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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21화 (21/92)

21화

이 순간이 가루처럼 흩날려 사라질까 봐, 한해는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멍하니 눈물짓고 있던 수진이 빙그레 웃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녀의 미소!

한해는 두 배로 더 환하게 웃었다.

“뭐예요.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

“반가워서 그렇지.”

“이 노래 신청한 사람, 혹시 오빠?”

“응. 너도 듣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정말……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그치? 나도 이 밤 너무 신나고 신기해.”

“신나고 신기해…….”

수진이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아까 사연 들어보니까 삼성동에 산다고 하던데, 오빠 이 동네 살아요?”

“응. 너는?”

“난 집이 바로 저기예요.”

수진은 손을 뻗어 단독주택 단지 옆에 홀로 우뚝 솟은 건물을 가리켰다.

한해는 경이로움에 전율했다.

“바로 옆집이었구나.”

“뭐라고요?”

“그 옆집에 내가 살아. 얼마 전까지 계속 불 꺼져 있던 제일 위층에 불 들어온 거 봤는데. 인테리어 공사하는 차도 봤고. 누가 새로 이사 왔구나 싶었는데, 너희 신혼집이었구나.”

“맞아요. 제일 위층. 그 바로 옆이 오빠가 사는 집이라고?”

수진은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가 중얼거렸다.

“옆집에 오빠가 산다…… 하…….”

“그런데 너 왜 자꾸 존댓말 해. 어색하게.”

“거리두기 차원에서.”

“그게 뭔데?”

“나 이제 유부녀잖아요. 오빠도 임자 있는 몸이고.”

“지난번에는 그냥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분명히 해야겠다. 임자 같은 거 없어. 난 그냥 고독한 전업 투자자라고.”

“풉. 내가 사진도 다 봤는데.”

“그거…… 후우…… 같이 배 타던 동료야. 아, 그 친구도 고향이 울진이어서 친해졌어.”

“친한 동료일 뿐이다? 그래서 막 울진에서도 만나고?”

“뭐야…….”

수진은 깨달았다. 바로 이 감정이 질투다. 아까 빈정거리는 남편을 보며 느낀 감정은 질투가 아니라 혐오였다.

또 이런다. 한해 오빠한테 내가 질투를 느끼면 안 되지. 다른 사람하고 결혼까지 해놓고선.

“그 얘기는 그만해요.”

“말 편하게 해. 나 어색하다.”

“좀 더 편해지면 말 놓을게요.”

가로등 아래 마주 보고 선 둘의 그림자가 따스하게 늘어졌다.

“오빠는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에요? 이 밤에? 옷차림 보니 누구 만난 것 같진 않고.”

“아까 라디오 들었잖아. 혼자 좀 걸었어.”

“아 맞다.”

고개를 끄덕이던 수진이 물었다.

“조금 더 걸어도 돼요?”

“지금? 어. 그러자. 오늘은 걷는 날이네.”

수진은 차 문을 잠그고 한해와 나란히 걸었다.

바람이 시원했다. 오늘 밤 이렇게 공기가 상쾌했었나?

고개를 들어보니 서울에서 보기 드물게 별과 달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아까도 이랬나? 나는 왜 하루 종일 좋은 것들은 하나도 느끼지 못했을까?

“너는 이 밤에 어딜 갔다 오는 거야?”

수진은 남편과 싸웠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일이 좀 밀려서. 야근하고 들어오는 길이에요.”

“와, 이렇게 늦게? 그러고 보니 무슨 일 하는지도 안 물어봤네.”

“드라마 기획피디예요.”

“와! 우리 수진이 결국 해냈구나! 대단해!”

한해는 온 얼굴과 들뜬 목소리로 기뻐해주었다.

수진은 먹먹해졌다.

대단하다고…… 대단할 건 없는데…… 그 말이 왜 이렇게 좋지?

“옛날에도 너 소설책 좋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좋아했잖아.”

“다 기억하네요.”

“그럼. 언덕에 앉아서 네가 해준 이야기들도 다 기억하는데.”

그랬구나. 오빠에게 난 특별한 아이였구나. 착각이 아니었구나.

주택가를 걷던 그들은 놀이터로 들어가서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한해는 수진의 일에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요즘은 무슨 드라마 기획하는데?”

“음…….”

수진의 가슴이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기분 좋은 울림. 누군가 진정으로 내 일에 관심을 가져주고 인정해줄 때 느끼는 보람과 위안이었다.

그녀는 야화 작가와 함께 작업하는 아이템의 줄거리를 간단히 들려주었다.

“대본을 다 수정하려면 일도 커지고, 또 나중에 연출자가 붙으면 또 계속 바뀔 테니까 일단 소설로 만들어보기로 했어요. 지금 한창 쓰고 계실 거예요.”

“그거 나오면 꼭 보고 싶다.”

그랬지. 오빠는 늘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지.

“내 얘기 말고 오빠 얘기도 좀 해봐요. 우리 옆집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며 지내요?”

한해는 담담한 목소리로 하루 일과를 들려주었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도.

“짠하다 오빠.”

“뭐가?”

“오빠가 무슨 감정인지 알 것 같아. 어릴 때 너무나도 무력하게 짓밟힌 기억 때문에, 내가 어디까지 부자가 될 수 있는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시험하려는 거잖아요.”

“그런 셈이지. 그렇지 않고선 뭔가 깊이 박혀 있는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어.”

“공포라…….”

“내가 부족해서 사랑하는 사람을 속절없이 잃어야 했던 공포. 너를 포함해서.”

“오빠가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그이가 거짓말을 해서 그렇지.”

“내가 원양어선을 타지 않았다면, 그 정도로 가난하고 절박하지 않았다면 강이가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겠지.”

“왜 자기 탓을 해요?”

“남 탓을 해서는 바뀌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수진은 깨달았다. 이 남자의 영혼은 그 누구도 부술 수 없다. 가난조차도. 거센 파도조차도. 14년이라는 세월조차도.

그토록 짓밟히고 내던져지고도, 한해 오빠는 여전히 강했다. 어릴 때도 오빠는 남 탓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불평불만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럼 만약에 나중에 오빠가 진짜 엄청난 부자가 되고 난 다음에는?”

한해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너를 기다리지.”

밤하늘 저편으로 별똥별이 하나 스치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수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인데 어떡해.”

“나 이미 다른 사람하고, 그것도 강이 오빠하고 결혼해서 살고 있는데 왜 그런 말을 해요?”

“강이하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 나도 인간이니까 인정하기 정말 싫었는데…… 현실은 현실이니까 받아들여야지. 네가 강이의 품에서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내 기다림이 헛되어도 상관없어. 네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오빠…….”

“나도 내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아까 정리를 해봤어. 자, 인생이 서커스라고 생각해봐. 수진이 너는 높은 곳에 매달린 외줄을 타고 있어. 떨어지지 않고 잘 타면 너무 좋겠지. 나도 그걸 바라. 하지만 만에 하나 떨어질 수도 있잖아. 그럴 때…… 나는 너를 안전하게 받쳐줄 저 아래 그물 같은 존재였으면 좋겠어.”

말라 있던 수진의 눈이 또 촉촉해졌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딨어, 오빠.”

“뭐가 바보 같은데?”

“그런 인생은 너무 외롭고 슬프잖아. 그물이라니.”

“뭐가 외로워?”

한해는 그네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너랑 같이 있는데. 이렇게 신나고 근사한데!”

“그러지 마 오빠. 그냥…… 오빠의 행복을 찾아요.”

“이게 내 행복이야. 너를 응원하고, 기다리고, 지켜주는 거. 그러다 보면 오늘 밤처럼 기적적으로 마주치는 날도 생기잖아. 라디오에 사연도 소개되고! 그러니 나 동정하지 마. 부러워하는 건 괜찮아. 허락해줄게.”

“정말 대책 없는 바보구나.”

수진은 연거푸 한숨을 쉬며 아픈 가슴을 달랬다.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21세기 서울에 이런 사람이 있지? 14년이라는 세월 동안 세상의 때가 안 묻어서 가능한 건가?

이 사람은 이렇게 지내고 괜찮다고 행복하다고 하지만, 이래선 안 되는 거잖아.

그녀는 쐐기를 박듯 말했다.

“나 강이 오빠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거야.”

“그래. 그럴 수 있도록 응원할게.”

“그러니까 기다리지 말라고. 라디오에 구질구질한 사연 보내지 말고!”

왠지 속이 상해 화를 내버렸다.

“진수진 너무하네. 그리워하는 것도 안 된다면, 너무 가혹하잖아.”

한해는 푸념하며 다시 그네에 털썩 앉았다.

놀이터에 세워진 시계탑의 시계가 정확히 자정을 가리켰다.

말없이 앉아 있다 보니 수진은 다시 편안해졌다. 아이들 놀이터에서 때 묻은 그네에 나란히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수십 억짜리 집, 수천만 원짜리 소파가 아니어도 충분히 좋았다.

“수진아, 뭐 하나만 솔직히 대답해줄래?”

“네. 물어봐요.”

“너 아까 왜 울고 있었어?”

아아…… 수진은 허를 찔렸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남편이 얼마나 거지같은 짓을 했는지, 결혼식 이후 단 하루도 좋았던 날이 없었다고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선 안 된다. 그건 희망고문을 부추기는 일이 될 테니.

“노래가 너무 슬퍼서.”

그녀의 짧은 대답을 곱씹던 한해가 더욱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그것뿐이지?”

수진은 눈을 통해 거짓말이 들킬까봐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참 이상하네. 그 노래가 슬퍼? 나는 그 노래가 희망차던데.”

“이 오빠 노래 모르는 건 여전하네. 네버엔딩 스토리가 어떻게 희망차게 들려요?”

“그리워하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만나길 비는 노래잖아. 짧은 노래 안에서는 아직 그런 일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노래 속 주인공들은 다시 만났을 거야.”

그는 ‘우리처럼’이라는 말은 생략했다.

“다시 들어볼래?”

한해는 핸드폰으로 부활의 노래를 틀었다.

은하수처럼 아름다운 선율 속에서, 수진은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정말…… 그랬을까?

힘겨운 날에 서로를 지키지 못했던 그들은 정말 다시 만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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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들어갔을 때는 새벽 한 시가 다 되어 있었다.

밖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만큼은 홀가분해야 정상인데 한 걸음 한 걸음 집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은 끔찍해졌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당길 즈음에는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남편은 뭘 하고 있을까? 거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까? TV를 보고 있을까?

차라리 잠들어 있기를 기도했다. 그를 더 미워하지 않게. 오늘 밤이 지나면 미움이 저절로 가라앉고 관계가 회복될 수 있게.

당장 오늘 밤이 문제네. 마주치고 싶지도 않은 사람과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니.

물론 집에는 침실이 여러 개 있었다. 가사도우미 두 분이 청소와 침구 관리를 특급호텔 급으로 유지하기에 오늘 밤 아무 침실에서나 자도 상관이 없을 터.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부부 사이에도 한 번 넘어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선이 몇 개 있는데, 오늘 남편이 그 선을 하나 넘었다.

수면 시간이 너무 다르거나 코를 심하게 골거나 등등의 특별한 문제 때문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혐오 때문에 부부가 각방을 쓴다면 그건 또 다른 선 하나를 넘는 행위일 터.

그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 밤 남편과 살 맞대고 자는 일은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이 악물고 감내하려 했다.

집 안은 고요했다. 불도 꺼져 있었고 그녀의 움직임을 감지한 미등이 켜졌을 뿐.

부부 침실은 안쪽에 완벽하게 분리된 구조여서 수진은 안심하고 거실로 나갔다.

차가운 물 한 잔을 손에 들고 잠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넓디넓은 집 안이 오늘따라 더 낯설다.

‘이 집을 지을 때 콘셉트가 뭐였는지 알아?’남편은 기획부터 설계, 시공까지 직접 관여한 이 집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1%는 거부한다.’처음 수진에게 집을 구경시켜주던 날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상위 1%를 대상으로 한 집 아닌가요?’‘상위 1%로는 부족하다는 거지. 우리가 지향하는 타깃은 1%의 1%. 그러니까 상위 0.01%의 슈퍼 리치였어.

그냥 성공이 아니라 성공 위의 성공, 정말 대단한 성공을 한 사람들만을 위한 집을 지은 거야.’1층부터 펜트하우스 세대까지 모든 세대는 최고급 자재에 최고급 빌트인 가구로 채워졌다. 당연히 입주민들은 그에 걸맞은 최고급 물건들을 들여놓았고. 그 결과가…….

지금 나를 둘러싼 공허함이란 말인가?

수진은 방금 전 한해와 함께 했던 짧은 시간을 떠올렸다.

낡은 그네에 앉아 있었는데도 충만했지. 더 바랄 게 없었지.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거실 통유리창 앞으로 가서 늦은 새벽 잠든 도시를 마주했다.

헛웃음이 나왔다. 오른쪽으로는 레이나의 씩 웃는 얼굴이 전광판에 가득, 왼쪽으로는 한해가 사는 집이 내려다보였다.

잔인하네. 이런 엇갈림이 인생이라면 너무 잔인해.

잔인하기만 했던 하루 중에서 좋은 것들도 있었잖아.

야화 작가님은 늘 엉뚱하고 유쾌해. 그리고 한해 오빠와 마주친 기적은…….

수진은 눈을 질끈 감고 기분 좋은 감정을 잘라냈다.

적어도 이 집에서만큼은 그 사람 생각은 하지 말자. 아무리 나를 괴롭혀도 이 집에서만큼은 남편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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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수진은 조심스럽게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남편은 잠들어 있었다.

이럴 때는 침대가 넓어서 정말 다행이야.

그녀는 남편이 깨지 않도록 가만히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도둑고양인 줄 알았네.”

어둠 속에 강의 목소리가 울렸다. 조금의 졸음도 묻어 있지 않았다.

수진은 팔뚝에 소름이 투두둑 돋았다.

“안 잤어요?”

강은 꼼짝도 하지 않고 말만 했다.

“재미있게 놀다 들어왔어?”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또 수진을 찔렀지만 참았다.

“회사 다녀왔어요.”

“그렇게 뛰쳐나가서 회사를 갔다? 그 말을 믿으라고.”

“믿기 싫으면 믿지 마요. 원하면 회사 컴퓨터 로그인 기록이라도 보내줄게요.”

“괜히 의심해서 오늘 밤을 망친 건 너야.”

“의심? 나는 내 눈으로 본 것만 물어봤을 뿐이에요.”

“그래. 질투란 부끄러운 감정이긴 하지.”

수진은 질끈 눈을 감았다.

“오늘은 이만해요. 우리 둘 다 내일 출근도 하잖아요.”

“하하하. 무슨 대단한 일을 하신다고.”

수진은 주먹을 꾹 쥐었다가 풀었다.

“잘게요.”

몸을 돌려 누운 지 얼마 안 있어서 남편의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타고 넘어왔다. 한 마리 뱀처럼.

“제발. 오늘은 그냥 자요.”

“엇. 지금 부부관계를 거부하는 건가?”

“지금 그럴 기분이에요?”

“아무 이유 없이 부부관계를 거부할 순 없다는 거 알지?”

“이유? 지금 제가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라는 거. 그것보다 더 확실한 이유가 있나요? 부부관계란 상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하지 않는 게 맞죠.”

“아버지가 오매불망 기다리셔. 내가 아무리 멋진 빌딩을 짓고 펀드를 성공시켜도 대를 이을 아들을 빨리 낳지 못하면 난 무능한 녀석 취급을 받을 거라고.”

더욱 깊이 들어오는 그의 손길을 견디지 못하고, 수진은 벌떡 일어났다.

“분명히 말했어요. 오늘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라고.”

“기분? 누구는 기분대로만 살아? 나도 기분대로 했으면 네가 한해 형이랑 노닥거리는 모습을 봤을 때 당장 박살을 냈겠지. 그런데 겨우 기분 때문에 부부관계를 거부해?”

또…… 수진은 남편의 입에서 한해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구토가 올라왔다.

“한 번만 더 건드리면 다른 방에서 잘 거예요.”

“아주 뛰쳐 나가는 게 습관이 되셨네?”

그 순간 수진은 깨달았다. 나 그동안 큰 착각에 빠져 있었구나.

한해가 죽었다는 거짓말이 너무 큰 충격이다 보니 다른 건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의 거짓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결혼 전에 너그럽고 친절했던 그의 태도는 결혼 후에 돌변했다. 아니면 원래 뒤틀릴 대로 뒤틀린 사람인데 진짜 모습을 꽁꽁 숨겨왔던 걸까?

“당신 왜 나를 속였어요?”

수진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뭘 속여? 또 강한해 그 새끼 얘기야?”

“아니. 당신은 늘 내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람 연기를 했잖아. 지금 당신 모습을 봐요.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수진은 정신병자라는 표현을 하려다가 참았다.

“분노만 가득한 사람이잖아.”

“신혼여행 가서 옛 연인과 연락을 주고받고, 심지어 만나서 노닥거리다가 딱 걸린 아내에게 분노조차 할 수 없다?”

“아 제발 그 얘기 좀 그만! 어떻게 된 일인지 다 말했잖아요. 게다가 옛 연인이라니…….”

“그 얘기를 꺼내게 당신이 유도했잖아. 그리고 나의 분노는 모두 당신이 뿌린 씨앗에서 자랐을 뿐이야.”

미치겠다. 이러다가 밤을 꼬박 새우겠어.

수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잠을 청했다.

뒤척이다 맞이한 잠 속에서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그녀는 사슬에 묶여 있었다.

괴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녀 앞에 등장한 사람은 시어머니였다.

“어머니…… 저 좀 풀어주세요…… 제발…….”

그녀는 애원하고 발버둥 쳤지만 시어머니는 뱀의 혀를 날름거릴 뿐.

“흐흐흐. 이 꼴 좀 보라지. 그러게 내가 경고했지? 너도 나처럼 될 테니 동정은 아껴두라고. 널 위해 써야 할 테니. 큭큭큭.”

비웃는 눈은 흰자위 없이 온통 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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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

다음 날 아침, 수진은 비명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불쾌한 악몽은 사라졌지만 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수진은 베드 테이블에 놔둔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남편이 출근했을 시간이었다.

어젯밤에 사무실에 들렀을 때 팀장 책상에 쪽지를 붙어두고 왔다. 야근 수당은 안 올릴 테니 조금 늦게 출근하겠다고. 그래서 알람도 안 맞추고 잠들었더니 이렇게 늦잠을 자버렸네.

정말 수많은 일이 벌어진 어제 하루. 얼마나 피곤했는지 늦잠을 잤는데도 몸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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