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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25화 (25/92)

25화

사랑하는 이의 불행을 지켜보는 건 내 불행만큼이나 괴로운 일이다.

강과 레이나의 행각을 지켜보던 한해의 기분이 그랬다.

화장실을 가려던 그는 본능도 잊은 채 그들의 웃음과 스킨십을 목격했다.

그의 분노는 체온을 올릴 만큼 뜨거웠다.

당장 녀석의 멱살을 잡고 턱을 날려버리려고 했다. 결혼한 지 고작 한 달 만에 이게 무슨 짓인지, 이 여자는 누군지, 당장 집에 들어가서 수진이한테 사죄하라고 호통치려고 했다.

그러나 침착한 성정이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신중하게, 현명하게 판단하자.

수진이는 가정을 지키고 싶어 해. 당장 난리를 피우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일단 대체 무슨 상황인지부터 조금만 더 지켜보자.

서로 유혹의 눈빛을 보내고, 달콤한 농담으로 서로를 웃기고, 스치듯 손끝으로 상대를 어르던 그들은 결국 키스까지 감행했다.

레이나가 테이블 너머로 몸을 굽혀 입 맞추는 장면을 한해는 차마 보지 못하고 외면했다.

동시에 그는 오래 전의 어떤 밤을 떠올렸다. 아릿한 슬픔과 먹먹한 아쉬움이 달빛처럼 스며있는 밤. 순결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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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으로 부모를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된 소년과 소녀.

그들은 별이 쏟아지는 언덕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 서로를 위해 서로를 잊자.”

잊자는 말은 오직 한해의 입에서만 나왔다.

언덕을 내려와 집으로 향했다. 죽음의 스산한 기운이 스민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수진은 혼자 집에 있기 힘들어했다. 울다 지쳐 쓰러지는 일은 다반사. 부모님의 귀신이 보인다며 경기를 일으키기도 해서 한해가 함께 있어주곤 했다.

그날 밤도 그랬다. 그녀의 부모님이 쓰던 방에 한해가 누워 있는데 늦은 새벽에 문이 열리고 수진이 들어왔다.

잠옷 차림으로 베개를 꼭 안은 그녀는 한해 옆으로 다가오더니 누워버렸다.

“오빠. 나 무서워.”

그렇겠지. 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그래. 여기서 자. 오빠가 재워줄게.”

한해는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다.

“오해하지 마. 귀신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서울 올라가서 강이 오빠네에서 지내야 하는 게 무서운 것도 아니야.”

“그럼? 서울에서 고등학교 들어갈 생각하니 무서워? 혹시 왕따라도 당할까 봐?”

“아니. 그런 건 하나도 안 무서워.”

“그럼 뭐가 무서운데?”

“오늘 밤이 지나면 오빠를 다신 못 볼까 봐 무서워.”

한해는 그녀를 안심시켜줄 수 없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해줘.”

수진이 칭얼댔다.

“오빠가 말했잖아. 그런 생각을 하면 새로운 생활을 못 버틸 거라고. 배수진을 친다는 말 학교에서 안 배웠어?”

“나는 다 계획이 있었단 말이야!”

칭얼대던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한해는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물었다.

“수진이 계획이 뭐였는데?”

“고등학교 들어가면 오빠하고 첫 키스를 하고, 오빠가 대학 들어가면 나도 같은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 졸업하면 오빠하고 결혼하고…… 아이는 딸 하나 아들 하나 낳고…… 다 계획이 있었다구!”

엉엉 울면서 쏟아내는 야심찬 계획을 평소에 들었다면 깔깔 웃으며 머리나 쓱쓱 비벼줬겠지만, 한해는 웃을 수 없었다. 그 역시 눈물이 나려 했다. 그에게도 계획이 있었으니까. 이룰 수 없게 되어버린…….

“다 망했어. 다…….”

그녀는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고 또 엉엉 울었고, 그때 엄마를 못 나가게 집으로 데려왔어야 한다며 자책하며 또 울었다.

이불이 축축해지도록, 온몸의 수분을 전부 눈물로 빼낼 것처럼 울던 그녀는 한참이 지나야 잠잠해졌다. 지쳐서 잠든 모양이었다.

한해는 의젓한 척 참았던 한숨을 토해내고 그제야 눈물을 흘렸다. 소리를 내면 수진이 깰까 봐 이를 꽉 물고 울었다.

“오빠 울어?”

그녀는 안 자고 있었다.

“응.”

“오빠도 슬퍼?”

“당연하지. 너무 슬퍼.”

“조금 다행이다. 나는 나 혼자 슬픈 줄 알았어.”

“바보 같은 소리. 나도 슬퍼. 너무나도.”

“슬픔은 왜 느끼는 거야”

“음…… 기대했던 것들이 이뤄지지 않으면 슬픈 거야.”

“엄마랑 아빠랑 오래오래 살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서 슬픈 거구나.”

“그렇지. 기대가 없으면 슬프지도 않아.”

“오빠랑 하려고 했던 것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오빠 계획은 뭐였어?”

“말했잖아. 난 해양대학교에 가고 싶었다고.”

“그거 말고. 나랑 뭘 하겠다는 계획은 없었어?”

한해는 수진의 뒤통수를 쓸어주었다.

“이제 그만 자. 이러다 밤새겠다.”

“나 안 잘래.”

“왜 또…….”

“오빠랑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자?”

“이럴 때일수록 잘 자고 잘 먹어야 하는 거야. 키도 더 커야 하고.”

“나 키 다 컸어!”

“고등학교 들어가서 크는 애들도 있어.”

“여자는 다르단 말이야. 애 취급하지 마.”

“이렇게 떼쓰는 거 보니까 애 맞네. 오빠는 잔다. 내일 아침에 군청에 가봐야 해. 너도 학교 가야지.”

“학교에서 자면 된다고. 어차피 애들도 보기 싫구.”

“친구들은 왜?”

“날 불쌍하게 본단 말이야. 그게 너무 싫어!”

한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슬프고 속상하고 거기에 사춘기의 격렬한 감정까지 더해져 미치겠지.

“나 도저히 안 되겠어.”

수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왜? 여기 불편하면 네 방에 가서 자. 나쁜 꿈 꾸거나 하면 부르고. 오빠가 갈게.”

“불편한 게 아니고. 너무 슬퍼서. 내가 기대했던 계획들이 전부 다 사라졌잖아.”

한해도 몸을 일으켰다. 무조건 달래려고만 하지 말고 맞춰주다가 재워야겠다 싶어서.

“우리 수진이가 정말 많이 속상하구나.”

“엄마 아빠는 이제 다시 볼 수 없지만 오빠는 아직 내 옆에 있잖아.”

“응. 오빠는 귀신 아니야.”

한해는 그녀를 위로해주기 위해 웃을 기분이 아닌데도 애써 웃어 보였다.

소년 소녀는 바닷가 마을을 비추는 달빛 속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파도 소리가 처연했다.

한해는 어린 나이에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진이 왜 이토록 잠들지 못하고 불안해하는지.

그러나 당장 그녀가 불쌍하다고 계속 이렇게 안아주고 받아줘서는 안 된다. 그녀에겐 앞으로 닥쳐올 미래가 더 중요하고, 그 미래에 난 없을 테니.

달빛이 내려앉은 그녀의 입술이 서서히 다가온다 싶었고, 그 순간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오빠…….”

수진이 그를 붙잡았다. 애타는 눈동자만큼이나 절박한 감각이 팔에 느껴졌다.

그것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그런 종류의 감각이었다.

“안 돼, 수진아.”

기어코 그녀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가지 마! 가지 마 오빠!”

가야 해. 더 이상 너를 안고 있다간…….

그는 끝내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왔다.

한해에게는 그때부터 새로운 슬픔이 시작되었고, 그 슬픔은 오래오래 지속되었다.

집채만 한 파도 앞에서도, 신비로운 혹등고래를 보면서도, 며칠 동안 이어지는 혹독한 생선 해체 작업 속에서도,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쏟아지는 이국의 항구 골목에서도, 40미터 아래 바다가 출렁이는 선실에서도.

그녀의 입술은 늘 해줄 수 없는 입맞춤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프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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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4년 후, 와인 바 세르반테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강과 레이나의 키스를 보며 한해는 수진의 슬픈 입술을 떠올렸다.

그녀를 위해, 그녀의 결혼을 위해 나는 14년이라는 기다림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입맞춤을 포기했는데…… 너는 이러고 있어?

이강. 너의 외도에 나는 분노할 자격이 있어.

그는 강의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리는 대신, 조금 더 이 장소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자리로 돌아가 웨이터를 부른 것이었다.

“저쪽 테이블로 선물을 보낼까 하는데. 여기서 제일 비싼 와인이 뭐죠?”

어떻게 이렇게 대담할 수 있냐고? 사토시 씨가 말했으니까. 이 테이블에서는 아무리 주문해도 계산할 필요가 없다고.

고맙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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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안에 들어가 빠지지 않는 돌 같은 것.

레이나의 광고판이 수진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몰랐을 때는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는데, 알고 나니 거실 창밖을 볼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퇴근하는 길에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들어오면 편했겠지만, 일부러 집에서 요리를 해 먹었다.

그래봤자 김치볶음밥이었지만 고기와 야채를 볶고 밑반찬을 꺼내 그릇에 담는 사소한 과정 자체가 일종의 거름종이 역할을 해주었다. 나쁜 생각을 걸러주는 거름종이.

자신만을 위한 식사를 하고 가벼운 음악을 들으며 설거지를 하고, 시원한 레몬수 한 잔을 들고 거실에 나와 창밖을 볼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나 싶었다.

그런데 ‘수학 일타의 지존 레이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몸을 돌리려다가 그녀 때문에 평화로운 휴식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고개만 살짝 돌렸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

남편과 아이가 같이 나가면, 그저 집에 혼자 있는 것만 해도 축복처럼 느껴진다고.

그런데 나는 뭐지?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지금 이런 평화를 느끼다니.

신혼 초에는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그렇게 보고 싶다던데…….

결혼을 앞두고 주변에서 들은 이런 저런 얘기들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 나와 남편, 둘만의 방식으로 잘 살면 되니까.

시작은 덜컹거리는 감이 있지만, 맞춰가는 과정이겠지.

좋은 생각을 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으로 발신인을 확인한 수진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하필 지금.

받지 않을까 망설이다가 습관이 되겠다 싶었다. 어른들 전화를 피하는 습관이 들면 고치기 힘들다고 하던데.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님.”

“퇴근했냐?”

“네. 집입니다.”

“강이 녀석은?”

“오늘 조금 늦는다고 했어요. 저녁 먹고 들어온다고.”

“그래? 음. 요즘 어떠냐?”

설마 또 손주 타령을 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겠지? 요 며칠 그이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모른 채로.

“점점 서로에게 적응하고 있어요. 직장에도 복귀해서 업무도 시작했고요.”

“그건 언제 그만둘 셈이냐?”

“네? 뭘요?”

“너 그 무슨 영화 만드는 일 한다는 거 말이다.”

드라마 기획피디. 일곱 글자짜리 며느리의 직업 외우는 일이 그렇게 힘드실까.

“드라마 기획 일이요. 그만둘 예정은 없는데요. 요즘 새로운 작품을 개발 중이에요.”

“드라마라…… 임신을 하면 어차피 그만둘 텐데 굳이 그사이에 다닐 필요가 있을까 싶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을까? 또 그 얘기…….

수진은 이제 예의의 차원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는 판단이 섰다.

“아버님. 지난번에 식사할 때는 그냥 지나갔는데,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가족계획에 대해서는 재촉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시아버지 입장에서 빨리, 여러 명의 손주를 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겠지만…… 이렇게 며느리한테 따로 전화하시면 제가 압박감을 느낍니다.”

“그것참 잘되었구나. 압박감을 느끼라고 전화했으니까.”

하아…… 수진은 단단한 벽에 머리를 찧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자연스럽게 진행될 일들이에요. 저 아직 어리고 건강하니까요. 그이도 그렇고요. 대체 몇 번이나 똑같은 말씀을 드려야 하는지. 말씀드릴 때마다 저도 죄송하고…….”

“아무래도 너한테 다 얘기를 해줘야겠구나.”

수진은 지난번 가족 식사에서 스치듯 들었던, 매우 이상한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여럿이 필요하다. 이미 우리 계열사도 여럿이고, 피가 안 섞인 놈들은 믿을 수 없고. 피가 적당히 섞인 놈들은 더욱 믿을 수 없고. 아버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잠깐만요. 아버님. 혹시 그이에게 제가 모르는 형제가 있나요?”

“눈치는 빠르구나. 다른 사람에게 태어난 형제가 둘 있다. 남자 애 하나 여자 애 하나.”

맙소사…… 수진은 레몬수를 내려놓고 소파에 주저앉아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것들이 아직은 어리지만 슬슬 경영권에 욕심을 내는 것 같다. 요즘은 그 뭐냐. 유전자 검사 이런 게 있어서 친자 확인도 확실히 되고. 걔들이 지분 상속을 요구하면 내 입장이 곤란해져.”

“그래서 빨리 그이 자식을 만들어라? 그것도 여럿? 그 말씀이시죠?”

“그렇지. 그래야 든든해지지.”

“그 배다른 형제들의 존재…… 어머님이나 그이도 알고 있나요?”

“그럼. 인사도 시켜주었는데.”

뭐라고? 수진은 내면의 윤리체계가 바이러스에 걸려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당당할 수 있지? 자기가 잘못해놓고선! 혹시 그이도 이런 모습을 보고 배웠다면 어쩌지?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버님. 제 입장에선 지금 여러 가지가 불편합니다.”

“나한테 따박따박 대드는 너의 태도가 몹시 버릇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게지?”

“그렇게 느끼셨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내가 왜 역정을 내지 않고 너의 무례함을 보고 듣고만 있는 줄 아니? 네가 그래봤자 달라질 게 없기 때문이야. 이미 자포자기해버린 강이 그 녀석보다는 근성이 살아 있는 널 대하는 게 더 재미도 있고.”

재미라니…… 재미라니! 재미로 며느리를 이렇게 못살게 군단 말인가?

“하여튼 회사 지분이나 상속을 신경 쓰셔야 하는 아버님 입장은 잘 알겠지만, 아무리 그게 중요하다 해도 제 입장에서 그런 이유로 급하게 아이를 낳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떤 이유가 필요할까?”

“아이란 부부 간 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기본이지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태화 회장이 느릿하게 물었다.

“역시 너는 강이 그 녀석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아버님!”

“상관없다. 사랑 따위. 언제 한번 집무실로 오거라. 너의 무례함을 직접 구경하고 싶으니.”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긴 한숨을 토해낸 뒤 수진은 소파에 늘어져버렸다.

내 선에서 해결해야 할까, 아니면 그이와 상의해야 할까? 아무래도 이건 며느리와 시아버지 둘만의 일은 아닌 것 같아.

수진은 강의 번호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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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한해를 맞닥뜨린 강의 가슴에는 격랑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필 레이나와 함께 노닥거리고 있을 때!

대체 무슨 돈으로 이런 테이블을 잡고 한 병에 수백만 원짜리 와인까지 선물로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행동의 의미는 확실했다.

그것은 도전이었다. 그대로 턱에 꽂인 펀치였다.

“왜 대답을 못 하실까?”

한해는 다리를 스르륵 꼬고, 마치 이 와인 바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등을 기댔다.

“유부남이 저렇게 아리따운 여성분과 여기서 뭘 하고 있냐고 물었잖아.”

이 개자식이 계속 도발을…….

강이 주먹을 불끈 쥐고 대답을 못하는 사이 한해는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며 와인까지 한 모금 마셨다.

“내가 보기엔 너랑 저 여성분이 하던 행동은 사람들이 흔히 연애질이라고 부르는 행동 같은데? 유부남이 막 그래도 되냐?”

“허튼 소리.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야.”

“비즈니스 파트너랑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막 그래? 그건 무슨 비즈니스냐?”

“키스라니. 어디서 모함질이야.”

“모함?”

한해는 핸드폰을 쓱 꺼내들었다.

“확인해볼까? 둘이 키스를 했나 안 했나?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웨이터라도 불러서 물어볼까?”

“이 자식이…… 촬영을 했어?”

흥분한 강이 핸드폰을 뺏으려 했지만 한해는 손쉽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이 맞닿을 듯 강과 마주선 한해의 표정은 자신 있는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용맹해 보였다. 반면 강의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네가 연애질을 하든, 외도를 하든, 심지어 무슨 범죄행각을 벌이던 난 상관 안 해. 하지만…….”

한해는 아예 자신의 이마로 강의 이마를 지그시 누르고 한 음절씩 씹어먹듯 말했다.

“수진이의 남편이란 놈이 형편없이 구는 꼴은 그냥 보고 있지 않을 거야.”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았다. 그러나 분출하면 어떨지 짐작도 안 되는 분노가 응축되어 있었다.

강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형이 배만 타느라 아직 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본데. 심지어 내가 불륜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건 전혀 법으로 처벌받지 않아. 하지만 불법으로 남을 촬영하는 건 범죄야.”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신고해보시지. 나는 어떻게 할까? 언론사에 제보라도 할까? 태화 그룹 2세의 불륜 행각, 불법촬영 논란으로 번져!”

아까부터 부르르 떨고 있던 강의 주먹이 위로 훅 올라왔다가 멈췄다.

한해가 환하게 웃었다.

“이강. 너 정말로 나랑 주먹으로 싸워 이길 수 있을 거 같냐?”

그는 어른이 초등학생을 놀리듯 강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꼬맹아. 뱃사람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모르지? 게다가 이 손은 말이야.”

그는 손을 쓱 들어 올리고는 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만 한 크기의 물고기 창자를 끄집어내는 일만 몇 년을 한 손이라고.”

그때였다. 레이나가 다가와서 끼어들었다.

“누구시죠?”

한해는 그녀를 보며 정중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우리 강이 여자친구 분인가요?”

“뭐라고요?”

“저는 강이하고 어린 시절을 잠깐 같이 보낸 동네 형이에요. 강한해라고 합니다.”

그는 쾌활하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고 레이나는 얼떨결에 악수를 받았다.

“두 분이 워낙 달달한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 같아서 제가 선물을 좀 보냈어요.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와인 바에서 제일 비싼 와인이었는데, 우리 강이 성에는 안 찼나 봅니다.”

“선물은 감사해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리버 오빠…… 강이 오빠가 지금 감정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분 맞죠? 수진 씨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한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레이나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머리 하나만큼 키 차이가 나는 그녀는 고개를 한껏 젖히고 쳐다봐야 했다.

“다시 한번 말해보시죠. 무슨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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