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건배했다.
“형. 그거 알아?”
그는 입술만 축인 술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형 입에서 내 아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조차 불쾌해.”
“그건 네 사정이고. 네가 끼어들기 전까지 난 수진이라는 이름을 천 번, 만 번 불렀으니까.”
“끼어들었다…… 그것도 참 거슬리는 표현이네.”
“뭐가 그렇게 불쾌하고 거슬리는 게 많을까? 그래서 어떻게 사냐?”
한해는 호쾌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불쾌하고 거슬리는 게 많은 놈이 외도는 어떻게 했을까? 불쾌하거나 거슬리지 않았어?”
“단정 짓지 마. 증거도 없으면서.”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나한테 증거가 없을 것 같아?”
한해는 눈썹을 비대칭으로 찡그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협박하는 거야?”
“경고라고 해야겠지. 수진이를 괴롭히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경고.”
“그래서 이제부터 엄청 잘해주려고.”
강은 노련한 격투가처럼 맞받아치지 않고 유연하게 공격을 피했다. 이번에는 한해가 움찔했다.
“아까 와이프하고 차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봤어. 몇 가지 소득이 있었지.”
그는 일부러 와이프라는 단어를 골라서 썼고, 한해는 부부라는 울타리 안에 애매하게 들어와 있다가 훅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도 소득이지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할지 구체적으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다는 점이 제일 큰 소득이지.”
강의 말은 내용뿐만 아니라 표정과 말투 역시 고도로 계획적이었다.
“그래. 형. 내가 인정할게. 나 형을 질투했어. 아까 형이 말한 것처럼, 내가 수진이를 만나기 전부터 있었던 둘의 인연을 질투했어. 그리고 형이 수진이를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 더 예민했겠지.”
그동안 부정하기 바빴던 사실을 갑자기 인정하자, 뭐라고 할 말이 없어진 쪽은 오히려 한해였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어. 그것도 인정. 멀쩡히 살아 있는 형을 시체 취급해서 미안해. 문제는 결혼 후부터지. 둘이 연락을 주고받고 만나는 모습을 보면서 내 기분은 어땠겠어?”
“그래서 외도를 저질렀다?”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끝까지 들어봐. 그래서 내가 수진이를 못살게 굴었던 것도 인정. 이 모든 문제의 핵심은 뭔 거 같아?”
한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과 다른 강의 태도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너야. 강한해.”
강은 한해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형만 없다면 처음부터 문제될 게 없었지.”
“꺼져달라는 거냐?”
“이해가 빠르네.”
“너의 행복을 위해서 내 삶을 포기해라?”
“나만의 행복이 아니지. 형이 그랬잖아. 수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시간이 온 거야. 사나이답게.”
“내가 사라져주면 수진이가 행복해질 거다?”
강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에서 한해는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수진이가 집에 찾아왔었지.
-혹시 이사 가줄 수 있어요? 어차피 이 집이 오빠 집이 아니라면 여기에 오지 않을 순 없나요? 우리 셋 모두를 위해 절대 마주치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래요.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싶다고 했고, 한해는 재차 물어 그녀의 의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약속했지.
꺼져주겠다고.
하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강은 외도를 저질렀고 폭력을 썼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진이도 같은 생각이라고?”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이틀 고민해보겠다고 했지만 이미 결론은 내린 것 같아. 다만…… 형도 수진이 성격 알잖아. 걔가 얼마나 착해?”
그럼. 너 따위 녀석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는 것만 봐도 알지.
“형한테 미안해서 모진 소리를 못 하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대신 하는 거야. 제발 우리 부부 좀 내버려둬.”
카운터펀치를 맞고 나가떨어지는 자신의 모습이 한해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런 식의 공격이라면 내가 막을 수 없잖아. 이건 나의 아킬레스건이니까. 수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는데…….
“확인은 해봐야겠어. 수진이의 생각은 어떤지. 넌 수진이의 남편이지 대변인이 아니잖아.”
“그래. 확인해봐. 보나마나 수진이는 모진 소리 못 하고 빙빙 돌려 말하겠지. 애가 너무 착해서 말이지. 그 선함 때문에 내가 수진이를 이토록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강은 완벽하게 연기를 마쳐가고 있었다.
“조만간 아이도 갖고, 이제 제대로 미래를 설계해야지.”
얼마나 이를 힘줘 물었는지, 한해는 어금니가 깨질 듯 뻐근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형한테 무조건적인 희생을 하라는 것도 아니야. 형 나름으로 계획을 갖고 육지에 정착했을 텐데 나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
강은 서류가 담긴 파일을 테이블 위로 내밀었다.
“이게 뭐야?”
“우리 자회사 중에 작지만 알짜 회사가 있어. 창호 제작업체인데 형도 투자 쪽 일을 한다니 재무구조가 얼마나 튼튼한지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 회사에 개인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지분을 형에게 양도한다는 계약서야.”
한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파일을 집어 들었다.
“대단하네. 이런 돈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수진이에 대한 내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형은 안심하고 떠나도 돼.”
한해는 파일을 집어들고 여는 대신 모서리로 강의 이마를 툭 때렸다.
“정신 차려, 인마.”
여유 넘치던 강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지분 총액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자유를 살 수 있는 금액은 아니야.”
파일은 열리지도 못한 채 다시 테이블에 놓였다.
“너희 집안의 잘난 태화 건설을 통째로 준다 해도 마찬가지야.”
“강한해. 너 뭘 믿고 그렇게 까부…….”
“너 수진이한테도 이런 식으로 하니?”
다시 역공을 펼치는 한해였다.
“네가 고작 이딴 인간이라면 수진이가 널 사랑할 리가 없을 텐데. 경멸하거나 잘해봐야 동정하겠지.”
“말조심해.”
“수진이 본인이 직접 의사를 밝히면 나도 생각해볼게. 하지만 그때까지는…….”
한해는 두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과 강의 얼굴을 차례로 가리켰다.
“형이 지켜보고 있다.”
그는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켜고 일어섰다.
“맥주 잘 마셨어. 오늘 얻어먹을 복이 많네.”
그는 빙긋이 웃고 자리를 떴다.
남아 있는 강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무려 수십억의 가치를 지닌 지분이 외면당한 모습을 보며 열패감에 휩싸였다.
낮에 아내도 같은 행동을 했지. 나의 진심과 성의를 무시하고 짓밟았지.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잘났어? 쥐뿔도 없는 거지새끼들이, 평생 죽도록 노력해봤자 이거 반만큼이라도 벌 수 있을 것 같아?
왜 너희들은 고마운 줄 몰라? 주제를 몰라? 구겨버리고 싶은…….
파일을 움켜쥐며 그는 분노했다.
그런데 왜 나는 하필 그런 존재를 사랑할까?
*
깜빡 잊고 커튼을 닫지 않고 잠들었다. 맑고 밝은 햇살이 이불 밖으로 나온 그녀의 몸에 스며든지도 한참, 수진은 늦잠을 자고 눈을 떴다.
토요일이라서 출근할 필요가 없다는 홀가분함 때문이었는지, 며칠째 극도로 쌓인 피로감 때문인지, 꿈조차 기억 안 날 정도로 깊은 잠을 잤다.
넓은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채 그녀는 햇살 속으로 손과 발을 넣었다가 빼는 무의미한 동작을 반복했다.
혼자 호텔에서 잔 적은 처음이었다. 대학시절에 누추하기 짝이 없는 반지하와 옥탑방에서 홀로 맞은 아침이야 수없이 많았지만.
그녀는 복잡한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간단하게 씻었다. 얼마 남지 않은 조식 뷔페 시간에 맞추어 내려갔다.
뷔페식당은 가짓수가 워낙 많아서 한 점씩 맛만 봐도 배가 불러서 다 먹지 못할 것 같았다. 넓은 레스토랑을 산책하듯 누비며 음식을 담았다.
커피까지 한 잔 빼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끝날 시간이 다 되어 자리는 한산했다.
창밖으로 수영장이 내려다보였다. 한가롭게 이른 수영을 즐기는 커플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녀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녀는 투명한 햇살 속으로 튕겨내는 물방울처럼 발랄했다.
저런 발랄한 연애를 한 번도 못 해본 인생이라니. 너무 아쉽다.
수진은 옅은 한숨을 참지 못하고 막막한 기분에 빠져버렸다.
아무리 돌이켜봐도 나는 대단한 삶을 바란 적 없어. 큰 재산을 원한 적도 없고. 꼭 저 아이들처럼 살고 싶었는데. 매일 저렇게 걱정 없이 살 순 없더라도, 가끔이라도 말이야.
먹고살 궁리를 하느라 바쁜 틈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어. 가끔 물놀이나 하면서 깔깔대고 웃을 수 있다면.
딱 그 정도의 삶을 바랐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온 것일까.
누굴 원망할 것도 없어. 그래봤자 바뀌는 것도 없으니까.
수영장 속 여자는 남자친구에게 물을 뿌리고 헤엄쳐서 도망쳤다. 남자친구는 아마도 그녀를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텐데도 슬금슬금 다가가며 물장난을 계속했다.
수진은 깨달았다. 얼핏 보면 수많은 선택이 복잡하게 엉켜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두 가지 중 하나.
과거에 대한 책임이냐,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도전이냐.
문득 접시를 보니 갖고 온 음식을 다 먹고, 그릭 요거트를 담은 작은 종지만 달랑 남아 있었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다 먹어 버렸네. 인생도 이렇게 흘러가버리면 어쩌지? 고민만 하다가 즐기지도 못하고 세월이 다 흘러가버리면?
토요일 아침이다. 내일까진 시간이 있어. 수영이나 해야겠다. 풍경 밖에서 부러워하지 말고, 혼자라도 안에 들어가 보자.
그녀는 그릭 요거트를 한입 떠넣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잘 잤어? 보고 싶어 미치겠지만 겨우 참고 있어. 내가 당신에게 저지른 서툰 행동들을 반성하면서. 기다릴게. 남편의 메시지였다. 그녀는 미간을 한껏 모았다.
이상하네. 왜 전혀 걱정이 안 되지? 원래 이런 상황이면 불안한 게 당연하잖아.
어젯밤 내가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양 다른 여자를 집에 불러들여 잔 남편인데, 둘째 날에는 아무 일 없으리란 보장이 있어?
그런데 나는 왜 전혀 그런 우려를 하지 않았지? 신경도 쓰지 않았지?
그녀는 다시 수영장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저 풍경 속에 나와 남편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저렇게 틈만 나면 키스하고, 서로를 쫓아다니고, 엉겨 붙어 셀카를 찍고…….
우린 그러지 않았지. 신혼여행에서조차 우리에겐 거리와 냉랭함이 있었어.
지금까지 일을 다 묻을 수 있을까? 다 묻는다면 거리도 사라지고 사랑의 온도도 높아질까?
한해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이상하네. 한해 오빠가 이럴 사람이 아닌데. 하다못해 호텔은 불편하지 않냐고, 어젯밤에는 무슨 일 없었냐고 안부라도 물어볼 사람인데.
하얀 요거트에 뿌려진 약간의 견과류처럼 서운한 감정이 서걱거렸다.
그녀는 한해에게 간단한 인사 메시지라도 남기려다가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강 씨. 당신 말 중에 맞는 말도 있어. 나는 늘 한해 오빠를 신경 쓰고 있네. 그건 인정해. 그러나 당신에 대한 예의로 그 마음이 작은 행동으로라도 이어지지 않게 누르고 또 눌렀어.
당신은 어땠어? 말로는 나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미치도록 보고 싶다고 하지만…… 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도 지켰어?
남편을 향해 솟아오르는 원망도, 한해를 향해 솟아오르는 감정도 모두 차분하게 식을 때까지 그녀는 기다렸다.
다른 사소한 것들, 이를테면 스푼으로 전해지는 요거트의 부드러운 질감이나 창밖에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에 집중했다.
내일까지라도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보자. 그럼 조금이라도 더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겠지.
혼자 있을 운명은 아니라고 확인시켜주듯, 뒤집어 놓았던 핸드폰이 울렸다.
남편일까? 한해 오빠일까?
수진은 마술사처럼 손끝으로 핸드폰 등을 톡톡톡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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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누가 일상적인 인사를 건넨다면 한해는 아니라고 대답할 태세였다.
안녕하지 않아요. 잠을 통 설쳤네요.
증권 시장이 열리지 않는 주말에는 운동으로 몸을 단련하곤 했는데 한 시간을 넘게 뛰어도 정신이 맑아지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을 다 찢을 듯 과격하게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고 돌아와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기분은 영 무거웠다.
-오빠 뭐해? 나쁜 의도 없이 천진난만하게 말을 거는 소월에게도 답장을 해주지 않았다.
머릿속엔 온통 수진과 관련한 걱정과 불안뿐.
전날 밤, 강을 만난 자리에서는 호기롭게 대처하고 나왔지만 그는 수진의 결정을 확신할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강을 용서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한다면? 그리고 또다시 이별을 통보한다면?
외줄타기 같은 인생에서 그물 같은 사람이 되어주겠다고 했지. 정말 그래? 고작 그 역할에 만족할 수 있어?
‘하루 이틀 고민해보겠다고 했지만 이미 결론은 내린 것 같아. 다만…… 형도 수진이 성격 알잖아. 걔가 얼마나 착해? 형한테 미안해서 모진 소리를 못 하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대신 하는 거야. 제발 우리 부부 좀 내버려둬.’강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조만간 아이도 갖고, 이제 제대로 미래를 설계해야지.’둘 사이에 아이라도 생긴다면?
왜 나는 한낱 인간 주제에 초인 같은 척했을까? 욕심도 질투도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야. 너 그렇게 성자 같은 인간 아니잖아 강한해.
소월에게 전화가 왔다. 메시지 답이 없으니 답답했겠지.
“미안, 운동하느라.”
그는 거짓말로 통화를 시작했다.
“오빠는 운동 더 안 해도 돼. 오빠는 좀 놀아야 돼.”
언제나 통통 튀는 음성이 그의 귀에 울렸다. 평소 같으면 미소가 절로 지어졌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노는 게 체질에 안 맞는 사람도 있어.”
“말 나온 김에 오늘 나랑 클럽에 한번 가볼래? 마침 토요일인데!”
“갑자기 무슨 클럽이야.”
“오빠가 너무 인생을 심각하게 사는 것 같아서.”
“너야말로 왜 나같이 심각하고 재미없고 놀 줄도 모르는 사람한테 전화했어? 이렇게 화창한 토요일에.”
“좋아하니까.”
한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냥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어.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소월아.”
누군가에게 관심이 생기면 그 관심의 크기만큼 그 사람에 대한 감각이 예민해지기 마련. 소월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억양만 듣고도 한해의 감정 상태를 짐작했다.
“아니. 그만. 더 이상 말하지 마, 오빠.”
“꼭 해야 할 이야기야.”
“나중에 해. 지금은 안 들을래.”
“넌 이렇게 살 필요 없잖아. 반짝반짝, 재미있게, 너답게 살아.”
“알았다고. 다음에 얘기해. 내가 타이밍 잘못 맞췄어.”
그녀는 도망치듯 전화를 끊었다.
아직 수진에게는 아무 연락이 없다.
한해는 핸드폰을 소파 위로 툭 던져놓고, 허물 벗듯 옷을 벗으며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레버를 가장 차가운 물로 맞춰놓고, 두 손을 벽에 대고 몸과 마음의 온도를 내렸다.
수진이의 결정도 중요하지만, 오직 기다려야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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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레오. 누나가 진짜 진짜 미안하다.”
소월의 혀는 완전히 꼬여 있었다.
“한밤중에 이렇게 불러내서 미안해. 알았지?”
자정이 다 된 시간. 다른 곳도 아니고 지하 연습실에서 소월은 취해버렸다.
사실 그녀가 불러낸 것도 아니었다. 레오가 전화를 했는데 소월이 잔뜩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고, 레오가 놀라서 달려온 참이었다.
“윤소월. 내가 분명히 얘기했지. 연습실 철칙.”
“미안해. 이렇게 취할 때까지 마시려고 했던 건 아냐. 딱 한 잔만 마시려고 했어.”
“내가 전화 안 했으면 어쩔 뻔했어? 여기서 취해서 잠들었을 거 아냐.”
“아마도? 하지만 우리 레오가 와줬네.”
“나가자.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
“나 오늘 집에서 못 자. 그래서 딱 하루만 재워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레오가 둘러보니 작업실 구석에 불룩한 백팩이 보였다.
“누구한테 재워달라고?”
“윗집에서 물이 막 새서, 침대가 다 젖었어. 망했어.”
소월은 레오에게 답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면서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강한해부터 원룸까지! 전부 말썽이야.”
“강한해? 그 사람 이름이야?”
“응. 그 새끼 이름이야. 나쁜 새끼.”
“나쁜 새끼 이름 치곤 멋있네.”
레오는 소월의 손을 잡았다.
“가자. 내가 재워줄게.”
“뭐? 너 누나랑 같이 살잖아.”
“그러니까 더 안전하지. 우리 누나 완전 오픈 마인드라서 괜찮아. 오히려 더 좋아할 걸? 나보고 맨날 고자라고 놀리는데.”
“하하하. 진짜 멋있는 언니네. 나 만나보고 싶다!”
레오는 만취해서 걸음도 못 떼는 소월을 업고 작업실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살다 보니 내가 우리 레오 등에 업히는 일도 생기네.”
“강한해가 아니어서 미안하다.”
“오늘은 그 새끼 얘기하지 마!”
그래놓고는 택시를 타자마자 정작 자기가 ‘강한해 나쁜 놈’을 중얼거리는 소월이었다.
“레오야. 내가 예전에 같이 배 타던 선장님한테 들었는데. 세상의 모든 사랑은 짝사랑이래.”
“뭔 소리야. 그냥 좀 자.”
“아니. 들어봐. 근본 있는 이론이야. 두 사람이 똑같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하잖아.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사랑은 어느 정도는 짝사랑이라는 거야.”
“어느 정도가 아니라 한쪽이 아예 관심 없을 수도 있잖아. 지금 우리처럼.”
“야! 내가 왜 너한테 관심이 없어. 관심 많지. 우리 레오가 얼마나 귀여운데.”
볼을 잡으려는 그녀의 손을 밀치면서 레오는 웃음이 나왔다.
“아 좀 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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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는 소월을 업고, 앞으로는 소월의 백팩을 메고 집에 들어온 동생을 보고 레이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뭐냐? 지금 내 동생이 집에 여자를 업어온 거야?”
“농담할 상황 아니야.”
레오는 바로 빈 방으로 소월을 데려가려 했지만, 잠시 정신 차린 소월이 그의 등에서 내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윤소월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월은 꾸벅 인사했고, 레이나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반가워요. 난 우리 레오가 연애하는 꼴을 못 봐서 여자한테 전혀 관심이 없나 했는데.”
“레오는 저한테 관심이 많습니다! 저도 레오가 엄청 귀엽고요.”
레이나는 활짝 웃는 얼굴로 소월의 술주정을 받아주었다.
“소월 씨도 엄청 귀엽네. 우리 동생이 반할 만한데?”
레오가 끼어들었다.
“두 분 얘기는 내일 술 깨고 하시죠. 지금 대화할 수 있는 상태 아니니까.”
그는 소월의 손을 잡고 다시 손님방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초면에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소월이 레이나에게 또 꾸벅 인사했다.
“괜찮아요. 술 먹고 진상 부리는 건 내 주특기라서. 받아주기도 잘 하니까.”
거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방으로 들어가며 소월이 흘린 말이 레이나의 귀에 꽂혔다.
“레오야. 너희 누나한테 진짜 죄송하다. 알지? 이게 다 강한해 때문이야. 나쁜 시끼.”
강한해? 저 아이 입에서 왜 강한해라는 이름이 튀어나와? 흔한 이름이 아닌데.
그녀는 한밤의 귀여운 불청객에게 다가갔다.
“소월 씨라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