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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43화 (43/92)

43화

-어젠 잘 잤어? 컨디션은 어때? 딱 선을 넘지 않는,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한 인사가 도착했다.

-응. 잘 잤어요. 오빠는?-나도. 이제부터 바쁜 시간이라 메시지 답이 늦더라도 이해해라. 뭐야. 밀당하는 거야?

-나도 바쁘다고요.-알지^^ 그래서 말인데, 지금 하고 있는 작품 말이야. 나한테도 보내줘. 수진의 고개가 절로 갸웃 기울어졌다.

-야화 작가 소설? 그건 왜요?-지난번에 스토리 들었잖아. 계속 읽어보고 싶어서.-오호. 일반인의 시선으로 모니터를 해주시겠다? 그런 건 아주 필요하죠. 우리 사무실 식구들도 다들 자기 작품 바쁘다고 열심히 안 읽어줘서.-돈은 따로 안 받을게. 한해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지 딱 2분. 일어나서 한 번도 웃지 않았던 수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좋아요. 지금 보낼게요.-이따 점심 먹으면서 볼게.-알겠어요. 돈 많이 벌어요. 오빠한테 돈 꿔야 할지도 모르니까.-은행 이자만 받을게.-쌩유. 거기까지. 한해가 갑자기 남자친구 행세를 하는 일은 없었다. 기대도 안 했지만.

그러나 야속한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선 그어달라고 했다고 너무 긋는 거 아냐? 이제 친구처럼 지낼 수는 있는데, 저녁 정도는 같이 먹을 수 있잖아?

야화 작가가 지금까지 보낸 원고를 한해에게 전달한 뒤 그녀는 한 줄 추신을 붙였다.

ps. 관심 가져줘서 고마워요. 모니터 비용은 못 주지만 밥 한 끼는 사줄 수 있어요. 법카로!

간질간질한 느낌으로 기다리다 답장을 받았다.

-떨린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법카로 먹는 밥. 마음 바뀌기 전에 오늘? 누군가의 호의. 좋은 사람과 주고받는 말장난. 함께 하는 밥 한 끼.

이런 게 사는 맛일까? 평생 모르고 살았던?

절로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지 못하는 그녀 옆을 지나가던 팀장이 쓱 끼어들었다.

“진피. 무슨 좋은 일 있냐? 헤헤 웃네.”

수진은 ‘좋은 일’이라는 표현에 잠시 멍해졌다.

‘아, 이혼소송을 시작해요! 이제 변호사를 알아봐야 해서요. 여기서 받는 월급은 고스란히 변호사 주머니에 들어갈 예정이죠.’내가 왜 웃고 있는 거지?

그녀는 현자처럼 느릿하게 대답했다.

“뭔가를 깨달은 거 같아서요.”

“저에게도 깨달음을 나눠주시겠습니까?”

팀장의 장난기는 여전했다.

“삶의 행복이란 상황이 아니라 상황을 대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건 화장실에 붙어 있는 말 아닌가요?”

“여자 화장실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아요.”

“그렇군요. 새겨듣겠습니다.”

한해 때문에 올라온 기분은 늘 유쾌한 팀장 때문에 더 상승했다.

최악의 상황에서 사는 맛을 느끼다니.

의욕이 살아나면서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

.

.

삶의 풍경만큼이나 장례식장의 풍경도 천차만별이다.

생전의 가난과 외로움은 죽음마저 가난하고 외롭게 만든다.

사토시라고 불리는 사내, 인걸은 장례식장 앞에 서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근조화환을 보며 괴이한 감정과 맞닥뜨렸다.

부고 소식을 들은 건 오늘 오전이었다. 일본에 두고 온 자식과 영상통화로 안부를 주고받고, 영국에 있는 은행에서 온 투자 관련 메일에 답장을 쓰려던 참이었다.

“인걸 오빠…….”

바들바들 떨리는 숙희의 목소리만 들어도 용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국 씨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지만 인걸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성국이 녀석. 결국 그렇게 간 거냐?

어린 시절 고향 친구였고, 그가 중동으로 돈을 벌러 간 사이 약혼녀를 가로챈 일생의 원수였다.

오랜 세월 그를 증오했으나 숙희의 남편이자 아이 아빠이기에 복수를 할 수도 없었다.

평탄은커녕 가난과 질병, 그리고 각종 중독으로 고통받았던 그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따로 복수 따위 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인걸은 바로 장례식장으로 달려왔고, 오는 길에 근조화환을 주문했고, 지금 그가 마주 보고 있는 유일한 화환이 바로 그가 보낸 것이었다.

성국아. 고작 이렇게 살다 가려고 숙희를 빼앗았니?

그는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접객실에는 조문객이 딱 한 테이블 앉아 있었고, 이미 소주병이 여럿 보였다. 상주인 진수도 그 틈에 있었다.

“어. 인걸 아저씨.”

인걸을 발견하고 일어선 그의 몸이 휘청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덥석 손을 잡으며 인사하는데 술 냄새가 확 끼쳤다.

망할 녀석…… 아버지 장례식을 막 치르는 상주가 벌써 취했어.

인걸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겨우 참고 목례로 예를 표했다.

“인사드리마. 가자.”

인걸은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영정 앞에 섰다.

상주 자리를 지키는 숙희의 얼굴에는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인걸을 본 그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보일 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는 입가에 묻은 양념을 닦지도 않은 진수가 서 있었다.

인걸은 이를 꽉 물었다.

상가만 아니라면 버릇없는 자식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

아버지를 애도하고 어머니를 달래줘도 모자랄 판에…….

나도 이렇게 조문을 왔는데! 너희 아버지에게 배신당한 나도 이렇게 왔는데!

인걸은 헌화를 하고, 향을 피우고, 영정 앞에 절을 올렸다.

성국이. 이제 어떤가? 지긋지긋한 인생 굴레 벗어던지니 속이 시원한가?

두 번의 절을 올리고 영정 속 얼굴을 마주했다.

언제 찍은 사진일까? 반송장으로 드러누운 지 몇 년이 되었으니 꽤나 젊었을 때 모습이겠지.

잔잔하게 미소 띤 얼굴을 주로 쓰는 요즘 영정사진과 달리 성국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자네가 숙희를 빼앗지 않았다면 자네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토록 고되지 않았을 거야.

자네는 감당할 수 없는 보물을 손에 넣고 안절부절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해적 같은 꼴로 살았어. 왜 그랬나…….

그는 상주와 맞절을 나누었다.

“황망하고 슬프겠지만 힘내시길 바랍니다.”

“와주셔서 고마워요. 근조화환도 잘 받았고요.”

숙희는 손을 꼭 잡고 존대로 말을 건넸다.

“그래도 우리 챙겨주는 사람은 인걸 아저씨밖에 없다니까.”

진수는 웃는 얼굴로 헛소리를 했고 인걸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접객실로 향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소주 한잔하고 가셔야죠.”

진수가 소주를 들고 인걸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가 왜 이토록 호의적인지 인걸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녀석에게 관심은 오직 돈.

나한테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인 게지.

“진수야. 아직 대낮이야. 손님들도 계속 올 텐데 상주가 그렇게 취해있으면 안 돼.”

인걸은 점잖게 말했다.

“에이, 문상객이 누가 온다고 그래요. 어차피 제 친구들이나 몇 오고 말 텐데.”

진수는 여전히 히죽거리고 있었다.

인걸은 가슴을 찢는 비애감에 인내심을 잃었다.

“감히 아들이! 아버지 영정 앞에서! 웃다니!”

그는 진수의 어깨를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제야 진수는 분위기 파악을 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러났다.

인걸은 홀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내가 잘못한 걸까? 더 일찍 나섰어야 했나?

평소에는 거의 느끼지 않는 감정, 후회와 자책을 쓴 안주 삼아 술을 마셨다.

“에휴. 뭐라도 좀 드시면서 반주를 하시지.”

어느새 다가온 숙희가 마주 앉았다.

상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원래보다 더 초췌해 보였다.

“자네야말로. 뭐라도 좀 먹고 서 있는 거야?”

인걸은 반찬 접시를 숙희 앞으로 쓱 내밀었다.

그녀는 나무젓가락을 가르고 무심하게 떡을 집어 먹었다.

“놀랍지도 슬프지도 않아요. 내가 아주 제대로 나쁜 년이 되었나 봐요.”

“그런 사람이 표정은 세상 다 잃은…….”

“앞으로 일이 막막해서 그래요.”

“막막하긴 뭐가 막막해. 이제야 숨통 트이는 거지. 평생 어디 숨 한번 제대로 쉬고 살았어?”

“진수 때문에 그러지요.”

“진수가 왜?”

“남은 재산 정리해서 자기 몫으로 달라고. 벌써부터 그 얘기를 하고 있으니.”

인걸은 또 빈속에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은 틀렸어. 물건이 그렇듯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따로 있을 뿐. 자네한테는 미안하지만, 진수는 못 고쳐.”

“왜 또 그런 매정한 얘기를 해요. 요즘 아침드라마에 얼굴도 비추고 그래요. 아까 방송국에서 문상도 온다고 하던데.”

“그렇게 잘난 배우라면 방송국에서 화환이라도 하나 왔어야지!”

숙희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다 줘버려.”

“네?”

“성국이가 남긴 재산, 진수한테 다 줘버리라고. 그리고 정신 차릴 때까지 연 끊어.”

“오빠…….”

“그게 진수가 유일하게 정신 차릴 수 있는 방법이야. 어차피 그 알량한 재산 다 털어먹겠지만. 이제 엄마 등골 빨아먹는 짓 그만하고 지 인생 지가 감당해야지!”

“다 줘버리면 저는요? 뭘 먹고사나요?”

“자네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말을 맺는 인걸의 목소리는 숙희보다 더 떨렸다.

자네 인생도 얼마 안 남았다고. 내가 아무리 부자여도 치매를 고칠 약은 못 구한다고.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를 차마 장례식장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으니까.”

숙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이미 늦었지만 더 늦지 않게 해줘. 숙희야. 부탁한다.”

눈물도 조문객도 곡소리도 없는 쓸쓸한 장례식장에 옅은 흐느낌이 번지기 시작했다.

*

두 번째로 찾아간 진료실. ‘정신과전문의 김야화’라는 명패 뒤에 앉아 있는 선생님에게 강은 먼저 양해를 구했다.

“잠시 넥타이를 풀어놔도 괜찮겠습니까? 업무 중에 들른 참이라서요.”

“그럼요. 편안한 상태에서 말씀 나누시는 게 좋습니다.”

강은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 단추도 하나 끌렀다.

야화는 환자 진료기록을 훑어본 뒤 물었다.

“진료를 계속할지 말지 고민해보겠다고 했는데, 다시 오셨네요?”

“네.”

“아내분에 대한 감정은 조금 편해지셨나요?”

“제가 여기 와 있는 걸 보면, 아니겠죠.”

“지난주에는 아내분에 대한 원망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눠봤어요. 그 이유가 어떤 남자를 사이에 놓고 생기는 질투와 열등감 때문이라고 하셨고요. 특이하게도 이강 씨가 쓰스로 분석까지 하셨어요. 아내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심리 같다고.”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강은 적잖게 안심되었다. 다른 생각을 들으려고 온 거니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전문가로부터.

“오늘은 이강 씨의 마음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알아보려 합니다. 지난 시간에 저희가 본 마음은 이강 씨가 머리로 해석한 마음이에요. 머리를 거치지 않은 원래 마음을 들여다보기로 하죠.”

“그게 가능합니까?”

“시도해보죠. 되는 경우도 있고, 여의치 않을 때도 있으니까.”

야화는 진료실 한쪽에 놓여 있던 긴 의자를 가리켰다.

“저게 뭔지 아세요?”

안 그래도 강은 궁금했다.

의자와 침대의 중간 단계랄까.

사람이 앉기에는 불편해 보이고, 인테리어로 들여놓기엔 너무 부피가 큰 카우치였다. 시대 배경이 몇백 년 전인 영화에서나 몇 번 봤을까 싶은 스타일.

“카우치의 일종인가요?”

“오, 정확하게 아시네요. 요즘 카우치는 다 가족용 소파에 붙어 나오지만 옛날에는 저런 형태로 따로 제작했죠. 한때는 정신과 병원을 카우치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그건 왜죠?”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드가 환자를 카우치에 눕히고 치료를 진행했기 때문이죠. 아직도 저희처럼 이런 카우치를 들여놓은 정신과 진료실이 꽤 있을 겁니다.”

그녀는 강을 카우치로 안내했다.

“편안하게 누우시죠.”

몸이 무방비로 노출되는 느낌이랄까. 다소 어색한 기분이었지만 강은 시키는 대로 몸을 누였다.

“저는 이강 씨 뒤에 앉아 있을 겁니다. 이강 씨도 의식적으로 저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세요.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 정도로 인식하시면 제일 좋습니다.”

“네.”

강은 짧은 대답을 하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눈을 감았다.

“자, 편안하게 호흡하시고요. 이강 씨의 기억을 조금만 뒤로 돌려볼게요. 어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볼까요? 어제 입은 옷은 뭐였을까요? 최대한 자세하게 묘사해보세요.”

“짙은 남색 슈트. 스트라이프 넥타이. 그리고 송아지 가죽 옥스포드 구두.”

“그랬군요. 그럼 조금 더 멀리. 작년 겨울로 돌아가 볼까요? 크리스마스에는 뭘 했을까요?”

“크리스마스는 아내와 보냈습니다. 그때는 결혼 전이었고 결혼 이야기가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였죠. 우리는 베트남 다낭의 호텔에 있었어요.”

“아 정말 좋았겠네요.”

“네. 모든 것이 좋았던 순간이었죠.”

“더 뒤로 가볼까요? 이번엔 아주 멀리 갑니다. 편안하게 숨을 쉬면서 저를 따라오세요.”

야화의 목소리는 조금씩 더 느려졌는데 변화의 속도가 크지 않아 강은 의식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어땠을까요? 어떤 기억들이 나세요?”

“목표로 했던 대학에 가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 기뻤다는 표현보다 더 구체적이네요.”

“기쁨보다는…… 아버지를 만족시켜 줄 수 있어서,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좀 더 떠올려볼까요? 대학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한테 칭찬을 많이 받았겠어요.”

강은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그를 찔렀으니까.

합격소식을 들은 어느 겨울날,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당신이 목표로 정해준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합격했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칭찬해주지 않았다. 대신 당분간 외국에 머물 거라고 했다. 전화기 너머 젊은 여자들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늘 애인이 있거나 애인을 바꾸는 중이었고, 일 년의 반은 집이 아닌 다른 여자와의 공간에서 지냈다.

강이 대학에 합격했을 무렵은 아버지의 외도가 절정에 이른 시절이라 아예 몇 달 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그 시절은 스무 살이나 어린 배다른 동생으로 결실을 맺었다.

카우치의 마력 때문이었을까.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부끄러운 이야기가 강의 입에서 조곤조곤 나왔다.

“그랬군요. 정말 많이 속상하고 힘들었겠어요.”

“아니요. 차라리 아버지가 곁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스무 살의 이강 씨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아버지에게 맞을 일은 없었으니까요.”

“아버지가 처음으로 이강 씨를 때렸던 날로 돌아가 볼까요? 언제였을까요?”

“그건 너무 옛날인데요…….”

강은 미간을 모으고 기억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갔다.

“조금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기억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처를 후벼 파는 고통이 번졌다. 고삐로 잡아끄는 느낌, 혹은 시멘트벽에 막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느낌…… 아버지의 폭행에 관한 기억은 끄집어내기조차 어려웠다.

야화는 침착하게 기다리면서 카우치를 톡톡 두드렸다. 아이를 달래듯, 혹은 기억을 거스르는 속도에 박자를 맞춰주듯.

어느 눈 내리던 날의 기억. 학교를 다녀온 강이 집에 들어갔을 때…… 귀를 찢는 비명소리…… 그리고 악마의 재림…….

결국 강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상담은 중단되었다.

*

고풍스러운 샹들리에 주위로 실내악이 넘실거렸다.

오랜만에 양식을 먹고 싶다는 한해의 선택에 따라 고른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수진이 앉아 있는 테이블 옆에는 중세시대 기사 갑옷이 조각상처럼 서서 지키고 있었다. 마주 앉은 그들은 천천히 식사했다.

“아까 사토시 씨하고 잠깐 통화했어. 변호사 때문에.”

“안 그래도 오늘 좀 알아봤는데 인터넷으로만 검색해서는 믿을 만한 사람 찾기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TV에 출연하는 유명한 변호사들은 너무 비쌀 것 같고.”

“그런 사람들이 재판도 잘해준다는 법도 없어.”

“그것도 정말 그렇죠. 사토시 씨는 뭐래요?”

“변호사 문제는 걱정 말라고.”

“정말요?”

“네가 무척 보고 싶대. 대신 모레쯤 같이 보면서 얘기하자고 하시네.”

“좋아요. 저야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지푸라기는 아니고 통나무쯤 되겠네. 절대 가라앉지 않을.”

“미리 말하지만 호의는 소개받는 데까지만 받을게요. 변호사비는 어떻게 해서든 제가 마련하고, 모자라는 돈은 빚을 져서라도 내겠어요.”

“진수진 참 안 변해.”

“소개해주는 것만 해도 고맙잖아요.”

“만나보면 깜짝 놀랄 거야. 정말 특별한 삶을 산 분이니까.”

“기대할게요.”

와인과 함께 메인 요리를 먹은 둘은 디저트로 단맛을 더했다.

한해는 수진이 보내준 야화 작가의 소설 이야기를 꺼냈다.

“나 사실 마케팅용어로 치면 소설 헤비유저야. 배에서 소설책 엄청 많이 읽었거든. 배에 와이파이가 터진 뒤로는 폰으로도 많이 봤고.”

그는 일반 독자로서 읽은 소감을 찬찬히 말해주었고 수진은 폰으로 메모까지 하면서 들었다.

한해의 모니터는 제작사에서 외주로 쓰는 전문 모니터 요원들 못지않게 꼼꼼했다.

수진은 마음이 흐뭇하게 차올랐다.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열심히 우리 작품을 읽어줘서.”

“멋지다. 우리 작품이라는 말. 작가도 좋아하겠다.”

“앗. 너무 내 멋대로 말했나? 작품의 권리는 당연히 작가의 소유죠. 작업을 하는 동안만 우리 작품.”

수진이 활짝 웃었다. 한해는 깍지 낀 두 손에 턱을 올리고 가만히 관찰했다.

“뭘 그렇게 봐요. 민망하게.”

“이젠 보는 것도 안 되냐? 말도 제대로 못 하게 하더니.”

“그렇게 보는 건 안 돼요. 표정이 너무 그윽해.”

“그윽하다는 게 무슨 뜻이야?”

“깊고 간절하다는 뜻.”

“그렇다면 맞네. 내 기분도 그윽해.”

수진은 여러 번 이런 말을 떠올렸다.

오늘, 사는 맛 참 좋네.

내가 누군가에게 호감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호감이 없는 사람하고는 중요한 이야기를 해도 따분하고, 호감이 있는 사람과는 사소한 잡담만 해도 즐겁다.

둘은 별것 아닌 것들을 이야기하며 웃고 박수 치고 흥분했다. 한해에게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

“잠깐만. 모르는 번호인데 전화 좀 받아볼게.”

전화를 받은 그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네. 강한해입니다.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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