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 군이 나를 알려나? 나는 이태화라고 하네.” 44화
가장 위험한 공격은 예상치 못한 공격. 이태화 회장의 전화가 바로 그랬다.
한해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껌벅였다.
어릴 때 딱 한 번 이태화 회장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사업이 몹시 어려워졌을 때 아들과 아내를 바닷가 마을에 숨겨놓고 찾아오지 않던 그는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한 뒤에 두어 번 가족을 찾아왔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 때 인사를 드렸는데, 어린 나이의 한해가 보기에도 뭔가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14년 만에 수진의 결혼식장에서 본 이태화 회장은 세월을 비껴간 듯 전혀 늙지 않은 모습이었다.
인사도 하지 않고 멀리서 보기만 했지만 어린 시절 감지했던 그 음험한 기운만큼은 그대로.
“한해 군. 듣고 있나?”
“아 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회장’이라는 호칭에 옆에 있던 수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설마 하는 표정이었지만 한해는 당장 뭐라 대답해줄 수 없었다.
“나를 기억하나? 오래전 일이지. 자네 부친이신 강인권 선장하고 목욕탕에 다녀오는 자네를 길에서 만나 인사를 나눈 적이 있는데.”
전화로 들리는 이 회장의 목소리는 깊고도 검었다.
“그래…… 바람이 몹시 불던 날이었지. 아마 일요일이었을 거야.”
한해는 두 가지 이유에서 깜짝 놀랐다. 그토록 오래전 일을 며칠 전처럼 자세하게 기억해서 놀랐고, 두 번째로는 아버지 이름이 나와서 놀랐다.
태풍에 휩쓸려 사라진 뒤 강인권이라는 아버지의 이름은 오직 한해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이름이었다.
“기억합니다. 회장님처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만나 뵈었던 일은 기억합니다.”
“그렇군. 기억한다니 다행이네.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
“인생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나이에 그런 일을 당하고 버텨냈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 칭찬해주지. 정말 대견해.”
“감사합니다.”
한해는 서늘한 기운이 드리운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왜 소름이 돋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디선가 다가오는 공포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일까?
“강이한테 자네 이야기를 전해들었네. 만났다면서?”
“네. 얼마 전에 맥주 한잔했습니다.”
“하긴. 울진에 있을 때는 둘이 아주 친구 같은 형 동생으로 잘 지냈지?”
“자주 어울렸습니다.”
“투자자로 변신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긴 세월 동안 바다에 나가 있다가 어떻게 그런 변신이 가능하지?”
“투자자는 너무 거창한 표현이고요. 소소하게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겸손하고 신중하군.”
그저 전화 통화일 뿐인데 한해는 면접이라도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 며늘아기하고도 연락하고 지낸다면서?”
상상도 못한 질문에 한해는 숨이 콱 막혔다.
“혹시 지금도 같이 있나?”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등줄기에 땀이 솟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련된 옷차림으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 속에 혹시 이 회장이 숨겨놓은 사람이 있을까?
의심을 품고 보니 다 미심쩍어 보였다.
“하하하. 농담이네.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이 회장이 껄껄 웃었다. 한해는 어릴 때 느꼈던 압도적인 어둠을 또 감지했다.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순 없었다.
“전화를 하신 용건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리 한번 볼까?”
“우리라면, 저하고 회장님이요?”
“왜? 내키지 않나?”
“굳이 회장님을 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데요.”
“투자자로서도, 친구 아버지로서도, 한 번쯤 저녁을 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다니. 당돌한 건가 무례한 건가?”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왜 나를 피하는 건가? 뭐 찔리는 거라도 있는지? 이를테면 자네가 내 며느리를 불순한 마음을 품고 몰래 만난다던가.”
“회장님!”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 피하니 그러네.”
“내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꼭 만나야 할 인연이라면 보게 되겠죠.”
“꼭 만나야 할 인연이라…… 왠지 그럴 것 같긴 하네.”
“다른 하실 말씀 없다면 끊어도 될까요?”
“강 군. 내가 경고 하나 하지.”
이 회장은 너그러운 태도를 거두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할 일을 만들지 말게나. 왜냐면 나는 용서를 모르는 사람이거든. 나한테 미안한 짓을 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 그러니 조심하게.”
한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웃는 얼굴로 나중에 만날 수 있기를.”
이 회장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겼는데도 한해는 핸드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회장님이라니요?”
수진이 묻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이태화 회장님이 전화를 다 주셨네.”
“아버님이?”
말을 뱉자마자 수진은 아차 했다. 법적으로 아직 시아버지가 맞긴 하지만, 이혼소송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한해에게 그런 호칭을 꺼내는 게 아닌데 싶었다.
“무슨 일로 전화했대요?”
“날 만나보고 싶어 하네. 이유는 말해주지 않고 뭐 격려 차원이라는데, 믿으면 안 되겠지?”
“조심해요. 무서운 분이세요.”
“대충은 알 것 같아. 너한테 하는 거 봐도 그렇고.”
“겁 안 나요?”
“겁은 무슨.”
수진은 잠시 그의 얼굴을 관찰했다.
신경 쓰일 법도 한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잖아.
“나를 안심시켜주려고 이러는 거예요? 아니면 정말로 두려움 따윈 없는 사람인 건가?”
“열일곱 살에 모든 걸 다 잃고 지금까지 버틴 내가 뭐가 또 겁나겠어? 아, 딱 하나 있다. 널 잃을까 봐 겁나. 너무 겁나.”
그는 솔직하고 우직하게 말했다.
“그거 말고는 겁나는 거 없어. 아무것도.”
수진은 할 말이 없어졌다.
“일단 이태화 회장의 초대는 거절했어. 그랬더니 화를 내시네.”
“주변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걸 못 견뎌 해요.”
수진은 출산을 종용했다는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말았다.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아. 언젠간 만나게 될 것 같아.”
“미안해요. 내가 아니었으면 이 회장님하고 엮일 일도 없었을 텐데.”
“바보 같은 소리. 네가 아니었으면.”
한해는 초콜릿 푸딩이 놓인 접시를 디저트 포크로 통통 두드렸다.
“이렇게 달콤한 저녁식사도 없었을 텐데?”
그는 예술품 같이 섬세하게 장식된 푸딩 끝을 포크로 잘라 입에 쏙 넣었다.
보고만 있어도 달콤한 모습에 수진은 침이 고였다.
눈으로 초콜릿 푸딩을 녹여먹는 기분.
설탕 같은 시간이 브람스의 실내악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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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는 차를 몰고 수진을 호텔까지 바래주었다.
창밖으로 어둠과 불빛이 파스텔 톤으로 어우러지는 밤거리를 보다가 수진이 중얼거렸다.
“집을 좀 알아봤어요.”
“아, 그래? 적당한 곳이 있어?”
“저 결혼 전까지 계속 혼자 지냈잖아요. 자취의 달인 수준이에요.”
수진은 빙긋 웃어 보였지만 한해는 웃지 않고 핸들을 잡은 손에 꾹 힘을 주었다.
“미안해.”
“갑자기 왜요?”
“내가 아니었다면 넌 좋은 집에서 강이랑 잘 살았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오빠야말로 바보 같은 소리.”
“후회하지 않아?”
“이혼 결정에 대해서 물어보는 거라면 전혀요. 그리고 다신 그런 얘기 안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식의 이야기. 저도 이제 다신 안 할게요.”
“그래. 나도 약속할게.”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둘은 말이 없었다.
수진은 가끔 한해가 운전하는 모습을 돌아보았다. 어린 시절 곁을 지켜주던 그에게서 느꼈던 든든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평생 사랑했던 남자를 단 한 순간도 남자로 대해본 적이 없네. 사랑을 고백하려던 바로 그 시점에 운명이 우리를 갈아놓았으니까.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그의 입술을 보며 궁금해졌다.
언젠가 저 입술에 입 맞출 날이 올까?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저릿한 울림이 퍼졌다.
부끄러워진 그녀는 괜히 한해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 해요?”
“말하기 곤란한데.”
“그렇게 대답하면 더 듣고 싶어지잖아!”
“정말 듣고 싶다면…… 운전하면서 널 가끔 훔쳐봤어. 그리고 입술을 보면서 생각했어. 언젠가 저 예쁜 입술에 키스하는 순간이 올까?”
수진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가슴 속에 있는 횃불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예언했다.
오래오래 타오를 횃불이 어둠을 물리치고 추위를 녹여주리라.
*
고민은 짧고 결정은 단호하고 행동은 빠른 사람. 레이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동생 레오와 소월을 불러 저녁을 사주었다.
“하나뿐인 남동생 여친하고 제대로 인사도 못한 것 같아서 말이야.”
별 이유 없는 누나의 호의처럼 포장했지만 그럴 리가. 그녀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셋이서 배부르게 먹으면 수십만 원은 거뜬히 나오는 고급 한우 식당에서 소월은 왠지 움츠려들었다.
“제가 밥을 사도 모자랄 판인데. 정말 고맙고 죄송합니다. 지난번에는 정말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제가 돈은 없지만 예의는 있거든요. 나중에 돈도 많이 벌어서 꼭 좋은 곳에서 밥 사겠습니다.”
레이나는 흐뭇한 눈으로 소월을 마주했다.
“소월 씨는 볼수록 귀엽네. 내 동생이 여자 보는 눈은 있어.”
“아니에요, 언니. 저희는 그냥 누나 동생 사이예요.”
레오는 괜한 얘기를 한다는 식으로 레이나에게 인상을 써 보이고는, 두 여자의 대화에서 일단 빠지겠다는 태도를 확실히 취하고 조용히 고기를 구웠다.
육즙이 딱 맞게 우러나게 잘 구워진 고기를 앞 접시에 놓아주자 소월이 눈을 번쩍 떴다.
“너 왜 그래? 레이나 언니부터 먼저 드려!”
“그러게 말이야. 언니 챙겨줘서 고맙다, 소월아.”
레이나도 거들었다.
“둘이 아주 잘 맞나 보네.”
레오는 툭툭거리며 레이나 앞에도 고기를 한 점 놓아주었다.
“우리 시원하게 맥주도 한잔해야지.”
레이나는 소월에게 찡긋 윙크했다.
“좋죠!”
“오늘도 그날처럼 쭉 달릴 거야?”
“아…… 죄송합니다.”
소월이 민망해하자 레이나가 깔깔 웃었다.
질 좋은 고기와 시원한 맥주. 서먹한 사이를 풀어줄 최고의 매개체 덕분에 소월은 레이나와 금방 친해졌다.
배도 차고 술기운도 딱 기분 좋게 올라왔을 때 레이나는 슬슬 본론을 꺼냈다.
“소월이 너 좋아하는 사람 있다며. 이름이 강한해라고?”
“엇! 제가 그날 취해서 막 다 말했죠. 죄송합니다.”
“어떤 사람이야?”
“제가 배를 탈 때 만났어요. 아직은 짝사랑인데…… 천천히 해보려고요.”
“짝사랑인데도 계속 기다리는 걸 보면 엄청 매력적인 사람인가 봐?”
“음. 언니 기준에서 보면 하찮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학교도 제대로 못 나오고 부모님도 안 계시고…… 어릴 때부터 배를 탔으니까요.”
“소월이가 언니를 오해하고 있네. 언니는 학벌이나 집안 같은 거 안 따져. 재산도 마찬가지고. 언니가 보는 건 사람의 영혼이지. 본능적으로 내 영혼이 끌리는 운명적인 짝이랄까? 그 영혼이 일그러져 있다고 해도.”
“제 눈에는 한해 오빠가 그래요. 그 사람은 다른 시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 같아요. 여행자 같달까요? 그래서 음…… 뭐라고 하지? 이 세상의 파도는 다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의연하다?”
“아! 그 말이 생각 안 났어요. 네. 의연해요.”
“그런데 의연한 강한해 씨도 짝사랑을 하고 있다며? 심지어 유부녀를.”
“레오한테 들으셨군요. 네. 맞아요.”
“그 여자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어?”
“저랑 한해 오빠랑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것만 알아요. 한해 오빠가 어릴 때부터 가까웠던 동네 동생이었다고.”
“그 여자 이름은 진수진이야.”
소월은 물론이고, 얌전히 고기를 굽던 레오도 놀라서 레이나를 쳐다보았다.
“나보고 진수진이 어떤 여자냐고 물어본다면 나도 똑같이 대답하겠어. 의연해. 이 세상의 파도는 다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더라. 즉, 강한해 씨와 소울메이트라는 뜻이야.”
“언니가 그분은 어떻게 아세요?”
“직접 만났으니까.”
듣고만 있던 레오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누나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혹시 누나가 좋아한다는 그 남자 아내가…….”
레이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 잔을 맥주로 채웠다.
“둘 다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그녀는 잔을 비운 다음 콧잔등을 찡그렸다.
“우린 아주 기구한 운명의 고리들로 전부 연결되어 있어. 그 첫 번째 고리는 강한해와 진수진이야. 그리고 두 번째 고리는 진수진과 이강이지. 이 고리는 특별해. 부부라는 이름으로 엮여있고 법적인 보호까지 받지.”
소월과 레온의 입이 스르륵 벌어졌다.
“그다음 나와 이강 오빠의 고리가 있어. 나도 강이 오빠를 짝사랑해. 소월이가 강한해를 짝사랑하는 것처럼. 그리고 레오가 소월이를 짝사랑하는 것처럼.”
불판 위에서 고기가 타고 있었지만 레오는 고기 굽는 일을 아예 잊어버렸다.
“이 고리들은 아주 단단하게 엮여 있었고 어느 하나 풀리거나 새로 엮일 것 같지 않았어. 그래서 다들 고통스러웠지. 정말 지긋지긋하게 모두가 다 말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뿐인데도, 행복하기는커녕 다들 가슴만 아팠지.”
“언니…… 정말이에요? 한해 오빠가 좋아한다는 여자의 남편이……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요?”
“현재로서는 남편이지. 하지만 앞으론 아닐 수도 있어.”
소월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진수진이 이혼을 결정하고 의사를 밝혔거든. 물론 남편인 이강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지만.”
“한해 오빠도 그걸 알아요?”
“당연하지. 이제 강한해는 죽을 때까지 직진만 하겠지. 그 남자 성격 네가 제일 잘 안다며.”
소월은 충격에 휩싸여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레이나는 그녀에게 충고인지 명령인지 애매한 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소월아. 강한해 포기해. 진수진이 남의 아내였을 때도 그녀만 보고 있던 사람이야. 그런데 이제 진수진이 이혼하겠다고 하잖아. 몇 년이 걸리든 강한해는 그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릴 거야.”
레이나는 레오를 돌아보았다.
“레오한테도 기회가 생긴 셈이야. 고리들이 끊어졌어. 이 귀여운 아가씨하고 새로운 고리를 만들 기회야.”
“누나가 나 생각해줘서 고마운데…… 좀 갑작스럽긴 하다.”
“난 처음에는 제일 단단한 고리부터 끊어져야 다른 고리들이 끊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 내 오해였어. 다른 고리들이 새로 만들어지면 이강과 진수진의 고리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멍하니 앉아 있던 소월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언니. 정말 죄송한데요. 저 먼저 일어날게요.”
그녀는 레이나에게 꾸벅 인사했다.
“또 실례를 하고 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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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다. 고작 밥을 먹고 30분 정도 같이 차를 탄 것뿐인데, 천국의 문에서 나오는 심정이네.
혹시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수진을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해는 몇 번이나 한숨을 토했다.
돌아서면 보고 싶다는 흔한 노랫말이 완벽하게 이해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의 방으로 올라가지 않고 길에 내려준 일은 매우 사려 깊은 행동이었다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그러다가도, 딱 한 시간만 산책이라도 할걸 그랬나 싶은 아쉬움이 몰려들기도 했다.
어쨌거나 모두 달콤한 감정들이었다. 외롭고 기약 없어 차게 식은 감정이 아닌 후끈하게 달아오른 감정.
집에 도착해 차고 리모컨을 누르려는데, 현관 앞에 누군가 쪼그려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차하기 전에 일단 차를 세우고 내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소월이니?”
한해가 부르자 그녀가 무릎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아, 오빠 왔네.”
그녀는 어딘가 쓸쓸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야.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어.”
“어…… 그냥…… 뭐라고 할지 몰라서…… 그냥 정신차려보니까 여기 와 있네.”
횡설수설. 그녀는 전에 없이 불안해 보였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한해는 그녀를 차에 태운 채 주차를 하고, 다시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만들어 건네주었다.
“무슨 일 있구나.”
“응. 아니라고 거짓말할 필요는 없겠지.”
한해는 보채지 않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몇 모금 따뜻한 차로 입을 적신 소월이 말했다.
“레이나라는 분 알지?”
“어? 네가 어떻게 레이나 씨를 알지?”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처럼 나를 쫓아다니는 녀석이 하나 있어. 나만큼이나 한심한 녀석이지. 그 녀석의 누나가 레이나야.”
한해는 얽혀있는 관계를 머릿속에 그려봤지만 쉽지 않았다.
“레이나 언니한테 들었어. 오빠가 좋아하는 그 여자, 진수진…… 이혼한다면서?”
“응. 합의가 쉽지 않아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그 말은…… 오빠가 나에게 올 가능성은 이제 없다는 뜻이네.”
“소월아. 처음부터 내가…….”
“알아. 오빠는 늘 거리를 유지했지. 나도 그러려고 애썼고. 하지만 오빠도 알잖아. 내 마음은 그러지 못했다는 거.”
“알아. 내 마음도 말을 안 들으니까.”
“오빠. 우리 참 좋은 인연인데. 그렇지 않아?”
“응. 같이 항해한 거리만 해도 얼마야. 바다라는 바다는 다 누벼봤지.”
“우리가 함께 본 별은 수백 개가 넘을 테고.”
“노을이 내려앉는 수평선, 이름 모를 바닷새들, 왠지 육지의 것과는 달라 보이는 구름,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들, 바다 위로 걸친 무지개…… 그런 것들을 너랑 함께 보았지.”
“눈물 나게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어. 소중한 추억이고. 망치고 싶지 않아.”소월의 눈도 목소리로 물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 오빠가 해줘야 할 일이 하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