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어떤 영화의 대사였지? 거절할 수 없는 제안만큼 위험한 제안은 없다고.
수진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돌아와 남편 앞에 앉았다.
“들어보자. 얼마나 대단한 제안인지.”
강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냥 말에서 끝나는 제안이 아니야. 서류로 만들어서 법적인 효력을 갖도록 공증까지 마칠게.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 아직도 헤매고 있네. 내가 그런 절차에 연연하는 사람이야?”
“나를 믿지 못할까 봐.”
“그건 사실이지. 내용부터 말해봐.”
“앞으로 내가 당신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외도를 하거나, 집착 증세를 보이면 당신이 원하는 만큼의 재산을 당신 앞으로 상속할게.”
“상속이라…….”
수진은 식은 차로 입을 헹구듯 마셨다.
“제안에 답을 주기 전에 몇 가지 확인해봐야겠어. 왜 내가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
“한두 푼의 돈이 아니야. 수십억? 수백억? 상관없어.”
“그러네. 그런 돈이라면 평생 잘 먹고 잘살 수 있겠네.”
“그 정도가 아니지.”
“대단하다. 아빠한테 허락 안 맡아도 돼?”
수진은 일부러 ‘아빠’라는 표현을 썼고, 그녀의 의도대로 강은 눈살을 찡그렸지만 일단 그냥 넘어갔다.
“내 앞으로 된 지분만 해도 너한테 충분히 양도해줄 만큼 많아.”
“그랬구나. 그런 엄청난 돈을 제시하면 내가 혹할 줄 알았구나.”
수진은 천천히 팔짱을 꼈다.
“그런데 어쩌지? 전혀 혹하지 않아서?”
“뭐라고?”
“전혀. 도리어 매우 불쾌해. 당신이 말한 것들, 너무나도 당연하고 신성한 의무야. 조건을 달 것들이 아니라고. 아무 조건 없이 당연히 지켜야 하는 것들이야.”
강은 또다시 흥분하려다가 겨우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수진은 한 번 더 낙담했다.
“이강 씨. 이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있지. 어쩌면 사람의 마음도 살 수 있을지 몰라. 어떤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에게 쓰는 돈으로 사랑을 가늠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마음을 팔지 않아.”
“어쩜 그렇게 고상하실까?”
“비꼬지 마.”
“이왕 이렇게 된 거 노골적으로 물어보자. 우리 집안의 재력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 어린 나이에 돌봐줄 사람 하나 없는 신세였는데?”
“맞아. 정말 힘들었겠지. 아마…… 보육원에 들어갔을까? 나 혼자 독립했다면 극빈층의 삶을 살았겠지? 하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난 똑같이 대답할 거야. 내 마음을 사는 조건으로 당신이 안락한 삶을 제안했다면, 난 거절하고 가난을 택했을 거야.”
“배부른 소리. 진짜 가난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래.”
“무슨 소리. 대학에 들어가고 내가 독립해서 살았던 거 기억 안 나?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 지옥고를 다 겪었어. 정말 지긋지긋하더라. 춥고 덥고 불결하고 불편했어. 그래도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서 좋았어.”
강은 애절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울 것처럼 물었다.
“대체 왜 나는 안 되는 건데?”
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나한테는 마음을 안 주겠다는 건데?”
“내가 준 마음을 당신이 내팽개쳤으니까.”
수진은 다시 한번 분명히 해두었다.
“난 당신에게 마음을 줬어. 내 남편이니까. 법적으로도 그렇고, 결혼식장에서 수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서도 했지.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어.”
“거짓말. 당신 마음에는 늘 강한해가 있었어.”
“거짓말은 당신이 먼저 했지. 한해 오빠가 죽었다고. 진실을 알기 전에 이미 우린 법적으로 부부였고. 난 내 선택에 책임을 지려고 했어.”
“말만 그렇게 하지, 실제로 당신은 늘 강한해를 마음에 두고 있었잖아. 아니야?”
아아. 수진의 한숨이 물안개처럼 깔렸다.
“도돌이표에 갇힌 노래 같다. 이 대목에서 우린 계속 같은 대화를 되풀이해.”
“당신이 시인을 안 하니까!”
“나는 조금의 거짓도 없이 다 말했어. 사실과 다른 얘기를 답처럼 정해놓고 아무리 강요해봤자, 난 시인할 수 없어.”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강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떴다.
침착하자. 냉정하게 언어를 고르자.
“수진아. 나는 정말 너를 좋아해.”
“그래. 그건 인정할게.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아.”
“너를 정말 사랑해.”
“그렇다면 방식의 완전히 잘못되었나 보다. 당신 마음은 그럴지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아.”
“내 사랑을 느끼게 된다면, 너도 날 사랑해줄래?”
“이강 씨.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무슨 수학공식처럼 마음의 답을 낼 순 없어.”
“그럼 어떻게 할까?”
“노력할 수 있겠지. 난 이미 오랫동안 노력했어. 당신이 내 운명이라고, 당신이 내 남편이라고, 당신 옆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하며 노력했어.”
“지금은 안 하잖아.”
“그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사람이 당신이니까.”
“앞으로도 하지 않을 셈이야?”
수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는 확실하네. 이 남자는 정말 간절하게 나를 갈구하고 있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오랜 세월 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어.
“어쩜 이렇게 아이 같을까?”
그녀는 남편의 뺨을 쓰다듬어주었다. 측은함의 표시였으나 그것만으로도 강은 감격해 몸을 떨었다.
“내 남편이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으면 좋겠어.”
“나…… 아직 너의 남편이긴 한 거지?”
강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 모습을 본 수진은 미칠 것 같았다.
“대체 뭘 그렇게 두려워해?”
“네가 없는 삶.”
“나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나보다 예쁜 여자, 나보다 똑똑한 여자, 나보다 당신에게 잘 어울리는 여자, 당장 이 카페 이 거리만 나가도 찾을 수 있을걸? 당신이 나를 제멋대로 신격화시켜놓은 거야.”
수진의 모진 말도 소용없었다.
“사랑에 빠지면 다 그렇지 않아? 사랑에 빠지면 상대는 신이 되지. 나는 속절없이 신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고.”
미안하게도 수진은 어린 시절의 몇 장면을 떠올렸다.
한해 오빠를 좋아했을 때, 오빠와 헤어져서 다시 못 본다고 생각했을 때, 그녀는 정말 속절없이 매달렸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그저 미성숙의 시기로 치부하듯 부정했다.
“그건 1차원 적인 사랑이지. 세상엔 그런 사랑만 있는 게 아냐. 각자 오롯이 자신의 주인으로 살면서 사랑할 수도 있어.”
“다른 여자에겐 그렇게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당신한테는 그게 안 돼.”
수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미성숙하다. 남편의 논리는 질투로 어그러져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나를 대하는 남편의 마음과 고백만큼은 진실이다.
“노력해봐도 안 되는데 어떡해?”
“우리 결혼 전에 연애할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당신은 늘 나를 편안하게 해줬어.”
“강한해가 없었으니까.”
종착역이구나. 모든 감정은, 어이없게도, 14년 동안 우리 곁을 떠나 있었던 그 사람을 중심으로 빙빙 돌고 있었구나.
“강한해가 없다면 나도 긴장할 이유가 없어.”
그것도 인정.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14년 전에도 그랬지. 세상 부러울 게 없었던 강이 오빠는 오직 한해 오빠 앞에서만 긴장했어.
“의식하지 않으면 안 돼?”
“내가 강한해를 의식하는 이유는 단 하나야. 너 때문이지. 내가 좋아하는 진수진이 강한해를 좋아하니까.”
“그건 애들 때 얘기잖아.”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강한해에 대한 마음이 전혀 없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어?”
아…… 그 질문만 하지 말지.
수진은 대답하지 못했고 강은 집요한 눈빛으로 그녀의 본심을 추궁했다.
“끝까지 대답 못 하면…….”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어. 당신의 아내로서 결혼 후 강한해와 조금의 부끄러운 일이 없었다고. 키스를 한 적도 없고, 같은 침대에서 뒹군 적도 없고, 우리 집에 부른 적도 없고…… 난 부끄러운 일은 한 적이 없어.”
“너의 마음에 대해 묻고 있잖아.”
“당신이 지금 이 상황에서 내 마음을 추궁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난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어. 레이나에게 마음이 없었어. 지금도 없고. 당신은 강한해에 대해서 어떠냐고.”
“우리 결혼이 지속되는 한, 한 남자의 아내로서 다른 남자와 선을 넘는 일은 없을 거야.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어.”
“자꾸 말을 돌리는데…….”
수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 이강. 너무 부당하지 않냐? 넌 바로 어제 폭행과 외도를 함께 저질렀어. 그런 인간이 내 마음을 추궁하고 비난해?”
위기감을 느낀 강이 소리쳤다.
“마지막 기회를 줘.”
수진은 돌아보지 않고 걸음만 멈추었다.
강이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제는 아프게 움켜쥐었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잡았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내가 그 기회마저 날려버린다면, 그다음부터는 당신 마음대로 해.”
“내 마음대로? 결혼을 없었던 일로 하자고 해도?”
강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당신도 그동안은…… 강한해와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았으면 해.”
수진은 어깨 위 견장처럼 얹혀있던 강의 손길을 밀어냈다.
“생각해볼게.”
“생각을 꼭 집 나가서 해야 하나?”
수진이 돌아서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치 이마로 그의 턱을 받아버릴 듯.
“정신 차려. 난 아직 당신의 폭력도 외도도 집착도…… 그 어느 것 하나 용서할 준비도 안 되어 있으니까.”
그녀의 기세에 놀란 강을 내버려두고, 그녀는 뚜벅뚜벅 떠나갔다.
*
-곧 도착해요. 저녁 사줄게요. 짧은 문자에 한해의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유난히 바빴던 오늘 수진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었다 내려놓았는지.
결국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하루 종일 기다린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배고픈데 많이 먹어도 되냐? 그의 답장에 그녀는 금방 화답해주었다.
-비싼 거 많이 먹어요. 한해는 슈트를 꺼내 입었다가 거울에 비친 모습이 너무 과한 것 같아 캐주얼로 갈아입었다.
오래 걸리지 않아 그녀가 도착했다. 연락을 받고 나가보니 차가 서 있었다.
“제 차 타고 움직여요.”
그녀가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한해는 조수석에 타면서 뒷자리에 실어놓은 짐을 발견했다.
“집에 들러서 갖고 온 거야?”
“네.”
짐을 보니 며칠 더 밖에서 지낼 계획인가 싶었다.
그리 멀지 않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한해의 예상과 달리 수진의 얼굴이 매우 심각해 보였다.
“무슨 일 있어?”
“지금 이 모든 상황이 특별한 일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강이하고는 연락해봤어?”
“잠깐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한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포크로 파스타를 말았다. 동그랗게 말린 파스타를 막 입에 넣으려다 멈칫했다. 수진의 하염없는 시선이 느껴져서.
“뭐 묻었냐? 잘생김?”
“궁금해서.”
“뭐가?”
“강한해라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뭐야…… 이 세상에 너보다 날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거야 어릴 때 이야기고, 14년 동안 떨어져 있었잖아요.”
“난 별로 변한 게 없어.”
“그래서 너무 신기해요. 그리고 미래에는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고.”
“너에 대해선 변함없겠지.”
“오빠도 알겠지만 이제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해요. 결혼생활을 계속할지, 아니면 이번 기회에 끝을 낼지…… 오빠한테 조언을 구하는 건 정말 아닌 것 같고. 그냥 넋두리로 들어줘요.”
“솔직히 말하면 난 걱정이 많이 된다. 녀석이 너를 해치지는 않을지. 또 외도를 저지르진 않을지. 숨 막히게 괴롭히진 않을지…….”
“맞아요. 걱정할 만하죠. 신혼 초에 이 난리를 쳤다면 이것만으로도 이혼할 사유는 충분하죠.”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한해는 쓸쓸하게 웃었다.
“이혼할 생각이 없구나.”
“한 번만 더 기회를 줘볼까 생각 중이에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끄덕끄덕. 한해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까 먹지 않고 들고 있던 파스타를 먹었다.
“아직 결정한 건 아니에요. 며칠 밖에서 지내면서 생각해볼까 해요.”
“그래. 그렇게 해. 호텔에 들어가려고?”
“네.”
“불안하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고.”
“고마워요. 어젯밤에도 너무 고마웠고. 신세진 거 갚으려고 저녁 사주는 거예요.”
“안 그래도 돼. 난 어제…… 선물 받은 기분이었으니까.”
“오빠…….”
수진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한해가 이렇게 마음을 내비칠 때마다 그녀는 어떻게 할지 몰랐다.
“선물이라는 말은 너무 소박하다. 축복받은 기분이었어.”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안 그래도 심란한데.”
“더 할 말도 많지만 참고 있는 거야.”
수진은 고개를 떨구고, 먹지도 않을 파스타 면을 계속 동그랗게 말기만 했다. 그녀는 식어버린 파스타 접시를 보며 들릴까 말까 한 음성으로 고백했다.
“나도 어제 행복했어요.”
한 줄기 환희가 한해의 깊은 눈에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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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혼자 있던 집이었는데, 어제 하루 그녀가 머물렀던 빈자리가 왜 이리 큰지.
텅 빈 집에 돌아온 한해는 적막의 망토를 뒤집어쓰고 잠시 서 있었다.
그녀와 함께 한밤의 라면을 끓이고,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던 부엌을 보며.
절망의 순간에도 함께여서 가능했던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그녀는 떠났지만 슬프지 않아.
문으로 치면 한 뼘 정도만 열어준 셈이었지만 안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 안에는 희망의 꼬리가 보였다.
그거면 됐다. 꼬리는커녕 희망의 그림자도 안 보이던 세월도 견뎠잖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와인도 없이 먹은 파스타가 느끼했는지, 시원한 맥주가 생각났다.
냉장고에서 꺼낸 캔맥주를 마시며 잠시 정원에 앉아 있었다. 구름이 잔뜩 껴서 별도 달도 흐릿한 밤하늘이었다.
원양어선을 탈 때 남반구의 바다에 나가 있을 때면, 밤하늘을 보면서 더 쓸쓸해지곤 했다.
수진이하고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조차 허락이 안 되는구나.
그때에 비하면 얼마나 희망차? 우린 같은 하늘 아래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 시내 호텔이라고 해봤자 밤 시간에는 30분 안에 달려갈 거리일 테니.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개 숙인 그녀가 수줍게 뱉은 말도.
-나도 어제 행복했어요. 오늘은 어때? 지금쯤 체크인하고 방에 들어갔을까?
혹시 너도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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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나타나지 말지 그랬어.
수진은 호텔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쓱 밀어보았다. 그 위에 한해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에.
차라리 당신이 죽은 줄 알고 평생 살았다면 어땠을까?
쓸쓸하지만 평온하게, 인생이란 원래 그런 거라며 잘 살지 않았을까?
남편은 이토록 날뛰지 않았을 테고, 나는 남편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그의 한결같음에 감사했겠지.
어땠을까? 행복……했을까?
어떤 거짓말이 일생 동안 들키지 않는다면, 그것을 거짓이라 할 수 있을까?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이 회오리처럼 그녀를 감쌌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그런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으니까.
더운물로 샤워를 하고, 가운을 입고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밤을 응시하다가,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는 동안에도 질문과 답은 계속 이어졌다.
궁극적인 질문은 아직 차례가 오지 않았다.
이 결혼을 위해 더 노력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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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떠나려던 참에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 수진인가 싶어 바로 액정을 확인했는데, 강이었다.
이 시간에 이 녀석이 왜?
한해는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강의 목소리는 더 이상 내려갈 수 없겠다 싶은 만큼 가라앉아 있었다.
“바쁘지 않으면 잠깐 만나.”
“지금?”
“아직 잘 시간은 아니잖아? 혹시 나오기 곤란한 상황인 건가? 누구랑 같이 있나?”
“아냐. 나갈 수 있어.”
약속시간을 정하고, 강이 링크로 보내준 약속장소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으려다 입고 있던 조거와 티셔츠 차림 그대로 나갔다.
수제맥주를 파는 동내 술집. 한밤중인데도 강은 슈트를 입고 앉아 있었다.
“마침 집에서 혼자 맥주 마시고 있었는데.”
한해는 빙긋 웃으며 마주 앉았다.
“집은 어디야?”
강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지만, 한해는 대답하기 곤란했다.
바로 근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강은 아직 모르니까. 알아서 좋을 게 없지.
“서울.”
“그러니까, 서울 어디.”
“왜 호구조사를 하고 그래.”
본격적인 싸움 전에 맹수들이 빙빙 돌며 상대의 전략을 가늠하듯 두 남자는 일단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해는 여유를 과시하듯 다리를 꼬고 메뉴를 살피고 종업원을 불렀다.
“페일 에일 한 잔 부탁해요.”
강도 같은 걸로 주문했다.
주문한 맥주가 나올 때까지 둘은 안부를 주고받았다. 한해는 전업투자자로 변신했다는 소식을 전했고, 강은 최근에 준공한 빌딩이 어딘지 알려주었다.
“이런 얘기나 하려고 태화건설 부회장님께서 나를 불러내진 않았을 텐데.”
“응. 할 말이 있어. 목이나 축이고 나서 얘기하자.”맥주가 나오고 건배를 하면서 첫 대결이 시작되었다.
“수진이를 위하여.”
한해의 건배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