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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23화 (23/92)

“세르반테스.” 23화

사토시가 들어서자 빌딩 경비를 맡은 업체 직원들이 달려와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응. 다들 고생이 많아요.”

그 모습을 보는 한해는 아까 생선구이 식당에서 본 사람과 지금 이 어마어마한 빌딩 주인이 같은 사람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하긴 인생의 정수를 맛보겠다며 원양어선까지 탄 사람인데…….

경비 업체 직원 한 명이 전담으로 안내를 맡아주었고, 한해는 사토시만 이용하는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제일 위층인 41층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최고급 레스토랑들이 모여 있었고 사토시는 ‘세르반테스’라는 이름의 스페인 식당으로 들어섰다.

높이가 41층인 만큼 창가 자리는 빼어난 전망을 자랑했다. 드넓은 레스토랑은 대부분의 테이블이 차 있을 만큼 성업 중이었고 창가 자리는 딱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사토시는 태연하게 그 자리에 앉았고 한해도 맞은편에 앉았다.

수석 셰프가 직접 와서 주문을 받았다. 뉴욕에서도 근무한 경력이 메뉴판에 적혀 있는 스페인 셰프보다 사토시가 더 유창한 영어로 주문했다.

넋을 잃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한해에게 사토시가 설명해주었다.

“이 테이블은 365일 내 전용이야. 아까 우리가 타고 온 엘리베이터와 함께 내가 누리는 특권이지.”

“굉장하네요.”

전 세계 곳곳에 빌딩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사토시의 빌딩에 와본 건 처음이었다.

“이런 건물이 다른 나라에도 있다고요?”

“몇 개 더 있지. 제일 큰 건 상해에 있는 빌딩이고.”

“기업 투자가 전문이신 줄 알았는데…….”

“에셋 파킹이지.”

“에셋 파킹?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에셋 파킹은 자산(Asset)과 주차(Parking)가 합쳐진 말이야. 나 같은 부자들이 주식이나 현금을 안전한 부동산 자산으로 바꿔놓는 거지. 주거용 부동산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어서 나는 이런 상업용 부동산으로 대부분의 재산을 바꿔놨지.”

“아하…… 그렇군요.”

한해는 문득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았다. 나도 에셋 파킹까지 할 정도로 돈을 벌 날이 올까? 그 정도로 나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일까?

그는 주문한 음식과 와인이 나오는 동안 와인 바를 가득 메운 손님들을 구경했다.

잔잔하게 흐르는 보사노바 음악처럼 다들 여유 있어 보였다. 잘 생기고 예쁘고 근사한 옷을 입은 사람들.

아직 내 능력만으로는 이런 곳에서 이런 사람들하고 어울린 순 없어. 풉. 무슨 에셋 파킹씩이나.

쓴웃음이 지어졌다.

와인이 먼저 나왔다. 숙련된 웨이터가 와인을 따라주었고, 커다란 잔에 찰랑이는 와인을 사토시와 함께 건배하고 마셨다.

“맛있네요. 와인은 전혀 모르지만.”

“좋은 와인이지. 자네보다 나이가 더 많은 녀석이야.”

“오늘따라 굉장한 경험을 여럿 하네요.”

“음식도 굉장할걸?”

그의 자신만만한 말처럼 잠시 뒤 나온 요리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와인과도 궁합이 기막혔다.

원목과 유리 자재를 적절하게 섞은 인테리어에 묘하게 어울리는 샹들리에까지. 모든 것이 근사한 공간이었다.

맛과 분위기와 알코올에 촉촉하게 젖고 싶었지만,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사토시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평소에도 그에 대한 호기심은 한가득이었으나 그는 호기심에 대해서도 늘 철통같은 사람이어서 자신이 원하는 질문에만 아주 조금씩 답을 흘려주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달랐다. 비밀의 문을 열어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한해는 약간의 흥분까지 느꼈다.

“선생님. 아까 그 식당 주인 아주머님하고는 어떤 관계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떤 관계처럼 보이던가?”

“그분은…… 남편도 있고 다 큰 아들도 있는 것 같던데요?”

“내 약혼녀였어.”

“어…… 그럼 파혼을 하신 건가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렇다고 해야 할까?”

사토시는 와인을 오랫동안 머금고 있다가 삼켰다.

“그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네는 모르겠지만 80년대는 야만의 시대였어.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일들이 매일 일어났지. 나하고 숙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어.”

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썼지만 그때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간이 찡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우린 같은 마을에서 자랐어. 그때는 강남이라는 말도 없었고 개발도 되기 전이라 논밭에 허허벌판이었지. 사람도 별로 안 살아서 우린 아주 어릴 때부터 동네 오빠 동생으로 가깝게 지냈어.”

그 시절의 사회적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작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오빠 동생의 정서만큼은 한해도 잘 알았다.

“부모님들끼리도 다들 잘 알고 지내셨어. 우리 아버지는 지금 압구정동에서 농사를 짓고 계셨고 숙희네 부모님은 양잠을 하셨으니까.”

“압구정동에서요? 헐. 양잠이 뭔가요?”

“누에고치를 키웠다고.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한 걸음에 달려가서 같이 놀곤 했지. 여름에는 한강에서 수영도 하고 겨울에는 썰매도 타고 연도 날리고…… 지금이야 전부 아파트촌으로 바뀌었지만.”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해는 수진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부모자식 간의 세대 차이가 나는데도 본질은 같았다.

아름다웠던 시절, 아름다웠던 곳에서 아름다웠던 기억을 함께 만들었던 사이.

“강남이 개발되면서 두 집안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어. 농사를 짓느라 땅이 많았던 우리 집은 부자가 되었는데, 땅을 빌려서 누에고치를 치던 숙희네는 다른 동네로 쫓겨났지. 나는 대학을 갔지만 숙희는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작은 회사에 취직했고. 그래도 우리 사이는 달라지지 않았고 결혼까지 약속했지.”

“그런데 뭐가 문제였나요?”

“강남이 개발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일찌감치 부동산 개발사업에 눈을 떴어. 그때는 중동에 건설 붐이 일었고 건설회사에 다니던 나도 중동으로 발령을 받았어. 숙희하고 떨어지는 일은 싫었지만 딱 1년만 큰물에서 경험을 쌓자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사토시가 입술을 꾸욱 물었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원양어선에서 밤새 고된 일로 녹초가 될 때도, 태풍이 몰아쳐 죽음의 공포가 배를 집어삼킬 때도 그는 늘 바위같이 단단한 표정이었는데.

“같은 회사에 다니던 남자가 숙희한테 몹쓸 짓을 저질렀지. 그 일로 임신까지 되어버렸고.”

“아…… 이런…… 엄청 충격받으셨겠어요.”

“무슨 소리. 그때 핸드폰이 있나 인터넷이 있나.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야 알았어. 그때는 이미 속수무책으로 배가 부른 뒤였고.”

“설마…….”

“그런 시절이었어. 야만의 시절이었지. 숙희는 아이를 위해 그 남자와 결혼했고, 그 결과가 자네가 아까 본 광경이지.”

“남편분은 어떻게 되셨어요?”

“매일같이 술을 달고 살았어. 지금 간암이 악화되어 오래 버티지 못할 상황이지. 요즘은 정신도 가물가물하다고.”

“아니 그럼 선생님은 그 긴 세월을…… 그분만 생각하신 건가요?”

“잊으려고 노력했지. 다른 여자도 만나보고. 방탕하게 즐겨도 보고. 미친 듯이 사업과 투자에 몰두해 이런 큰 빌딩도 사고.”

와인 바를 천천히 둘러보는 사토시의 시선은 어딘가 쓸쓸하고 허망했다.

“이 나라가 싫어서 일본에서도 오래 살았어. 일본 여자하고 살림도 차렸지. 내가 참 돈복은 많은 사내라는 말이지.”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머금고 그 시절을 떠올렸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가 일본 경제가 막 추락한 뒤였어.”

“잃어버린 10년?”

“이제는 20년이 넘어버렸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일본 경제가 단숨에 고꾸라지고 장기 불황이 시작된 때였어. 나는 휴짓조각처럼 싸진 일본 부동산과 주식을 손쉽게 살 수 있었지.”

“운이 아니라 감각이지요. 감각이 없으면 운과 위기를 구별하지도 못하니까요.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돈을 버는 사람들은 언제가 싸고 언제가 비싼지 알고, 대부분은 사람들은 그러지 못하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벌면 뭐해. 숙희가 나를 놔주질 않는걸.”

“선생님이 못 놓으신 건 아니고요?”

“허허. 냉정하긴. 그래. 사실은 우리 둘 다 그랬지.”

한해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떠올렸다.

아니다. 우린 달라. 수진은 자신의 가정에 충실하겠다고 했어. 게다가 숙희 아주머니처럼 그런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것도 아니고…….

“매일 연락하고 그랬던 건 아니야. 우리는 각자의 가정에 충실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 그런데…… 운명처럼 마주치고 서로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되더라고.”

그리워하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그런 영화 같은 일들이요?

한해는 속으로 물으면서 마음이 애잔해졌다.

“일본에서 낳은 아이가 성년이 되던 날, 나는 도쿄에 있는 이만한 빌딩을 위자료로 지급하고 이혼했지. 그리고 배를 탔고…….”

“저를 만났군요.”

“응. 마치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은 자네를 말이야.”

“많이 다른데요. 저는 선생님처럼 엄청난 재력이 없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정말 중요한 건 우린 같은 별자리에 속해 있단 거지.”

“같은 별자리? 그게 뭘까요?”

“사람은 말이야. 마치 혈액형처럼 사랑하는 방식이 정해져 있어. 겉보기엔 매번 연애 패턴이 다른 것 같지만 본질은 같아. 우리는 오직 한 사람밖에 보지 못하는 별자리를 타고 태어난 거야.”

이것은 저주일까 축복일까? 한해는 아찔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와인을 머금었다.

“죽을 때까지 그 별자리는 바뀌지 않아. 애써 부인할 순 있겠지만 별자리는 영혼과 관련된 거라서 바뀌진 않아. 자네는 바꿀 수 있을 것 같나?”

한해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내 운명을 인정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어. 그리고 남은 인생은 그녀를 되찾기 위해 바치겠다고 결심했지.”

“그분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사토시의 주름진 눈에 서서히 눈물이 고였다.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

“에이, 선생님이 아까 그러셨잖아요. 이제 겨우 예순이라고. 청춘이라고.”

“나는 그런데…… 숙희는 이미 머리가 굳어가고 있어.”

“머리가…… 어…….”

그제야 한해는 아까 의아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분명히 인사도 하고 소개도 드렸는데, 그를 못 알아보고 다시 누구냐고 물어보았지.

“치매가 시작되었어.”

한해의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까 내가 걸어준 그림 기억나나?”

“네. 풍경화 말씀이시죠? 꽃 그림을 떼고 바꿔 걸어주신.”

“내가 그린 그림이야.”

“그럴 줄 알았습니다. 솜씨가 대단하시던데요?”

“문제는 그게 새 그림이 아니라는 거지. 꽃 그림 전에 걸려 있던 그림인데, 숙희는 기억을 못 해. 처음 보는 그림처럼 감탄하잖아.”

“아…… 그림을 바꿔주시면서 상태를 점검하시는 거군요?”

“아마 다음에 꽃 그림을 갖고 가면 또 처음 보는 그림인 양 해맑게 좋아하겠지. 바보같이…….”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사토시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모든 게 다 내 책임인 것 같아.”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한해는 용기 내어 손을 잡아주었다.

“아니요. 선생님 책임이 아닙니다. 제가 살아보진 못했지만 그때는 불가항력의 시대였잖습니까. 선생님이 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이 없었잖아요.”

“처음부터 내가 중동으로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

“자책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이 어제도 저한테 말씀해주셨잖아요. 실패에 집착하면 또 실패하게 된다고.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다시 시작하라고.”

사토시는 쓸쓸하게 웃었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런 식의 속마음인 것 같았다.

주식 시장은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매일 열리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아. 우리의 삶도 유한하고.

“아직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얼마 안 남아서 더 소중한 시간이요.”

“그녀에겐 남편이 있어. 아들도 있고.”

“남편이라는 작자는 처음부터 몹쓸 짓을 저지르고 일생을 술로 보냈다면서요? 죗값을 받는 겁니다. 그리고 아들은 뭐…… 선생님과 그분의 관계에 전혀 신경 안 쓸 것 같던데요?”

“그렇다 해도 아직 그녀는 법적으로…….”

“선생님. 인간의 바람과 욕망은 종종 법과 배치됩니다. 법의 테두리에서 우리의 바람과 욕망을 충족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때는 선택을 해야죠. 심지어 법과 도덕이 서로 상충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걸로 압니다.”

사토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해했다.

“내가 자네한테 해준 얘기 같기도 하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선생님은 평생 그분의 가정을 지켜주려고 애썼습니다. 본인이 피해자이면서도요! 충분히 하셨어요. 이제 두 분만 생각하세요.”

와인 잔을 쥔 사토시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만약 선생님이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분은 어떻게 될까요? 본인이 치매에 걸렸으면서도 말기 암 환자인 남편 뒷바라지에 망나니 아들한테 시달리며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겁니다. 그걸 보고만 계실 겁니까?”

그 말에 사토시는 뭔가 결심한 듯 잔을 놓았다.

“그건 죄악이지.”

“네. 그러니 그분을 구해주세요. 선생님의 인생도요.”

“자네의 처지를 내가 잘 아는데, 자네한테 이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군.”

“저와는 다르죠. 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리고 수진이는 자신이 더 행복한 쪽으로 선택을 했으니 그녀의 선택을 인정하고 응원해줘야죠.”

“고맙네. 내가 자네한테 이런 가르침을 얻을 줄이야.”

“주제넘었다면 용서하십시오.”

“아니. 그저…….”

사토시는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왔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을 안아주듯 한해를 안았다.

“고맙다, 한해야.”

그는 와인 바를 떠나려고 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숙희한테. 더 늦기 전에.”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집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한해도 따라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사토시가 만류했다.

“여기까지 와서 왜 금방 가? 와인도 실컷 마시고 음식도 더 먹고 분위기도 더 즐기게. 참고로 이 테이블은 말이야.”

그는 남은 말을 귀에 속삭였다.

“아무리 주문을 해도 계산할 필요가 없다네.”

찡긋 윙크를 해주고 바를 떠나는 사토시의 뒤에 대고 한해가 외쳤다.

“행운을 빌게요!”

그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의 뒷모습이 어딘가 힘차 보여 한해는 적지 않게 안심했다.

한해의 가슴은 먹먹한 감정으로 꽉 차버렸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인생유전. 거기에 하나 더 얹어졌다. 같은 별자리.

연거푸 와인을 마셨더니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와인 바를 전체적으로 돌아볼 겸,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자주 이곳에 들르는 고독하고 돈 많은 도시 남자 코스프레를 하며, 사람 구경을 하던 그의 시선이 한곳에 붙들렸다.

강이 있었다. 수진이 아닌 다른 여자와 마주 앉아서.

그럴 수도 있지. 결혼을 했다 해도 다른 여자와 와인 바에서 이야기 정도는 나눌 수 있겠지. 친구일 수도 있고 사업상 파트너일 수도 있으니.

그러나 친구나 사업상 파트너끼리 서로 손을 쓰다듬지는 않잖아? 저토록 서로를 유혹하듯 말이야.

폭풍을 감지한 선원의 얼굴로 그는 강에게 다가갔다. 망설임 없이.

.

.

.

“마음에 들어?”

레이나는 강에게 와인을 따라주며 물었다.

“괜찮네. 음식도 나쁘지 않고.”

강은 와인 잔을 슬슬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일단 넓어서 좋아. 내가 가 본 와인 바 중에서는 제일 넓으니까. 그리고 높은 데 있어서 전망도 탁 트여 있고. 무엇보다 선곡이 마음에 들어. 나른한 재즈힙합 비트가 절묘하게 어울린다니까.”

붉은 와인을 혀와 입술로 한껏 희롱하는 레이나의 모습은 드라큘라를 연상케 했다.

“와이프 다시 보니까 예쁘더라.”

레이나는 어제 파티에서 마주친 수진을 떠올리고 말했다.

“결혼 전에 오빠랑 같이 있는 모습 우연히 봤을 때는 촌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촌년은 맞지. 촌에서 나서 컸으니까.”

“촌년이랑 왜 결혼했는데?”

“자꾸 도망가서. 잡아두려고.”

“헐. 겨우 그런 이유로?”

“레이나. 내가 사업을 하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게 뭔 지 알아? 이 세상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유 따윈 없어.”

강은 주위에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를 손가락으로 쓱 훑으며 말했다.

“얘들 말이야. 겉보기엔 다 비슷해 보이지. 하지만 사정이 다 달라. 이 중에도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해도 근근이 먹고사는 주제에 정말 날 잡고 온 애들이 있을 거야. 다른 사람들 방문 후기도 꼼꼼히 보고 뭘 시키는 게 가성비가 좋을지도 고민하고. 한껏 꾸미고 잔뜩 사진을 찍어서 인스타에 올릴 계획으로.”

그의 말을 증명하듯, 바로 옆 테이블 커플이 최대한 설정샷으로 사진을 찌고 있었다.

“그런 반면 습관처럼 와서는 메뉴에 적힌 가격도 안 보고 대충 시키고는 계산서 금액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카드 내미는 애들도 있을 거고.”

“그렇겠지. 겉으로 구별하긴 쉽지 않겠지만.”

“하지만 여길 나가는 순간 진짜 인생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지지. 어떤 애들은 매달 한숨 나오는 월세를 내는 집으로, 어떤 애들은 부모님이 증여해준 수십억짜리 집으로 돌아가겠지. 어디서 그런 차이가 생길까?‘“운이겠지. 부모 운.”

“맞아. 이유 같은 건 없어. 이 세상은 그냥 그런 거라고. 비정하게도.”

“당신이 운명론자인 줄은 몰랐네.”

“사랑도 그래. 이유 따윈 없어. 그냥…… 마치 운으로 부모가 결정되듯 그냥 정해진 상대에게 빠져버리는 거야. 나에게 제일 잘 어울리거나 유리한 상대를 고르는 게 아니라고.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난 그래.”

“뭐, 그것도 인정. 나만 봐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런 바보 같은 남자한테.”

“풉. 바보 같은 남자 인정.”

“같이 살아보니까 어때? 그토록 갖고 싶은 여자랑?”

강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중얼거렸다.

“지금은 되갚아주는 중이야.”

“무슨 뜻이지? 국어가 아니라 수학 일타강사라.”

“그 긴긴 세월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던 일에 대해 복수해주고 있어.”

“하하하. 리버 오빠 진짜 귀엽다.”

“벌을 다 받고 나면 그다음엔 잘해주려고.”

“그전에 벌 못 받겠다고 도망가면?”

“무슨 수로 도망가? 법적으로 부부인데.”

“이혼 소송을 할 수도 있잖아.”

“우리나라는 귀책 사유가 있는 쪽의 이혼 소송은 불가능해. 바꿔 말하면 나에게 특별한 귀책 사유가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고.”

“리버 오빠가 학대했다고 증거를 대면?”

“내가 바보냐? 법정에서 인정될 정도로 증거를 남길 것 같아? 내가 말한 벌은 그런 벌이 아니야. 그녀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마음을 갉아먹는, 그래서 결국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리는…… 오히려 가해자인 나를 갈구하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방식이지.”

“스톡홀롬 신드롬 같은?”

“납치를 한 건 아니잖아. 우린 합법적인 부부라고.”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와인 잔을 비웠다.

“그럼 나는 어떻게 전략을 세워야 할까?”

“무슨 전략?”

“오빠를 뺏는 전략.”

“바보 같은 소릴. 그냥 이렇게 지내. 친구와 연인 사이 어디쯤에서.”

“오빠가 나 잘 모르는구나. 나도 오빠 못지않게 소유욕 강한 사람이야. 나 오빠 갖기로 결심했어.”

“주변에 멋진 총각들도 많을 텐데 왜 하필 유부남이야?”

“아까 오빠가 말했잖아. 이유 따윈 없다고. 세상은 부조리하고 사랑도 마찬가지야.”

“그래. 부조리하지. 어이가 없을 정도로.”강은 부조리라는 표현을 와인처럼 입안에 굴리면서 한해를 떠올렸다.

한해의 존재 역시 부조리했다.

14년 동안 먼 이국의 바다를 떠돌다가 왜 하필 결혼식 날 나타난 거야? 그리고 왜 주변을 얼쩡거리는 거야? 열 받게…….

그는 한해가 앞에 있는 것처럼 속으로 경고했다.

강한해. 명심해. 네가 계속 주위를 맴돌수록 수진이는 괴로워질 거야.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를 태울 듯 노려보고 있는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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