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소월이 꽤 큰 소리로 불렀지만 여자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근처 횟집에서 나온 남자에게 다가가더니 함께 멀어졌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소월은 중얼거릴 수밖에.
“어…… 혹시 수진 씨?”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짐작을 해보았다.
만약 수진 씨가 맞다면 옆의 남자는 남편이겠지? 얼핏 보긴 했지만 한해 오빠 못지않은 비주얼일세.
소월은 막 달려가서 둘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런 무례한 짓을 할 순 없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한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 그냥…….”
어느새 두 남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냥 멍 때리고 있었어요.”
“너도 그럴 때가 있어? 늘 뭔가에 집중하는 모습만 봤는데. 항해할 때고 그렇고 육지에서도 그렇고.”
“오빠랑 있으니까 마음이 편해지나 봐.”
소월은 슬그머니 한해에게 팔짱을 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진 남녀를 떠올리며.
“우리 밤바다 좀 걸을까요?”
“좋지. 술도 깰 겸.”
한해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별빛도 반짝이고 먼바다에 나가 있는 고깃배의 불빛도 쨍했지만, 오늘 밤 가장 밝은 빛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등대 불빛이었다.
아까 수진과 함께 걷다가 켜지는 순간을 목격했던 그 등대.
한해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에 찰싹 붙은 소월이 제목을 알 수 없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 밤, 평온하다. 달콤하다. 따스하다. 그 무엇보다, 적당하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긴긴 세월 이 악물고 올라와 다시 찾은 밤.
앞으로의 인생도 오늘 밤처럼 적당히 평온하고 달콤하고 따스하다면,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내가 금지된 것을 소망하지만 않는다면.
그래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데…….
*
“당신에게 여긴 어떤 곳이에요?”
어둠 속에서 질문을 받았을 때 강은 감추고 있던 비밀을 들킨 소년 같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당신에게는 어떤 곳인데?”
“저한테야 애증이 교차하는 곳이죠. 고향이고, 어릴 때 좋은 기억들도 있지만…… 결국 부모님을 모두 빼앗아간 죽음의 고장이기도 하고.”
“나를 만난 곳이기도 하잖아?”
“응. 맞아. 그건 좋은 기억에 들어가죠. 남편을 만난 곳이니.”
좋은 기억에 들어간다…… 들어간다…….
강은 아내의 표현을 언어학자처럼 곱씹었다.
들어간다는 표현인즉슨, 여러 가지 좋은 기억 중 하나라는 말이지?
남편을 만난 일이 그저 여러 가지 사건 중 하나다?
그래. 너에겐 그렇겠지. 너에겐 오직 한해 형이…….
또다시 치미는 분노가 자신을 집어삼키기 전에, 마치 압력밥솥이 터지기 전에 증기를 분출하듯 강은 입을 열었다.
“시간은 공평하지만 기억은 공평하지 않지.”
“무슨 뜻이에요?”
“우리가 겪은 일들은 분명히 같은 속도로 흐르는 시간 속에 잠겨 있지. 그중에서 어떤 일들은 기억의 부력에 의해 끊임없이 떠오르는 반면, 어떤 일들은 그냥 잠겨버리거나 흘러가버려서 형체도 없이 사라져.”
“응. 맞는 말.”
“나에겐 이곳이 그런 의미야. 기껏해야 사계절이었지만,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작은 조각이겠지만…… 내 기억을 지배하는 시기이고 그 기억을 담은 장소야. 이 바닷가는.”
“그 정도였어요? 난 당신한테는 그냥 어릴 때 스쳐 지나간 곳 정도인 줄 알았는데.”
“사춘기의 터널이 관통했던 지점이었고…….”
강은 어금니로 침묵을 지그시 물었다가 놓았다.
“첫사랑이자 일생의 사랑을 만난 곳이기도 하지.”
신혼여행의 마지막 밤, 부부는 달빛과 별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누워 있었다.
일류 호텔이 아닌 숙소여서 창호의 방음 능력이 떨어졌는데, 덕분에 파도 소리도 별빛 달빛처럼 스며들어왔다.
첫사랑이자 일생의 사랑.
수진은 잠들기 전에 냉랭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별생각 없이 던졌던 질문에 이토록 무겁고 묵직하고 단호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그녀는 대화를 좀 더 이어가려고 했지만, 강은 스르륵 돌아누웠다.
“잘 자.”
커다란 등이 마치 방패처럼 느껴졌다. 수진은 미안한 동시에 억울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애초부터 당신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 긴긴 세월 동안 나를 속이고 멀쩡한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놓지 않았다면 이 모든…….
수진은 다시 시작되려 하는 원망의 쳇바퀴를 움켜잡았다.
그만.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어버렸잖아.
어제는 잊자. 오늘을 생각하고 내일만 생각하자.
그녀는 억울함을 누르고, 어떻게든 남편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담아 말했다.
“당신도 잘 자요.”
.
.
.
오래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강은 전학 와서 수진을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첫눈에 반했다는 표현 외에는 그 열띤 감정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수진이는 잘 웃고 친절한 아이였다. 그래서 그는 오해했다. 그녀 역시 같은 감정이라고.
누군가를 본능적으로 좋아하고, 그 마음이 받아들여진다는 것. 더 나아가 그 대상 역시 나를 좋아해준다는…… 그 자연스러운 교감이 강에게는 기적이었다.
자연스러운 교감의 첫 대상인 부모가 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니까.
아버지는 괴물이었고 어머니는 시체였다. 어린 강이 느끼는 부모의 이미지는 딱 그랬고, 괴물이나 시체와 교감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사업이 위기에 몰리며 잠시 쫓겨 내려온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강에게는 숨 쉴 틈이 생긴 해방구나 마찬가지였다.
세계 금융위기 때문에 생긴 유동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아버지는 서울과 미국을 오갔고, 일부러 파산시켜 놓은 회사 때문에 채권자들을 피해 가족은 낯선 곳에 피신시켜 놓은 것이었다.
그 덕에 강은 아버지의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잠시 풀려날 수 있었다.
바로 그 시절에 나타난 수진은 단순한 첫사랑을 넘어 자유와 평화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수진이는 오직 한해만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강한해…… 강은 그를 볼 때마다 괴로웠다.
‘형. 수진이가 아니었다면 형한테 경쟁심 따위 느끼지 않았을 거야. 아무리 잘나봤자 바닷가 마을 선장 아들에 불과하니까.’그러나 수진이의 시선이 늘 한해를 향해 있는 한, 그는 그저 시골뜨기 소년이 아니었다. 넘어서야 할 대상이었다.
그를 넘어서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운동도, 게임도, 공부도,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강은 모든 면에서 자신이 한해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딱 한 가지 수영만큼은 한해가 더 잘했다. 강은 수영도 지기 싫어서 종종 한해와 대결했다.
그날 바닷가에서의 일, 그 찰나의 순간은 강에게 잊히지 않는 기억이었다. 오죽하면 꿈에서조차 여러 번 되풀이 될 정도로.
찬란한 태양이 내리쬐던 바닷가. 두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소녀.
“형, 우리 수영 대결할까?”
언제나 그랬다. 늘 먼저 대결을 제안하는 쪽은 강.
“그럴까?”
한해는 늘 승낙. 강에게는 대결이었지만 한해는 놀이로 받아들였다.
둘은 거침없이 바다에 뛰어들었고, 파도를 거슬러 멀리멀리 나아갔다.
그날 강은 반드시 한해를 이기고 싶었다. 왜냐하면 전날에 빌어먹을 자전거를 보고 말았으니까.
한해의 자전거 뒷자리에 수진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한해의 허리를 팔로 감고, 그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바닷바람이 그들의 머리칼을 시원하게 날려주었고, 둘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우연히 길을 걷다가 그 모습을 본 강은 인사를 하는 대신 그만 골목에 숨어버렸다.
나였다면…… 수진이가 내 허리를 안고 내 등에 고개를 기대줬다면……
며칠 전 엄마 차를 타고 읍내를 지나가다가 수진이를 발견하고 태워주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괜찮아요. 저는 걷는 게 좋아요! 강이 오빠 학교에서 봐!”
그렇게 거절했던 수진이가 한해의 자전거 뒷자리에는 냅다 올라타고 저렇게 행복하다니…….
그래서 강은 더더욱 한해를 이기고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결코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결국 그를 잡아끌었다. 깊은 바다 속으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모래사장에 누워 있었다.
바로 코앞에 수진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뜨기 전에 입술에 느껴졌던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입술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빠! 강이 오빠! 정신 들어? 괜찮아?”
그녀가 나를 살렸다. 꺼져가던 내 생명을 뜨거운 키스로 되살려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강은 감격에 휩싸였다.
하지만 감격도 잠시.
수진은 스르륵 그의 몸에서 일어나더니 옆에 있던 한해에게 안겼다.
그리고 아무 목적 없는, 그저 참을 수 없이 좋아서 하는 키스를 나누었다.
이럴 수가…….
강은 비참해졌고, 키스 중에 언뜻언뜻 눈이 마주친 한해가 날리는 윙크 때문에 더 비참해졌다.
후훗. 잘 보고 있니? 수진이는 너 따위 관심도 없어. 수진이는 나밖에 모른다고 이 찌질아. 크크크.
첫사랑의 키스 덕분에 살아났던 그는 첫사랑의 배신으로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빠졌다.
“아아…….”
그리고 꿈에서 깼다.
아주 고약하게 각색된 기억이 악몽으로 재현된 것이었다.
현실 세계로 한숨을 토해낸 그는 옆에서 자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결국 나는 수진이를 아내로 맞이했어. 이렇게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일어나지.
원할 때면 언제든 안을 수도 있고 입 맞출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소망이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방식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지만 아내는 신혼여행 중에 나 몰래 한해 형을 만났다.
나는 정말 사랑에 이긴 것일까?
반듯한 이마와 다소곳한 이목구비, 그리고 순결의 상징과도 같은 하얀 뺨과 분홍빛 입술.
아내는 아름답다. 처음 만났을 때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처럼, 지금도 아내를 보고 있노라면 너무 예뻐서…… 가슴이 뛴다.
수진아. 내 아내 수진아.
내가 이렇게 널 좋아하는데,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줄 수 있는데…… 너는 왜 바보같이 그런 짓을 저질렀어?
사랑이 뜨거운 만큼 배신감도 펄펄 끓었다.
그래도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어제보다는 분노가 가라앉았다.
평생 아내를 괴롭히겠다는 악랄함은 누그러지고, 그저 약간의 복수로 되갚아주면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아내의 머리채를 가볍게 쥐었다. 비단처럼 보드라운 촉감조차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왜 너는 온전히 내 것일 수 없어? 결혼으로도 안 된다면, 어떻게 해야 널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
누군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폭력이 아닐까?
소월은 문득 그런 생각에 잠겼다.
폭력이라는 표현이 너무 과격하다면, 어불성설이라고 하면 어떨까?
한낮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바닷가 모래사장.
그녀는 비키니 차림으로 몸을 태우며 한해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거침없이 바다를 향해 걸어 나가는 그를 보고 있자니, 왠지 막막해졌다.
이토록 멋진 존재를 내가 온전히 가질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소유물처럼 가진다는 개념도 옳지 않은 것 같고, 그럴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해를 갖고 싶다는 목표를 버리고 그와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다는 바람을 품기로 했다.
그저 그의 시선이 나에게 자주 멈추고 머물러주기를. 그거면 돼. 그거면 충분해.
비록 당신의 마음 몇 조각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 있다 해도 괜찮을 것 같아. 조금 서운하고 슬프긴 하겠지만 말이야.
“소월!”
바다에 뛰어들기 전에 한해가 뒤돌아보았다.
넋을 잃고 훔쳐보던 소월은 화들짝 놀랐다.
“네, 오빠.”
“안 들어올래?”
“저는 그냥…… 선탠 할게요.”
“오케이.”
한해는 고집하지 않고 혼자 바다로 나아갔다.
수평선을 향해 팔을 뻗는 그의 모습을 보며 소월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저 오빠를 몇 달씩 혼자 육지에 놔둘 수 없어. 그럼 바다가 지옥이겠지.
그녀는 모래를 털고 일어나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오빠아아아아. 같이 가요!”
해맑게 소리 지르며.
*
허니문은 끝났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신혼부부에겐 본가에서 가족 식사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태화 건설이 소유한 ‘어반 호텔’의 특급 셰프가 집으로 와서 요리를 내왔고, 며느리인 수진은 돕고 싶어도 도울 기회가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를 보고 이태화 회장이 한마디 했다.
“뭘 하려고. 먹기나 해라.”
그가 첫술을 뜨자 저녁식사가 시작되었다.
여느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밥을 먹는 내내 대화는 없었고, 시어머니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며느리로서 이런 숨 막히는 저녁 식사 분위기를 어떻게든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에 수진이 겨우 입을 뗐다.
“두 분도 하와이 다녀오신 적 있나요?”
푹 숙이고 있던 시어머니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이태화 회장을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이 회장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뭐가 죄송해?”
“며늘아기가 버릇을 제대로 못 배운 모양입니다. 제가 잘 가르쳐서 식사 중에는…….”
잔뜩 주눅 든 시어머니의 말을 이 회장이 가로막았다.
“요즘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우리 집안 분위기야 천천히 익히면 될 일이고.”
이 회장은 수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와이를 가봤냐고? 나는 몇 번 가봤지. 하와이야 언제 가도 좋지.”
잔뜩 긴장했던 수진은 대화를 받아준 이 회장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아, 그러셨구나. 어머님은 어떠셨어요?”
“이 사람은 안 가봤지.”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
“이 사람은 외국 나가본 적 없어.”
“네? 어머님이 외국 여행을 한 번도 안 가보셨다고요?”
“여편네가 애 낳고 살림이나 하면 됐지, 외국은 뭐 하러 나가.”
여편네? 무엇을 예상해도 그 이상의 충격을 안겨주는 이 회장이었다.
대놓고 비하를 당했는데도 시어머니는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꾸역꾸역 밥을 입에 밀어 넣을 뿐이었다.
뭐 이런 상황이 다 있어…… 이 집안만 조선시대야 뭐야?
수진은 진실이 뭔지조차 분별할 수 없었다. 혹시 농담일까? 아니면 정말로 어머님이 한 번도 외국에 안 나가봤는지? 그렇다면 아버님은 누구하고 몇 번이나 하와이를 갔다는 건지…….
왜 하필 며느리 앞에서 자기 아내를 비하하고 치욕을 안겨주는 건지…… 어질어질했다.
수진은 옆에 앉은 강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눈도 귀도 없는 사람처럼 눈앞의 밥만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그러나 수저를 쥔 손에 무지막지한 힘이 들어간 모습이 보였다. 뭔가를 아슬아슬하게 참아내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대로 대화를 끝낼 순 없잖아? 수진은 있는 힘을 다 짜내어 말했다.
“두 분이서 한번 다녀오세요. 어머님 바람도 쐬실 겸.”
그녀의 말은 허공에 흩뿌려질 뿐.
이 회장은 아내와 함께 가는 여행 따위 관심도 없다는 투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희들 신혼여행 가서는 부부의 의무에 충실했느냐?”
아아…… 또 저 이야기.
수진은 강이 도와주기를 바랐다. 아무리 시아버지라도 선을 넘는 발언에 대해서는 남편으로서 아내를 지켜주길 바랐다.
그러나 강은 이번에도 눈과 귀가 먼 사람 흉내를 내었다. 다만 수저를 움켜쥔 손에는 더 힘이 들어갔다. 이러다 수저가 부러질 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아닌 건 아닌 거잖아.
“아버님. 외람되지만 2세 문제는 저희 둘이 잘 상의해서 계획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버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기도 며느리 입장에서 민망하고…….”
“너희들의 2세라고 생각해? 태화 그룹의 후계자다.”
“네. 아버님 말씀도 맞습니다. 아직 저도 나이가 젊고 이이도…….”
“저 사람이 비실비실해서 결국 이놈 하나밖에 만들어놓지 못했어. 사실…….”
이 회장은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삼킨 말이 무엇인지, 수진은 몹시 궁금했지만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여럿이 필요하다. 이미 우리 계열사도 여럿이고, 피가 안 섞인 놈들은 믿을 수 없고. 피가 적당히 섞인 놈들은 더욱 믿을 수 없고.”
응? 피가 적당히 섞인 놈들? 이건 또 무슨 얘기야?
수진은 아찔해졌다.
눈앞에서 집안의 엄청난 비밀이 망토를 쓴 채 휘휘 날아다니고 있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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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집안은 어떨까?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 내외와 시부모의 저녁 식사란, 덕담과 웃음꽃이 만발하는 자리 아닐까?
고역에 가까웠던 저녁 식사는 어쨌든 끝이 났다.
요리는 불려온 셰프가 맡았던 반면, 설거지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몫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가사도우미가 있지만 일부러 퇴근시켰어.”
나란히 서서 설거지를 하던 시어머니가 말했다.
“네, 잘하셨어요. 이럴 때라도 어머니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수진은 가능한 가장 밝은 미소와 말투로 어머님을 대했다.
아까 식사 자리에서는 죄인처럼 얼굴을 못 들고 있던 어머님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이 기회에 어머님을 위로해주고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님이 좀 무서운 편이시죠?”
뭔가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를 하던 어머님이 노래를 멈췄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수진을 마주 보았다.
“그치? 네가 보기에도 내가 참 초라해 보이지?”
허억. 수진은 신음을 토할 뻔했다.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이 어딘가 섬뜩해서.
“에이, 어머님. 그런 건 아니고요.”
그녀는 팔에 돋은 소름을 감추고 싶었다.
“수진아.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설마 출생의 비밀이요? 하하.”잔뜩 겁먹은 수진이 애써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흰자가 별로 없는 어머니의 검은 눈은 더욱 으스스하게 번들거렸다.
“그딴 거 말고. 진짜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