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속상한 하루였다.
그냥 포기할까?
좀처럼 포기를 모르는 레이나는 몇 번이나 그 단어를 떠올렸다.
그녀를 가로막은 사람은 강이 아니었다. 제멋대로인 그의 행동, 이기적인 태도 등등은 오히려 그녀를 자극하는 요소. 문제는 그의 아내 수진이었다.
하루 자고 일어났는데도 그녀의 모습이 잊히지 않으니.
머리카락을 건네주던 그녀의 한마디.
“남의 침대에 이런 거 흘렸으면 갖고 가야죠.”
차분한 태도. 정제된 언어.
대체 어디서 그런 기품을 익혔을까? 분노를 참느라 생긴 무게일까?
“이제 가 봐요.”
자신을 아랫사람 다루듯 명령하던 마지막 모습이 자꾸 생각났고, 그 기억은 열패감으로 이어졌다.
토요일이었지만 특강 촬영이 있었는데 스태프들도 우려할 정도로 티가 났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좀 피곤해서 그래.”
레이나는 웃으며 안심시켜주었지만 속은 절대로 괜찮지 않았다.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몇 번이나 강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빠. 나 그냥 포기할까?
우울한 토요일이 다 지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동생 레오가 데리고 온 귀여운 불청객이 상황을 반전시켰다.
술에 잔뜩 취한 그녀가 흘린 이름, 강한해.
레이나는 자러 들어가는 소월을 가로막고 섰다.
“소월 씨라고 했나?”
소월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처음 보는 사람처럼 또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3등 항해사 윤소월이라고 합니다!”
항해사…… 강한해도 배를 탔다고 했잖아?
맞네. 같은 사람이야.
그녀는 레오의 어깨를 가볍게 쥐어주며 속삭였다.
“소월 씨 재우고 누나 잠깐 보자.”
“왜? 나 야단치려고? 신경 쓰이면 데리고 나가서…….”
“아냐. 그냥 뭐 물어볼 게 있어서.”
레이나는 창밖으로 대치동 학원가가 내려다보이는 거실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레오는 금방 나와 그녀 옆에 앉았다.
“소월 씨는? 잠들었어?”
“안 잔다고 버티는 걸 겨우 재웠어.”
“귀엽네. 발랄하고.”
“미안해, 누나. 갑자기 손님 데려와서.”
“뭐가 미안해. 이런 손님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야. 그런데…….”
레이나는 동생의 눈치를 보며 슬쩍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한해? 아까 소월이가 그런 이름을 말하던데.”
“아…… 강한해…….”
급격히 어두워지는 레오의 표정을 보며 레이나는 확신을 굳혔다.
“소월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 이름이야.”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다던 그 남자?”
“응.”
레오는 더 이상 말하기 싫은 양 짧게 대답했고 레이나는 속으로 말했다.
그 여자 이름은 진수진이야. 너는 모를 테지만.
그녀는 보기 힘든 진지한 태도로 물었다.
“저렇게 만취한 상태에서도 그 남자 이름을 불러대는데, 넌 괜찮냐?”
“안 괜찮지. 아프지.”
“그런데도 계속 소월 씨를 기다린다?”
“난 한번 마음이 가면 잘 안 움직여. 움직이고 싶어도 잘 안 돼.”
레이나는 쓸쓸해졌다.
나도 그래 동생아. 이건 집안 내력인가?
“소월 씨도 너랑 다를 게 없긴 하네. 강한해라는 사람도 심지어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다니.”
“게다가 그 여자는 얼마 전에 결혼까지 했고 말이지.”
알지. 그 여자 남편이 바로 내가…….
레이나는 연쇄작용을 떠올렸다.
수진을 제일 꼭대기에 놓고 그 아래로 이어지다가 다시 그녀에게 돌아오는 마음의 서클.
그녀는 수학적으로 짚어보았다. 이 징글징글한 서클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강, 수진, 한해, 소월, 레오. 그리고 그녀 자신까지…….
그 사람들을 모두 같은 비율로 놓는다면, 어떻게 해야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 실현될까?
지금처럼 강와 수진 커플이 계속 유지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진다.
그러나 강과 수진 커플이 헤어진다면? 나머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가능성의 총합이 치솟는다.
우리 남매의 행복을 우선으로 여긴다면 더더욱!
레이나는 하루 종일 머리에 맴돌던 포기라는 단어를 박박 찢어버렸다.
동생의 처진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어쩌다 우리 남매가 모두 이런 식의 연애를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잘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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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한남동의 칵테일 바에서도 사랑에 관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홀로 호텔에서 고독한 시간을 견디던 수진에게 야화 작가가 연락을 한 것이다.
호텔 근처 미국식 햄버거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칵테일 바로 자리를 옮겼다.
작품 이야기로 깊이 빠져들었다가, 일 얘기만 하고 헤어지기 아쉬웠던 수진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담당 피디라는 사람이 작가하고 너무 작품 얘기만 많이 해서 죄송했는데, 이렇게 술 한잔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너무 좋네요.”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제가 조금 무례했죠? 선약도 안 해놓고 주말에 불쑥 연락해서요.”
“아니에요. 혼자 심심하던 참이었어요.”
“혼자? 피디님 결혼하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맞아요.”
수진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의 현재 상황은 작가와 나눌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일 때문에 잠시 남편하고 떨어져 지내고 있어요.”
“아하. 그러셨구나. 제가 타이밍을 잘 잡았네요.”
“작가님은 미혼이신가요?”
“네. 결혼을 한 번도 안 했어요. 얼마 전까지 같이 살던 남자가 있긴 했는데 헤어졌네요.”
“이런. 허전하시겠어요.”
“제 경험이 이번 작품에 많이 담겨 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그럴듯한 커플인데 사실 둘은 서로 행복하지 않은?”
“작가님도 그러셨어요?”
“저희는 다행히 서로 그 사실을 인정하고 합의하게 이별을 택했죠. 동료 의사였거든요.”
“의사? 작가님 의사세요?”
“네. 제가 말씀 안 드렸죠. 정신과 전문의예요.”
수진은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전에 처음 만났을 때도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더라니.
“저도 결혼 전에 정신과에 찾아갔던 적 있어요. 그냥 다 털어놓기만 했는데도 꽤나 도움이 되더라고요.”
“좋은 선생님을 만나셨나 보다.”
“이 결혼이 맞나…… 결혼 전에 느끼는 불안감의 정체는 뭘까…… 뭐 이런 것들 때문에. 웃기죠?”
“웃기긴요. 결혼 때문에 찾아오시는 분들 꽤 있어요. 며칠 전에도 어떤 남자분이 부부생활 때문에 찾아오셨어요. 그분은 자신의 외도 때문에 괴로워하시더라고요.”
야화는 의사로서 환자의 비밀보장 의무를 철저히 지키는 편이었다. 지금껏 그 어떤 환자도 실제 이름을 얘기한 적은 없었다.
수진은 돌부리에 걸린 기분이었다. 남의 얘기 같지 않아서.
“외도는 병인가요?”
수진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말에 야화는 웃음기를 거두었다.
노련한 의사답게 수진의 눈빛을 읽고 신중하게 대답했다.
“외도의 동기가 뭐냐에 따라 다르지만 병이라기보다는 고치기 힘든 습관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네요.”
“습관이요? 사건이 아니고?”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이 있잖아요. 외도를 안 하는 사람은 있지만 한 번만 하는 사람은 없다고.”
수진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정의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일회성 외도로 그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동안 선생님이 상담해보신 사례들로만 보면요?”
“제 경우에는…… 한 번에 그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칵테일 잔을 비웠다.
“담배를 끊기 힘들다고 하는데, 외도에 중독되면 몇 배로 어렵습니다.”
“어째서죠?”
“쾌락의 중추와 정신적 만족감을 동시에 충족하기 때문이죠.”
수진은 강의 변명을 떠올렸다.
‘나는 망가진 채로 당신을 만났고, 당신에게 집착했어. 인정할게. 그런데 집착을 멈출 수 없고 그런 내 자신을 혐오해. 그래서 당신을 증오하고 사랑하고…… 배신감을 느끼고 복수심에 미친 짓을 하고, 그걸 합리화하고 후회하고 또 그런 내 모습에 화가…….’야화는 루비 같은 붉은빛을 띤 칵테일을 홀짝이고 말했다.
“외도와 폭력은 그 원인이 같은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아이러니하게도 외도를 저지른 당사자가 오히려 폭력적으로 상대를 대하기도 하고요. 가정폭력 역시 습관이자 중독일 수 있거든요.”
수진은 그녀를 아프게 했던 강의 모습을 떠올렸다.
담배보다 몇 배로 끊기 어렵다는 것들을 단번에 고치겠다는 강의 약속을 믿어도 될까?
야화와 조금만 더 친했더라면, 수진은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뻔했다. 대신 그녀는 다른 이야기로 관심을 돌렸다.
“야화 작가님은 왜 헤어지셨어요? 실례가 되는 질문이라면 죄송합니다.”
“실례는요. 이런 이야기 하면서 친해지는 거죠. 저희 커플은 일차적 행복에 실패했어요.”
“의사선생님이셔서 그런지 말이 좀 어렵네요.”
“행복도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차원을 나눌 수 있어요. 어떤 학자들은 단계가 높아질수록 고차원적이라고 하는데 제 생각은 그렇지 않고요. 다만 종류가 다를 뿐이죠.”
“이를테면?”
“일차적 행복. 혹은 쾌락적 행복이라고 하죠. 포유류에게는 쾌락중추라고 부르는 신경 조직이 있는데요. 쾌락적 행복은 이게 자극되면 자동적으로 느껴져요. 식욕, 성욕 같은 것들이죠. 알코올이나 마약도 마찬가지고요. 쾌락적 행복은 강렬한 대신 지속시간이 짧죠.”
“그리고요?”
“자기만족적인 행복이 있어요. 성취감이나 과시욕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죠. 스스로를 인정하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성취나 성공과 관련된 행복이에요. 일상적으로는 멋진 옷을 입거나 외모 칭찬을 받을 때 기분 좋은 것도 이 영역에 들어가고요. 대부분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아까 쾌락적 행복과 자기만족적 행복, 이 두 가지예요.”
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나머지 하나는요?”
“온전한 행복, 다른 말로 이타적 행복이라고도 하죠. 자신만의 행복감이 아니라 타인이나 집단, 더 나아가서는 보편적인 인류애를 실천하면서 느끼는 행복감이죠. 봉사나 자선활동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례가 있겠네요.”
“세 가지 종류의 행복이라…….”
“저희 커플은 오히려 자기만족적 행복이나 이타적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문제가 없었어요. 의사로서, 학자로서 서로를 충분히 인정해주었고 응원해줬죠. 둘이 함께 봉사활동도 꽤나 많이 다녔어요. 하지만…….”
야화는 아픈 기억을 소환하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서로의 쾌락적 행복을 채워주는 데는 실패했어요. 식성도 너무 달랐고 남녀관계도 꽝이었죠. 서로에게 육체적 흥분을 전혀 못 느꼈달까요. 1년 동안 같이 살면서 키스도 몇 번 안 했을걸요?”
수진은 공감하며 끼어들었다.
“아까 점심 때 수영장에서 노는 커플을 우연히 봤어요. 서로 안고 입 맞추고 물장난치고 쫓아다니는 모습이……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동시에 아름다워 보이더라고요.”
“맞아요. 그게 바로 쾌락적 행복의 모습이죠. 사실 부부가 이타적 행복까지 함께 추구하기엔 너무 어려우니 논외로 하고, 쾌락적 행복과 자기만족적 행복을 두 가지를 서로 충족시켜주는 일은 너무 중요한데…… 저희 커플은 그러지 못했고요.”
수진은 바텐더에게 아까 마신 칵테일을 한 잔 더 주문했다.
새로 나온 잔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자신을 돌아보았다.
강을 안고 싶었던 적이 있나? 손잡는 일부터 시작해서 강과의 육체적 교감이 진정으로 좋았던 적이 있나? 좋기는커녕 아프지 않았던가?
기억을 떠올리기만 했는데도 손목의 찌릿한 고통이 되살아났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강은 물론이고 시댁에서는 내 직업을 인정조차 해주지 않았지. 이 결혼 안에서 성취감을 느낄 일은 없겠네.
온전한 행복? 이타적 행복? 그런 걸 강과 함께 추구한다고? 야화 작가의 말대로 그건 아예 논외로 하자.
수진은 혹여 마음을 들킬까봐 남의 일처럼 무심하게 말했다.
“결혼을 고민할 때 그 세 가지 단계의 행복이 잣대가 될 수도 있겠네요.”
“그렇겠죠. 무척 단순해 보이지만 그게 참 어려워요. 저희는 그러지 못해서 헤어졌고요.”
수진은 눈앞에 갈림길이 보이는 듯했다. 그녀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두 가지 삶의 모습이.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더라고요. 아기를 낳으면 엄마 아빠는 그냥 물고 빨면서 키우게 되잖아요. 기본적으로 남녀 간의 사랑도 그런 본능에서 출발하는 것 같아요.
존경이니 인내니 정이니 동반자니…… 그런 관계는 그다음이고요. 누군가를 안고 싶고 입 맞추고 싶은 마음은 노력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니…… 그래서 우린 헤어지면서 서로 탓하지 않기로 했어요. 쿨한 척했달까?”
어쩌죠, 작가님? 나도 그런데.
수진은 입으로는 웃었지만 눈물이 고이지 않을까 걱정했다.
괜히 칵테일 바 안에 들리는 음악을 콧노래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막 넘어가는 순간의 풍경이었다.
*
오후 내내 수영을 하고 밤늦게까지 야화 작가와 수다를 떨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동안 그녀를 짓눌렀던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덜 풀려서였을까.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정오가 가까웠다. 아침 뷔페 시간을 날려버렸다.
“아 정말 미쳤나 봐.”
시계를 확인한 수진은 혼잣말을 하면서 잠에서 깼다. 충분히 잔 덕분에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더운 물로 샤워를 하고 잠시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아직도 결정은 내리지 못했다.
결혼을 망설일 때도 몇 달은 고민했으니, 결혼을 돌이키는 일에도 그 정도로 긴 시간이 필요할까?
그러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 안에 결정한다. 아무리 근소한 차이라도, 더 기우는 쪽으로…… 흘러간다.
얇은 수필집 한 권을 다 읽은 그녀는 호텔에 딸린 도서관 겸 카페를 산책하듯 거닐었다.
무척 넓고 장서도 많은 공간이어서 책의 숲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커피와 함께 점심으로 먹은 샌드위치가 부실했는지 해가 지기도 전에 출출한 기분이 들던 참이었다.
-저녁 약속 있어? 같이 먹을까? 꾸밈없는 메시지를 툭 던진 사람은 한해였다.
잘됐다. 이강 씨의 마지막 제안은 들어봤으니,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해 오빠의 이야기도 마지막으로 들어봐야 공평하지.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답장을 보냈다.
-맛있는 거 사주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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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데는 또 어떻게 알았어요?”
좁고 허름한 골목으로 들어가는 한해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토시 씨가 좋아하는 분이 계셔. 그 분이 하는 식당이야. 생선구이가 정말 끝내주지.”
“아하. 생선구이 좋다. 그런 제대로 된 집밥이 너무 그리웠어요.”
“그럴 것 같아서.”
어쩜 이렇게 식성을 딱 알아서 맞춰줄까.
지금 허기와 기분 같아서는 고등어 한 마리쯤은 뼈만 남기고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낡고 빛바랜 식당 간판 아래에서 한해는 잠시 멈췄다.
“저기 보여? 안에 계신 분.”
수진은 까치발을 하고 간유리 너머를 엿보았다.
염색을 제때 하지 않아 머리가 희끗한 주인아주머니가 앞치마를 입은 채 TV를 보고 있었다.
“저분이에요?”
“응.”
한해는 수진에게 사토시 씨의 러브스토리를 들려주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그렇게 흘러가고, 지금 저 분은 치매 초기 증상이 시작되었어. 남편은 연명치료 중인데 곧 치료를 중단하실 것 같아.”
“사토시 씨는 계속 기다리고 있고요?”
“얼마 전부터는 두 분이 데이트도 하고 그러시더라고.”
수진은 숙희의 뒷모습에 멍하니 시선을 얹어놓고 움직일 줄을 몰랐다.
“들어가자. 배고픈데.”
한해가 손을 잡고 식당에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의 인기척을 느낀 숙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한해를 보고 고개를 여러 번 갸웃거렸다.
“잘생긴 총각이…… 낯이 익은데? 내가 요즘 하도 가물가물해서.”
한해는 몇 번이나 인사를 드렸다는 말을 감추고 꾸벅 인사했다.
“지난번에 뵈었습니다. 사토시…… 아니 인철 선생님 제자입니다.”
“아하, 그렇구나. 밥 먹으러 왔어요? 옆에는 색시?”
“어…… 색시는 아니고 친구예요.”
한해가 놀라자 수진이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진수진이라고 합니다. 한해 오빠랑 친한 동생이에요.”
“그래? 둘이 너무 잘 어울려. 뭣이 오빠 동생이야. 딱 봐도 궁합이 좋은데.”
숙희의 말에 한해와 수진 모두 뺨이 붉어졌다.
“저는 삼치구이로 하겠습니다.”
머쓱해진 한해가 불쑥 주문하자 수진도 뒤따랐다.
“저는 고등어로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한해에게 작은 목소리로 허락을 구했다.
“나 계란말이 시켜도 괜찮아요?”
그 말을 들은 숙희가 손사래를 쳤다.
“그거는 서비스지. 이런 선남선녀가 찾아왔는데. 잠깐만 기다려.”
숙희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와…… 여기 진짜 분위기 대박이다.”
수진은 반가운 친구를 만난 표정으로 좁디좁은 가게를 둘러보았다.
곳곳이 벗겨진 낡은 벽지와 제대로 시간이 안 맞는 시계, 들여놓은 지 20년은 되어 보이는 집기들,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까지. 모두가 일상의 거룩한 남루함을 담고 있었다.
“여기 꼭 우리 어릴 때 울진에 있던 식당 같네요. 이런 식당에 와본 지 너무 오래됐어요.”
“하긴 태화건설 2세께서 이런 데를 올 리가 없으니.”
“나 냄새만 맡고 막 흥분하는 것 같아.”
그녀의 말대로 주방에서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환기 시설이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생선 굽는 냄새가 실내로 꽤나 흘러들었는데, 그마저 식당의 분위기와 제법 잘 어울렸다.
“호텔은 어땠어?”
“그냥 뭐…… 쉬면서 생각하긴 좋죠. 음식은 거창하기만 하고 입에는 별로 안 맞았지만.”
한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빙긋이 웃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서, 후각을 자극하는 생선구이 냄새를 맡으며, 막히는 것 없이 오가는 대화 속에서 그녀는 야화 작가의 말을 떠올렸다.
일차원적인 행복과 이차원적인 행복 모두를 채워줄 수 있는 상대.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안기고 싶고, 입 맞추고 싶은 상대…….
“아무리 봐도 너무 잘생겼냐?”
한해는 하염없이 자신을 보고 있는 수진에게 찡긋 윙크했다.
“뭐래…… 너무 배고파서 멍하니 있었어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보자고 했어.”예상하지 못했다. 그저 입맛을 살려주려고 잠깐 불러낸 줄 알았다.
한해는 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참고, 기다리고, 지켜봐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눈을 똑바로 보며 할 말이 있단다.
“나 겁먹어야 하는 상황?”
수진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한해는 진지하게 한 단어를 내놓았다.
“이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