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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뺏겠습니다-12화 (12/92)

12화

이상한 일이지. 화끈화끈 울컥하는 열기는 어디에서 왔을까?

수진은 옅은 한숨을 뱉었다.

내 마음이라는 미로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가장 들뜨기 쉬울 신혼여행 내내 감정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잖아. 그런데 한해 오빠와 함께 있었던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에 요동쳐버렸어.

우뚝 솟아 있는 한해의 모습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 중 가장 외롭고 고되다는 갑판원으로 14년.

그 긴 세월 홀로 바다에 떠돈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당당하고 강해 보일 수 있을까?

그녀의 가슴은 또다시…….

안 되지. 이러면 안 되지.

그녀는 아플 때까지 입술을 물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저는 이쪽으로 돌아가야 해요.”

“그래. 난 이쪽이야.”

한해는 수진과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그녀는 떨어지기 싫다고 고집 부리는 발을 억지로 땠다.

왜? 대체 왜 머뭇거리는 거야?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 직전에 한해는 씩 웃으며 손을 들었다.

“잘 가!”

뭐라고? 잘 가라고? 그렇게 밝게 인사할 일이야?

이게 우리 평생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냥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잘 가라고?

수진은 울음이 터질 것 같아 다시 입술을 물었다. 피가 날 지경이었다.

미안해요. 난 차마 그런 인사 못 하겠어. 그렇게 웃어 보이지도 못하겠어.

우리 다신 마주치지 마요, 차라리…….

그녀는 평소보다 더 빨리 더 넓은 보폭으로 걸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혹시 오빠가 내 등을 보고 있을까?

옛날에는 그랬다. 옆집에 살면서도 그는 늘 그녀가 대문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생각해보니 그랬구나. 난 오빠의 등을 본 적이 없어. 그 말은 오빠는 늘 내 등을…….

그러나, 그래서, 그녀는 더욱 뒤돌아볼 수 없었다.

돌아봤다가 다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아서.

그녀는 걸음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정신없이 걸었고, 해안가 도로에서 펜션으로 들어가는 모퉁이를 돌고 나서야 멈췄다.

“후우후우…….”

가쁜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길 담장이 그녀를 가려주고 있다.

어느새 그녀의 몸은 땀으로 축축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몸을 식히고 펜션으로 향했다.

“왔어?”

펜션 입구에 강이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침착한 미소를 띤 얼굴로.

“어, 일어났네요?”

“응. 한 시간 잘 잤어.”

“배고프겠다.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산책을 오래 다녀왔네?”

“아…… 오랜만에 왔더니…….”

수진의 혀가 덜컹거렸다.

말해야 할까? 거짓말처럼 우연히 한해 오빠를 마주쳤다고? 잠깐 얘기를 나눴다고?

믿지도 않겠지. 만에 하나 믿어준다 해도 난리를 치겠지.

이 모든 게 남편의 거짓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드니 또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그래. 이제 다시 그 사람 만날 일도 없으니…….

“예전에 자주 다녔던 곳에 한 번씩 가봤어요.”

“아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말 것 같던 강이 조용히 덧붙였다.

“한해 형하고 추억이 많은 곳들이겠네.”

쾅. 머릿속에 번개가 친다.

수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꼭 그렇게 말해야 해요?”

“응? 난 무슨 특별한 뜻을 담아서 한 말은 아닌데.”

“특별한 뜻이 없다면,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이잖아요.”

“왜? 강한해라는 이름이 무슨 금기어라도 되나? 싫어하고 경계해도 내가 하면 했지. 내 입으로 그 인간 이름을 부르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비아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말투가 수진을 희롱했다.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뭐라고요?”

“아니 별 얘기 아닌데 발끈하길래.”

수진은 일단 입을 닫고 코로 심호흡을 했다. 아주 깊이, 폐 깊은 곳의 열기까지 사그라들도록.

“우리 이러지 말아요.”

“우리? 왜? 내가 뭐 잘못하고 있나?”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예민했어요.”

“예민했다…… 예민했던 게 당신의 잘못이다?”

강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어. 배고프다. 뭐 먹자.”

그는 수진의 손목을 턱 잡았다.

그녀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아, 아파. 그의 손길은 어딘가 아프다. 힘이 안 들어가 있어도 나를 아프게 해.

*

특별한 손님을 위해 준비한 음식은 문어였다. 거기에 각종 산나물, 맑은 국물의 생선탕까지 곁들인 최고 건강식.

소월의 식구들은 부모님도 동생도 하나같이 밝고 건강했다. 늘 반짝이는 그녀의 영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것 같아 한해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머니는 그를 보며 연신 감탄했다.

“우리 소월이가 한해 씨 이렇게 미남이라는 얘기는 안 해줬는데.”

“엄마도 참. 오빠 고등학교 들어갈 때까지는 한 동네 살았으면서 기억 안 나?”

“난 한해 군 어릴 때 기억은 별로 없어서. 배를 10년도 더 탔다면서 어쩜 이렇게 멋지게 잘생겼어? 난 뱃사람은 전부 이이 같은 줄 알았지.”

어머니는 자기 남편과 비교하듯 우스갯소리를 했고 다들 웃음이 터졌다.

놀림을 당한 소월의 아버지도 허허 웃었다.

평생 배를 타서 뼛속까지 그을렸을 것 같은 피부는 주름이 가득했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세상만사 달관한 듯 느긋했다.

“한해 군 아버님도 아주 미남이셨지.”

아버지의 말씀에 소월이 눈치를 줬다.

“아, 내가 괜한 얘기를 했나?”

“아닙니다, 어르신. 오히려 저는 궁금합니다. 저희 아버지하고 배를 같이 탄 적도 있으신지요?”

“있다마다.”

그는 주름진 눈을 반쯤 감고 옛 시절을 떠올렸다.

“강 선장님 고집 참 대단했지. 그래도 고집만큼 자기가 솔선수범해서 다들 잘 따르곤 했지. 나도 그랬고. 자네 얘기도 가끔 하곤 했어.”

“뭐라고 하셨는데요?”

당사자인 한해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귀를 쫑긋했다.

“자기를 안 닮았으면 좋겠다고.”

그 말이 한해의 가슴을 쳤다.

“아들 녀석은 허허실실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어.”

한해는 그런 소리를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해준 적은 없었다. 다만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비바람이 쳐도, 몸이 피곤해도 생업의 엄숙함을 거부하지 않고 바다로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가장 큰 가르침이었다.

“그 녀석은 어떻게 되었나 몰라.”

소월의 아버지가 가볍게 인상을 썼다.

“자네하고도 잘 붙어 다니던 꼬맹이 있었잖아. 그날 강 선장하고 같이 바다에서 잘못되었던 진 씨 딸내미 말이야. 이름이 뭐였더라?”

한해는 굳어버렸다. 묵직한 덩어리가 정수리에 쿵 내려앉는 기분.

“수진이 말씀이군요. 진수진.”

“아, 그래. 맞아. 수진이.”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처럼 느슨하게 앉아 있던 소월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진이는 요즘 어떻게 지내나? 혹시 요즘도 소식을 들었나?”

한해는 씁쓸함을 삼키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럼요. 아까도 만났는걸요. 얼마 전에 재벌2세와 결혼했어요. 여기서 얼마 안 떨어진 펜션에 남편하고 놀러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놀랄 것 같아, 줄여 말했다.

“네. 결혼도 했고.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 그래? 정말 다행이네. 다들 걱정했는데. 그날 정말 아주 온 동네가 초상집이었지. 아휴. 한해 군이 정말 고생 많았어. 이렇게 잘 커줘서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

아버지는 한해에게 소주잔을 건넸다. 그 너머로 딱딱하게 변해버린 소월의 얼굴이 보였다.

*

소월의 집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횟집.

수진과 이강 부부도 저녁을 먹고 있었다.

연애를 할 때도 둘은 별로 말이 없는 커플이었고, 결혼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더했다. 거기에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이 아슬아슬 드리워져 있었다.

둘 사이에는 최고급 어종을 모아놓은 자연산 모듬회가 풍성했지만, 강은 거의 먹지 않았다.

입맛이 싹 달아나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고개 숙이고 회를 오물거리는 수진을 노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슬쩍 시선 피하기를 반복했다.

수진의 입에서 가끔 한숨이 새어 나올 때면 그는 속으로 물었다.

불편해? 분위기 X같지? 네 마음이 불편하다면 내 마음은 지옥이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할 자격이 있는 날에, 너는 날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으로 만들었어.

감히…… 감히 신혼여행 중에 딴 놈을 만나? 그것도 내가 죽도록 싫어하는 그 새끼를?

하와이에서 연락했니? 이 먼 동해바다까지 불러냈어? 보고 싶어 죽겠다고?

아까 둘이 만나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바로 달려 나갔다. 한해의 멱살을 잡고 턱이라도 날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멀리서 둘의 모습을…… 역겹도록 애틋한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다른 계획을 세웠다.

주먹보다 훨씬 더 아프게, 훨씬 더 치명적으로 놈의 인생을 파멸시킬 계획을.

그리고 아내에 대해서는…… 아아.

너는 영화 대사처럼, 내 삶을 망치러 온 구원자일까?

그녀가 미워서 죽을 것 같은 동시에 그녀를 죽어도 놓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괴롭히고, 평생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진수진…… 빌어먹게도 예쁘잖아. 이토록 나를 능멸하고 끔찍하게 만들어놓고선 고개 푹 숙이고 회나 먹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제 더 이상 너에게 구원을 바라지 않을 거야. 나는 널 불행하게 만들 거야. 행복해질 수 없도록 널 가두고 또 가둘 거야. 무릎 꿇고 울면서 빌게 만들 거야.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른 채, 나직한 한숨을 토해내고 수진이 고개를 들었다.

강은 이번에도 슬쩍 고개를 돌리고 창밖의 밤바다로 시선을 던졌다.

“왜 안 먹어요?”

“별로 입맛이 없네.”

“점심도 휴게소에서 대충 먹었잖아요. 배 많이 고플 텐데.”

“그러게. 그런데 별로 먹고 싶지가 않네.”

“술 한잔할래요?”

“뭐, 그러던가.”

수진은 소주를 주문했고 두 잔을 연거푸 비웠다.

“술이 당겼나 봐?”

“당신. 무슨 할 말 있죠?”

“응? 아닌데.”

“제발. 제발 그러지 말아요. 왜 이러는 거예요?”

“내가 뭘?”

“지금 우리 꼴을 봐요. 이게 신혼부부의 모습이에요?”

그 말에 강의 입꼬리 한쪽이 비열하게 올라갔다.

풉! 미치겠다, 진짜. 진수진, 너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하하. 진짜 토할 것 같아.

우리의 모습? 이게 신혼부부의 모습이냐고?

그럼 너는? 신혼여행 중에 딴 놈을 불러내고, 남편이 낮잠 자는 펜션 앞에서 만나는 너는?

“신혼부부의 모습이라.”

강은 큭큭 비웃으며 혼자 소주를 따라 마셨다. 빈속의 소주는 위장을 연거푸 할퀴었다. 이제 고통을 즐기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신한테 말 안 한 게 있어요.”

수진은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털어놓았다.

“아까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한해 오빠를 만났어요.”

강은 일부러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연히? 와우, 하필 여기서?”

“저도 정말 놀랐어요.”

“원양어선 갑판원인 놈이 하필! 우리가 신혼여행을 마무리하는 동해바다에 와서 하필! 너하고 마주쳤다고?”

“오빠 고향이잖아요.”

“그놈이 매년 고향에 왔대? 내가 알기론 아닌데.”

“그래요. 14년 만에 처음 온 거래요.”

“하필, 지금 말이지? 그리고 하필 너하고 딱! 바닷가에서 마주치고! 와우!”

강은 또 한 잔 소주를 안주 없이 마셨다.

크윽. 쓰리고 아프고 좋다.

“정말이에요. 제가 뭘 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 인생의 남은 운을 모조리 걸고 말할 수 있어요. 정말 그렇게 우연히 마주쳤어요.”

수진은 절절하게 호소했다. 그녀의 시선을 맞이하는 강의 시선에는 조금의 믿음도 묻어 있지 않았다.

“누가 그러던데. 뭘 걸고 얘기하는 사람은 믿으면 안 된다고.”

“무슨 의미죠?”

“뭐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그건 당신이 제일 잘 알겠지. 나야 알 리가 있나.”

“혹시 당신 지금 이러는 게…… 그것 때문이에요? 우리가 마주친 걸 알기라도 했나요?”

“당신이 그 새끼하고 마주쳤는지, 혹은 뭘 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뭘 하다니…… 아아…… 그냥 걷고 얘기하고 그게 전부였어요. 당신이 14년 동안 했던 거짓말에 대해 제가 사과도 했고…….”

강이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주변의 다른 손님들이 돌아보았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네가 왜 사과를 해?”

“우린 부부니까요. 남편의 잘못을 아내가 사과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주제넘게 굴지 마.”

연거푸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거친 말. 수진은 귀를 의심했다.

결혼 전에는 단 한 번도 강의 입에서 이런 식의 말을 들어본 적 없었다. 그녀가 강에 대해 높게 평가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내가 한 가지만 얘기해주지. 넌 이제 내 아내야. 부부로서 부끄러운 짓을 하면 제대로 벌을 받게 해주겠어. 너도 그렇고 상대도 그렇고.”

“당신, 지금 그 말의 의미가 뭐죠? 부끄러운 짓이라뇨? 벌이라뇨?”

“미리 경고해두는 거야.”

수진은 입이 턱 막혔다.

경고라니. 내가 뭘 했다고?

그녀는 SF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멀쩡한 사람이 서서히 괴물로 변하는 과정. 그 첫 시퀀스…….

아니겠지? 오늘 뭔가 심기가 불편한 일이 있어서 그런 거겠지? 아버님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까 한해와 함께 있던 장면을 강이 목격했으리라고,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유 모를 증오와 불안으로 가득한 남편을 보고 있노라니, 할 말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의 애정을 담아 사과했다.

“미안해요.”

그녀는 테이블을 가로질러 그의 손을 먼저 잡았다. 한해의 이야기로 분위기가 불편해진 것도, 이 상태로 숙소로 돌아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당신이 신경 쓸 일 없을 거예요. 약속해요.”

그녀에게 붙잡힌 강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화해하고 싶지만 자존심 때문에 하지 못하고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아이처럼.

“당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오해할 일은 전혀 없었어요. 그러니 마음 풀어요.”

그 말에 강은 고개를 숙였다. 언뜻 그의 눈물이 비쳐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래. 보듬어주자. 내 남편이니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를 사랑하고…… 맹세했으니까.

*

“그랬구나. 우리 아빠가 알 정도로 둘이 어릴 때부터 가까웠구나.”

소월이 중얼거렸다.

“말해줬잖아.”

“그 정도일 줄은 몰랐죠.”

소월과 한해는 바닷가를 따라 늘어선 횟집 중 한 곳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저녁은 든든히 먹었고 해산물을 안주 삼아 밤바다의 낭만을 한껏 즐기는 중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뭐가?”

“수진 씨 때문에 힘든 거. 결혼식 날에는 정말 많이 힘들어했잖아요. 뭐 그 덕에 오빠하고 부쩍 가까워지긴 했지만.”

“지금은 한결 나아.”

한해는 굳이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다. 이미 유부녀가 된 그녀를 되찾겠다는 계획 자체가 차마 입 밖에 꺼내지 못할 만큼 불순했으니까.

지금의 현실이 모두 강의 거짓말 때문이었으니까 인정할 수 없다고, 그러니 나는 거부하고 운명을 거스르겠다고.

그 말은 한해 자신에게나 통할 뿐 다른 사람에게 말해봤자 코웃음만 칠뿐임을 잘 알았다.

게다가 아까 수진을 만나고 나니, 남편에게 돌아가야 하는 그녀의 현실을 두 눈으로 보고 나자 의지가 흔들리기도 했다.

인정해야 할까? 운명에 승복하고 그녀의 새로운 삶을 응원해줘야 할까?

그의 속도 모른 채 소월은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포기 못 하겠다고 떼를 쓰더니, 이제 마음을 정리했구나.

후훗! 그럼 그렇지!

“한 잔 받아요!”

술병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했고, 둘이 건배하는 쨍 소리는 더욱 경쾌했다.

“나 있잖아요. 생각해봤는데. 나도 이제 배 그만 탈까?”

“뭐라고? 갑자기 왜?”

“오빠랑 같이 항해도 못 하는데 그까짓 배는 타서 무엇하리! 엉엉엉.”

소월은 장난으로 우는 척을 했고 연기가 너무 실감 나서 한해는 얼어버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소월은 깔깔대도 웃었다.

“아, 진짜 세상 진지하다니까! 농담이에요.”

“놀랐잖아.”

“아니, 배 그만 탈까 한 말은 진지한 말이고. 오빠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럼 왜? 너 배 타는 거 좋아했잖아?”

“오빠를 보면서 반성했어요.”

“날 보고?”

“오빠는 목표를 딱 정해놓고 어떻게든 그 목표를 향해 다가가잖아요. 나에게 사실 배는 도피처였거든. 얘기했잖아요. 원래 음악을 했다고.”

“걸그룹 준비했다는 얘기는 했지.”

“이 나이에 이제 걸그룹은 안 되고. 사실 곡 만들고 노래 부르는 거 좋아해서 항해할 때도 쉴 때도 작업한 노래들이 꽤 있거든요. 나도 오빠처럼 용기 있게 도전해볼까 싶어서.”

“뭐 그런 이유라면…….”

“바다도 좋지만 결국 그건 두 번째로 좋은 거니까. 인생에서 두 번째로 좋은 거에 안주하면 제일 좋은 걸 포기해야 한다고 강한해 씨가 가르쳐줬다요.”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쩜 이렇게 사뿐사뿐 가벼울 수 있는지, 한해는 소월에게 감탄하며 미소 지었다.

.

.

.

술자리는 가뿐하게 끝났다.

한해가 계산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해서, 소월은 먼저 밖에 나와 있었다.

자신이 작곡하고 불렀던 노래를 허밍으로 흥얼대며 바닷가 도로 위를 휘적휘적 걸었다.

나비처럼 움직이던 그녀의 발걸음이 딱 멈췄다.

수십 미터쯤 떨어진 다른 횟집 앞에 어떤 여자가 서 있었다.

화장기 없이 뽀얀 얼굴에 태생적으로 귀티가 나는 아우라.

머리에서 발끝까지 서울 사람이다. 딱 보면 알지. 이 동네 사람은 절대 아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소월은 왠지 그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술기운 때문일까? 혹은 달빛에 홀린 듯 소월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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