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브레이크에 발을 떼고 천천히 그녀를 향해 차를 몰았다. 15화
창문은 내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 곁으로 천천히 지나가며 얼굴만 확인했다.
역시 맞다. 수진이다.
인연인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진다고 그랬나?
고향에서 그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여기 서울에서도 이렇게 만났다.
창문을 내리고 인사를 할까, 잠시 망설였다.
무슨 일로 여기 왔어? 어디로 가는 길이야? 태워줄까? 가볍게 말을 건네 볼까.
그러나 그는 참아보기로 했다. 고향에서 그녀를 만난 후 결심했으니까. 이제 막 시작된 그녀의 결혼생활을 흔들지 않겠다고.
한 번만 더 운명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다.
곁을 스쳐 지나가면서 백미러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영화의 슬로모션처럼 세상이 느려지는 착각.
그녀는 심플한 줄무늬가 새겨진 흰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편안하게 묶었다.
예쁘네. 뭘 입어도, 머리를 어떻게 해도 예쁘네.
“수진아 안녕.”
한해는 소리 내어 인사했다.
어차피 그녀는 상상도 못 할 테니. 지금 막 옆으로 지나간 벤틀리 세단을 누가 운전하고 있는지.
천천히 뒤로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궁금해졌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삼성동 주택가 골목에는 무슨 일로 온 걸까?
호기심을 겨우 참고 한해는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오랜만에 하는 운동이라 몸이 뻐근했지만, 그는 일부러 더 많은 무게를 들고 더 많은 횟수를 반복하고, 더 빨리 더 오래 달렸다.
아쉬움과 호기심을 연소시키기 위해, 땀에 흠뻑 젖고 숨을 헐떡일 때까지 몸을 혹사시켰다.
두 시간이나 이어진 운동을 마치고 라커룸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저기요.”
뒤돌아보니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필라테스 강사인가 싶을 정도로 잘 관리한 몸의 소유자.
“저를 부르셨습니까?”
“네.”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었다.
“무슨 일로?”
“와우. 운동 정말 열심히 하시던데요.”
“아, 네. 감사합니다.”
“저도 땀을 너무 흘려서 목마른데, 시원한 커피나 한잔하실래요?”
“절…… 아세요?”
“아니요. 전 여기 피트니스에 1년 넘게 다녔는데 처음 뵙는 것 같네요.”
“네. 오늘 처음이에요. 그런데 제가 빨리 가봐야 할 일이 있는데…….”
한해의 반응에 답답한 표정을 짓더니, 여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 그쪽이 되게 마음에 드는데, 어때요?”
한해는 당황해서 잠시 눈을 깜박였다.
“오늘 저 처음 보신다면서요?”
“네. 뭐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운동하는 모습만 봐도 너무 멋있었지만, 사실 아까 주차장에서도 봤어요.”
아…… 그런 차를 타고 다니면 이런 일도 벌어지는구나.
한해는 피식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좋은 사인으로 받아들인 여자도 따라 웃었다.
“바쁘시면 번호만 서로 교환하죠. 나중에 밖에서 봐도 좋으니까요.”
“좋게 봐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 여자 친구가 있어서요.”
한해는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섰다.
표정이 일그러진 여자를 뒤로 한 채 라커룸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절대로 좋지 않았다. 그저 쓸쓸했다.
여자 친구가 있다고? 퓨우…… 샤워나 하자.
*
“오랜만이네요.”
의사는 편안한 음성으로 인사했다.
음악도 소음도 없는 정신과의원 진료실이라서 원래 명료한 그의 목소리는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책상 맞은편에 앉은 수진은 처음이라 긴장했던 지난번보다 한결 편안했다.
“저야 뭐 늘 똑같죠. 환자들 진료하고. 신혼여행은 어땠나요?”
수진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보통은 이렇게 대답하겠지? 너무 좋았죠. 푹 쉬다가 왔죠. 또 가고 싶네요. 등등.
그러나 난 그렇게 쉽게 말해버리지 못하겠어.
“흠. 이런저런 생각이 많으셨군요. 그러니까 여길 다시 찾아오셨겠죠.”
“차라리 종교를 가져볼걸 그랬나요? 선생님이 보시기도 제가 좀 한심하죠? 이런 데 와서 사랑 타령을 하다니.”
“한심하다니요. 마음이 괴롭다면 그게 곧 병입니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하잖아요. 혼자 끙끙 앓는 것보다 훨씬 낫죠. 제가 대단한 해답을 드리지 못한다 해도 말이에요. 그저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아질 수 있다면 그걸로 제 역할은 충분합니다.”
“결혼식 날, 엄청난 일이 있었어요.”
수진은 결혼식에 한해가 나타난 일부터 시작했다. 뒤늦게 알게 된 남편의 거짓말, 그리고 한해와의 우연한 마주침, 그 후 남편과의 냉담까지 가감 없이 전했다.
괴이할 정도로 왜곡되어 있는, 극도의 가부장주의 시댁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다 들은 의사는 양손을 느슨하게 깍지 꼈다.
“정말 힘드셨겠네요.”
수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중얼거렸다.
“더 힘들게 사는 분들도 있는데요.”
“이를테면?”
“가정폭력이 있거나, 배우자가 외도를 일삼거나, 그런데도 참고 결혼생활을 버티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지금 수진 씨의 그 말에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묻어 있습니다.”
“무슨 뜻이죠?”
“두 가지 심리가 엿보이는데요, 차례로 말씀드려보죠. 먼저 수진 씨가 예를 든 상황들은 법적인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수진 씨는 그런 상황에서도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고 있네요.”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수진 씨가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일이 크게 작용하나 봅니다. 어떻게든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라고 할까요?”
“그렇지…… 않나요?”
“결혼의 의미, 부부의 의미, 가정의 의미,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의 의미…… 절대적이라고 여겨지는 개념은 의외로 시대에 따라 휙휙 바뀌어 왔고 지금도 바뀌고 있습니다.”
의사는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수진 씨가 태어난 시대만 해도 여자는 서른 되기 전에 시집을 못 가면 망한 인생이라고들 했어요.”
“네에?”
“현실을 부정할 수는 있지만 과거를 부정할 순 없죠. 역사에 새겨져 있으니까요. 그 시절 뉴스나 드라마를 찾아보세요.
그 시대에는 결혼해서 두어 명의 아이를 낳는 4인 가족이 이른바 정상인 시대였고 그렇게 살지 못하면 요즘 말로 루저 취급을 받았죠. 그러나 불과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편적인 가정 형태는 1인 가정이에요. 혼자 사는 가구가 가장 많아요.”
“그 정도로 많나요?”
“1인 가구 비중이 무려 30%예요. 더 늘어나고 있죠. 혼인율과 출산율은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죠. 이 속도로 10년쯤 지나면 비혼이 결혼보다 더 보편적인 삶의 방식이 될 겁니다. 이미 아이 둘만 있어도 키우기 힘들겠다고 하는 시대가 왔어요. 왜 결혼을 안 했느냐는 질문보다 왜 결혼을 했냐고 물어보는 시대가 오고 있는 거죠.”
“저도 꼭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그건…… 한해라는 남자분과 결혼할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어차피 한해 오빠가 아니라면 내 인생은 의미가 없기에 결혼도 생각해보지 않은?”
수진은 움찔했다.
“어쨌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으니 수진 씨는 어떻게든 그 결혼을 지켜내고 싶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강박에 괴로워하는 겁니다.”
“가정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강박인가요?”
“정말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면 당연히 강박이 아니지만…… 속마음은 이 결혼 물렀으면 좋겠는데, 이성으로 마음을 부정한다면 강박이죠. 혹시, 그렇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수진의 언성이 높아졌다.
“저는 이 결혼 무르고 싶지 않아요!”
의사는 그녀의 눈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시선을 돌렸다.
“제가 수진 씨를 너무 몰아부쳤나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고 싶었지만 진료실 커튼은 닫혀 있었다.
의사는 달래듯 말했다.
“아까 저한테 결혼식 이후의 일들을 전해주는 수진 씨의 얼굴이 밝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딱 한 번 빛이 돌아온 때가 있었는데, 한해 씨 이야기를 할 때였어요. 그때만 눈과 입이 웃었어요.”
그랬구나. 나도 모르게…….
“이제 갓 결혼한 수진 씨에게 이혼을 들먹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의사의 본분도 아니고요. 다만, 남편분의 심각한 거짓으로 인해 수진 씨는 속아서 결혼했고, 거기에 분노를 느끼면서 동시에 가정을 지키려는…… 심리적으로 매우 힘겨운 상황에 놓여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네. 힘들어요. 많이.”
수진이 항복 선언을 하듯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려고 했다.
“가정을 꾸리고 지키는 일이 개인의 행복보다 우선시 되던 시대가 분명히 있었지요. 원치 않는 남자와 결혼하고, 이혼하고 싶어도 아이를 봐서 참고, 속으면서도 참고, 냉대 받으면서도 참고, 미친 시댁도 참고, 불행해도 참고, 심지어 맞으면서도 참고…….”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저물었어요. 이제는 개인의 행복도 결혼만큼 중요한 시대예요.”
“네. 맞습니다.”
수진도 이미 수치로 증명되는 시대의 흐름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모님이 그렇게 된 건 결코 수진 씨의 잘못이 아닙니다. 절대로. 수진 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결국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얼마나 많은 밤을 자책했던가?
내가 아빠를 말렸더라면? 엄마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면? 그랬다면 두 분은 돌아가지 않으셨을 텐데.
남의 집에 얹혀 살면서 얼마나 꿈꿨던가?
비록 부모님은 태풍에 휩쓸려 가정이 산산조각 났지만, 나는 그 무엇으로도 깰 수 없는 가정을 이루겠다고. 내 아이는 반드시 지켜주겠다고.
“부디 오늘 제 말씀이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네 선생님. 많이 편안해졌어요. 하지만…….”
수진은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그래도 내가 한 선택이니 책임지겠어요. 결혼생활에 최선을 다해보려고요.”
의사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저 역시 결혼과 가정의 가치를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언제든 견디기 힘든 마음을 털어놓고 싶으실 때면 찾아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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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나온 수진이 향한 곳은 일터였다.
상암동의 드라마 제작사 사무실.
“오오, 진피 왔어?”
팀장은 수진의 성에 피디의 앞글자를 붙여 진피라고 그녀를 부르곤 했다.
“사표 내러 왔냐?”
짓궂은 정도가 지나친 편인 팀장이지만, 몇 년간 수진이 봐온 결과, 악의가 없고 의리는 가득한 인간이라는 결론!
“왜요? 사표 안 내면 저 자르시게요?”
“재벌 2세 사모님이 이런 누추한 데 출근하는 거 나도 부담스러우니깐.”
“누추하지 않게 우리도 대박 한번 내봅시다.”
그녀가 다니는 제작사는 이른바 메이저 작가나 배우 에이전시와 연이 없었다.
대본을 개발하는 기획팀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나중에 제작 단계에서는 규모가 있는 다른 제작사와 공동제작을 하는 방식으로 서너 편의 드라마를 찍은 신생 제작사였다.
직원이라고 해봤자 기획 피디인 수진을 비롯해 일곱 명의 피디와 두 명의 팀장, 그리고 대표까지 열 명이 전부였다.
같이 일하는 작가들도 대부분 신인이거나 갓 데뷔한 정도.
그래서 작가와 아이템을 발굴하고 개발하는 수진의 역할이 중요했다.
“우리 회사가 누추해지지 않으려면 가장 필요한 게 뭘까?”
팀장은 아예 머그잔을 들고 수진의 자리 앞에 앉았다.
“제가 잘해야겠죠? 기깔나는 책을 뽑아야겠죠. 그걸로 투자금 땡기고, 캐스팅 빵빵하게 엮고, A급 피디 붙여서 팍팍팍! 아닌가요?”
“정답. 거기에 한 가지 더 얹자면…….”
팀장은 음음, 목을 가다듬고 넌지시 물었다.
“그…… 태화 그룹에서 며느리가 일하는 회사 작품에 투자도 좀 해주고 그러겠지?”
“아오! 팀장님! 공과 사는 제발 좀…….”
오랜만에 만난 팀장과 티격태격하던 수진이 입을 다물었다.
회사 사람 아닌 이방인이 사무실로 들어와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새카만 흑발을 늘어뜨린 그녀. 메이크업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베일 듯 높은 콧날과 빨간 입술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마른 몸에 블랙 원피스를 입었는데, 신발은 스니커즈에 백팩을 맸다. 그리고 앞머리는 로커처럼 늘어뜨려 눈을 슬쩍 가려 신비로운 인상을 풍겼다.
배우? 작가? 경력직 피디 지망? 짐작이 안 되네.
팀장도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웃음기를 거두고 여자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제가 쓴 대본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작가였구나.
요즘은 제작사 이메일로 대본을 보내는 게 일반적인데, 여자는 굳이 제본까지 한 책을 백팩에서 꺼냈다.
“아…… 저희는 이메일로 대본을 받아서요. 저희 홈페이지를 보면 신인 작가 투고하는 이메일이 표시되어 있으니 거기로 대본을 보내주시죠.”
팀장이 웃는 얼굴로 여자를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여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니요. 제가 책을 놓고 갈 테니까, 책으로 보셨으면 해요.”
너무나도 단호한 태도에 팀장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저는 신인 작가는 아니고요.”
여자는 제본된 대본과 함께 명함을 건네주었다.
“네…… 알겠습니다. 잘 읽어보겠습니다.”
“열 페이지만 읽어보시면 그 뒤로는 멈추지 못하실 거예요.”
여자는 자신만만한 말을 하고는 팀장 뒤에 앉아 있던 수진과 눈이 마주쳤다.
수진도 얼떨결에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작가님.”
그녀는 천천히 허리 굽혀 인사하고는 뒤돌아 사무실을 나갔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 팀장이 대본과 명함을 건네주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아오. 니가 읽어 봐라. 난 저렇게 막무가내인 신인 딱 질색이니까.”
“왜요. 비주얼은 아주 강렬하고 좋은데. 작품도 비주얼 같다면 좋겠네.”
수진은 명함을 확인했다.
작가 야화. 010-****-****.
명함에 있는 글자라고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전부였다.
야화? 무슨 뜻이지?
천일야화(千一夜話)에서 따온 건가? 아니면 들꽃이라는 뜻의 야화(野花)? 혹시 밤에 피는 꽃이라는 뜻의 야화(夜花, night flower)?
어쨌든 이름은 외모하고 어울리네. 작품도 그랬으면.
“그럼 제가 읽어볼게요.”
수진은 대본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그녀는 야화 작가의 호언장담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와…… 대단해…….”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분명히 지금 이대로 촬영에 들어갈 수는 없는, 원작 수준의 거친 대본이지만 스토리의 힘이 강력해서 읽다가 멈출 수 없는 건 확실했다.
“진피! 밥 먹으러 가자. 복귀 기념으로 오빠가 점심 쏜다.”
다른 피디들과 함께 자리로 온 팀장의 점심 제안을 거절할 정도였다.
“잘생긴 팀장님. 저 이거 마저 봐야 하니까 식사하고 오시는 길에 김밥이나 샌드위치 좀 부탁해요.”
수진의 말에 팀장이 눈썹을 갈매기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의 개인기이기도 했다.
“얘가 또 오자마자 오버하네. 너 이렇게 열심히 살 필요 없잖아.”
“열심히 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수진은 읽고 있던 야화 작가의 대본 표지를 들어 보였다.
“책이 재밌어서 그런다고요오!”
*
“나 회사 그만두려고.”
소월의 말에 레오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든 손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꾸었다.
“갑자기?”
“아무래도…… 갑자기라고 해야겠지?”
“이유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 두 명 있어. 먼저 한해 오빠. 그 오빠가 회사를 그만뒀거든.”
“헐. 그래서 따라서 그만둔다? 한해라는 사람 놓고 바다에 나가기 싫어서?”
“그런 이유도 반 있지만 나머지 반은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니…… 그 말에 이렇게 설레어버리는 나란 놈…….
“나한테 시집이라도 오려고?”
“풉. 그게 아니고, 너보고 반성했거든. 넌 어쨌든 계속 음악을 하잖아. 아이돌 그룹 멤버가 되는 데도 실패했고, 기획사에서도 나왔고, 혼자 곡 쓰고 노래하면서 몇 년째 내놓는 노래들도 반응이…….”
“워워워. 잠깐만. 지금 이거 칭찬이야 욕이야?”
“한국말 끝까지 들어라. 어쨌든 넌 네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하고 있잖아. 플랜 B로 쉽게 가지 않고.”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거…… 여전히 음악이야?”
“응.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래. 나도 곡 쓰고 노래하고 싶어. 그게 제일 하고 싶은 일이야.”
레오는 주먹을 쥐고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로 기뻤다.
언제였지? 작년 겨울, 엄청 추운 날이었는데.
서촌의 등갈비 식당에서 오후부터 낮술을 마신 날이었을 거야.
누나랑 둘이 낮술을 마시는 일은 처음이라,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꾸역꾸역 따라 먹었지.
그런데도 좋았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누나가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
술기운이 오른 그는 제안인지 부탁인지 애매한 말을 했더랬다.
“누나. 같이 음악 하자. 뱃사람으로서 누나의 모습도 너무 멋있지만, 그게 누나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야? 응?”
그때 레오는 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소월의 동공을.
소월은 무지 화를 냈다.
“나 지금 우리 회사에서 얼마나 촉망받는 항해산데! 네가 뭘 알아? 너나 실컷 해라. 되지도 않는 음악.”
악담까지 했지만 레오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소월의 마음에 음악을 향한 불씨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 불씨가 튼실한 불길로 타오른 것이다!
“생각 잘했어, 누나.”
“고맙다. 금방 회사에 전화로는 얘기했는데, 본사에 들러야 해.”
“그럼 서울 올라오겠네?”
“응. 이따 버스로 올라갈 거야.”
“오늘 볼까?”
“어…….”
레오는 소월이 망설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한해라는 사람 때문에 그렇지? 아직 그 사람하고 약속은 안 잡았지만 혹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지금 나하고 약속 잡아놓기는 곤란한 거지?
그래도 괜찮아. 왜냐하면 언젠가는…….
“이따 봐서 연락해 누나. 나 작업실에 계속 있을 거니까 아무 때나 편하게.”
“어, 그럴게.”
그 사람을 만나지 않는 시간에 날 만나줘도…… 난 괜찮아. 바보 같지만 괜찮아.
“당장 작업실 필요하면 내가 빌려줄게.”
“그래도 돼?”
“응. 난 집에도 간단하게 작업할 수 있게 해놨으니까.”
“감동이네. 휴우. 알 되겠지? 나 몇 년 동안 기타나 치고 깨작거려서 제대로 곡을 완성해 본 적이 없네. 미디도 많이 잊어먹었다.”
“누나 프로그램은 뭐 써? 로직? 프로툴? 큐베이스? 작업실에 깔려 있는 거 써도 되는데 어차피 나중에 누나가 작업실 따로 만들려면 누나 쓰기 편한 게 좋잖아. 컴 하나 새로 세팅하지 뭐.”
“헐…… 너 왜 이렇게 잘해주고 그래?”침묵의 순간 하나, 둘, 셋.
“좋아하니까.”
말해버렸다. 계획했던 건 아닌데 질러버렸다.
하…… 소월의 들릴까 말까 한숨 뒤, 레오는 쐐기를 박았다.
“내가 윤소월 너 좋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