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26화 (26/92)

26화

레이나는 한해를 마주한 짧은 순간에 알아차렸다.

이 남자, 강하다. 단단하다.

그녀가 강에게 느끼는 주된 감정은 연민인데, 한해는 정반대였다. 조금의 연민이 스며들 틈도 없었다.

그녀는 귀엽게 웃으며 한 발 물러섰다.

“제 표현이 조금 지나쳤나요?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사과는 받아드리겠습니다.”

한해도 한 발 물러섰다.

“그렇다면 당신과 수진 씨의 관계는 뭘까요?”

그는 한쪽 눈썹을 올리고 되물었다.

“그쪽은 강이하고 어떤 관계입니까?”

“제 이름은 레이나예요. 강이 오빠하고 특별한 관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를테면?”

레이나가 대답하려는데 강이 가로막았다.

“레이나. 먼저 자리로 가 있어.”

“왜? 재미있어지려는데.”

“재미? 지금 재미 운운할 상황 같아?”

강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오빠가 재미없다면 뭐.”

그녀는 한해에게 손을 발랄하게 인사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발랄하네. 수진이하고는 너무 다른데?”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한해는 강을 보며 삐뚜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어느 쪽이 너의 진짜 취향이냐?”

“여기서 취향이 왜 나와?”

“레이나라고? 저 여자가 자기 입으로 그랬잖아. 너랑 특별한 사이라고.”

“원래 말을 오버해서 하는 애야.”

“그럼 네가 말해봐. 둘이 무슨 사이인지.”

한해는 주머니 속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단, 너희 둘이 한 짓을 내가 다 봤다는 사실만 명심하고.”

“아까도 말했잖아.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한해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 쪽이 맞는 말이야? 레이나는 특별한 관계, 너는 비즈니스 파트너.”

“설마 날 미행한 거야?”

“내가 왜?”

“수진이한테 미련이 있어서?”

여유를 부리던 한해의 태도가 처음으로 딱딱해졌고 강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사실 나 알고 있었어. 형도 수진이 좋아했잖아. 결국 수진이는 나를 선택했지만.”

강이 으스대듯 말했다.

하마터면 멱살이라도 틀어잡을 뻔했지만 전업투자자로서 익힌 냉정함이 한해를 말려주었다.

더 벌고 싶은 생각, 빨리 팔고 싶은 생각, 인간의 욕망을 막대로 잘게 나눠놓은 양봉과 음봉 사이를 누비며 감정을 다스리는 훈련을 해왔고 그 훈련이 지금 빛을 발했다.

“잠깐 앉아. 이러고 서 있을 일이 아니라.”

한해는 자리에 앉아 맞은편을 가리켰지만 강은 그냥 서 있었다.

“왜? 빨리 레이나한테 돌아가고 싶어?”

“미친 소리.”

강은 두려울 게 없다는 식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한해는 웨이터를 불러 새 잔을 갖다달라고 한 다음 강에게 와인을 따라주었다.

“강아. 그거 알아? 우리 둘이 처음 술 마시는 거야.”

“그게 뭐가 중요해?”

“뭐든 처음은 중요하지. 수진이도 그래서 중요해. 내 첫사랑이니까.”

권투로 치면 잽 공격처럼 한해는 강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수진에 대한 강의 진짜 마음을 파악하고 싶었다.

“첫사랑은 늘 실패하지.”

강은 와인 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고 한해도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첫사랑을 위해.”

강이 뽐내듯 건배사를 했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그의 눈이 말했다.

수진이는 형의 첫사랑일 뿐만 아니라 내 첫사랑이기도 해. 차이가 있다면 형은 실패했고 나는 성공했다는 거지.

한해는 강의 도발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아주 천천히 와인을 마셨다.

“형은 요즘 뭐하고 지냈어? 꽤 오래 쉬네?”

“이제 배 안 타.”

그 말에 강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그럼 뭐하는데?”

“비즈니스. 너처럼. 물론 레이나 같은 파트너는 없지만.”

“무슨 비즈니스?”

“나한테 관심이 많구나?”

강은 지그시 이를 물었다. 주먹이 오가지 않을 뿐 치열한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형이야말로 우리 부부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신혼여행까지 쫓아오고 말이야.”

“뭐라고?”

“다 알고 있어. 울진에서 형이 수진이하고 몰래 만난 거.”

한해는 멈칫했다.

그걸 강이가 어떻게 알지? 수진이도 그런 얘긴 없었는데…….

“이강. 그건 오해야. 난…….”

“오해? 형이야말로 지금 나와 레이나 사이를 오해하고 있어.”

“너 설마 그 일로 수진이를 못살게 굴었냐?”

꽈악 이를 무는 한해를 보고 강은 소리 내어 웃었다.

“왜 남의 아내를 걱정하고 그래?”

“울진에서 만남은 우연이었어.”

“형이 내 말보다 자기 눈을 믿는 것처럼 나도 그래. 형은 우연이라고 하지만 난 두 눈으로 직접 본 게 있고, 그래서 둘이 나 몰래 연락을 해서 만났다고 믿어.”

“미친 소리. 우린 서로 연락처도 몰라.”

강은 속으로 예스! 외치며 주먹을 꾹 쥐었다. 결정적인 정보를 빼냈다.

서로 번호는 모른다 이거지? 믿어도 될까? 그렇다면 울진에서 둘이 만났던 일은 정말 우연일까?

“그 일로 수진이를 괴롭혔다면 넌 정말 잘못한 거야.”

한해가 한 번 더 강조했고,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인정이 아니라 비아냥의 전주곡이었다.

“아주 애타는 마음, 잘 알겠어. 눈물 나네. 그런데 형. 대상이 틀렸어. 남의 아내 걱정은 이제 그만해. 남편 입장에서 한심하고 짜증나니까.”

한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패배를 시인했다.

어쩔 수 없네. 수진이가 너와 함께 있는 이상, 나는 너를 이기고 싶지 않구나. 수진이의 남편이니까. 다만…….

“수진이 행복하게 해줘라.”

“수진이는 내 와이프야. 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아까 내가 본 모습은 그렇지 않아서 하는 말이야.”

“오해라니까. 형이 남의 아내를 신혼여행지에서 만난 일처럼. 그것도 내가 오해한 거라며? 이번엔 형이 오해한 거야. 영어로 이븐. 비겼어.”

“비기긴 뭘 비겨. 지금 우리가 무슨 시합을 하는 게 아니잖아.”

“수사적 표현이지. 아, 학교를 제대로 안 다녀서 무슨 뜻인지 모르나? 쉬운 말로 하면, 표현이 그렇다는 거야. 정말 시합이 아니라.”

강은 비아냥을 멈추지 않았다.

한해는 잔에 조금 남은 와인을 비우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며칠 전에 동네에서 수진이와 마주친 일은 강이가 모르는 것 같아. 그 말은, 내가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는 뜻이고. 그건 다행이네.

“나는 수사적인 표현에 익숙하지 않으니 직설적으로 말할게. 넌 모를 거야. 네가 울진에 오기 전부터 수진이 괴롭히는 놈이 있으면 내가 두 배로 혼내줬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수진이 속상하게 하지 마. 그럼 나 굉장히 비이성적으로 변하니까.”

“나도 직설적으로 말할게. 우리 부부한테 그만 신경 꺼주시지.”

강은 잔을 쓱 밀어놓고 일어섰다. 한해의 테이블을 힐긋 보고 와인 바도 둘러보았다.

“어디서 돈이 나서 이런 허세를 부리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는 손가락으로 한해의 옷을 가리켰다.

“그 싸구려 양복은 여기랑 너무 안 어울린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빈 잔을 튕겼다.

“와인 잘 마셨어.”

불안한 울림을 남기고 떠난 강의 뒷모습을 한해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저 녀석 괴상해. 겉으로는 겨우 감추고 있지만 안에는 뭔가 뒤틀려 있어. 수진이는 괜찮을까?

동시에 강의 말처럼 오지랖인가 싶기도 했다. 부부 사이의 일은 부부만 안다고, 신경 꺼주는 게 오히려 그녀를 위하는 것일까? 쉽게 결정해서는 안 될 문제다.

그는 혼자 와인을 따라 마셨다. 금방 삼키지 않고 오랫동안 입안에 머금었다.

.

.

.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해는 대로변에서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술기운도 떨칠 겸 조금 걸을 생각이었다.

호젓한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보폭을 크게 걷던 그의 눈에 어제까지만 해도 그냥 스쳐 지나갔던 뭔가가 턱 걸렸다.

빌딩 옥상. 레이나의 광고판이 떡하니 빛나고 있었다. ‘수학 일타의 지존 레이나’.

일타가 무슨 뜻인지 몰라 검색을 해본 그는 레이나의 SNS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구나.

그는 아까 강이 있어서 하지 못했던 말을 비밀댓글로 남겼다.

-오늘 우연히 만났던 강한해라고 합니다. 주제넘은 소리라고 치부하실 수도 있지만 제가 좀 구식이어서요. 강이는 저에게는……. 한해의 손가락이 멈췄다. 수진이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친동생 같은 아이? 소중한 사람?

잠시 아랫입술을 물고 있다가 이렇게 썼다.

-제 목숨과도 같은 사람의 남편입니다. 그러니 오늘 같은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연락할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이만. 자기가 쓴 글을 보고 피식 웃었다.

목숨 같은 사람이라니. 정말 구식이네. 14년 동안 아저씨들하고만 지내서 그런가? 어쩌겠어.

그는 댓글을 달려다가 말았다. 그가 쓴 것처럼 주제넘은 오지랖이라는 판단이 들어서.

그냥 폰을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들었다.

레이나의 옥외 광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수진의 집도 보였다.

강이는 집에 들어갔겠지? 아까 나하고 마주치고 얼마 안 있어서 와인 바를 나갔으니까. 설마 레이나와 다른 곳으로 간 건 아니겠지? 수진이를 저 성 같은 곳에 혼자 가둬놓고…….

강은 밤거리에 한참 서 있었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 위험한 것들을 한눈에 담았다.

강과 수진이. 레이나. 그리고 나까지. 어쩌다 한곳에 모이게 됐을까? 이런 연결고리를 운명라고 부르는 것일까?

하필 그 순간, 소월의 천진난만한 메시지가 왔다.

-뭐해 오빠? 나 진짜 너무 귀여운 고양이 영상 발견! 보내줄게. 소월이 보내준 짧은 영상을 재생시켰다.

새하얀 털이 북슬북슬한 고양이가 테이블에 올라갔다가 미끄러졌다.

한해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운명이라고 부르는 연결고리가 소월에게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을.

.

.

.

집에 돌아가니 사토시 씨가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한해 군 왔는가?”

“선생님. 계신지 몰랐습니다. 여기 계신 줄 알았다면 좀 일찍 들어올걸요. 연락을 하시지.”

“괜찮아. 영화나 한 편 보고 있었어.”

“화질을 보니 요즘 영화 같진 않은데요?”

“자네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나온 영화지.”

화면 속에는 구식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무척이나 앳된 얼굴의 톰 크루즈도 보였다.

“어, 저 배우. 톰 크루즈 아닌가요? 미션 임파서블에 나오는.”

“오, 아는군. 이 영화는 탑건인데, 80년대에 나온 영화니까 못 봤겠지?”

“모르겠습니다.”

“숙희하고 마지막으로 본 영화였는데.”

“아하! 그분하고는 얘기가 잘되었나요?”

사토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다가 리모컨을 들어 영화를 껐다.

“동네나 한 바퀴 돌고 올까?”

.

.

.

며칠 전 아름다웠던 밤을 기억했다. 그녀와 함께 웃고 떠들며 걸었던 길을 사토시 씨와 함께 걷는다.

사토시의 발걸음은 느리고 무거워 보였다.

“일이 잘 안 되었어.”

“그러셨군요.”

한해는 조금 놀랐다. 사토시 씨의 입에서 뭔가가 잘 안 되었다는 말이 나오다니 낯설다.

“너무 늦었나 봐. 숙희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이 엉켜 있어. 사경을 헤매는 알코올중독자 남편, 거머리 같은 자식…… 돈으로도 해결 안 되는 것이 있더라고.”

아직 30대인 한해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였다.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들었다.

“혼자 집에 오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어. 숙희가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지 얼마나 됐을까?”

“갑자기 영화는 왜요?”

“숙희는 영화를 정말 좋아했거든. 우리 젊을 때는 극장도 별로 없고 영화도 몇 편 안 나오던 시절이었는데도 참 극장에 자주 갔어. 아까 그 영화 말이야. 탑건. 벌써 환갑이 다 된 톰 크루즈가 파릇파릇한 20대 때 찍은 영화지. 그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영화야. 나는 얼마 안 있어서 중동으로 떠났으니까.”

“그러셨군요.”

“삶에 지친 사람들한테 일어나는 진짜 불행은 좋아하는 것들이 뭔지 잊어버리게 된다는 거야. 아마 숙희는 몇 년…… 어쩌면 10년도 넘게 극장에 못 가봤겠지.”

사토시의 음성이 촛불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는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려는 듯 애써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어땠나? 근사한 곳에서 여유를 즐겼는가?”

“저도 일이 좀 있었습니다.”

그는 강과 레이나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걱정이네. 자네도 나처럼 될까 봐.”

사토시는 친아들의 연애사를 들은 아빠처럼 진지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이런 엄청난 짓을 하는 사람만 악마가 아니야. 눈에 띄지 않게 잘근잘근 다른 사람을 괴롭혀 절망으로 몰고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강이라는 친구가 그런 악마라면 어쩌나 싶어.”

“저도 어른이 되고는 처음 보는 거라,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불안하긴 합니다.”

“만약 더 이상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면 주저 말고 수진이를 구해주게. 돌이킬 수 없게 늦어버린 다음에 후회하지 말고. 나처럼 살지 마.”

“선생님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난 시간이 너무 없네.”

천천히 걷던 그들은 다시 집 앞에 도착했다.

“호텔로 들어갈게.”

“여기서 같이 주무시지 그러세요. 늦었는데.”

“아니야. 이제는 호텔이 더 편해. 잘 자게, 한해 군.”

그는 돌아서려다가 말고, 피식 웃었다.

“35년 전에 말이야. 극장에서 탑건을 보고 나오는데 숙희가 톰 크루즈가 너무 잘 멋있다고 난리인 거야. 특히 비행기를 모는 모습이. 내가 부아가 나서 그랬지. 나중에 내가 모는 비행기를 태워주겠다고.”

“풋풋한 연애 시절이 있었네요.”

사토시는 주머니에서 낡은 가죽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신분증같이 생긴 뭔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경량항공기 조종사 자격증’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하아…… 장난 없는 분이구나. 농담을 몰라!

사토시는 찡긋 윙크했다.

“나중에 한해 군도 한번 태워줄게.”

.

.

.

그날 밤, 한해는 거실에서 영화 ‘탑건’을 봤다. 톰 아저씨의 젊은 시절 모습 위로 사토시 씨의 얼굴이 겹쳐졌다.

간절히 기도했다. 머지않은 어느 날. 사토시 씨가 모는 경비행기 뒷자리에 숙희 아주머니가 타고 즐거워하는 날이 오기를. 꼭…….

*

그 시간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수진은 다른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남편을 미워하지 않게 해주세요. 강은 12시가 다 되어 들어왔다. 어디 있다 왔냐는, 아내로서 당연한 질문에 그는 날카롭게 반응했다.

“말했잖아. 사업상 미팅이 있었다고. 지금 의심하는 거야?”

“그냥 별 뜻 없이 한 말이었어요.”

“그런 말을 실없는 소리라고들 하고, 나는 실없는 소리를 아주 싫어해.”

남편의 모습 위로 어머님을 막 대하던 시아버지의 모습이 스치듯 겹쳐졌다.

종종 아들은 아버지를 혐오하면서 닮아간다는 말이 떠올라 가슴 깊은 곳이 서늘해졌다.

“왜 그렇게 예민해요?”

“네가 예민하게 만들잖아?”

“저는 어제 못다 한 대화를 마무리하려던 것뿐이었어요. 앙금이나 오해가 남지 않게.”

“나는 앙금이나 오해 없지만, 좋아. 대화하자. 얼른.”

“이런 식으로 어떻게 대화를 해요?”

“더럽게 복잡하네. 그럼 어떤 식으로 대화를 해야 하니? 정해진 형식이라도 있어?”

수진은 흔들리는 눈으로 강을 응시했다.

“변했어요. 너무나도. 아니면 원래 이랬는데 속인 거예요?”

“뭐가? 난 여전히 나인데. 그때도 지금도.”

수진은 울화가 치밀어 이쯤에서 대화를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당신은 친절하고, 따뜻하고, 품이 넓은 사람이었어요. 긴 세월 변함없이 그런 모습으로 곁에 있어준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래서 여기까지 왔죠. 그런데 지금 당신 모습을 봐요.”

“내 모습?”

그는 거실 창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슥슥 머리를 만졌다.

“변함없이 잘생겼는데, 왜? 뭐가 변했니 속였니 헛소리를 지껄여대는 거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래요. 그래요…….”

그녀는 코끝을 간질이는 화장품 냄새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았다.

술 냄새와 뒤섞여 있는 그 냄새는…… 함께 비즈니스 미팅을 했던 사람들 중에 여자가 있었겠지, 믿어주려고 애썼다.

겨우 어디 있다가 왔냐고 물어본 질문 하나로 이런 파국이 벌어지는데 여자 화장품 냄새 운운했다간 오늘 밤을 통째로 날려버려야 할 테니까.

그녀는 침실로 들어갔다. 소리치고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눈꺼풀을 닫았다.

할 만큼 했어. 더 이상 쫓아가면 비굴함의 영역에 들어서지. 그러지는 말자. 나도 좀 쉬자.

인간의 감각은 하나가 닫히면 다른 것들이 그만큼 예민해지는 걸까? 그녀의 귀는 침실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예민하게 잡아냈다.

남편은 술을 마시려나 보다. 진열장이 열리고 위스키 꺼내는 소리가 들려. 아까도 술 냄새가 꽤 났는데 더 마시려나 봐.

신경 끄고 자자. 이렇게 부당하게 대접받으면서 안주라도 차려주려고?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은 자꾸만 더 또렷해졌다.

어른이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는 존재라고 배웠다. 어른이니까, 스스로 결정한 결혼생활이 더 충실하고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중이다.

그러나 결혼생활이란 혼자서 아무리 애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 박수와도 같지. 혼자서는 소리를 낼 수 없어.

늦은 시간인데 남편은 꽤나 오래 술을 마셨다. 작은 소리에도 화르륵 반응하던 그녀의 감각도 조금씩 무뎌져 막 잠이 들던 참이었다.

누군가 곁을 파고드는 감각에 잠이 깼지만 여전히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수진아.”

남편의 목소리에 술 냄새가 지독해서, 대답하지 않았다.

“안 자고 있는 거 다 알아. 그러니까 그냥 듣기만 해.”

수진은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뭐지?

아까 비아냥거리던 톤과 완전히 다른,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자상한 남편의 목소리였다.

“일종의 고해성사라고 생각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