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수진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썼다.
지금 이대로 대화를 끝내버리면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노력해야지. 노력이 필요해.
남편의 태도가 몹시도 불쾌했지만, 최대한 부드럽게 응대해주었다.
“작가가 모레 미국으로 출국해서 오래 있다 온대요.”
“하필 모레 출국이라…….”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며칠만 일찍 얘기해줬어도…….”
“하여튼, 알겠어.”
그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수진은 그의 수저를 뺏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럼 어떻게 하냐고? 당신의 들러리가 되어주기 위해 내 일은 내팽개쳤으면 좋겠어?
아니, 기꺼이 들러리 서 줄 수 있어. 하루만 더 일찍 얘기해줬어도.
하지만 바로 전날에 이렇게 통보해버리는 경우가 어딨어? 당신이야말로 날 무시하고 있잖아? 나야말로 궁금해. 당신에게 내 존재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퍼붓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결과가 너무 참혹할 것 같아 참았다.
대신 이렇게 마무리했다.
“딱 하루만 더 일찍 말해줬어도 약속을 미뤄서라도 당신 곁에 있어줬을 거예요.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일방적으로 통보해버리면 나도 어쩔 수 없잖아요.”
강은 아무 반응이 없이 계속 밥만 먹고 있었다.
당신, 지금 밥이 넘어가요?
수진은 입맛이 싹 달아났다.
*
“와 진짜 맛있다아아!”
소월은 감탄하면서 연신 고기를 집어 먹었다.
“실컷 먹어. 모자라면 또 시켜줄게.”
한해는 집게를 들고 부지런히 고기를 구웠다.
버스를 타고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소월은 한해를 만났고, 첫 마디가 ‘배고파’였다.
“역시 회는 동해안, 고기는 서울 고기야.”
소월은 아무 말 대잔치를 시전하며 헤헤 웃었다.
“맛있네. 나도 여기 처음 와 보는 덴데.”
한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급히 검색해서 고른 한우 식당이었다.
“엄마 아빠한테 자랑했어요. 오빠가 고기를, 그것도 한우를 사준다고. 자기들이 얻어먹는 것도 아니면서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고마운 건 내가 고맙지. 울진에서 대접받은 게 얼만데.”
“그럼 술 한 병 더 시켜도 되죠?”
소월은 호기롭게 소주를 한 병 더 시켜 마셨다.
이른 저녁 날씨는 상쾌했고 한해의 기분도 홀가분했다.
며칠째 1%의 법칙은 적당히 초과달성하고 있다. 아직은 장이 좋아서 가능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하락장이 찾아와도 잘 버틸 자신이 있었다.
“근데 오빠. 집에서도 이렇게 입고 있어요?”
소월은 노타이 슈트 차림의 한해를 보며 물었다.
“응. 일할 때 복장이야.”
“우워어. 진짜 옷을 이렇게 입어서 그런가? 뭔가 막 월스트리트 느낌 나고 그러네. 어차피 집에서 혼자 하는 거잖아?”
“그렇지. 다른 직원은 없지. 나중에 필요할 수도 있지만.”
“그럼 막말로 잠옷 입고 일해도 되잖아.”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긴장감이 달라지니까. 넥타이까지는 몰라도 이 정도는 입어야겠다 싶어서.”
“매끼 메뉴를 찍어서 식단 관리를 하는 거랑 같은 맥락이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이렇게 철저한 사람이 어떻게 그날은 그렇게 술에 떡이 되어 쓰러졌나 몰라.”
“미안.”
“뭐가 미안해. 섭섭하게. 그러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래도 돼.”
“이젠 그럴 일 없을 거야.”
“내가 오늘 딱 그러고 싶은 기분인데. 술도 팍팍 잘 받고. 오빠는 그때 괴로워서 막 마셨지만 난 기분이 좋아서 막 마시고 싶어.”
“그래. 걱정 말고 마셔.”
어느 정도 술기운을 얻은 그녀는 반짝이는 미소와 함께 본론을 꺼냈다.
“오빠. 나도 회사 그만두려고.”
“응? 갑자기?”
“사실 갑자기는 아니지. 오빠도 알잖아. 내가 늘 음악 하고 싶어 했던 거. 자기 꿈을 위해 꿋꿋이 나아가는 오빠도 그렇고, 나하고 예전에 같이 음악 하던 친구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음악을 하는 모습도 그렇고…… 보면서 뭐랄까, 현타가 심하게 왔달까?”
“너 회사에서 촉망받는 항해사잖아.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왜…….”
“맞아. 그냥 배를 타면 별 문제는 없을 거야. 하지만 한번쯤은 안전한 선택이 아니라 정말 내 마음이 가는 쪽으로 선택해보고 싶어. 그게 20대만의 특권일 수도 있잖아. 나이가 들면 더 어려워진다고 하던데…….”
마지막 이유는 말하지 못했다.
오빠랑 떨어져 혼자 바다로 나가기 싫다고.
그런 이유를 댔다간 혼이 날 것 같아서.
“어련히 신중히 생각해봤겠지.”
한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술잔을 들었다.
“소월이의 새로운 인생을 위해 건배!”
건배하는 소월의 마음은 잔 속 소주처럼 찰랑거렸다.
“고마워 오빠. 응원해줘서.”
“노래 나오면 꼭 들려줘.”
“그럼! 그전에 모니터 해줘야지!”
기분 좋게 술을 마시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한해의 표정을 세심히 관찰했다.
누군가를 아주 좋아하게 되면 그 사람의 얼굴 근육을 읽는 법을 배운다.
눈썹이 움직일 때 어떤 감정인지, 턱을 괴는 건 어떤 심리인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인지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결론을 얻어낸다.
술기운이 오른 한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게 어딘가 무의미한 공간에 시선을 둔 채 정지해 있었다.
이 표정은 너무 잘 알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표정이잖아.
아직…… 못 잊은 거야? 이미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여자를?
소월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물어보았다.
“그 여자…… 수진 씨하고 연락은 해?”
“어?”
한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수진이? 걔하고 내가 연락을 왜해. 갑자기 그건 왜?”
“나 사실…… 확실하지 않아서 말은 안 했는데 지난번에 오빠 울진 내려왔을 때, 우연히 수진 씨 본 거 같아서.”
그녀는 바닷가 횟집 앞에서 스치듯 봤던 일을 말해주었다.
한해는 씁쓸하게 웃더니 잔을 비웠다.
“맞을 거야. 그날 낮에 산책 나갔다가 우연히 마주쳤거든. 신혼여행 끝에 남편하고 같이 내려왔더라고.”
“아! 그럼 그때 옆에 있던 분이 남편분인가 보다.”
“그럴 거야. 강이.”
“강? 오빠도 그 사람 잘 알아?”
“뭐…… 조금은.”
한해는 자세한 이야기는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결국 강이 끔찍한 거짓말로 수진이를 속이고 결혼했다는 이야기로 이어질 테니까.
소월 역시 둘의 뒷모습이 다정해 보였다는 말은 삼켰다. 아직 한해의 다친 마음이 충분히 아물지 않은 것 같아서.
그녀는 손등에 턱을 올리고 생글생글 웃었다.
“뭐야…… 그런 귀여운 표정은…….”
“왜? 부담스러워?”
한해는 얼굴 가득 웃었다.
“나 왜 술 취하니까 막 오빠한테 장난치고 싶지?”
“무슨 장난?”
“어…… 나 이따 오빠 사무실 구경하러 가도 돼?”
“사무실? 그거 그냥 집 2층에 마련해놓은 건데.”
“그러니까. 궁금해서.”
한해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곤란해. 그때 말했잖아. 내 집이 아니라 관리해주는 조건으로 들어가 지내는 집이라고.”
“그럼 지금은 오빠 집인 거잖아. 나도 매달 월세 내면서 남의 집에 들어가 살아. 코딱지만 해서 그렇지.”
“난 월세를 안 내. 말 그대로 관리인이야. 내 맘대로 손님을 부르고 이러면…….”
“알았어. 안 쳐들어갈게. 쫄기는.”
소월이 손을 뻗어 한해의 볼을 잡아당겼다.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기가 막혀 웃는 그를 보며, 소월은 안도했다.
잘했어. 이렇게 예쁜 사람을 놔두고 어떻게 몇 달씩 바다에 나가.
수십 미터 아래 출렁이는 파도에도, 멀리 호수처럼 펼쳐진 바다에도, 눈 아프게 파란 하늘에도, 새빨갛게 타오르는 노을 속에도, 별과 달이 반짝이는 밤하늘에도 이 사람이 떠 있을 텐데.
그녀는 볼을 놓아주고 잔을 들었다.
“우리 한 번 더 건배할까?”
“좋지!”
좋은 사람과 함께 있어 참 좋은 밤, 잔을 나누어서 더 좋은 밤이었다.
“분위기 깨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한 가지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
불편해지더라도, 확실하게 정리해야 할 문제였다.
“소월아. 넌 너무나도 소중한 친구이자 동생이야. 예전에 네가 말했던 나에 대한 너의 마음을…… 나는 감히 받을 수가 없어. 이걸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널 다치게 할까 봐 걱정돼. 난 여전히 아직도…….”
“잠깐.”
한해도 단호했지만 소월도 단호하게 그의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오빠는 벌써 전에도 얘기했으니까. 나도 분명히 말했잖아. 알고 있다고.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 그러니 내 행동, 내 감정의 결과는 내가 책임져. 나도 성인이니까 알아서 할게.”
한해는 그녀가 독립된 행동주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내 마음은 너무 좋아. 오빠가 보호자처럼 행세하지 않고 친구처럼 나를 동등하게 대해줬으면 해.”
“그래. 내가 주제넘었나 보다. 미안.”
“그럼 벌주 마셔야지.”
소월은 혀를 쏙 내밀고 한해의 잔을 채웠다.
한해의 마음이 어떤지는 본인 못지않게 소월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그냥 이대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 여기까진 괜찮아.
하지만 자꾸 욕심나는데 어쩌지? 마음이 더 커져서 말을 안 들으면 어떡하지?
*
야화 작가를 만난 건 늦은 오후의 사무실이었다.
원래는 가로수 길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긴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수진의 부탁으로 최대한 시간을 당겼다.
“다음에는 제가 꼭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괜찮아요. 저 먹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야화 작가는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다.
오늘도 그녀는 올블랙 패션. 가까이에서 마주 보니 양쪽 눈동자 색깔이 달랐다.
“어, 오드 아이네요? 렌즈인가요?”
“맞아요. 오드 아이.”
“아…… 제가 괜히 실례한 건가요?”
“아니에요. 자세히 보셔도 돼요.”
야화는 일부러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한쪽 눈은 짙은 갈색, 한쪽 눈은 잿빛이 감도는 푸른색.
가뜩이나 신비로운 그녀의 이미지가 더욱 강렬해 보였다.
“작가님은 뭐랄까, 일관성이 있어요.”
“무슨 의미죠?”
“외모, 목소리, 성격 같은 것들이 글하고 결이 맞달까?”
“제가 좀 싸늘하죠?”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니고 매력적이라는 뜻이에요.”
“특이하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제 얘기는 그만하고, 대본은 어떻던가요?”
“흡입력이 대단했어요.”
수진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장르는 정치스릴러. 간단한 이야기는 이런 식.
극단적으로 불운한 운명으로 태어난 아이가 있다. 신께서는 그에게 최악의 부모와 가난을 멍에로 씌웠지만, 최고의 두뇌와 육체를 선물해주셨다.
보육원에서 자란 그가 이를 악물고 변호사가 되고 정계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스릴 넘치는 암투와 성공담.
“재미있게 봐주셨다니 감사하네요.”
“다만…… 로맨스 터치가 너무 없어서 건조한 느낌이 들어요.”
“지겹지 않나요? 그놈의 로맨스.”
헉.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야화 작가의 일갈에 수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제 말을 오해하신 것 같은데, 로맨스물로 만들자는 얘기는 아니고요. 최소한의 로맨스 터치는 있어야 하지 않나. 양념 차원에서. 그런 얘기였어요.”
“흠. 양념이라…… 저는 워낙 음식에 간을 안 하고 먹는 편이라서요.”
야화 작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했다.
3초 뒤에 웃음이 터지려는 걸 수진은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작가님. 좋아하는 정치 스릴러 드라마는 어떤 게 있을까요?”
“저 ‘비밀의 숲’ 좋아해요. 특히 시즌 원. 드라마로 세 번, 대본으로 네 번, 전부 일곱 번을 봤네요.”
그녀는 갑자기 자기 팔을 쓱 내밀더니 극 중에서 유재명 배우가 했던 대사를 흉내 냈다.
“내 오른팔은 무한증식이야.”
수진은 또 웃음을 참아야 했다.
“어…… 음. 그 드라마만 봐도 최소한의 로맨스 터치는 있잖아요.”
“조승우와 배두나 씨의 관계를 설마 로맨스로 보시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니죠. 하지만 신해선 씨는 분명히 극 안에 달달한 양념을 가미하고 있잖아요.”
가만히 생각하던 야화 작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진수진 피디님 이름에 진이 두 번 들어가서 그런가? 진짜 괜찮은 사람이네.”
“갑자기요?”
“오드 아이는 사람 속을 잘 봐요.”
그랬다. 야화 작가는 황당한 소리를 세상 진지하게 할 줄 아는 귀한 재주가 있었다.
집에서는 답답하지만, 그래도 이 작가님하고 일하는 건 재미있겠어.
“작가님. 오늘 제가 드리고 싶었던 얘기는요. 저희 회사에서 저 말고 팀장님하고 대표님도 대본을 보셨어요. 제가 추천해서요. 다들 재미있어하시는데, 몇 가지 요소들이 더 있었으면 하세요.”
“정중한 거절이군요.”
“아니요! 아니에요. 정말로 저희는 작가님과 계약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로맨스 터치를 포함해서 제가 생각한 몇 가지 보완책을 문서로 전해드릴 테니까 한번 고쳐보시겠어요?”
“계약 전에 수정을 요구하는 거, 나쁜 관행 아닙니까? 신인이시니까 저작권도 신경 쓰이고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절충안으로 이런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수진은 핸드폰으로 책 표지를 보여주었다.
“이 책 이번에 드라마 되는 거 아시죠?”
“그럼요. 뉴스로도 봤어요.”
“야화 작가님도 소설로 먼저 써보는 건 어떠세요? 저작권 보호도 될뿐더러, 수정할 내용을 미리 검증해보는 방법도 되고요.”
야화 작가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작사 측의 의견을 반영해서 소설을 쓰고 저작권은 공동으로 갖자?”
“아니요. 저작권은 전부 작가님 겁니다.”
“피디님 의견도 들어간다면서요?”
“네. 괜찮습니다. 저는 그 작품에 대한 권리는 조금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드라마를 위해 더 나은 방향의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그래서 그걸 원작 삼아 작가님과 계약을 하려고 제안 드리는 겁니다.”
야화 작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이 손해 볼 일이 없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사람 제대로 봤네. 좋은 분 맞네. 이마가 반듯한 사람이 역시 마음도 반듯해.”
이번엔 갑자기 이마 타령? 수진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
.
.
야화 작가와 미팅을 마친 수진은 바쁘게 집으로 향했다.
그녀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야화 작가와의 미팅을 일찍 당기고,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남편이 주최하는 설명회 행사장을 깜짝 방문하는 것.
그녀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었다. 생전 하지 않던 과속을 하고, 늘 수수한 복장을 고수하던 몸에 결혼식 뒤풀이 때 입었던 파티 드레스를 다시 걸치는 노력.
모두 남편을 위해서였다.
평소보다 조금 더 화려한 메이크업과 귀걸이 목걸이를 착용했다. 시댁에서 준 폐물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드레스 룸의 전신거울에 비춰본 모습에 스스로 놀랐다.
영화제 시상식에 가는 배우 의상 같네.
너무 화려한가 싶었지만 이왕 남편 기를 살려주기 위한 이벤트이니 과감해지자 싶었다.
거울에서 물러서려던 순간, 한해가 떠올랐다.
왜 지금? 이 순간은 오빠하고 아무 상관이 없잖아. 그런데 왜 지금 내 눈 앞에 나타난 거야?
아…… 아마도 보여주고 싶었나 봐, 오빠한테. 나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내가 한 선택에 책임지려고, 새로운 인생에 충실하려고 애 쓰고 있다고.
그러니 오빠도 잘 살아. 여자 친구하고 행복하길 빌게. 행복해. 오빠라도…….
그녀는 거울 앞을 떠났다.
이런 옷을 입고 운전을 할 순 없어서 택시를 불렀다.
기다리는 동안 남편 생각만 하려고 애썼다.
맞아요. 나 알아달라고 이렇게 가는 거야. 당신한테 속아서 결혼을 했지만, 어떻게든 당신하고 잘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봐달라고.
당신은 여전히 한해 오빠에 대한 질투로 나를 못살게 굴지만, 그래도 나까지 당신을 못살게 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그러니 우리 그만 화해하자고. 이건 정말 내 최선이라고…….
.
.
.
대한은행과 태화건설이 만났습니다. 리츠 투자의 새로운 리더, 대한태화 골든리츠!
특급호텔 그랜드 볼륨 앞에 붙은 거대한 현수막이었다.
연회장 한쪽에는 재즈 콰르텟이 연주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고, 그 앞으로는 투자설명회 겸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가득 앉아 있었다.
축하 연설을 마친 대한은행 부회장이 꾸벅 인사하자 사람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지금까지 유인석 대한은행 부회장님이셨습니다. 수고하셨고요.”
행사 사회를 맡은 사람은 교양과 예능 프로그램을 넘나드는 인기 아나운서였다.
“자, 그럼 이번에는 대치동 골든빌딩을 멋지게 완공해내신 분이죠. 대한민국 건설업계의 새로운 황태자, 태화그룹 이강 부회장님 모셔보겠습니다!”
앞서 연설을 마친 은행 부회장이 초로의 신사였다면, 뚜벅뚜벅 연단을 향해 걸어가는 강은 너무나도 젊은 청년이었다.
“와우, 우리 부회장님 비주얼이 저를 부끄럽게 만드네요. 직접 광고모델을 하셔도 손색이 없으시겠어요!”
사회자의 너스레에 강은 매너 넘치는 미소로 웃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태화 건설 부회장 이강입니다.”
그가 꾸벅 인사하자 참석자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강은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이번에 출시될 리츠 상품의 성격을 설명하고 투자성공을 확신했다. 비장의 카드가 남아 있었다.
“자. 다 아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짜잔!”
마술사 같은 그의 손짓에 연회장 스크린에 광화문 도심에 우뚝 솟은 빌딩 사진이 떴다.
“올해 말, 우리 골든리츠의 새로운 자산으로 편입시킬 광화문 오메가 빌딩입니다!”
놀란 투자자들이 웅성거리다가 우레와 같은 박수로 깜짝 뉴스를 환영했다.
강은 더 나아가 업계 최고의 배당을 약속하고 연설을 마쳤다.
“자, 이제 돈 얘기는 그만하고 이 아름다운 밤을 즐겨봅시다! 플레이 더 뮤직!”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연회장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재즈 콰르텟이 신나는 연주를 시작했다.
동시에 웨이터들이 쟁반을 들고 출동해 사람들의 손에 샴페인을 쥐여주었다.
투자설명회장은 파티장으로 바뀌었고 분위기는 점점 더 달아올랐다.
강은 연회장을 누비며 주요 투자자들과 친목을 다졌다.
다들 오늘 투자설명회가 정말 끝내줬다고, 원래 계획했던 것보다 투자액을 늘리겠다고 칭찬해주었다.
강은 노련한 비즈니스맨의 매너로 투자자들과 웃고 떠들고 악수하고 사진을 찍고 훗날의 새로운 사업을 도모했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겨우 쉴 타이밍을 찾아 연회장을 살짝 빠져나왔다. 샴페인을 한 번에 비우고 한 잔 더 마시려고 하는데,
“자기 너무 섹시하더라.”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레이나였다. 그녀는 할리우드의 글래머 배우들이나 겨우 입을 법한, 육감적인 보디 라인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드레스 차림이었다.
“레이나?! 아니…… 여긴 무슨 일이야?”
“우리 리버 회장님. 오랜만인데 한번 안아볼까?”레이나가 성큼성큼 다가와 강의 품에 덥석 안겼다.
“으음…… 크리드 어벤투스? 이렇게 상황과 딱 맞는 향수를 뿌릴 줄 아는 남자라니!”
레이나는 그의 품 안에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와이프 님께서 골라주신 거?”
엉겁결에 그녀를 안고 있던 강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