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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32화 (32/92)

32화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소설에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의 심정을 묘사할 때 자주 쓰는 클리셰. 정작 생전에 주마등을 본 독자는 100명 중에 한 명도 없을 텐데.

정말 사람이 죽을 때 생전의 인상적인 기억들이 스쳐지나간다면, 오늘 이 순간은 빠질 수 없겠네.

수진은 그녀의 어깨를 파고든 강의 손을 잡았다.

“이거 놔.”

그녀가 세차게 저항해 빠져나가자 다급해진 강은 머리채까지 잡았다가, 자기도 놀랐는지 손을 뗐다.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

충격적인 상황에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겁먹은 느낌은 없었다.

겁을 먹은 사람은 도리어 남편 강이었다. 사고를 쳐놓고 자기가 놀란 아이처럼, 그는 자신의 손을 보고 놀랐다.

“미안해, 수진아. 내가 잘못했어. 이럴 일이 아닌데…….”

강이 계속 변명하려 했으나 수진은 듣지 않았다.

서재에서 나간 그녀는 현관으로 향했다.

“수진아! 여보!”

놀란 강이 그녀에게 달려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여자라도 남편과 자고 싶지 않을 거야. 그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으로부터 피신한 아내를 욕할 사람도 아무도 없을 거고.”

“미안해! 내가 너무 흥분해서 잠깐 정신이 나갔었나 봐.”

“잘 모르는 모양인데, 잠깐이 아니야. 당신은 결혼하고 내내 정신이 나가 있었어. 당신이 그 길고긴 세월 동안 쌓아 올린 거짓의 탑이 무너진 뒤로.”

“제발…….”

“나는 분명히 계속 기회를 주고 또 기다렸어. 당신의 거짓말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이미 당신에게 속아 법적으로 결혼을 한 상태였으니까 결혼식은 올렸지. 너무 당황해서 그때 뭘 어떻게 할 경황이 없기도 했고.”

수진은 멈추지 않았다. 걸음도 말도.

“그러나 당신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나를 의심하고 비난하고 질투하고 집착하고…… 내가 대화를 하려하면 비아냥거리고…… 당신 가족의 언어폭력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생각도 없었어.”

“일단 우리 차분하게 앉아서 대화하자.”

“그 말은 이미 내가 너무 여러 번 해서 임팩트가 없지?”내가 아무 이유도 없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잖아?”

“또 그 소리. 난 이미 지겹도록 설명했어. 아무리 설명하면 뭘 해? 당신이 믿으려 들지 않는데.”

“나 오늘 병원에 다녀왔어.”

현관까지 나갔던 수진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정말이야. 이것 봐.”

강이 핸드폰에 찍힌 카드 내역서를 보여주었다.

‘김&정 정신과의원’이라는 이름과 결제 내역이 찍혀 있었다.

“당신한테 말했잖아. 나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그거 고쳐보려고. 당신을 위해 고쳐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그런 사람이 아내 머리채를 잡아?”

“아…… 아직…….”

“아까 나 당신의 눈을 봤어.”

“수진아…… 제발 잊어줘…….”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눈이었어.”

그녀는 신발을 신었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하고 한 침대에서 자라고? 오늘?”

강은 맨발로 문을 막았다.

“비켜.”

“이대로 못 보내.”

“이대로 가겠다면? 이번엔 주먹으로 코를 부러뜨릴 건가?”

“수진아. 아까는 내가…….”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진수진.”

당황해서 용서를 구하던 강의 목소리가 다시 딱딱해졌다.

수진은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닫힘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를 부르고, 들어가서 닫힘버튼을 누르고, 확실하게 문이 닫힐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고작 30초? 그러나 그녀에겐 3분처럼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내려가는 느낌이 들고 나서야 안심했다.

“아아…….”

온몸에 힘이 빠졌다. 엘리베이터 벽에 몸을 기대고 진동을 느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기운을 내자, 수진아. 적어도 오늘 밤 이 집에서 탈출할 기운은 있어야 해.

과장된 말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강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꼈다.

지하 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외출하세요?”

지하 주차장에서 안으로 들어오려던 경비업체 직원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늘 환한 미소로 답해주던 그녀는 의도치 않게 직원을 무시하고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바깥바람이 몸을 감싸고 나서야 안도감을 느꼈다. 드디어 나왔다.

그런데 차 앞에서 그녀는 절망할 수밖에. 패닉 상태에서 뛰쳐나오느라 핸드폰만 들고 나왔다.

“아 미치겠다…….”

일단 이 집에서 멀어지자. 택시비는 핸드폰으로 입금해드려도 되니까.

그녀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불러 1층 로비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길가에 서서 택시를 잡으려고 팔을 내밀었다. 그런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팔을 잡았다.

설마…….

절망감에 짓눌려 고개를 돌려본다. 역시나 남편.

“가지 마.”

“명령하지 마.”

“너의 집은 여기야. 이 밤에 어딜 가겠다는 거야?”

“어디든 위협이 없는 곳.”

“오버하지 마.”

“내가 오버했으면 결혼식장을 엎어놨겠지. 당신이 더 잘 알잖아? 내가 얼마나 그동안 참아왔는지. 불과 30분 전까지만 해도 난 당신의 잘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당신을 존대했어.”

“그깟 존댓말 반말이 뭐가 중요하다고.”

“남편의 외도는 중요하지. 명백한 이혼 사유이기도 하고.”

이혼이라는 말에 강의 눈이 다시 해까닥 돌아갔다.

“이혼하자고?”

“당신이야말로 오버하지 마. 내가 이혼하자고 했어? 외도와 폭행 모두 이혼 사유라고. 법적으로 그렇다고 말한 것뿐이야.”

“이혼하고 싶으니까 그렇게 말했겠지.”

다시 싸늘해지는 남편을 보며 수진은 아득해졌다.

당신 기억나? 나 한때 당신을 강이 오빠라고 부르며 따라다니고 좋아했던 적도 있어.

모든 것이 초여름 햇살처럼 반짝였던 그 시절. 동해안 바닷가 마을을 누비고 다녔던 아이들이었던 그때.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그녀는 깊은 슬픔에서 겨우 헤어 나왔다.

“아직 이혼을 말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럴 생각도 없고.”

“그럼 같이 집에 가자.”

강이 손목을 잡았고, 그녀는 찌릿한 아픔에 인상을 썼다.

그래. 당신이 내 손을 잡으면 늘 이렇게 아팠어.

“우리 당신 좋아하는 드라마 보면서 맥주 마실까? 아니면 와인과 치즈?”

강은 온화하게 웃으며 물었지만 그녀는 소름이 훅 끼쳤다.

당신…… 그게 지금 상황에서 가능한 대사와 표정이야?

“다음에 그런 날이 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날 놔줘야 해.”

그녀는 남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그는 더 아프게 손목을 움켜쥐었다.

“오빠. 나 아파.”

그녀는 결혼식을 치른 뒤 한 번도 쓰지 않은, 어린 시절에 그를 부르던 호칭을 일부러 썼다.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조심이나마 누그러뜨리려고.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날선 음성으로 물었다.

“놓아주면 어디로 갈 건데?”

“가긴 어딜 가. 혼자 좀 있게 해줘.”

“왜? 또 그 새끼한테 쪼르르 달려가려고? 사진으로 보면서 질질 짠 걸로 모자라서 직접 보고 안기려고?”

“야! 이강!”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수진도 소리쳤다.

“말조심해! 넌 지금 망상에 빠져서 날 이상한 모습으로 그려놓고선 그 모습에 화를 내고 있어. 그게 바로 정신병이야.”

“하! 널 위해서 병원에 다녀왔더니 이젠 정신병자 취급이네?”

그는 강제로 그녀를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놔! 이거 놓으라고!”

그녀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강의 완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들어가자. 길바닥에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얘기해.”

“놔! 오늘 밤은 당신하고 못 지내겠다고!”

“나 더 이상 미치게 만들지 마.”

강의 얼굴은 아까와 똑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두려웠지만 그녀는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거 놓으라고! 경찰이라도 불러야 정신 차릴래?”

서로 있는 힘을 다해 밀고 당기다가, 그녀는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그가 수진을 내팽개친 셈이기도 했다.

“수진아, 괜찮아?”

놀란 강이 그녀를 일으켜주려고 손을 뻗었다. 앙칼진 고함이 그의 귓가를 때렸다.

“건드리지 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이 또 그녀의 손목을 감아쥐었을 때,

“그만.”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그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 힘이 얼마나 셌는지 강은 비명을 지르며 저절로 손을 놓았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선 사람은 한해였다.

수진은 꿈인 줄 알았다. 꿈이라고 확신했다.

얼마나 두렵고 힘이 들었으면 한해 오빠의 환영이 보일까?

그러나 강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은 모든 것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강한해……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는 입술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구나! 내 생각이 맞았어. 집을 뛰쳐나가서 이놈을 만나려고 했구나.”

강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강. 웃지 마.”

한해는 방금 목격한 장면에 피가 끓어올랐다.

“너 지금 수진이를 길바닥에 패대기쳤어.”

강은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했는데 이제 미안해할 필요 없겠네. 내 짐작이 맞았으니. 너희 둘은 오늘도 만나려고 다 말을 맞춰놓은 거냐?”

“정신 차려. 아니면 너도 바닥에 던져버린다.”

한해가 엄중히 경고했다.

“나한테 하는 말? 와 진짜 황당하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강의 비아냥은 계속되었다.

“강한해 씨. 남의 아내하고 몰래 만나다 보니 착각하고 계신가 본데요. 제가 진수진 씨 남편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다 인간 취급받아? 아무리 결혼했다 해도 남편 자격이 없는 새끼들이 있지. 아내 몰래 불륜을 저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적반하장으로 폭력을 휘두른다면, 남편 자격이 있을까?”

“너야말로 내연남 주제에!”

강이 한해 옆으로 돌아 수진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소스라치게 거부했다.

“수진이가 싫다고 하잖아!”

한해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아쭈? 너 치겠다?”

강은 턱을 쳐들었다.

“쳐봐, 어디. 배상금으로 네까짓 놈 전 재산을 날리게 해줄게.”

바닥에 쓰러졌던 수진이 한해의 팔에 매달렸다.

“하지 말아요. 제발요.”

부르르 떨리던 한해의 주먹이 차분히 내려갔다.

“다치지 않았어?”

한해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쳤다.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지고 쓸리면서 팔꿈치가 까져 피가 보였고, 손목은 벌겋게 부어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은 부러진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병원에 가봐야겠는데. 엑스레이도 찍어보고.”

한해의 걱정에 강이 나섰다.

“여보. 집으로 가자. 내가 집으로 의사를 부를게.”

여보라니…… 수진은 미친놈이라고 남편의 얼굴에 대고 소리치고 싶었다.

한해는 그녀에게만 들리게 나지막이 말했다.

“택시 타고 병원으로 가. 가서 연락해.”

수진은 움츠린 시선으로 강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공포를 읽은 한해가 눈빛으로 말해주었다.

‘걱정 마. 강이는 내가 잡고 있을게. 적어도 오늘 밤엔 널 해치지 못할 거야.’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택시를 잡았다.

“야. 진수진. 너 가지 마.”

강이 그녀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한해의 억센 팔이 그를 붙잡았다.

“놔, 이 새끼야! 내가 내 와이프한테 간다는데 네가 뭔데 막아?”

소리치는 강에게 한해는 차분하게 말해주었다.

“지금 수진이가 접근금지명령 신청해도 넌 할 말이 없어. 그러라고 할까?”

식식대는 강의 눈앞에서 수진은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그제야 한해는 강을 놔주었다.

두 남자는 잠시 서로를 노려보며 말이 없었다. 머리 위 45도쯤 보름달이 비현실적으로 크게 빛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수퍼문이라고 떠들던 그 달인 듯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한해였다.

“이강. 너 왜 이러냐?”

“누가 할 소린데? 수진이가 연락했어? 만나자고?”

“너 정말 심각하구나. 결혼 후에 수진이가 나한테 먼저 전화한 적 단 한 번도 없어.”

“하! 그걸 믿으라고? 어? 그걸 믿으라고? 그걸 누가 믿어? 또 우연히 마주쳤다고?”

“잘 알고 있네.”

“못 배운 티를 내는 건가? 우연은 그렇게 반복될 수 없어. 세상의 모든 일은 확률이야.”

“뱃사람들은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라고 하는데. 확률을 이기는 게 운명이라고도 하고.”

“운명…… 그건 부부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넌 부부라는 말을 쓸 자격이 없어.”

한해는 레이나에게 모든 사실을 다 들었다고 말할까 망설이다가 참았다.

불륜에 폭행에 정신적 학대까지…… 이미 그가 직접 보고 들은 것만 해도 강의 턱을 날려버릴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은 자신만만했다.

“난 이미 수진이와 부부고 앞으로도 부부일 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강한해. 너 지금 내 아내를 뺏겠다고 뻔뻔하게 선전포고라도 하는 거냐?”

한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말할 뿐.

“수진이는 행복해야 해. 행복하기만 해야 해.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행복까지 다 누려야 해.”

그는 강의 옆을 지나가며 흘리듯 말했다.

“그렇게 해줄 자신 없으면 꺼져.”

“이런 미친…….”

강은 주먹을 쥐고 한해에게 달려들까 했지만 아까 별 힘도 들이지 않고 그의 팔목을 부러뜨릴 것 같았던 한해의 완력을 떠올렸다.

14년 동안 뱃사람 생활로 다져진 짐승 같은 몸이 그를 지나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윽고 정적과 어둠이 강의 몸을 휘감았다.

혼자네. 나는 처절하게 혼자네. 별도 달도 나를 비웃네.

그의 입에서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오열이 터져 나왔다.

*

거품 목욕에 와인 한 잔.

레이나가 하루를 마감하는 방식. 오늘은 술을 한잔하고 들어와서 그런지 더운물 안으로 몸이 녹아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뜨거웠던 강과의 시간을 떠올리며 거품을 손으로 쓸었다가 모았다가 찌그러뜨렸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혼자 세계를 떠돌면서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

나는 왜 그를 사랑하는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그를 잊겠다며 떠난 여행에서 말이다.

그녀는 다시 돌아왔고, 예전처럼 그를 만나고, 여전히 그는 온전히 그녀의 남자가 아니고…… 결국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그녀는 한해와의 만남에서 묘한 위로를 얻었다. 짝이 있는 사람을 놓지 못하는 동지랄까.

방식은 달라도, 결국 온전히 그 사람의 곁을 차지하고 싶다는 마음은 같으니까.

수학강사인 그녀는 잘 알고 있다. 이번 문제는 무려 다섯 가지 경우의 수가 있다.

결국 강과 수진이 이혼하지 않는 경우.

강과 수진이 이혼하고 강은 그녀와 이뤄지지만 수진은 한해와 이뤄지지 않는 경우.

강과 수진이 이혼하고 수진은 한해와 이뤄지지만 강은 그녀와 이뤄지지 않는 경우.

강과 수진이 이혼하지만 한해도 그녀도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

강과 수진이 이혼하고 그녀는 강과, 한해는 수진과 이뤄지는 경우.

그녀는 다섯 번째 경우가 답이 되기를 간절히 빌었다.

인생도 수학처럼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손바닥에 올려놓은 비누 거품 공을 후우 불어 흐트러뜨리는 순간, 욕조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놀랍게도 한해 전화였다.

그녀는 장난으로 영상통화를 할까 하다가 조금 더 진지해지기로 했다.

“이렇게 빨리 다시 연락할 줄 몰랐는데.”

“집에 들어가셨어요?”

“그럼요. 지금 혼자서 와인 한 잔 더 하면서 거품 목욕 중이에요.”

“정보를 하나 드릴까 하고.”

“거봐요. 같은 편이라고 했죠? 무슨 정보인지 말해 봐요.”

“강이는 오늘 밤을 혼자 보내야 합니다. 외롭고 처절하게.”

그녀는 미간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가슴 위에 얹혀 있던 비누 거품이 후드득 떨어졌다.

“무슨 일이죠?”

“직접 물어봐요. 그리고 위로해줘요. 자기 가슴에 스스로 칼질을 했으니까.”

레이나는 한해의 말에서 연민을 느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를 가로챈 남자에게 연민을 느끼다니…….

“그럼 이만.”

한해는 용건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레이나는 잠시 강의 모습을 떠올렸다.

불완전한 영혼. 나약해서 더 강한 척하고, 비겁해서 더 용감한 척하고, 늘 외로운 영혼.

그녀는 샤워로 몸에 묻은 거품을 씻어내며 기도했다.

오늘 밤, 내가 그의 아픔을 씻겨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

.

레이나와 짧은 통화를 마치고도 한해는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았다. 수진에게 전화가 오면 바로 택시를 잡아타려고.

한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좀 마음이 놓였다.

아까 본 강의 얼굴에 번져 있던 절망과 분노는 오래전에 본 어떤 사람의 마지막 표정과 똑같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원양어선을 함께 탔던 인도네시아 항해사였다.

이혼을 하고 얼마 안 있어서 배에 탄 그는 항해 내내 날카롭게 굴었다. 나이 어린 막내 갑판원을 괴롭히기도 했다.

어느 날 밤 복도에서 마주친 그에게 한해는 따끔하게 혼을 냈다.

배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꾸 시비를 걸면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다고. 한 번만 더 힘없는 신참 갑판원을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그는 항변도 하지 않고 막막한 표정으로 그냥 서 있었고, 한해는 그를 뒤로한 채 선실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기관실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아까 강의 표정이 딱 그랬다.

세상 모든 것을 잃은 표정. 누구든 괴롭힐 사람을 찾다가 아무도 없으면 자신이라도 해칠 것 같은…….

수진이를 지켜주고, 더 나가서 강에 대한 복수도 할 생각이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다.

강이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도록 레이나라도 손을 잡아주길 바랐다.

훗날 강에게 터놓고 대화할 기회가 온다면 말해주고 싶었다.

너는 수진이를 죽도록 갖고 싶어 하는구나. 가질 수 없다면 파괴하고 싶지. 아무도 그녀를 갖지 못하도록. 특히 내가…….

그러나 알아둬. 너도 나도 그녀를 가질 수 없어. 우리가 누군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착각이야.

난 그저 그녀 곁에 늘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삶의 경이로움을 그녀와 나누고 싶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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