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19화 (19/92)

남편이 도발적인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한 몸처럼 붙어 있었다. 19화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연회장으로부터 눈에 띄지 않는 곳, 하필 호텔의 커다란 기둥 뒤의 은밀한 공간. 그들은 숨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진이 연회장에서 나오는 방향이었다면 못 봤을 텐데 하필 뒤늦게 호텔로 들어가다 보니 눈에 띈 것이다.

마치 키스를 마치고 떨어진 것 같은 분위기의 남녀, 그중 남자는 분명히 남편이었다.

“아…….”

외마디 신음이 수진의 반짝이는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발은 바닥에 붙어버리고 몸은 얼어붙었다.

저 여자는 누구지? 왜 저이는 저 여자와…….

여자는 키득거렸고 남편은 담담한 표정으로 여자를 응시한다. 입술과 입술이 한 뼘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서 손까지 잡고 있다.

둘은 뭐라고 대화도 나눴는데 거리도 멀고 수진의 귀는 이미 충격으로 틀어 막힌 상태여서 들리지 않았다.

갖가지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가서 따질까? 지금 뭐하는 거냐고? 아니면 그냥 모른 척 멀찍이 지나갈까? 아니면 둘이 나를 자연스럽게 발견하도록 가까이 지나갈까?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결심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아내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그녀가 얼어붙은 발을 겨우 떼어 다가가려던 순간, 그들이 먼저 연회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수진은 다시 멈춰 서서 둘의 뒷모습을 볼 수밖에.

여자는 남편 곁에 바짝 붙어있는 것으로 모자라 슬쩍 팔짱을 끼기도 했다.

수진의 눈동자는 혼돈으로 일렁였다.

금방 내가 본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둘은 무슨 사이일까?

연회장 앞에서 다다른 둘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팔짱을 풀고 떨어졌다. 그리고 사람들 틈에 섞여 보이지 않았다.

수진은 호텔 로비의 유리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남편의 기분을 좋게 해주겠다고, 약속시간을 옮기고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가 드레스코드까지 맞춰 왔는데…….

기특하고 예뻐 보였던 모습이 한순간에 초라하고 비참해졌다.

그냥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수진은 맥없이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내키지 않은 걸음을 겨우 옮겨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파티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재즈밴드는 대공황 직전의 흥청거리는 미국 상류층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한 듯 옛날 재즈 음악을 흥겹게 연주하고, 다양한 국적의 투자자들은 샴페인 잔을 들고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파티의 주인공, 새롭게 탄생한 리츠 펀드의 기획자 이강이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머리가 희끗한 백인 노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고 아까 곁에 붙어 있던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수진은 두어 번 심호흡을 하고 남편에게 다가갔다.

“저 왔어요.”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발견한 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당신이 어떻게?”

수진은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따지더라도 지금은 아니야. 오늘 밤은 넘기지 않겠지만 이 자리는 아닐 거야.

그녀는 힘을 주어 억지 미소를 머금었다.

“깜짝 선물이랄까요?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녀는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놀라긴 했지만 썩 기뻐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놀랐겠지. 방금 전까지 한 짓이 있는데.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그랬어.”

그랬으면 아까 그 여자와 기둥 뒤에 숨어들지 않았을까?

“깜짝 선물을 얘기해주는 법이 어디 있어요.”

강은 그제야 대화를 나누다 멈춰있는 백인 노부부를 다시 챙겼다.

“아…… 맞다. 내가 소개해줄게. 이번에 우리 펀드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해주신 래퍼티 부부셔. 상업용 부동산 업계의 명가 래퍼티 자산운용 대표님이시기도 하지.”

그는 노부부에게 수진을 소개해주었다.

“미스터 앤 미세스 래퍼티, 디스 이즈 마이 와이프.”

“와우! 하우 럭키 유 아, 미스터 리!”

그들은 수진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며 활짝 웃었다.

수진은 강의 팔짱을 꼈다. 남편의 팔에 아직 다른 여자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아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연회장을 돌았다. 아내로서 할 도리를 다하겠다는 결심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그러나 아까 그 여자와 맞닥뜨리는 순간, 그녀의 평정은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도기 접시처럼 산산조각났다.

“인사해. 이쪽은 레이나. 개인투자자로서는 거액을 투자 약속하신 분이야.”

남편은 딱딱한 말투로 소개했지만 레이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 이분이 우리 이강 회장님 사모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수진은 정중히 목례로 인사했다.

레이나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감탄했다.

“와우. 이렇게 입고 계시니 또 완전 다른 분위기네.”

수많은 대본을 읽고 분석하는 직업을 가진 수진은 레이나의 말 속에 들어있는 힌트를 놓치지 않았다.

또 완전 다르다고?

“예전에 저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응? 아…… 우리 초면인가요? 그렇겠네. 하하. 어쨌든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성함이?”

“저는 진수진이라고 합니다.”

“우리 이강 부회장님의 아내 자리를 꿰찬 행운아가 누군가 했더니 수진 씨였군요. 신혼이라고 들었는데 깨가 쏟아지나요?”

“저희 부부에 대해 아는 게 많으시네요.”

“제가 원래 호기심이 많아서요.”

레이나는 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런 엄청난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사업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서 이것저것 물어봤어요.”

둘 사이의 아슬아슬한 기류를 감지한 강이 끼어들었다. 그는 수진의 손목을 잡았다.

“자, 이제 자리를 옮기지. 소개할 분들이 많으니.”

레이나가 손을 들고 까딱거렸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진수진 씨.”

수진은 차마 인사가 나오지 않았다.

강은 그녀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지만, 돌아보지 않아도 등에 달라붙은 레이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있다. 남편과 그 여자. 그저 펀드 대표와 투자자의 관계는 아니야. 절대로.

내 이름까지 물어봤잖아. 왜?

이상한 점이 또 하나 있었다.

아까는 너무 흥분해서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저 여자 왜 이렇게 낯이 익지? 저 자신만만한 미소와 묘한 눈빛…… 나 분명히 또렷이 기억해. 왜지?

수진은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친한 사이예요?”

“누구?”

“금방. 레이나라는 여자.”

“아, 개인치고는 자금 동원력이 상당한 분이라. 친하게 지내야지.”

이쪽 업계 생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수진은 그것보다는 더 똑똑했다.

“아무리 액수가 크다고 해도…… 사모펀드도 아닌 공모 펀드 운용사 측에서 개인투자자까지 일부러 친하게 지내야 하나요?”

허를 찌르는 질문에 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다 당신한테 설명해줘야 해?”

날카롭게 찌르는 말투가 불편했다.

불과 30분 전에 기둥 뒤에서 당신이 한 짓을 내가 아는데, 이런 경우를 두고 적반하장이라고 하나?

“설명까지 필요한 질문이었나요? 그럼 됐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과민반응할 것까지야.”

그냥 넘어가려다가 수진은 하나만 더 물어보았다.

“제가 저 여자랑 만난 적이 있나요?”

“아닐걸?”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이 익숙하죠?”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아나 보지.”

강은 더 이상 레이나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다.

두 가지는 확실했다.

첫째. 수진이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레이나처럼 화려하게 생긴 사람은 주변에 없었다.

둘째. 오늘 밤은 어쩔 수 없이 집에서 큰 소리가 나겠구나.

.

.

.

“셋째. 여기서 자는 건 절대 안 된다.”

레오는 독서실 총무마냥 작업실 사용규칙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마포 합정동에 위치한 그곳은 방음 시스템을 갖춘 스무 개 남짓한 작업실이 노래방처럼 긴 복도를 따라 늘어선 공동 스튜디오였고, 그중 하나인 레오의 방에 소월이 방문한 참이었다.

흡연 금지, 음료 외 음식물 반입 금지에 이어 취침 금지가 세 번째 룰이었다.

“난 이해가 안 가는데?”

소월은 작업실 구석에 놓인 접이식 침대에 앉아보았다.

“어차피 24시간 사용하는 작업실인데 왜 잠을 자지 말란 거야? 이렇게 버젓이 침대까지 들여놓고선.”

레오가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일단 그건 침대가 아니고 소파 겸용 간이침대고, 자면 안 된다는 건 건강 때문에 그런 거야. 한두 시간 눈 붙이는 건 괜찮지만 여기서 아예 자기 버릇하면 진짜 몸이 안 좋아진다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기 지하라서 공기가 좋지 않아. 호흡기도 안 좋아지고, 게다가 간이침대라 자고 나면 결리는 곳도 생긴다고.”

“우리 레오 오빠, 참 다정도 하셔라.”

소월이 장난을 쳤지만 레오는 단호했다.

“하여튼 지금 얘기한 세 가지는 꼭 지켜줘야 해.”

“알았어. 뭐 내가 지금 쓰는 원룸이나 여기나 수면환경은 큰 차이 없어 보이지만. 큭큭.”

소월은 그녀의 작은 침대에서 한해와 함께 밤을 보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짜릿해졌다.

누추하지만 따뜻하고 낭만적인 순간. 아니다. 누추해서 더 따뜻하고 더 낭만적이었을까?

“무슨 생각해?”

한해 생각을 하다가 들킨 소월은 급히 엉뚱한 화제를 꺼냈다.

“어? 아. 이 근처에 먹을 데는 많이 있나?”

“엄청 많지.”

“나 배고픈데.”

“알았어. 장비만 소개해주고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

그는 작업실 내의 시스템을 간단히 소개해주었다.

“나는 기타를 잘 안 쓰는데 누나는 기타를 많이 쓰니까 나중에 갖다 놔.”

“그래야겠다. 요즘 기타도 막 컴으로 찍고 그러던데 난 기타 성애자로서 영 내키지 않아.”

“피아노 성애자로서 나중에 협연 한번 할까?”

“좋지. 꽤 든든한데 레오?”

“누나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무명 작곡가로 살아보니까 재능보다 근성이 일단 있어야 해.”

“근성하면 이 윤소월 님이지. 태평양과 대서양을 누비며 기른 인터내셔널 근성.”

레오가 깔깔 웃었다. 소월도 따라서 웃다가 간이침대에 누워보았다.

“오오. 이거 개 편한데?”

“아까 세 번째 룰 말했지? 잠은 집에 가서 자는 걸로.”

“잔소리는. 야. 그런데 너 나한테 작업실 빌려주고 넌 집에서 작업해도 괜찮냐?”

“내 방에도 어느 정도는 시스템 만들어놔서 괜찮아.”

“그래도 공짜로 받을 수는 없으니까 여기 임대료 반은 낼게.”

“그게 맘 편하면 그렇게 해.”

“집에서는 작업 잘돼?”

“부모님은 다른데 살고 누나랑 둘이 사는데…… 누나랑 나야 뭐 완전 서로 노터치니까.”

“너 닮았으면 누나 엄청 예쁘시겠다.”

“나랑 하나도 안 닮았어. 안팎으로 완전 반대. 성격도 완전 반대.”

“그래? 궁금하다.”

“아, 우리 누나 되게 유명한 사람이야.”

“누군데? 연예인이야?”

레오는 누나 레이나의 사진을 핸드폰으로 찾아 보여주었다.

.

.

.

아, 저 여자였어?

집에 들어온 수진은 허탈함에 입이 벌어졌다.

거실의 통유리창 오른쪽 끝에 레이나의 얼굴이 걸려 있었다. 멀리 보이는 빌딩 옥외 간판이 그녀 차지였다.

수학 일타의 지존 레이나

광고 문구 아래 안경을 쓴 레이나가 자신만만한 미소 짓고 있다.

아아…… 이건 무슨 인연 혹은 우연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숨어 있는 걸까?

“뭘 그렇게 서 있어.”

등 뒤에서 들리는 남편 목소리에도 수진은 몸을 돌리지 못했다.

“아…… 레이나 씨를 봤구나.”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소파에 앉았다. 리모컨을 들어 TV를 켜고 채널을 경제뉴스 전문 채널로 맞췄다.

수진은 마음을 다잡고 남편 옆에 앉았다.

“당신도 알겠지만 나 그렇게 빙빙 돌려서 말하는 재주가 없어요.”

“잘 알지. 그래서 내가 좀 상처를 많이 받았나.”

“아까 호텔에 갔을 때, 저 여자…… 레이나하고 당신이 붙어 있는 모습을 봤어요.”

무심한 척 연기하던 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여간 친밀해 보이는 사이가 아니던데. 기둥 뒤에 숨어서 키스라도 한 건가요?”

수진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순간, 강은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통쾌함.

남녀관계에서도 늘 승부가 벌어진다. 매일, 매사건, 어쩌면 매순간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갑과 을이 정해진다.

대부분 정서적으로 의존적인 쪽이 패자와 을의 처지가 되기 마련이고, 강과 수진의 관계에 있어서 그건 늘 강의 몫이었다.

그런데 지금 수진이 흔들리고 있다. 나 때문에.

강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수진에게 갖는 갈증은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애착이었다.

그는 늘 수진에게 애착을 갖고 있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강해졌지만, 감정의 흐름은 일방적이기만 했다.

수진은 그에게 애착 관계가 전혀 없었다. 그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나 때문에 기쁘고, 나 때문에 화가 나고, 나 때문에 눈물을 쏟고, 나 때문에 밤을 새우고, 나 때문에 비참해지고…….

넌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잖아?

강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늘 담담한 수진을 보며 패배감에 괴로워했다.

그런데 지금 나 때문에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

이런 식의 통쾌함이 얼마나 왜곡되고 멍청한 감정인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되물었다.

“질투하는 건가?”

“뭐라고요? 지금 그게 할 말이에요?”

“아까 말했잖아. 우리 펀드에 10억이나 투자하기로 한 개인투자자라고.”

“그 정도 돈 아무것도 아니라면서요?”

“기관투자로 보면 푼돈이지만 개인투자자로는 쉽지 않은 금액이라고.”

“그래서 연회 도중에 기둥 뒤에 숨어 키스를 나눌 정도로 친밀해졌다?”

수진은 키스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다만 마치 키스 직후 같았던 분위기가 떠올라 그렇게 말이 나왔다.

그런데 강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까 직접 봐서 느꼈겠지만 레이나는 보통 사람들하고 달라. 무척 도발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제멋대로지. 잠깐 바람을 쐬려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가 그녀가 그렇게 밀착하고 다가왔던 것뿐이야.”

“하! 당신은 가만히 있었는데 그 여자가 혼자 그렇게 들이댔다?”

수진은 화를 내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나 질투하고 있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라고 그녀의 마음이 답했다.

그녀의 분노는 정의 차원에서의 분노였다.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도 뻔뻔하게 큰소리치는 남편에 대한 분노.

아내로서 정당한 권리를 확인하려는 것뿐이지 질투의 감정은 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강은 그녀의 분노를 질투로 해석했다. 왜곡된 감정인 줄도 모른 채 계속 통쾌함을 느꼈다.

“당신이 질투할 만한 사이 아니야. 다시 그럴 일도 없을 거고.”

마치 대단한 선심을 쓰듯 다독여주었다.

“당신이 속상했다면 미안해. 별 거 아닌 일이었지만 앞으로는 내가 더 조심할게.”

수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 어이가 없다고 하나?

“그럼 저건 뭐죠?”

그녀는 거실에서 보이는 레이나의 광고판을 가리켰다.

“이게 다 우연인가요?”

“일타 강사가 강남에 광고판 올리는 일은 흔하디흔한 일이야. 버스 수십 대를 자기 얼굴로 래핑하고 코엑스 빌딩 전면을 광고판으로 쓰는 강사도 있다고.”

“그게 아니라! 당신은 이번 리츠 펀드 투자자로서 레이나라는 여자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 내 느낌엔 그게 아니라는 거죠. 게다가 저 광고판은? 그 여자하고 당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은데?”

“무슨 근거로? 여자의 직감?”

비웃음을 머금은 남편의 태도에 수진은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논리가 아니라 질투에 휘말리면 망상이 생기는 법이야. 냉철한 당신답지 않게 왜 그래? 흐흐흐.”

“웃어요? 웃음이 나와요?”

“날 몰라? 내가 당신한테 어떻게 했어? 당신이 강한해를 못 잊고 나를 밀어내는 동안에도 나는 몇 년 동안 오매불망 당신만 쫓아다녔어.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다른 여자랑 무슨 관계를 맺어?”

그렇게 말하면서 강은 레이나를 처음 만났던 밤을 떠올렸다.

당신이 나를 거절했던 그 날 밤, 나는 이 집에 그녀를 초대했어. 우린 사랑을 나눴지.

배덕감.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을 때 죄책감과 쾌감을 동시에 느끼는 감정.

길티 플레저라고도 하는 중독성 강한 감정에 그는 완전히 휩쓸렸다.

매일 지기만 하던, 매번 을이기만 했던 관계가 역전되었다는 심각한 착각에 통쾌해했다.

그런 남편을 가만히 지켜보던 수진이 고개를 떨궜다.

“내가 당신을 정말 잘 몰랐나 봐. 이렇게 뻔뻔한 사람일 줄은 몰랐어.”

“당신의 망상에 동조하지 않으니, 뻔뻔하다?”

수진은 팔짱을 끼고 걷던 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목도한 광경이었다. 그 여자가 감고 있던 팔에 내가 팔짱을 꼈지. 남편 기를 살려주겠다고 달려가서!

수진은 치밀어오르는 말을 내뱉지 않고 입안에서 잘근잘근 씹었다.

내 눈으로 보고 내 몸으로 느꼈다고! 당신과 그 여자의 관계를!

“으이구. 우리 와이프가 이렇게 질투쟁이인 줄, 나야말로 당신을 잘 몰랐네?”

강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려 했다.

“귀여워. 이리 와봐. 우리…….”

“손대지 말아요!”

수진은 그의 팔을 쳐버렸다. 그 순간 강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너 지금 날 쳤나?”

그 순간 그녀는 남편이 끔찍하게 느껴졌고 그 감정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은 부르르 떨며 일어섰다.

수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고, 핸드폰과 지갑을 챙겼다.

“어디 가?”

신경질적인 남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바깥 공기를 쐬지 않으면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멈춰. 멈춰! 멈추라고 했다!”

남편의 거듭된 말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마.

그녀가 현관 중문 손잡이를 잡는 찰나,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서늘한 목소리가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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