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달라는 말 하러 온 거 맞냐고.” 29화
늦은 오후의 햇살이 그녀의 뺨에 드리웠다.
“그렇게 과격하게 말하진 않았어요.”
“말뜻은 크게 다르지 않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계속 이러고 있을 건가?”
옆에서 보기엔 탱고를 추는 남녀처럼, 수진은 한해에게 허리가 감긴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아…… 미안해요.”
수진은 힘주어 몸을 일으켰다. 왠지 부끄러워진 그녀는 급히 자리를 뜨려했다.
“그럼 다시 볼 일이 없기를. 잘 지내요.”
한해는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고, 수진은 대문을 나서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인사도 안 해요?”
“마지막이라고 생각 안 하니까.”
“마지막이에요.”
“그 말, 함부로 쓰는 거 아니야.”
대문을 나가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그가 성큼 다가왔고, 그녀는 또 잔뜩 긴장해버렸다.
“14년 전에 내가 함부로 그 말을 썼다가 14년 동안 후회하고 있지.”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갖다 댔다.
“아까 엄청 떠는 것 같던데. 내 착각인가?”
수진은 놀림을 당하는 것 같아 거세게 부정했다.
“내가 왜 떨어요. 착각은 자유지만.”
더 오래 있다간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마저 새어나갈 것 같아, 그녀는 대문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한해는 허둥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세상 진지한 얼굴로 와놓고선…….
그는 손을 들어 자기 눈금을 보듯 살펴보았다.
아직도 손에 떨림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따뜻한 체온도.
서쪽하늘에 서서히 불이 붙었다. 노을이 타오르기 좋은 날씨였다.
*
“이것도 사이코 같은 짓인가.”
신호대기에 걸린 차 안에서, 강은 조수석에 놓인 꽃바구니를 보며 중얼거렸다.
집무실이 있는 빌딩 지하 아케이드에서 비서를 시켜 만든 꽃바구니였다.
오후에 레이나와 뒹굴고 아내에겐 꽃다발 선물이라.
그는 역치의 개념을 떠올렸다.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세기.
인간은 자극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라 역치는 계속 커질 수밖에 없는데, 죄책감도 같은 원리를 따른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 저지르다 보면 엔간한 나쁜 짓으로는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내가 그런가? 어쨌든 어젯밤부터 들끓던 불안은 차분하게 가라앉았어. 그거면 됐어.
신호가 바뀌고 그는 가속페달을 밟았다.
일찍 퇴근했더니 차도 별로 막히지 않아 금방 집에 도착했다.
대로에서 골목으로 빠진 뒤 속도를 줄여 가고 있는데 심상치 않은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차를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옆모습이 보였고 이제는 뒷모습만 보이지만,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갈색 롱스커트를 입은 여자는 아내가 확실했다.
뭐지? 지금 남의 집에서 나오지 않았어?
강은 고개를 기울여 아내가 나온 집을 확인했다. 담장을 맞대고 이어진 고급주택들 중 한 곳이었다.
우리 동네에 아내 친구가 있었나? 아니면 벌써 동네 친구라도 사귄 건가?
강이 아는 수진은 그런 성격이 아니다. 내성적이거나 까칠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사 온 지 한 달도 안 되어 동네 친구를 사귀고 집을 들락거리는 타입은 절대 아니다.
설마…… 한해?
그는 픽 웃어버렸다.
한해 그놈이 여기 살 리가 없잖아.
평소 같았으면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겠지만 와인 바에서 본 한해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슈트는 싸구려 티가 났지만 입성도 멀끔했어. 하룻밤에 수백 만 원을 요리와 와인에 썼잖아. 집도 절도 없는 뱃놈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만약 저 집이 한해의 집이고 아내가 들락거린다면…….
동굴에 자러 들어갔던 괴물이 다시 기어 나와 화살표 모양의 붉은 꼬리를 흔들었다.
아내의 뒷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진 뒤, 그는 차에서 내렸다.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꽉 물고 문제의 집을 응시했다.
가서 초인종을 눌러볼까? 그럼 확실히 알 수 있지.
만약 엉뚱한 사람이 나온다면 뭐라고 하지? 그거야 문제가 안 되지. 대충 둘러대면 그만이지.
강한해, 그 새끼 면상이 튀어나온다면 그때가 진짜 문제지.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상황이었다.
막상 자신은 이미 외도를 저지르고 오는 길이었으면서도, 비이성적인 분노가 핏줄을 불끈불끈 자극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팔짱을 꼈다가, 허리에 손을 올렸다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걸음을 옮겼다.
한해의 집이기를 바라는 역설적인 심리도 있었다. 자신을 망쳐버리고 싶은 마음처럼, 완전히 파국으로 치달아 버리고 싶은 심리.
마침내 문제의 대문에서 열 발자국도 남지 않은 거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핫팬츠를 입고 기타를 멘 여자가 그의 앞을 휙 지나가더니 문 앞에 서는 것이 아닌가!
뭐야 이건 또…….
강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물러섰다.
인디밴드 기타리스트 같은 느낌의 발랄한 여자는 껌까지 딱딱 씹으며 벨을 누르더니, 문이 열리자 폴짝 뛰어 들어가 버렸다. 다시 문이 닫혔다.
강은 허탈하게 웃었다.
작업실인가 보군. 가정집을 드라마나 뮤직비디오 작업실로 만든 그런 곳인가?
그럼 그렇지. 한해 녀석이 이런 데 살 리가 없고, 내가 아는 수진이는 한해 집을 들락거릴 정도로 간이 크지도 못해.
그는 다시 차로 돌아왔다. 꽃바구니의 오렌지 색 꽃을 손으로 쓰다듬고 시동을 걸었다.
.
.
.
그녀는 원래 샤워를 오래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5분 길어야 10분.
시원한 물에서 수영을 하거나, 아예 탕에서 몸을 담그고 있는 기분은 좋아하지만 좁은 샤워부스에서 오래 머무는 기분이 싫었다.
몸을 닦을 때도 꼭 샤워실 문을 열어놓았고, 집에 아무도 없을 때는 아예 화장실 밖에 나와 몸을 닦는 게 보통이었다.
커다란 타월로 몸의 물기를 닦아내며, 금방 한해의 집에서 느낀 감각을 떠올렸다.
14년 만에 닿았던 손길과 체온과 호흡. 그리고 예전처럼 장난스럽게 놀리던 말과 시선…….
왜 하필 그때 현기증이 생겨서!
종아리를 닦으며 에휴,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킨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남편이 앞에 있었다.
“놀랐잖아요…….”
“뭘 그렇게까지. 부부끼리 내외해?”
“그런 게 아니고 집에 있는 줄 몰랐어요.”
그녀는 샤워타월로 몸을 가렸다. 아까 한해의 시선을 받을 때 느꼈던 떨림은 사라지고, 남편의 시선은 불쾌한 기분만 흩뿌렸다.
“인기척이라도 내지. 웬일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요 며칠 일이 많아서 너무 늦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예민해서 당신하고 제대로 대화도 못 나누고, 또 그러다 보니 서로 오해가 쌓이고…….”
그는 꽃바구니를 쓱 내밀었다.
“사과하려고.”
수진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이 꽃…… 나 주려고 샀어요?”
“그럼 누굴 주려고 샀겠어? 하하.”
“아…… 너무 예쁘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타월을 잡고 한 손으로는 꽃바구니를 든 어정쩡한 자세가 불편했다.
“나 옷 좀 입고 나갈게요.”
“응. 그래.”
강은 허리를 굽혀, 아직 물기가 남은 그녀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춰주었다.
“우리 오늘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자. 와인도 한잔하고.”
“그래요.”
그가 나간 뒤 수진은 머리를 말리고 홈웨어로 갈아입고 꽃바구니 앞에 섰다.
가격이 짐작가지 않을 만큼 풍성하고 다채로운 꽃들이 작은 정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면 내가 미안해지잖아.”
그녀는 꽃바구니 가운데 꽂혀 있는 카드를 발견했다.
-아직 많이 망가져 있지만 당신을 위해 고쳐볼게.
그녀는 한숨을 쉬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결혼 후 나를 목 졸라 죽일 것처럼 괴롭히던 그 사람하고…… 같은 사람이 맞나?
아, 종잡을 수 없어.
그녀는 금방 말린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
.
.
시카고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몸값 비싼 셰프라고 했다.
강이 유학 시절 친하게 지냈던 후배가 오픈한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하우스.
외국인 셰프가 직접 서빙까지 해주는 테이블에서 와인을 곁들인 스테이크를 먹었다.
요 며칠 날카롭고 불안했던 남편은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바로 오늘 아침만 해도 정신병자 같은 모습을 봤던 터라 수진은 쉽게 마음을 놓지 못했다.
레스토랑 주인인 후배가 얼마나 괴짜인지를 여러 가지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하던 남편은 몇 번이나 먼저 건배를 청했다.
수진도 간만에 마시는 레드와인이 어찌나 맛있던지, 조금씩 취해갔다.
“당신 일은 어때? 새로 기획한다는 드라마 말이야.”
“별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리츠 펀드 런칭하면서 여유가 없어서 그랬지, 늘 당신을 응원하지.”
“지금 작가가 미국에 갔는데 먼저 소설로 원안을 써보기로 하고 한참 작업 중이에요.”
수진은 야화 작가의 독특한 캐릭터를 설명해주었고, 강은 엄청 관심 있는 얼굴로 듣고 웃다가,
“괴짜 작가님을 위해.”
건배까지 해주었다.
“아 참. 아까 퇴근하는 길에 당신 봤어.”
“무슨 소리예요?”
“집 앞 골목에서. 무슨 작업실 같은 집에서 나오던데. 음악 하는 사람도 들락거리고.”
잠시 눈앞에 하얘졌던 수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작업실이라니, 음악 하는 사람은 뭐지? 다른 집하고 헛갈린 모양이네.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역시 같은 동네는 무리야. 한해 오빠한테 얘기하길 잘했어.
“부르지 그랬어요.”
수진은 시선을 피하고 스테이크를 썰었다.
“뒷모습이 예뻐서 쳐다보다가 타이밍을 놓쳤지.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갈색 롱스커트, 맞지?”
“네, 맞아요.”
그녀는 스테이크를 씹으며 잠시 진정하고, 와인으로 입을 헹구었다.
“당신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응? 왜?”
“결혼하고 이렇게 기분 좋은 모습은 처음 봐서.”
“그래? 다행이다. 감정의 밸런스를 맞추는 방법을 발견한 것 같아.”
“뭔데요? 요가라도 해요?”
“뭐 일종의 요가라고 해야 하나?”
“일종의 요가라니, 그게 뭔데요?”
“농담이고. 들끓는 마음을 진정하는 방법을 발견했어.”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묻고 있는 거잖아요.”
빙빙 돌리며 대답을 회피하던 강이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수진은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였다.
“옛날 생각.”
그는 귀엣말로 와인보다 더 달콤한 고백을 속삭였다.
“소년이 소녀를 처음 만났던 그 순간을 떠올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생각해. 그리고 내 일생의 소원이었던…… 당신이라는 여자가 내 아내가 된 이 현실에 감사해.”
수진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오늘 오후에 그렇게 평온을 찾았어.”
고백을 마친 강은 또 와인 잔을 들었다.
“오늘 밤을 위해.”
*
한해와 소월의 저녁은 치킨에 맥주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정원이 너무 예쁘다며 난리를 친 소월 때문이었다.
“와, 이게 집이란 말인가! 강남 한복판에!”
그녀는 작은 연못을 돌아다니는 비단잉어들하고도 인사했다. 춤추듯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피크닉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수진이 앉아 있던 자리였다.
“나 오늘 반드시 여기서 저녁을 먹을 거다욧!”
무슨 뮤지컬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하늘을 손짓했다.
“저녁을 먹다 보면 별도 뜨고 달도 뜨겠지! 술도 한잔하면 얼마나 좋을까!”
“뭘 여기서 먹어. 나가서 오빠가 맛있는 거 사줄게.”
한해는 집까지 왔는데 배달 음식을 시켜주기 미안했다.
“한우 어때? 너 고기 좋아하잖아.”
“노노. 치킨에 맥주. 피크닉 테이블에서. 그게 오늘의 정답.”
손님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이 치맥으로 저녁을 때웠다.
고소한 치킨을 아사삭 베어 물며 한해는 인정했다.
야외에서 먹으니 두 배로 맛있네.
맥주는 또 어떻고. 냉장고에 있었던 걸로 모자라, 소월은 아이스버킷까지 들고 나왔다. 얼음을 가득 채운 아이스버킷에 맥주 캔을 담아놨다가 먹으니 이가 시릴 정도였다.
“오빠. 기억나?”
“뭐?”
“예전에 우리 배 타고 거기, 페루였나? 하여튼 남미 쪽에 갈 때. 그때 오빠가 후라이드 치킨을 해줬잖아.”
“아, 기억난다. 일항사님이 먹고 싶다고 하셔서.”
“야식으로 만들었는데 인기가 너무 좋아서 닭이 모자랐잖아.”
“정작 나는 날개 하나밖에 못 먹었어.”
“그 얘길 하려고. 나 정말 그때 오빠 표정이 잊히질 않아.”
소월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때 우리 갑판 위에서 밤바다를 보면서 치킨을 먹었잖아.”
“일항사님이 허락해줘서 맥주도 홀짝였지.”
“정말 끝내줬지. 남반구라서 별자리도 희한하고. 뭐할까…… 어…….”
“타임머신?”
“맞아!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의 바다로 간 느낌이었어.”
“고대엔 치킨이 없었겠지.”
“타임머신 안에 치킨을 들고 말이야.”
소월은 그때로 돌아간 듯 닭다리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빠가 아니었으면 나 정말 외로웠을 거야.”
“저도 함께 항해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삼항사님.”
둘은 닭다리로 건배하고는 소리 내어 웃고 또 맥주로 건배하고 하늘을 마시듯 술을 마셨다.
“오늘이 꼭 그날 같다.”
“그날 노래도 불렀어. 일항사님이 부탁해서 네가 기타까지 들고 나와서 불렀잖아.”
“맞아! 그럼 오늘도 한 곡 불러볼까?”
“부탁해도 될까요?”
수진은 담장에 세워둔 기타를 케이스에서 꺼내 들었다. 의자에 앉아 간단하게 튜닝을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찬바람이 조금씩 불어오면 밤하늘이 반짝이더라. 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네 생각이 문득 나더라.”
그녀는 궂은일을 해서 마디가 굵어진, 그러나 한해의 눈에는 늘 예뻐 보이던 손으로 기타 줄을 튕기며 노래를 불렀다.
“어디야 지금 뭐 해?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너희 집 앞으로 잠깐 나올래? 가볍게 겉옷 하나 걸치고서 나오면 돼.”
꾸임 없는 음성으로 부르는 노래가 한해의 마음을 적셨다.
“너무 멀리 가지 않을게. 그렇지만 네 손을 꼭 잡을래. 멋진 별자리 이름은 모르지만 나와 같이 가줄래?”
그러나 노래를 부르는 소월이 아니라 수진의 얼굴이 그려졌다.
한해는 미안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고개 들어 어린 별들을 보며 노래를 들었다.
소월은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노래를 마쳤다.
“와 멋지다.”
한해가 박수를 쳐주자 소월은 헤헤 웃으며 기타를 내려놓았다.
“적재의 노래였습니다. 별 보러 가자.”
“노래 좋다. 꼭 네가 만든 노래 같아.”
“아, 나도 이런 멋진 노래 만들어야 할 텐데. 항해도 그만두고 달려들었는데.”
“소월아.”
한해는 보통 때보다 더 따스하게 이름을 불렀다. 소월은 입이 스르륵 벌어진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
“꼭 그런 날이 올 거야. 항해까지 포기하면서까지 꾸는 꿈이 이루어지는 날.”
별것 아닌 말이 소월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
“갑자기 왜 진지하게 사람 울리고 그래.”
소월은 웃으면서 눈물을 닦아냈다.
“진짜 나쁜 오빠라니까.”
그들은 부른 배를 내밀고 한가롭게 맥주를 마시며 밤하늘과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공포 영화 데이트는 미뤄졌음을 둘 다 알았다.
밤이 깊었고 그녀는 마음도 깊어졌다.
지금 여기가 너무 좋은데. 그냥 여기서 술도 더 마시고 거실에서 영화나 보다가 자고 간다고 하면…….
한해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먼 곳에 시선을 걸어놓고 있었다.
뭐야. 옆모습 조각 같다고 자랑하는 거야?
“오빠.”
“어, 소월아.”
“나 오늘 여기 더 있다가 자고 간다고 하면 오빠가 불편하겠지?”
한해는 마음을 숨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알았어. 대답을 봤어.”
“사실 내가 지난번에 너한테 크게 실수한 게 있잖아. 하룻밤 신세 진 게 있으니 그 밤을 갚긴 해야지.”
“언제든 하루 재워준다 이거야?”
“말하자면 그렇지.”
“그걸 오늘 쓰긴 아깝다.”
“언젠가. 빚지고 살 순 없으니까.”
“오빠. 이런 사랑도 있어.”
소월은 대뜸 사랑 이야기를 꺼내고 턱을 괴었다.
“상대 마음에 내가 없는지 알면서도 그저 함께 있는 시간만으로도 충만해서 행복한…… 그것도 사랑 아닐까?”
한해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사랑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런 사랑도 있겠지.”
“알면 됐어.”
소월은 기타를 챙겼다.
“이제 가게?”
“응. 더 있다가는 오빠네 숙박 쿠폰 오늘 써버릴 것 같아서.”
찡긋 윙크하는 눈에서 은화가 짤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
다음 날. 하루 종일 긴장한 채 트레이딩 프로그램에 몸을 던졌던 한해는 오후에 장이 마감한 뒤에 낮잠을 잤다.
딱 한 시간, 알람을 맞춰놓고 일어났더니 레이나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우리 오늘 보기로 했죠? 한해 씨와 함께 할 합동작전에 지금 잔뜩 흥분했어요. 한해는 한껏 미간을 좁히고 액정을 노려보았다.
합동작전이라니. 당신 대체 무슨 꿍꿍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