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누구 올 사람 있어?”
한해는 귀엣말에 가깝게 목소리를 낮췄고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문 열어주지 말고 누군지 물어봐.”
수진은 문 앞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누구세요?”
“룸서비스입니다.”
낭랑한 여자 음성이었다.
“룸서비스 시킨 적 없는데요?”
“저희 호텔 이벤트에 당첨이 되셔서요. 서프라이즈 선물입니다.”
수진은 짧은 순간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재빨리 생각하고는,
“잠깐만요.”
문을 여는 대신 전화를 들어 프런트와 연결했다.
“지금 제 방 앞에 호텔 직원이 와 있는데요. 이벤트로 룸서비스 무료 이용이 당첨되었다고 하는데, 혹시 그런 이벤트가 진행 중인가요?”
“음…… 저희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이벤트는 레이트 체크인, 얼리 체크아웃 할인이벤트가 있고요. 또…… 재즈가 있는 밤 라운지 바 이용 이벤트 두 가지뿐인데요.”
“그렇다면 누군가 호텔 직원을 사칭하고 있다는 말이네요. 제 방문 앞에서요.”
“아, 그런가요? 지금 즉시 조치하겠습니다.”
한해는 상황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너를 미행한 걸까?
잠시 후 문 앞에서 실랑이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진과 한해는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호텔 직원들이 의문의 여인을 데리고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객실 관리팀 팀장 이용호라고 합니다.”
굵직한 남자 목소리에 수진이 문을 열었다. 한해 역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이 팀장은 허리 숙여 사과를 표했다.
“신원미상의 인물이 저희 호텔 직원을 사칭한 것 같습니다.”
“왜 그랬대요?”
“조사해보겠습니다. 저희 운영팀 사무실로 데려갔고요, 간단한 조사를 마친 다음에 필요하면 경찰에 넘길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주세요. 몹시 불안하고 불편하네요.”
“이해합니다. 사과의 차원에서, 또 보안 차원에서 다른 객실로 업그레이드 해드리겠습니다.”
수진은 어떠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았고, 한해는 나쁠 것 없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한낮의 해프닝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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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단계가 아니라 두 단계를 업그레이드해준 객실은 분리된 방이 하나 더 있었고 전망도 탁월했다.
이태화 회장을 만나고 와서 축 늘어져 있던 수진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난리치는 통에 정신이 들어버렸네요.”
그녀는 방에 비치된 커피를 끓여 마셨다.
“누굴까?”
“뻔하지 않겠어요? 그이 아니면 시댁에서 붙인 사람이겠죠. 지금 남편과 시아버지 이태화 회장님을 만나고 오는 길이니까요.”
“이태화 회장이 미행을 붙였을 수도 있겠네.”
“경찰조사를 하면 나오겠죠. 어쨌든 미안해요. 오빠까지 놀라게 해서.”
“응. 좀 놀라긴 했어.”
한해는 이제 괜찮다는 식으로 빙긋 웃어 보였다.
“일단 변호사부터 구해야 해요. 이혼 전문 변호사를 알아봐야 하는데. 막막하긴 하네요.”
“사토시 씨한테 물어볼게.”
“그분이라고 알까요?”
“그분은 모르는 게 없어. 사랑만 빼곤 다 성공한 분이야.”
“사랑만 빼고 다 성공한 인생이라……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요.”
“물어봐. 어떤 인생인지.”
“네. 만나보고 싶어요. 그분만 괜찮으시다면.”
수진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힘을 뺐다. 현기증은 가셨지만 컨디션은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기를 다 빨려버렸다.
안쓰러운 시선으로 지켜보던 한해가 불쑥 말했다.
“폭탄이 한번 떨어진 자리는 안전하다. 그런 얘기 알아?”
“들어봤는데, 갑자기 왜요?”
“만약 아까 호텔 직원을 사칭한 사람이 이태화 회장 쪽에서 보낸 사람이라면, 적어도 오늘 이 호텔은 무척 안전할 거라는 얘기지.”
“그렇겠네요.”
“그러니까 걱정 말고 편히 쉬어.”
“그러고 싶은데…… 없던 폐쇄공포증이 갑자기 생긴 것처럼 답답해요.”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연이어 협박을 당하면서 영혼이 쪼그라진 느낌이었다.
“안 되겠다.”
한해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가자. 바람 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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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가 없는 드라이브였다. 그러기로 합의하고 출발했다.
차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한해는 제일 바깥쪽 차선에서 급하지 않게 차를 몰았다.
수진은 끝없이 이어진 차선을 응시하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디에 도착할지 모르는 이 드라이브처럼 내 인생도 이제 다시 출발했어.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딱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녀는 든든하게 핸들을 잡고 있는 한해를 돌아보았다.
이 남자가 내 곁에 있을 거야. 어떤 식으로든.
그녀는 가끔 문을 열고 얼굴에 바람을 맞이하기도 했다. 아는 노래가 나오면 흥얼거리기도 했다.
한해는 말을 걸지 않았다. 함부로 기분을 묻지도 않고 침묵을 불안해하지도 않고 그저 그녀의 시간을 지켜주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수진이었다.
“나도 그래.”
“오빠는 뭐가 힘들었는데요?”
“네가 힘들면 나도 힘드니까.”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말도 내 맘대로 못 하냐?”
“나 완전히 떳떳해지기 전까진 오빠 안 좋아할 거니까, 방해하지 말아요.”
“노력은 해볼게.”
그는 눈주름을 보이며 미소 지었고, 수진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렇게 웃지도 마요.”
“안 보면 되잖아!”
수진은 웃음기가 묻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가 출발한 뒤 한 번도 어디로 가는지, 여기가 어딘지 묻지 않았다. 도로 위 표지판으로 위치를 짐작할 뿐이었다.
강변대로를 타고 달리던 차는 인천공항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영종대교의 거대한 아치를 통과하는 순간 수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마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 같네.
길고 긴 다리를 건너, 한해는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휴게소에는 작은 건물 높이의 푸른 곰 조각이 서 있었다.
수진은 곰을 쳐다보며 오래 되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결혼식을 치른 다음 날, 신혼여행을 떠나는 길에 이 곰 조각을 지나쳤지.
다른 남자와 신혼여행을 가던 그날, 나는 당신 생각을 했어.
그녀는 보디가드처럼 곁을 지키고 있는 한해를 돌아보았다.
오빠라는 호칭이 너무 익숙하지만, 속으로라도 당신이라고 불러볼까?
당신을 원망하고, 당신을 원망하는 나를 원망하고, 무엇보다 이제 막 남편이 된 사람을 가장 원망했어.
그때 알았지. 당신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당신은 나보다 더 큰 피해자라는 사실을.
당신은 피해를 감수하고, 내 남편이라는 이유로 그 사람을 용서해주었어. 죽도록 미웠을 텐데 욕 한번 하지 않았어.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 잘못된 건 잘못된 거니까.
“좀 돌아볼까요?”
“그래. 천천히 걷자. 아주 천천히.”
둘은 나란히 휴게소 안을 산책했다.
곳곳에 꽃이 피어 있었다. 수진은 향을 맡고 바람을 느꼈다.
건물 주위를 충분히 거닌 뒤 3층의 전망대로 올라갔다.
그들이 정처 없이 달려온 고속도로 너머로 풍력발전소와 공항건물이 꽤나 가까이 보였다.
주위가 모두 탁 트인 전망이 눈을 씻어주는 기분이었다.
다른 쪽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는데 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여긴 원래 이래요?”
수진이 갯벌을 가리키며 묻자 한해는 낮은 목소리로 설명해주었다.
“썰물시간이라서 그래. 밀물 때가 되면 다시 바다가 되지.”
“신기하다.”
“그치. 우리 고향은 동해안이라 밀물썰물이 없었으니까.”
“오빠는 배 오래 탔으니까 이런 거 많이 봤겠네요.”
“저기에서 출발한 적도 많지.”
한해가 다른 쪽을 가리켰는데 멀리 항구와 몇 개의 섬이 보였다.
“제일 앞에 보이는 작은 섬이 세어도, 중간에 있는 섬이 동검도, 그 너머 보이는 산이 마니산이야.”
“와아…… 정말 잘 아는구나.”
한해는 갯벌에 한가롭게 노니는 새들을 가리켰다.
“쟤는 저어새, 쟤는 갈매기, 쟤는 백로. 지금 식사시간이지. 갯벌에 갑각류도 많고 작은 치어들도 밀물이랑 같이 들어오니.”
“비행기 타고 떠날 때하고 배 타고 떠날 때 기분은 완전히 다를 것 같아요.”
“네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
하지 말랬잖아. 그런 말…….
수진이 지적하기 전에 한해는 위험한 말들을 이어갔다.
“수진이는 어디 있을까? 지금 뭐하고 있을까? 가끔 내 생각을 할까? 혹시 지금 나처럼 하늘을 보고 있지는 않을까?”
“오빠…….”
“항해를 백 번 나갔다면 네 생각도 백번을 한 셈이야.”
더 듣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아, 수진은 전망대를 떠났다.
전망대 아래 2층에는 전시실과 다양한 게임기계, 카페. 비즈니스 공간도 있었다.
“오랜만에 한 판 어때?”
그들은 아이스커피를 한 잔씩 뽑아들고 게임을 했다. 고전 아케이드 격투게임이었는데, 한해는 봐주지 않았고 수진은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와 인성 보소. 어쩜 이래요?”
“봐주면 지는 것보다 더 기분 나쁠 거 아냐. 내가 진수진 성격 몰라?”
“기분 안 나쁘게 봐줘야지! 슬쩍 자연스럽게!”
“왠지 약 올리고 싶었어.”
“뭐야……,”
나 오늘 이혼선언 한 사람 맞아? 겨우 한 시간 드라이브를 하고 구식 게임을 몇 판 했는데…… 거울 봐봐. 웃고 있잖아. 스트레스 때문에 미친 건가?
2층을 좀 더 둘러보다가 멈춘 곳은 빨간 우체통 앞이었다. 우체통에는 ‘느린 우체통’이라는 하얀 글자와 설명이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소중한 추억을 전하세요. 편지는 1년 후에 배달됩니다.’
“우와 이거 신기하다.”
수진은 우체통 옆에 마련된 엽서를 들어보았다. 영종대교 사진이 앞에 실려 있었다.
한해도 흥미롭게 우체통을 살폈다.
“1년 후에 도착한다…… 우리도 써볼까?”
“그래요. 서로에게.”
그들은 나란히 앉아 엽서를 썼다.
‘한해 오빠에게’ 첫 줄만 적었는데도 눈물이 차올라 수진은 잠시 쉬어야 했다.
늘 그녀에게 주의를 기울이던 한해도 그녀의 심경변화를 눈치챘다.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안타까워서.”
“뭐가?”
“오빠한테 부치지 못한 편지가 잔뜩 있거든요.”
한해가 죽었다는 거짓말을 듣기 전까지, 수진은 아무리 뜸해도 한 달에 한 통씩은 한해에게 편지를 썼다. 그것은 일종의 서간체 일기와도 같았다.
“내 나름 중요한 사건들이 생기거나 유난히 감정이 북받칠 때…… 늘 보고 싶었지만 심하게 보고 싶은 날…… 그럴 때 편지를 썼어요. 오빠 생각이 많이 나는 날에는 울면서 쓸 때도 있었는데.”
“그 편지들 지금은 어디 있는데?”
“학교 졸업앨범, 옛날에 쓰던 물건들 모아놓은 서랍에 같이 있어요. 큰 상자에 넣어뒀으니까.”
한해는 한참 말없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소름 끼치도록 놀라운 일이네.”
“왜요?”
“나도 너한테 부치지 못한 편지가 많거든. 태평양, 지중해, 대서양, 북해…… 배에서 쓴 편지들.”
“정말이에요?”
“이제 줄 수 있게 되었네. 우리 교환하자.”
수진도 소름이 돋았다.
“난 특히 마지막 편지는 외울 정도로 다 기억하는데. 오빠가 죽은 줄 알고 쓴…… 하늘에서 나를 보고 있을 오빠에게.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예요.”
“내 마지막 편지는 뭘 것 같아?”
“뭔데요?”
“곧 보게 되겠지.”
한해는 찡긋 윙크를 했고, 수진은 그의 가슴을 때렸다.
“그런 거 하지 말라니까.”
그녀는 다시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니구나. 우리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똑같았구나. 그 방식마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눌러 쓰면서 궁금해졌다.
1년 뒤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옆에서 세상 진지하게 엽서를 쓰고 있는 한해를 훔쳐보며 속으로 물었다.
당신 생각엔 어때요? 1년 뒤에 이 편지를 받을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요? 함께 있을까요? 서로를 뭐라고 부를까요?
석양빛에 물든 그의 옆모습은 이번에도 반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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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를 떠난 한해는 차를 몰고 공항으로 내달렸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공항 건물로 들어왔다.
떠나는 사람들과 도착하는 사람들. 공항 직원들과 승무원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겠다.”
수진의 혼잣말에 한해가 물었다.
“무슨 뜻이지?”
“공항이 직장인 분들 아니면, 비행기를 타고 왔거나 타러 가는 사람들만 있는 곳이잖아요. 갈 사람과 온 사람. 어느 쪽도 아닌 사람은 우리뿐이라고요.”
설명을 듣고 한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은 안 했지만 난 처음부터 여기 오려고 했어.”
“정말요? 목적지 없이 그냥 드라이브 한 거 아니었어요?”
“머릿속에는 있었어.”
“왜 하필 공항?”
“연습 삼아.”
“연습? 무슨 연습이요?”
한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진이 몇 번이나 되물어보았지만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그들은 공항건물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어린별이 뜨는 하늘 아래 다시 서울로 달렸다.
“고마워요. 오빠 덕분에 완전히 기운 차렸어.”
“계속 호텔에서 지낼 셈이야?”
“빨리 방을 알아봐야죠.”
“괜찮다면 사토시 씨 집에서 지내도 돼.”
수진은 잠시 흔들렸지만 고개를 저었다.
한해 역시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했다.
“그래. 아무래도 위험하겠지. 상대 쪽에 발각되면 이혼소송에 불리한 증거가 될 거고.”
“네. 그래서요. 그나저나…….”
수진은 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거비까지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혼소송이라…….
그냥 이혼소송이 아니다. 태화건설을 상대로 이혼소송을 진행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할까?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드는 공포심을 누르려고 중얼거렸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겠죠?”
한해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언제나 따뜻한 손으로.
그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늘 곁에 있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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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는 그녀를 호텔 로비에 내려주고 떠났다.
방에 올라오기 전에 수진은 아까 만났던 객실 팀장을 찾아 상황을 물어보았다.
“제 방에 찾아왔던, 직원 사칭했던 여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팀장은 곤란한 표정이었다.
“그 사람 말로는 장난치는 동영상을 찍으려고 했다는데,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장난치는 동영상이요?”
“유튜브에 그런 거 많이 있잖아요. 몰래카메라 같은 거. 가짜로 룸서비스를 주는 척하면서 황당한 상황을 연출하려고 했대요. 그런데 지금 유튜브 채널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뭐야…… 그럼 말이 안 되잖아요.”
“네. 한마디로 횡설수설이에요. 그래서 경찰에 넘겼는데, 뭔가를 훔치거나 범죄를 계획한 정황은 없어서 구속할 수는 없답니다. 아마 조사만 하고 지금쯤은 풀려났겠죠.”
수진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이태화 회장이 보낸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그 여자가 끝까지 입을 다문다면 어떻게 할 도리는 없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혹시 경찰에서 무슨 연락이 오면 알려주세요.”
방에 들어와서 잠시 누워 있다 보니 한해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도 너처럼 행복해지기로 마음먹었어. 우리 둘 다 이제 그럴 자격 있어. 그리고 넌 좀 덜 착해도 돼. 좀 덜 착해도 된다…… 무슨 뜻일까? 강의 입장을 너무 생각해줄 필요 없다는 뜻일까?
그렇지. 누가 뭐래도 강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니까. 피해자가 가해자 걱정을 해줄 필요는 없지.
그녀는 강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금방 전화를 받았다.
“응.”
무심하고 서늘한 한마디. 아까 시원하게 뚫어놓았던 가슴이 다시 콱 막히는 느낌이었다.
저녁을 먹었는지 안부를 물어보려다가, 좀 덜 착해져도 된다는 한해의 말이 생각나서 안부인사는 생략했다.
“아직은 호텔인데. 방 구하는 대로 짐을 옮길게.”
“무슨 소리야. 왜 방을 구해? 집 놔두고.”뭐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말투는?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이 다 꿈이었나?
“우리 이혼하기로 했잖아.”
그 뒤에 이어진 강의 말은 더욱 의외였다.
“뭐야…… 만우절도 아니고. 빨리 들어와. 저녁 시켜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