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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42화 (42/92)

42화

창밖은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다. 한해와 함께 노을빛으로 채웠던 마음이 다시 어두워지는 기분이었다.

“왜 또 그래.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우리 이혼하기로 했잖아.”

“난 그런 적 없는데? 당신의 망상일 뿐이지. 우린 이혼 안 해.”

‘못 해’도 아니고 ‘안 해’라고 표현하는 그의 태도는 콘크리트 벽 같았다.

“그래. 당신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어쩔 수 없이 소송으로 갈 수밖에 없겠네.”

“진수진. 너 소송으로 나 못 이겨. 우리 같은 재벌 그룹 이혼소송이 어떤지나 알아? 5년 6년은 기본이야. 우리 아버지 친구분 중 한 분은 다른 여자하고 살면서 애까지 낳아 키우고 있는데도 아직도 10년째 이혼소송 중이라고.”

“오래 걸리더라도, 평생이 걸리더라도 계속할 거야.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의사는 전혀 상관없이 마음대로 지껄이는 당신하고 같은 집에 사는 날은 단 하루도 없을 거야.”

“괜히 돈 낭비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쯤하고 들어와. 나도 이번 일로 느낀 게 많아. 변화된 모습 보여줄게.”

수진은 가슴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속이 터질 것 같다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겠다.

“왜 당신은 자기 입장만 생각해? 나는 싫다고. 당신하고 같이 살기 싫다고. 당신이 변하든 말든 이제 상관없다고.”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네. 걱정된다. 지칠까 봐.”

“하! 그게 걱정되면 그냥 날 놓아줘.”

수진은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강은 무섭도록 차가워졌다. 낮에 공원에서 이혼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와는 둘의 태도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수진아. 내 사랑 수진아.”

사랑이라는 단어가 그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 자체가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할 수 없는 일이 널 놓아주는 일이야.”

“아 제발…… 당신은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

“당신이 내 아내라서 행복해. 그런데 왜 이혼을 하고 불행해져야 해?”

둘 사이의 감정에 대해 더 이야기하다가는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았다.

“아까 아버님 만나서 말씀드렸어.”

“안 그래도 연락 오셨어. 내일 만나서 얘기하기로 했어. 오늘 밤에 술자리가 있다고 하셔서.”

하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가 이혼을 선언했는데 술자리?

“나는 당신에게…… 당신 집안에…… 뭐였을까?”

“사랑받는 아내이자 며느리지. 지금도.”

“그놈의 사랑! 지긋지긋해! 토할 것 같아!”

“다시 만날 때까지 몸 건강, 정신 건강 잘 챙기기를 바랄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집에 들어오고 싶으면 언제든 들어오고. 내 곁은 항상 당신을 위해 비워져 있으니까.”

아…… 정말 누가 들으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친절한 남편인 줄 알겠네.

수진은 무서워졌다. 이혼소송을 진행하면서도 강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판사가 보기에 어떨까?

파탄주의가 아니라 유책주의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부부 한쪽의 사랑이 식었다는 이유로 이혼할 수는 없다.

강이 계속 저렇게 나오는 이상 판사가 이혼하라고 판결할 것 같지는 않아. 혹시 그걸 노린 걸까? 그래서 저런 태도로 나를 대하기로 마음먹은 걸까?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강 씨 잘 들어.”

수진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참고, 최대한 감정을 빼고 말하려고 애썼다.

“자꾸 당신의 유책사유를 되풀이해서 말하게 만들지 마. 당신은 혼인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대한 거짓말을 했고, 결혼 후에는 외도를 저지르고,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일삼고, 부당하게 나를 의심하고 집착했어.”

“우리 공주님이 왜 예쁜 입으로 그런 나쁜 말을 할까.”

공주님? 수진의 팔뚝에 소름이 쫙 돋았다.

공주님이라는 표현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말투 또한 달달한 신혼을 즐기는 남편의 말투였다.

“그런 말은 당신 내연녀한테나 해.”

“응? 내연녀?”

“레이나! 그 여자하고 직접 통화까지 했다고!”

“우리 공주님이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네. 빨리 집에 돌아와. 저녁은 먹었어? 같이 먹을까?”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나긋나긋한 말투를 듣고 있자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당신 내연녀가 그러더라. 당신과의 사이가 너무 진지해서 문제라고. 당신 포기 못 하고, 어떻게든 뺏을 거라고. 그리고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네…….”

강은 중얼거렸지만 아까보다는 흔들리는 음성이었다.

“이강. 미친 연기 그만하고 인정할 건 인정해.”

“후우…… 우리 공주님이 요즘 새 작품 준비하느라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았나? 자꾸 이상한 소리를…… 괜찮아. 기다릴게. 사랑해, 수진아.”

“사랑!”

그딴 소리는 당신 내연녀에게 하라고 소리치려다가 겨우 참고 말했다.

“방 구하는 대로 다시 연락할게.”

통보하듯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 정말…….”

침대에 털썩 누웠다.

이제 강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손길이 미치지도 않는데…… 수진은 한참 동안 답답하고 소름끼치는 불쾌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한해의 메시지를 다시 열어보았다.

-나도 너처럼 행복해지기로 마음먹었어. 우리 둘 다 이제 그럴 자격 있어. 그리고 넌 좀 덜 착해도 돼. 마법의 주문처럼 반복해서 읽고 났더니 조금 편해졌다.

그래. 행복해지자. 오직 그것만 신경 쓰자. 길고 긴 세월 동안 난 행복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으니.

.

.

.

강은 핸드폰에 저장된 통화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녹음은 잘되었다.

잔뜩 스트레스를 받은 아내와 어떻게든 아내를 달래주려는 착한 남편의 통화 내용.

그는 핸드폰을 꽉 쥐고 있다가 레이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이 시간에 웬일이야!”

레이나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너 수진이하고 통화했냐?”

“어…… 수진 씨가 말했나 보네.”

“왜 함부로 나대고 그래?”

“나대긴 누가 나대. 수진 씨가 먼저 연락했어.”

“뭐? 정말이야? 그럴 사람이 아닌데.”

“보여줘? SNS로 먼저 연락 왔어.”

“너 수진이한테 대체 무슨 소릴 한 거냐?”

“솔직히 말했지. 내가 늘 하던 대로.”

강은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네가 쓸데없는 소릴 해서 수진이가 이혼하겠다고 난리잖아.”

“하! 오빠. 다른 일에는 세상 냉정하고 똑똑한 사람이 왜 그 여자하고만 엮이면 똥멍청이가 되는 거야?”

“네가 이렇게 말했다며? 나랑 불륜을 저질렀다고! 날 포기할 수 없다고! 날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응. 그렇게 말했어. 다 사실이니까.”

“야…… 이 미친…….”

“그동안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모양이네. 여러 번 했던 얘긴데.”

“다른 건 모르겠지만 네가 날 행복하게 해줄 일은 없을 거다.”

“오빠. 이제 그만해. 그 여자도 불쌍하다. 좀 놔줘.”

“지금 누가 누굴 동정해?”

“나 수진 씨 싫거나 밉지 않아. 질투하고 미워했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좋은 사람 같아. 다만 오빠 곁에 있으면 서로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야. 각자는 몸에 좋지만 같이 먹으면 안 되는 음식들처럼 말이여.”

“한 가지 확실하게 해두고 가자. 난 수진이하고 이혼하지 않아. 그리고 만에 하나, 그녀와 오래 떨어져 있게 된다 하더라도 네가 수진이 자리를 차지할 일은 없을 거야. 이 세상 누구도.”

“와…… 진짜 집착 쩌네. 그런 사람이 왜 나하고 그랬대?”

“닥쳐. 다신 수진이하고 연락하지 마.”

“싫은데? 계속 연락하고 지내고 싶은데?”

“이런 미친…… 레이나. 너 왜 그래?”

“오빠야말로 이거 왜 이래. 세상 그 누구보다 날 잘 아는 오빠가. 난 늘 멋대로 내키는 대로 살았어. 난 수진 씨가 이혼하도록 힘을 보탤 생각이야.”

“부탁한다. 아니 경고한다. 더 이상 수진이하고 엮이지 마.”

“있잖아. 내가 인생관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지. 오빠가 시키는 대로 다 하도록 만드는 방법.”

“어떻게 하면 되냐? 알려주면 그렇게 할게.”

“나랑 결혼해.”

“그만!”

강은 주먹으로 벽을 쿵쿵 때렸다.

“늘 오빠 갖고 싶었어. 뺏고 싶었어.”

“아,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바보. 누구보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오빠일 텐데? 오빠는 어떻게 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진 씨를 뺏었잖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이제는 뺏기지 않으려고 발악하고 있고. 그 마음을 돌아봐. 내 마음이 딱 그러니까.”

“함부로 비교하지 마.”

강은 인사를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와우. 마무리도 섹시하네.”

레이나가 있는 곳은 백화점 복도. 갑자기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녹음된 통화 내용을 확인했다.

녹음은 잘되었다. 잔뜩 열 받은 유부남과 어떻게든 그를 잡으려는 내연녀의 통화 내용.

“언젠가 당신하고 같이 쇼핑을 올 거야. 우린 웃으며 이 시절을 추억할 거야.”

그녀는 씩 웃고는 에르메스 매장 안으로 긴 다리를 옮겼다.

“레이나 쌤 오랜만이에요!”

그녀를 알아본 직원들이 꾸벅 인사했다.

“좀 일찍 오시지. 저희 영업시간이 30분밖에 안 남았는데요.”

매니저가 아쉬워했지만 레이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 사는 데 30분이면 충분하죠.”

치렁치렁한 머리에서부터 라이더 재킷 그리고 극단적인 미니스커트와 킬힐을 신은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쇼핑을 시작했다.

*

아침이 밝았다.

태화건설 이태화 회장은 이른 아침 골프 라운딩을 마치고 바로 출근했다.

그는 첫 스케줄 전에 집무실에서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커피 향을 제대로 음미하기도 전에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수진이었다.

“음…… 생각보다 더 겁이 없는 아이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좋은 아침이다, 수진아.”

인자한 시아버지의 말투로 인사를 건네고 커피 한 모금.

“회장님. 불쑥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회장님은 뭐냐. 그냥 아버님이라고 해라.”

“회장님, 저한테 미행 붙이셨어요?”

“응? 그게 무슨 소리냐?”

“제가 묵는 호텔방 앞을 얼씬거리는 사람이 있어서 신고했어요.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아이고!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러게 집 밖에 나가 있으면 위험하다. 얼른 들어가렴.”

“아버님. 저 이혼합니다.”

“어허…… 왜 또 아침부터 이렇게 흉한 소리를…… 쯧쯧쯧.”

“아무리 부정하셔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그리고 합의든 소송이든 이혼할 때까지 저는 이강 씨하고 같이 지내지 않을 거고요. 단 하루도.”

“우리 수진이가 화가 많이 났구나.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거 같구나.”

이 회장은 반쯤 남은 에스프레소 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다신 저 미행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혼은 결혼과 달리 어디까지나 저와 이강 씨 둘 사이의 일이에요. 합의를 하든 소송을 하든 저희 둘이서 하겠습니다. 회장님이 개입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또 흉한 소리를…… 좀 진정하거라. 며칠 더 쉬고 저녁이나 먹자꾸나. 얼마 전에 우설을 제대로 내놓는 집을 발견했는데…….”

“저야말로 징그러운 소리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네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수진은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통화를 마친 이 회장은 자그마한 에스프레소 잔 옆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겼다. 그 진동은 점점 세져서 잔이 튕겨져 나갈 것만 같았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초조한 듯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는 쾌감에 몸을 떨고 있었다.

얘야, 나는 너를 굴복시킬 거야. 그 생각을 하니 짜릿해지는구나.

똑똑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리고 비서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강 부회장님 오셨습니다.”

이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이 들어왔다.

그는 피가 섞이지 않은 부하 직원처럼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몇 신데 잘 잤냐는 인사야. 벌써 라운딩 돌고 커피도 한 잔 마시고 네 와이프하고 통화도 했는데.”

며느리도 아니고 ‘네 와이프’라는 표현에 강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렸다.

“앉아.”

강은 이를 꾹 물고 마주 앉았다.

“수진이가 이혼 얘기를 하던데.”

“죄송합니다. 수진이가 좀 격앙될 만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가지가지 했다면서? 바람도 피우고 손찌검도 하고. 어지간히도 괴롭힌 것 같던데?”

탓하는 말투가 아니었고, 강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부터 더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이 있긴 한 거냐? 수진이는 꽤 단호해 보이던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이혼할 일은 없을 겁니다. 잘 수습해보겠습니다.”

이 회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강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서도 계속 응시하며 담배를 피웠다.

침묵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강은 아버지의 시선이 칼로 찌르는 것처럼 괴로웠다.

“너는 내가 왜 수진이를 잡아두려는 것 같냐?”

한참 뒤에 나온 질문에 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답을 알면서도.

누나하고 수진이가 닮아서 그런 거 아닌가요? 외모도 성격도.

“대충 알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다 우연이나 운명 같으냐?”

강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우연이나 운명 얘기가 왜 나오는 걸까?

“시골 바닷가에 살던 수진이가 우리 집에서 같이 살다가 너와 결혼까지 하게 된 일이, 우연이나 운명 같냐고.”

“좀 어려운 질문입니다. 세상 모든 일은 우연 아니면 운명…… 둘 중 하나 아닐까요?”

“멍청한 녀석. 이 세상엔 우연이나 운명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쟁취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수진이가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와 있는 건 나의 의지 때문이다. 너의 알량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우리가 있는 이 빌딩, 전국에 건물과 아파트를 건설한 우리 회사. 모두 내 의지의 소산이지. 수진이도 그중 하나라는 말이야.”

“아버지…….”

강은 14년 전 시골마을의 비극적인 하룻밤을 떠올렸다.

태풍이 닥친 날 조업을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고기밥이 되어버린 사람들.

다들 의아해했다. 노련한 뱃사람들이었는데, 태풍이 갑자기 경로를 틀었다는 예보가 전해졌을 테고 충분히 항구로 돌아올 시간이 있었는데 왜 돌아오지 못했을까. 아니, 애초에 왜 그 날씨에 조업을 나갔던 걸까?

강은 다시 생각해봐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가 그 일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같이 배를 타고 나갔던 것도 아니고, 태풍을 조종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다 지나간 일 생각해봤자 소용없고,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이 회장은 파이프 담배를 뻐끔거리며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의지를 갖고 있다. 너와 수진이 둘의 피가 섞인 손주를 보겠다. 그 아이가 우리 태화 그룹의 대를 이을 것이고. 내 의지는 그런데 너는 어떠냐?”

“의외네요. 아버지가 제 의지를 물어보시니.”

“이 문제만큼은 내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저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수진이를 아내로 두고 싶습니다.”

“그럼 방법을 고민해봐. 재판을 계속 끌면 지쳐서 포기할까? 내가 아는 수진이는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당장은 그 방법밖에 모르겠습니다.”

“고민해봐. 방향이 정해졌으니 방법을 찾아야지.”

“네, 아버님. 꼭 찾아내겠습니다.”

이 회장은 뭔가 남아 있는 말이 있는 사람처럼 눈에 힘을 주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그놈 말이야. 강한해라는 녀석. 그놈도 관련이 있는 거냐?”

강은 너무 놀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한해에 관한 이야기는 꺼낸 적이 없었다. 수진이 역시 그랬을 텐데.

“수진이가 어제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그 녀석이 이름이 나왔어. 어릴 때 서로 좋아하던 사이였는데, 네가 그놈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그 거짓말이 아니었다면 너랑 결혼도 안 했을 거라고. 맞아?”

진수진…… 아버지한테 그놈 이야기까지 다 해버렸구나.

강은 남자로서 자존심이 구겨졌고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아직도 수진이 마음이 그놈한테 마음이 있는 거야? 그래서 걔가 이혼하려는 거야?”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꼴에 남자라고 자존심 때문에 말 못 하는 거냐?”

“잘 모르겠습니다. 수진이는 아니라고 하는데.”

“뭐하는 놈이야?”

“배를 오래 타다가 요즘은 전업투자자로 일한다고 들었습니다.”

“투자자? 뱃놈이 투자자로 변신했단 말이야?”

“네.”

“흠…… 보통 놈은 아닌 거 같은데. 굴리는 돈은? 어느 정도 규모야?”

“그리 큰돈은 아닐 겁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녀석을 탈탈 털어 거지로 만들어버리는 방법은 어때? 다 털리고 나면 한강에 찾아가려나? 지 애비처럼 물귀신이 될 운명인가.”

거침없는 악의 기운에 강은 소름이 끼쳤다. 그 역시 한해가 죽도록 미웠지만 그 정도까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정말로 내 손으로 강한해를 파멸시킬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문득 며칠 전에 찾아갔던 정신과 의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이 특이했는데. 야화라고 했던가? 한 번 더 가서 상담을 해봐야겠어.

강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동안 이 회장의 두꺼운 검지 손톱이 다시 테이블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강한해…… 강인권 선장의 아들. 궁금하네. 어떻게 컸는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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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출근길이었다.

회사 앞 길가에서 이태환 회장하고 통화한 시간은 고작 10분 남짓. 그동안 에너지가 몽땅 소진되어버린 기분.

애써 웃는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온 뒤 노트북을 켰다.

야화 작가가 며칠 사이 작업한 소설 원고가 잔뜩 도착해 있었다.

-피디님하고 교감을 하고 나니 글 쓰는 일이 외롭지 않아졌어요. 든든하게 이끌어줘서 고마워요. 평소 같았으면 신이 나서 읽어봤을 텐데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가능한 한 빨리 이혼소송을 시작해야 한다. 변호사부터 구해야 할 텐데. 태화 건설을 상대하려면 보통 변호사로는 어림없겠지.

그녀는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뭘 기다리는 거야?

미치도록 외롭고 두려운 상황에서 한해의 존재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는 어제저녁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없었다.

이제 막 이혼소송을 시작하려는 타이밍이니 한해 오빠 입장에서도 조심스럽겠지. 나 역시 거리를 두는 게 맞고. 내 입으로 그러자고 했고.

머리로는 그렇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그런가. 이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그녀의 손은 자꾸만 폰을 확인했다.

기다리던 메시지가 도착한 건 오전 10시가 넘어서였다.

불안과 싸우느라 얼어 있던 그녀의 얼굴이 꽃처럼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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