서 1년 정도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내를 만났죠. 겨우 중학생이었는데…… 그녀는 제가 찾던 바로 그런 대상이었어요.”

“어떤 점이 그랬을까요?”

“아내는 어릴 때부터 늘 밝고 건강했어요. 제 마음을 집어삼킨 어둠을 몰아내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진부한 표현이지만…….”

강은 말을 잇지 못했고 야화가 도와주었다.

“천사 같았나요?”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어요. 동네 오빠였죠. 저는 그를 끝없이 질투하고 경쟁했고…….”

그는 한해와 수영 대결을 펼치다가 익사할 뻔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아내가 저를 구해줬어요. 그녀가 입술을 통해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죠. 그 순간 저는 결심했어요. 제 인생을 걸고 그녀를 아내로 만들겠다고.”

“결국 꿈을 이루었네요.”

“이루긴 했는데 지키기가 어렵네요.”

“아직도 안 좋은 모양이네요. 요즘 아내분하고 상황은 어떤가요?”

“아내가…… 이혼을 통보했어요.”

“아, 이런. 충격이 크셨겠어요.”

“처음엔 충격을 받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이혼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내분이 뜻을 굽힐까요?”

“상관없습니다. 끝까지 소송전을 벌일 각오도 되어 있고요.”

야화는 상담을 진행하며 적은 메모를 다시 훑어보며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강 씨. 이렇게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지금 어머니의 상태는 어떻죠?”

“어머니는…… 살아 있는 시체 같은 상태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미 영혼이 파괴되어버렸어요.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정도니까요.”

“지금 이강 씨는 어머니라는 존재의 부재를 아내를 통해 마련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무리한 말과 행동이 나오는 거죠. 어제오늘 상담을 진행하고 보니, 이강 씨의 외도는 마치 어머니를 속상하게 하려고 나쁜 짓을 하는 아이의 심리 같기도 해요.”

강은 동의하지도 반박하지도 않고 이를 꾹 물었다.

“이 세상의 어떤 여자도 자기 자식이 아닌 성인 남자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해줄 순 없어요. 엄마의 일은 누군가 대신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엄마의 존재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어요.”

이번에는 강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이렇게 하죠. 지금 이강 씨가 완전히 포기하다시피 한 어머니의 관계를 회복해봅시다.”

“어머니가 아내와의 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라도 회복되고 나면 아내분을 대하는 이강 씨의 태도도 달라질 수 있어요.”

지금까지 야화의 말에 동의하며 따라오던 강이 머뭇거렸다.

“저를 믿고 한번 시도해보시죠.”

야화의 눈빛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

.

.

늘 외면했다. 짓밟는 자의 폭력도 싫지만 짓밟히는 자의 무기력도 공유하기 괴로운 감정이기에 언젠가부터 강은 어머니라는 존재를 지웠다.

어머니 역시 강하고는 눈도 잘 마주치려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조차 고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편이 편했다.

그래요, 엄마. 우린 이렇게 살아요.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눠봤자 서로의 비참한 신세를 인정하게 될 뿐이니까요.

아버지까지 셋이서 함께 밥을 먹거나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는 일은 있었지만 어머니와 둘이서 시간을 보낸 적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들의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몇 번이나 되물었다.

“지금 집으로 온다고?”

“네. 집에 계시다면서요.”

“나는 있는데…… 아버지는 없는데.”

“어머니만 있으면 돼요.”

“무슨 일이냐?”

엄마랑 밥 한 끼 먹겠다는 말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해야 할 만큼 강과 어머니의 관계는 어색했다.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하고요.”

“어…… 아버지 없이? 그래. 그럼 밥은 준비해놓을게.”

아들이 찾아간다는데 이렇게 불편해하는 어머니라니.

강은 무거운 마음을 품고 집으로 향했다.

그는 어머니가 주로 뭘 하고 시간을 보내는지 몰랐다.

청소부터 요리까지 등 집안일을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고, 아버지는 거의 집에서 잠만 자고, 그마저도 안 들어오는 날이 많은데 그 긴 세월을 어떻게 보냈을까?

아들로서 당연히 던져봤어야 할 질문을, 도우미 이모님이 차려준 저녁을 놓고 마주 앉은 어머니를 보며 이제야 떠올렸다.

“오늘은 뭐하셨어요?”

“나 말이냐?”

“네.”

“그냥…… 있었다.”

“하루 종일요?”

어머니는 죄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강은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겨우 참았다.

“식사하세요. 잘 먹겠습니다.”

말없이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강은 어머니의 얼굴을 여러 번 응시했다.

아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니는 밥을 먹는 내내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마 나도 이랬겠지. 차마 마주하기 두려워 시선을 피한 채 살아왔겠지.

그는 문득 깨달았다. 수진이와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조차도 아버지하고만 교감했을 뿐 어머니는 철저히 배제시켰다는걸.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여기서부터 대화를 시작해볼까?

“요즘 수진이하고 별로 좋지 않아요.”

밥을 다 먹자마자 강은 입을 열었다.

얼마 뜨지 않은 밥을 다 먹고 기다리던 어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많이 잘못했어요. 수진이는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고요.”

그 순간 강은 눈을 의심했다.

어머니가 웃었다. 소리를 내거나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녀의 입가는 분명히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잘못 본 건가요? 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본 것 같은데.”

“무슨 소리냐. 그럴 리가.”

“지금 막 웃었잖아요.”

“아니다. 결혼한 지 몇 달 안 된 아들이 이혼한다는데 어떻게 웃음이 나오겠니.”

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짓누르는 침묵을 한참 견디다가 강은 어머니의 손을 끌어 잡았다.

“어머니. 괜찮아요.”

다시 마주친 어머니의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왜 아들을 겁내요? 난 엄마 편이에요.”

“강아…….”

“이제부터라도 엄마 편 할 테니까 겁내지 말고 절 대해줘요.”

너무 갑작스럽게 말해버렸나? 강은 속도 조절이 쉽지 않았다. 그 역시 제어하기 힘든 감정의 격랑에 떠밀리고 있었다.

“어머니를 추궁하려는 것도 아니고 비난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이제라도, 늦게라도……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 거예요.”

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수진이가 불쌍하세요?”

“그런 거 아니다.”

“그래서 수진이라도 구해주고 싶으세요? 어머니처럼 되지 않게?”

“그게 무슨 소리냐.”

어머니는 반박했지만 강은 그녀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저는 아버지와 달라요. 지금까진 아버지를 혐오하면서 나도 모르게 닮아갔는지도 모르지만…… 이제부터라도 그러지 않으려고요.”

강은 목에 힘을 주어 떨림을 잡았다.

“그러니 저를 도와주세요.”

“내가 너를 무슨 수로 돕겠니.”

“이렇게 같이 밥 먹는 일부터 시작해요.”

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내려놓은 숟가락을 보며 강은 첫술에 배부르겠냐는 속담을 떠올렸다.

그래. 이렇게 시작해보자.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지만 미래를 더 나빠지지 않게 해야지.

“그럼 저 가볼게요.”

강이 집을 나서기 직전, 현관까지 배웅 나온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막 구두를 신은 발끝부터 시작해 문손잡이를 잡은 손까지 얼어붙었다.

“강이야. 엄마가 미안하다.”

환청이 아니었다. 굳어 있던 아들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고 미소가 번졌다.

야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네. 이렇게 시작하는 겁니다. 잘했어요.

.

.

.

집에 돌아온 강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늘어졌다.

안주인이 떠난 저택은 버림받은 아픔을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 같았다.

고요하고 공허하고 외롭다.

아무리 비싼 가구도 가전도 예술품도 함께 누릴 이가 없으니 그저 물건일 뿐.

차라리 집이 작기나 하면 덜 외로울까?

생각해보니 아내에게 연락한 지가 며칠 되었다.

그는 폰을 들어 전화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시간을 주자. 이미 나에게 질려 있는 상태니까.

대신 고심해서 메시지를 썼다.

-오늘도 병원에서 상담 치료를 받고 왔어. 효과가 있는 모양이야. 마음이 꽤나 편해졌어. 당신이 기꺼이 나에게 돌아올 정도로 건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밖에 있더라도 잘 챙겨 먹고 건강 잘 챙기길 바라. 언제나 너를 생각하고 너를 사랑해. 모든 글자가 전부 진심이고 진실이었다.

그는 전송버튼을 누르고 답장을 기다렸다.

메시지를 보내고 18분 뒤에 아내가 읽었는데 30분이 지나도록 답이 없었다.

강은 그동안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씻지도 않았다.

어떤 상황일까? 이 정도의 메시지도 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가 싫어졌나?

아니면 누구랑 같이 있는 건가? 혹시…… 또 강한해…….

겨우 진정시켜놓은 마음에 다시 불이 붙었다.

그 불길은 힘이 매우 세서 그의 손을 움직여 통화 버튼을 누르게 했다. 그러나 손끝이 액정에 닿기 직전에 이성의 힘으로 폰을 내려놓았다.

“하아하아…….”

정말 아무것도 아닌 행동인데 숨이 가쁠 정도로 힘들었다.

바로 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내인가 싶어서 봤더니 비서였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어 잡념을 내보내고 전화를 받았다.

“늦은 시간에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내일 출장 건은 어떻게 정리할까요?”

아까 병원에 들르느라 결제를 미뤄놓은 지방 출장 건이었다.

부산과 제주도에 새로 오픈하는 레지던스 빌딩에 들러 입주민들의 하자보수 요구를 확인하고 조율해야 하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다음 주로 미룰까 싶었는데 이 집에서 잠시 떠나 있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아예 다른 곳에서 일에 파묻혀 있으면 잠시나마 아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출장 가도록 할게. 기간이 며칠이라고 했지?”

“부산에서 이틀, 제주도 이틀, 총 4일이 잡혀 있습니다.”

“속초 크래프톤 타워도 둘러보는 일정으로 할게.”

“그럼 거의 일주일이 될 텐데, 괜찮으실까요?”

“뭐 어때. 업무야 지방에서도 다 볼 수 있으니까. 임원 회의야 화상으로 하면 되고.”

“업무는 큰 상관 없겠지만, 부회장님이 신혼이시니까.”

몇 년째 그를 모시고 있는 비서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응. 신혼은 맞지. 하지만 동시에 이혼 위기라는 사실을…… 너한테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마침 아내도 며칠 출장을 갈 일이 있어서 괜찮아.”

“아,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스케줄 어레인지 하겠습니다. 편안한 밤 보내십시오.”

통화를 마친 강은 수진의 연락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답이 없었다.

수진아. 진수진…… 대답해…… 진수진!

너 내 메시지를 읽었잖아? 왜? 대체 왜 연락을 안 하는 거야? 그 새끼랑 같이 있냐? 그 새끼랑 뭐하냐?

용암 같은 분노가 솟아오르는 열기를 느끼며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분명히 아까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길에는 다 잘될 것 같았는데. 마음도 편안하게 가라앉고 자신도 있었는데.

이렇게 무너져버렸어. 한심하게!

인정할 수밖에. 이성도 자제력도 단숨에 무너뜨리는 존재가 바로 그녀라는 사실을.

이런 고장 난 마음이 과연 고쳐질까?

그는 또 야화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그러나 다음 상담은 내일도 아닌 모레.

잠깐만. 출장을 가면 상담은 어떡하지? 일주일이나 출장을 잡아놨는데. 화상으로도 상담이 가능하려나?

하아…… 나는 어쩌다 정신과 의사의 상담 시간을 애타게 기다리는 인간이 되어버린 걸까?

혼자 이 집에 있다간 돌아버릴 것 같아!

그는 자동차 열쇠를 집어 들고 집을 뛰쳐나갔다.

*

같은 시간. 서울 시내 호텔.

한해는 사토시 씨와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 곳은 사토시 씨가 서울에서 지낼 때 애용하는 곳이었다. 하룻밤 숙박료가 백만 원을 훌쩍 넘는 객실인 만큼 개방감이 상당했다.

한해도 사토시가 지내는 호텔에 초대받아 온 건 처음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사토시는 며칠 전에 다녀온 장례식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미리 알았다면 문상을 갈 걸 그랬습니다.”

“아니야. 나중에 숙희네 식당이나 같이 가자고.”

“네. 수진이도 같이 가도 좋고요. 지난번에 데려갔더니 얼마나 잘 먹던지.”

한해는 생선구이를 등뼈만 남기고 싹싹 발라먹던 수진을 떠올리고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날의 고소한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재벌가 며느리치고는 입맛이 까탈스럽지 않은가 보군.”

“재벌가 며느리라니, 그런 말 들으면 질겁할걸요.”

“하하, 하긴 그게 싫어 뛰쳐나오겠다는 사람이니. 왠지 내 마음에 들 것 같아.”

“수진이도 굉장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전 선생님과 수진이가 아주 잘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럼 다행이지만 노인네 보고 실망할 텐데. 허허.”

“올 때가 됐는데…….”한해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다고, 올라가겠다는 메시지가 온 지 10분이 넘었는데.

그는 수진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어디야? 안 올라오니까 걱정되어서.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막 드는 찰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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