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18화 (18/92)

놀라움 반 반가움 반 섞여 있던 그의 표정이 스르륵 사라졌다. 18화

강은 이번 펀드의 주요 투자기관 중 한 곳의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그쪽에서 먼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나타난 레이나의 존재가 잠시 지금 상황을 잊게 만들었다. 천억이 넘는 펀드의 투자설명회 중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애프터 파티 중이라고 해도 수많은 투자자 앞에서 이렇게 화려한 여자와 안고 있다니.

그녀는 늘 그런 식이었다. 현실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리는 지우개 같은 능력이 있달까.

“보는 사람들 많아. 포옹은 이제 그만.”

강은 레이나를 슬쩍 밀어냈다.

“아니, 여긴 어쩐 일이야? 세계 여행을 떠난다고 했던가?”

“그랬지. 자기가 다른 여자한테 장가간다고 해서. 실연의 아픔을 이겨내려고.”

“이거 왜 이러셔. 누가 들으면 우리 사귄 줄 알겠다.”

“어, 우리 사귄 거 아니었어?”

강의 턱 아래, 그녀는 커다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아래로 뻗은 아찔한 몸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왜 이래, 레이나.”

그는 외면하려 했지만 잠시 추억에 덜미를 잡혔다.

그랬었나? 우리의 관계가, 사귀었다고 할 수도 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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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처음 만난 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수진에게 프러포즈를 했다가 거절당한 날이었으니 잊을 수 없지.

강은 그와 수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유일한 장애물이 한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해만 없으면 수진과 이어질 거라고 확신했다.

정성스럽게, 오랫동안 거짓말의 벽을 쌓아 한해를 가둬버렸다.

처음에는 현실부정 단계에서 허우적대던 수진도 한해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고, 긴긴 세월 자신의 곁을 지켜주던 강에게 마음을 조금씩 내어주기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걸었고, 비가 쏟아지던 초여름 우산 아래에서 팔짱을 끼기 시작했고, 그녀의 생일날 케이크 위로 첫 키스를 했다.

그들은 연인이 되었고, 연인으로서 충분한 세월을 다졌다고 판단하고 감행한 프러포즈였다.

그가 준비한 선물은 회사에서 분양한 집이었다. 호텔로 지어진 건물을 재건축한 최고급 빌라 중 제일 위층 세대를 그녀 앞으로 등기 이전시켜주려고 했다.

고전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스테이크하우스에서 그는 이렇게 프러포즈했다.

“순서가 엉켰는데 네가 풀어줬으면 해. 대답도 듣기 전에, 결혼식도 하기 전에 신혼집을 준비했어. 이 집에서 너의 남편으로 같이 살게 해줄래?”

당연히 승낙받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애매한 미소로 고개를 내저었다.

“어…… 너무 갑작스럽잖아. 난 아직 확신이 없어.”

그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왜? 아직도 한해 형 때문이야? 강한해는 죽었어! 대체 왜?

그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물었다.

“어떤 점에서 확신이 없는데?”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사실에 대해선 확신해. 하지만 주제넘게도…….”

수진은 등기 서류를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세상에. 수십억짜리 집을 프러포즈 선물로…… 이렇게 엄청난 당신을…… 내가 결혼할 만큼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가진 게 많아서 사랑하기 힘들다는 말? 그건 궤변 아닌가? 혹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어떻게든 만들어내려고 하는 말?”

“오빠. 나는 인생을 내 힘으로 만들어나가고 싶어. 나와 함께 인생을 가꾸어나갈 동반자가 있다면 더 좋겠지. 오빠가 오늘 나한테 준 선물을 받아버리면, 내 인생은 그냥 여기서 끝이야. 이 집 하나만 있어도 평생 일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걱정은 없을 테니.”

“그게 왜 나빠? 너 요즘 계속 힘들어했잖아.”

그 시기는 수진이 콘텐츠 기획 피디로서 미래에 대해 회의감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신생 드라마 제작사의 젊은 피디로 입사했지만, 참여하는 프로젝트마다 대본 단계에서 엎어지는 일을 반복해서 겪으며 그게 모두 자기 탓인 양 자책하던 시절.

“어, 맞아. 나 요즘 힘들어. 그렇다고 이런 치트키를 쓰고 싶진 않아. 그건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여기까지 온 내 노력을 비웃는 행위니까.”

“치트키라…… 프러포즈 선물이…….”

미안했던지 그 뒤로도 그녀는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덧붙였다.

“당신은 나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이야. 당신도 잘 알잖아. 나는 그저…… 나일 뿐이지만 당신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수많은 것들을 갖고 태어났어. 당신한테 어울리는 상대와 결혼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나랑 어울리는 상대?”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살아보려고 끙끙대는 애 말고, 좀 더 영리하고 실리적인…… 이런 선물을 위협으로 느끼는 사람보다는 감동받을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 아니면 이 정도 선물은 당연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로 많이 가진 사람이거나. 당신 집안에서도 나보다 훨씬 더 쉽게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지금 그게 위로냐고 따지는 대신 강은 초인적 인내로 미소 지었다.

“바보 같은 소리. 너만큼 나에게 어울리는 상대는 없어.”

어쨌든 프러포즈는 실패했고, 미리 다 꾸며둔 펜트하우스로 가서 그녀와 함께 밤을 보내려 했던 로맨틱한 계획도 어그러졌다.

그는 처절한 고독을 씹기 위해 혼자 그 집으로 향했다. 그가 설계에도 직접 참여했던 집.

영동대교 남단. 대지 2, 600제곱미터에 전용 213제곱미터 면적으로 오직 32가구만 들어서는 최고급 빌라. 그중에서도 제일 위층 펜트하우스.

그날 밤 강이 혼자 지낼 곳이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멈췄고,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금발에 가깝게 염색한 머리가 치렁치렁. 자신만만하게 몸을 드러낸 의상과 아찔한 하이힐. 클럽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이 화려한 메이크업.

한마디로 강이 질색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15층 버튼을 누르고는, 미리 눌려있던 16층 버튼과 강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아하! 16층에 사시는 분?”

그날 밤 강은 그 누구와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

“반가워요. 저는 15층 주민이에요.”

그녀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손가락을 가리키며 웃었다.

“보시다시피. 큭큭.”

강도 애써 미소를 지어주었다. 속으로는 제발 나 좀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빌면서.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두어 번 더 강을 힐긋거렸다.

“엄청 속상한 일 있으시구나?”

선무당 같은 질문에 강은 허를 찔렸다. 그녀가 계속 찔렀다.

“제가 사람들 엄청 많이 만나는 직업을 갖고 있거든요. 혹시 저 모르세요?”

“제가 당신을 왜 알아야 합니까?”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15층에 도착했다.

레이나는 사람을 홀리는 눈웃음으로 그를 잡아끌었다.

“잠깐 내리면 알려드리죠.”

강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를 따라 내렸다. 사람 없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그는 대답을 기다렸다.

“매일 제 얼굴을 볼 테니까요.”

강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봤는데, 어딘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에 자신이 없었다.

“진짜 모르시네. 알려드리고 싶다.”

“어떻게요?”

“안 그래도 저 16층 주민이 대체 누구신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레이나는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제가 펜트하우스를 차지하려고 여기 분양 첫날 아침부터 제일 먼저 연락하고 왔는데, 거긴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제일 먼저 왔는데 누가 펜트하우스를 차지했냐고 제가 막 따졌죠. 끝까지 얘기를 안 해주길래 좀 황당했지만, 여기가 너무 욕심이 나서 바로 아래층을 골랐죠.”

“좋은 집 잘 선택하셨습니다.”

“응? 어…… 혹시…… 이 집 지은 회사 관계자? 설마…… 그럼 태화건설?”

강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이태화 회장님이십니다.”

레이나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대한민국 이래서 안 된다니까.”

“불법은 아닙니다. 분양공고 자체가 펜트하우스를 제외하고 나갔어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처음부터 빠져 있더라고. 자기 회사 아들 몫으로 돌려놨구만.”

“그나저나 이제 설명해주시죠. 제가 왜 당신 얼굴을 알아봐야만 하는 지.”

레이나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제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펜트하우스에 한번 가보고 싶어요. 재벌 2세는 집을 어떻게 해놓고 사나 궁금하기도 하고요. 오늘 좀 즐겨보려고 나갔다가 아주 빡치는 일이 생기는 바람에 되돌아온 터라 술도 한 잔 땡기고. 그리고 당신 집에 들어가는 순간, 당신은 깨달을 거예요. 왜 당신이 날 알 수밖에 없는지.”

평소 같으면 받아들일 리 없는 제안이었다. 아니, 집에 올라가는 중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일도 없었겠지.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강의 마음은 수진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 그리고 이제는 대상조차 사라져버린 덧없는 열등감으로 가득했다.

“그러죠. 그럼. 올라와보시던가.”

“와우! 열 받고 심심하던 차에 이런 돌발 이벤트 너무 좋아!”

그녀는 악수를 청했다.

“제 이름은 레이나예요.”

그렇게 레이나와 함께 집에 들어왔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프러포즈를 받아준 미래의 신부와 함께 들어왔어야 하는데…….

레이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웃겨. 아무리 건설회사 대표 아들이라 해도, 집이 너무 모델하우스 같잖아요.”

그녀는 드넓은 거실을 꾸미고 있는 가구와 예술품을 둘러보았다. 베르사유 궁전에나 달려 있었을 법한 샹들리에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쩜 이렇게 사람 손때가 하나도 안 묻어 있어? 사람이 안사는 집 같아요.”

“잘 보셨네요. 오늘 처음 사람이 들어온 집이니까.”

조금 기분이 나아진 강은 와인셀러에서 샴페인 한 병을 꺼냈다. 원래 함께 마시려고 했던 사람이 처절하게 거부했으니 어쩔 수 없지.

“오늘부터 여기서 지낼까 했는데, 당신이 딱 찾아온 겁니다.”

레이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뭐가 이리 드라마틱해? 나 이런 거 완전, 너무, 진짜 좋아하는데…….”

강은 늘씬하게 빠진 잔에 샴페인을 따라 건네주었다. 자신의 잔에도 따른 후, 건배했다.

“좋은 집에 입주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제가 직접 지어서 얼마나 좋은 지는 잘 알죠.”

“고마워요. 거금을 들여 장만했는데 건축하신 분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안심되네요.”

레이나는 건배하고, 윙크하고, 잔을 비웠다.

“이렇게 술까지 한 잔 했는데, 난 아직 그쪽 이름도 모르네요?”

“레이나 씨가 작은 비밀을 알려주면 저도 정식으로 저를 소개하죠. 대체 제가 레이나 씨를 알아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뭔지.”

“이리 와 봐요.”

레이나는 강의 손을 잡고 거실 통 유리창 앞으로 이끌었다. 왼쪽으로는 한강, 오른쪽으로는 청담동의 야경이 파노라마로 펼쳐져 보였다.

“저기! 보이죠?”

레이나가 가리킨 곳은 청담사거리 건물 옥상에서 빛나는 광고판이었다.

‘수학 일타의 지존 레이나’

광고 문구 아래 안경을 쓴 레이나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은 사진.

“거실 창문으로 매일 보이는데, 절 못 알아볼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오늘이 입주 첫날인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대체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일타의 지존?”

“일타강사는 1등 스타강사의 줄임말이에요.”

“아…… 그러면 학원 강사군요?”

“흠. 그냥 학원 강사가 청담사거리에 개인 전광판 광고를 할 수 있을까요? 한 달 광고비가 천만 원인데.”

보통 사람들이 들으면 혀를 내두를 만한 금액이지만 대기업을 경영하는 강의 입장에서는 별로 감이 오지 않았다.

“하긴 뭐 태화 건설 2세가 보기엔 어차피 다 같은 수학 강사로 보이겠네. 뭐지 이 기분? 약간 자존심 상하면서도 약 오르네?”

강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주었다.

“이강? 이름 멋지다. 저는 리버 오빠라고 부를게요. 강이니까 리버,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오빠.”

“난 내 나이 말한 적 없는데.”

“딱 보면 알지. 그걸 말해줘야 아나? 자, 이제 호구조사는 대충 끝났으니 술이나 마실까요? 음악 좀 틀어 봐요. 아무거나 신나는 걸로.”

“음악? 나 그런 거 잘 모르는데.”

“풉. 이것도 내 스타일이네. 잘 생기고 딱딱한 남자. 얼굴도 이렇게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막말도 잘하고 음악도 많이 알고 분위기도 잘 잡고 이러면 난 좀 거부감 들더라.”

“그런 남자가 주위에 많은가 보네.”

“네. 주변에 남자는 정말 많아요. 다들 어떻게 나랑 한 번…….”

레이나는 말꼬리를 끌며 강 앞으로 다가왔다. 강렬한 중력을 가진 눈을 반짝이며.

“이렇게 나랑 가까워져보기만을 학수고대하는 그런 놈들이 내 주위엔 참 많…….”

강이 한 발 뒤로 물러서자 레이나가 까르르 웃었다.

“아 귀여워! 내가 막 뽀뽀라도 할까 봐?”

강은 어이가 없었다. 뭔가에 홀리듯 어쩌다 보니 아랫집 사는 여자를 집에 들였는데, 이러다간…….

“오해가 있나 본데. 난 그저 궁금했을 뿐이에요.”

“뭐야. 아깐 자연스럽게 말 편하게 하더니, 왜 또 갑자기 존댓말?”

“하여튼…… 샴페인도 한잔했고, 서로 인사도 했으니 이만 내려가.”

“싫은데? 난 지금 이 기분 너무 좋은데?”

그녀는 남아 있던 샴페인을 마저 비웠다.

“나한테 이렇게 거리감 두는 모습도 너무 신선하고 막 섹시하고 그렇다고! 내가 갖고 싶었던 집의 주인을 엘리베이터에서 딱 마주친 우연도 너무 마음에 들어. 리버 오빠는 내가 싫어요?”

강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목을 팔로 감고 입을 맞췄다. 거침없이 전진, 또 전진.

강은 눈을 감고 수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오늘 밤은 네가 먼저 나를 버렸으니 나도 널 버린다.

“음…… 우리 키스도 너무 좋은 거 같지 않아?”

강은 동의하는 대신 물어보았다.

“나 너처럼 금방 확신이 생기고 그런 스타일이 아냐. 다만 오늘 내 기분이 좀 그래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그게 무슨 상관? 지금의 기분이 중요하지. 오빠. 난 뭐가 맞고 틀리고는 관심 없어. 그건 수학문제를 풀 때나 중요하지. 지금의 기분. 그게 삶의 정수라고 생각해. 난 지금…… 더 하고 싶은 기분이야.”

레이나는 자신의 이미지와 딱 맞는 장광설을 쏟아낸 입으로 다시 열렬하게 키스했다.

입은 뜨거운 키스를 주고받고 손은 서로의 감각을 일깨우고, 발은 주춤거리며 침실로 향했다.

그녀를 기다리던 침대에 다른 여자가 누운 모습을 보며 강은 헤아리기 어려운 배덕감에 전율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주사위를 던졌다. 핸드폰을 확인해서 수진에게 메시지가 들어와 있으면 지금이라도 멈추려고 했다. 사과까지 아니더라도, 잘 들어갔냐는 안부 문자라도 와 있기를 바랬지만…….

그녀는 연락이 없었다.

빌어먹을. 늘 이런 식이지. 매 순간 너는 나를…….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셔츠를 벗어던졌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레이나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오오…… 박력 쩔어주시고…… 몸 좋아주시고…….”

“말하지 마. 아무것도.”

갑작스러운 손님에게 다시 키스를 퍼부으며 강은 비애를 느꼈다.

진수진. 보고 있어? 네가 버린 나는 이러고 있어.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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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둘은 몇 차례 더 서로의 집을 오가며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나 강이 다시 그녀를 밀어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결국 그가 원하는 존재는 따로 있었고, 다른 대체물로 공허함을 채울 순 없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레이나에게 거리를 두었고, 그럴수록 레이나는 그녀답지 않게 그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그녀가 질색했을 구태의연한 표현, 이를테면 ‘정식’으로 사귀자는 식의 대시를 그녀가 먼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강은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레이나에게 알렸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지만, 결국 수진과의 결혼이 결정되며 모든 것은 마무리되었다.

그녀는 아예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으로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세계여행으로까지 이어진 길고 긴 방황의 시간 뒤, 다시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태화건설의 새 리더로 그가 발돋움하는 투자설명회 파티에.

“레이나……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옷은 무슨 홍콩의 큰손처럼 입고 말이야.”

“안 내쫓고 반가워해줘서 고맙네.”

강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생각해보니 레이나는 늘 수진과 결정적으로 틀어질 때 등장했다.

그녀에게 복수하고 싶을 때, 못되게 행동하고 싶을 때, 짜잔.

이런 것도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나도 리버 펀드에 투자하려고.”

상장하기로 한 펀드의 정식 명칭은 ‘대한태화 골드리츠’였지만 레이나는 늘 그랬듯 제멋대로 불렀다.

“그래. 믿어줘서 고맙다. 배당 많이 줄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할게.”

“한 10억 정도 넣어두면 괜찮을까?”

강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야. 기관도 아니고 개인이 누가 한 종목에 그렇게 많이 넣어. 1억만 넣고 다른 데 분산 투자해.”

“아냐. 오빠를 사는 기분으로 왕창 살래. 여윳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거침없이 말하는 그녀의 빨간 입술을 보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한 게 없구나. 여전히 사람을 자극하고 뒤흔드는 건…….

레이나는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10억이면 키스 한 번 해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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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에서 내린 수진은 호텔 안으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그녀가 필요한 시간은 설명회 뒤에 이어지는 파티라고 했으니, 많이 늦진 않은 것 같다.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꽤나 마음이 편해졌다.

이 정도 노력이면, 며칠 잔뜩 굳어있던 당신 얼굴이 좀 풀릴까? 나를 할퀴는 오해와 질투의 손톱을 거두어주려나?

최대한 다정하게 옆에 붙어 안주인의 자리를 지켜줄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는 당신 아내니까…….

파티가 열리는 그랜드볼륨으로 부지런히 걸어가던 수진의 발걸음이 일순간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도 과녁에 꽂힌 화살처럼 파르르 멈춰버렸다.

호텔 로비 구석, 기둥 옆 구석진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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