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11화 (11/92)

10미터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오래전 소녀의 호위무사. 11화한해가 울진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말이 터미널이지 시골의 버스 터미널이란 그저 열 대 남짓한 버스가 고작인, 오히려 버스 종점에 더 가까운 풍경.

“오빠!”

높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 여기!”

소월은 손을 머리 위로 휘휘 흔들었다. 그녀는 일본 멜로 영화에 나올 법한 분홍색 스쿠터에 앉아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구나.”

“태워 가려고요.”

소월은 스쿠터 뒷자리를 툭툭 쳤다.

“내가 덩치가 있어서…… 이 작은 스쿠터가 감당할까?”

한해는 조심스럽게 뒤에 앉았다. 꾹 내려앉는 바퀴의 움직임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헬멧 쓰시고!”

소월이 하나 더 갖고 온 헬멧을 건네주었다.

한해는 헬멧을 쓰고 소월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자, 그럼 갑니다요! 꼭 잡아요!”

한해의 걱정과 달리 스쿠터는 문제없이 출발했다.

우리는 늘 아래에서 도시를 본다. 드론이나 헬기에서 찍은 도시의 부감은 매일 보던 도시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고향의 거리도 한해에게 그렇게 낯설었다. 워낙 오랜만이기도 했고.

그는 처음 와본 사람처럼 스치는 풍경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곧 바다가 나왔다. 1년에 300일은 바다 위에서 지내면서도 고향 바다는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한해만큼 소월도 설레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이런 날이 오다니!

‘언제나 꿈꿔 온 순간이 여기 지금 내게 시작되고 있어. 그렇게 너를 사랑했던 내 마음을 넌 받아주었어.’그녀는 오래전 노래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가, 흥을 누르지 못하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늘은 우릴 항해 열려 있어. 그리고 내 곁에는 니가 있어. 환한 미소와 함께 서 있는, 그래 너는 푸른 바다야!”

“들어본 노랜데?”

“듀스의 여름 안에서! 고마워요, 와줘서.”

“무슨 소리. 초대해줘서 내가 고맙지. 이렇게라도 고향에 다시 돌아와서 좋다.”

해안가 도로를 사이에 두고 파란 바다와 평행으로 달리는 분홍스쿠터의 모습이 꼭 엽서 속 한 장면 같았다.

분홍스쿠터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바닷가 마을에 그림같이 새파란 대문이 달린 집으로 점점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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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은 부모님께 한해를 소개해주고 2층의 빈방으로 안내해주었다.

방은 꽤나 넓었고 특별히 가구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 점이 더 좋았다. 마치 산사에 템플스테이라도 온 기분.

“침대가 없어서 요를 깔고 자야 하는데 괜찮겠어요?”

소월의 걱정에 한해는 손을 휘휘 저었다.

“무슨 소리. 갑판원 생활이 어떤지 알면서.”

찌든 냄새를 이불 삼아, 삐걱거리는 철제 침대에서 무릎 굽히고 잤던 밤이 얼마나 많았는지.

맨바닥이라고 해도 깨끗한 요 위에서 자는 일은 호사였다.

“저녁은 집에서 먹고, 이따 밤에 한잔 어때요?”

“좋지.”

“그럼 저는 엄마 저녁 준비하는 거 도와줄 테니까 쉬고 있어요.”

“잠깐 산책이나 나갔다 올게.”

“그래요! 저녁 다 되면 전화할게요.”

한해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바로 앞이 바닷가 해안도로였다.

조금 걷다 보니 예전에 살던 집이 나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횟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바로 그 옆에 수진이 살던 집도 사라지고 3층짜리 건물이 서 있었다.

다 사라졌네. 하긴 그동안 세월이 얼만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다. 14년 전 오늘, 그는 바로 이 바닷가에서 뱃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지금 길고긴 항해를 마치고 다시 육지에 정착하려 한다.

끝과 시작이 이어지는 곳에서, 새로운 인생의 첫날인 셈이었다.

씩씩하게 내딛던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수진이 서 있다.

그는 놀란 표정조차 짓지 못했다.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그녀는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맞은편에서 조금 더 걸어오다가 멈추었다.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시선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무심하게 날아갔다.

그는 프랑스 작가 카트린 페이의 글귀를 떠올렸다.

사랑이란 가깝고도 먼 당신의 숨결. 파도와 바람 소리가 겨우 덮은 나의 심장 소리.

파도 소리도 숨을 죽이는 것 같은 착각. 거기에 음악이 섞여 들리는 착각.

늦은 오후의 태양은 바다 위에 금가루를 비처럼 내리고.

“수진아…….”

웃음이 피식 나왔다.

“너 여기서 뭐하냐?”

“오빠는요?”

그녀의 눈동자도 목소리도 파르르 떨렸다.

“난 오랜만에 고향 내려왔는데.”

“나도 그런데.”

“너…… 신혼여행 가지 않았어?”

“여행은 다녀왔고…… 아직 휴가가 이틀 남았는데 여기서 하루 지내려고 왔어요.”

“아하…… 그랬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려고 양 발끝에 힘을 꽉 주었다.

“강이도 같이?”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이는 운전하느라 피곤하다고 잠깐 눈 붙이고 있어요.”

수진은 양 주먹을 꽉 쥐고, 떨림을 감당해내고 있었다.

“그랬구나. 와……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냐. 난 진짜 14년 만에 처음 왔는데.”

“그러게요. 너무 얼떨떨해서…….”

얼어 있던 수진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아…… 진짜 오빠네. 오빠 맞네.”

“응. 맞아.”

둘은 잠시 더 서로의 시선 속에 서 있었다.

“산책 같이할래?”

그가 물어보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보고 걸어오던 둘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말없이 발걸음만 나란했고 파도는 박자를 맞춰주었다.

기억과 추억 그리고 오해와 아픔이 수풀에 스치었다.

약속이나 한 듯 걸음이 멈춘 곳. 어린 시절 나란히 앉아 별을 구경하던 언덕이었다.

한해는 오래전 어느 밤을 떠올렸다.

망원경으로 별을 보다가 문득 수진이 추워하는 것 같아 물었다.

“춥지? 들어갈까?”

“아니! 하나도 안 추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린 그녀의 살갗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 있었다.

그날 밤, 그는 들어가자고 그녀는 안 들어가겠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다음 날 수진이 감기에 잔뜩 걸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녀가 떠올린 밤은 조금 달랐다.

낮에 학교에서 몰래 연애소설을 실컷 읽은 그녀는 사춘기 소녀의 감성이 충만한 상태였다.

화끈거리는 감성의 목적지는 키스.

열다섯이었나? 열여섯이었나? 어린 수진은 키스를 하면 어떤 느낌일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여느 때처럼 한해 오빠와 언덕에 앉아 과자도 먹고 별도 보고 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꾸 오빠의 입술로 향했다.

결국 그녀는 키스를 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와 꿈속에서.

“여긴 정말 우리 말고는 아무도 안 오나 봐.”

한해는 그들을 기다린 방석처럼 잔디가 소복하게 난 곳에 앉았다.

“그러게요. 하나도 안 변했어. 그냥 세월만 흘러가버렸네요.”

세월이 너무 흘렀지. 나는 유부녀가 되어버렸잖아. 열일곱 살이나 되었다고 으스대던 오빠는 서른이 되었고.

한해 옆에 앉은 그녀는 또 소설 같은 상상을 했다.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다가 타임슬립을 해버린다면?

태풍이 모든 것을 쓸어갔던 그 날 전으로. 그럼 우리의 아빠들도 살릴 수 있고 오빠도 배를 탈 필요가 없고…… 우린 헤어지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여전히 철없는 소녀일 테고 오빠와 키스를 해도 비난받지 않을 수 있겠지.

그러나 타임슬립은 일어나지 않았고, 변해버린 것들은 그대로였다.

수평선으로 시선을 늘어뜨린 한해의 옆모습은 열일곱 소년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

“읽었어. 네가 단 인스타 댓글.”

그의 낮은 음성은 먼 파도 소리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별, 저녁, 하늘 이런 것들과도.

“아, 그랬군요. 난 답이 없어서. 혹시 못 봤나 했어요.”

“나도 답글을 달려다가 사과를 받을 수 없어서 그냥 있었어.”

“많이…… 속상했죠?”

“글쎄. 그 정도 표현으로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미안해요.”

“네가 아무리 사과해도 소용없어. 잘못은 강이…… 너의 남편이 했잖아. 사과는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하는 게 맞고.”

“맞아요. 하지만 그 사람이…….”

“알아. 사과를 받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어. 오해하지 마.”

“저도 많이 화가 나서…… 신혼여행 내내 썩 좋지는 않았어요.”

“좋아 보이던데.”

한해는 뾰족한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사진들 보니까 멋지더라. 잘 어울려.”

감정적으로 수세에 몰려있던 수진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조심스럽던 그녀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오빠가 보기에 우리…… 정말 잘 어울려요?”

한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잘 어울리는 부부가 되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요.”

“내가 괜히 심술부린 건가. 미안하다.”

“심술이 나긴 해요?”

수진의 눈이 그를 낚아챘다.

그는 지그시 이를 물었다가 놓았다.

“응. 질투 나.”

그 말에 수진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뭐야…… 질투라니…….

“날 좋아하기라도 했다는 말이에요? 14년 동안 못 봤는데?”

“14년 동안 깨달았어. 우린 너무 어렸고 너무 가까워서 잘 몰랐지만 내가 널 여자로서 좋아했다는걸. 나라는 남자는 너라는 여자를 좋아했어.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이 없었어.”

수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너의 결혼식에서 수십 번 나 자신에게 물어봤어. 만약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강이가 뭐라고 하건 간에, 너랑 몰래 연락을 계속 주고받았을까? 다른 남자가 생기지 않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가난한 갑판원 주제에, 먼바다 고깃배에 일 년 내내 갇혀 있는 처지에 널 차지하려고? 그랬다면…… 지금 우린 달라졌을까?”

그는 평생 못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고백을 다 털어놓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허공에 버렸다.

수진의 눈이 젖어 있었다.

“그러지 그랬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그랬어.”

“너한테 짐이 될까 두려웠어. 장애물이 될까 봐 겁이 났어.”

“왜 나를 못 믿었어요?”

“넌 너무…… 어렸으니까.”

“오빠도 알았죠? 내가 오빠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한해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한번 기회라도 줘봤어야죠. 내가 아무리 어렸어도.”

모질게 책망하면서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설령 서로 입장이 뒤바뀐다 해도, 그녀 역시 한해와 같은 결정을 내렸을 거다.

그래도 화라도 내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가슴이 저기 절벽 아래로 떨어져 산산조각날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흐르던 긴장을 깨뜨린 건 한해의 핸드폰 벨 소리. 소월의 전화였다.

한해는 목소리를 낮춰 전화를 받았다.

“응.”

“저녁 다 됐다요오오! 얼른 와요!”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는 휴대전화 밖으로 새어 나오기에 충분히 컸다.

“어. 금방 갈게.”

전화를 끊자 수진이 돌아보았다.

“누가 기다려요?”

“어…… 같이 배 타는 친구 중에 고향 후배가 있어서. 오늘 그 집에서 지내기로 했어.”

수진이 피식 웃었다.

“아, 여자 친구?”

“아니. 여자 친구는 무슨.”

며칠 전 밤의 기억이 꼬리를 잡아서 말끝이 흐려졌고, 수진은 그 미묘한 머뭇거림을 눈치챘다.

그녀는 남편이 보여준 사진을 떠올렸다. 앙증맞고 귀엽게 생긴 여자와 한해가 서로 뺨을 착 붙이고 찍은 셀피.

여친이랑 찍은 사진도 봤는데 왜 발뺌하냐고, 추궁하기 싫었다.

그럴 자격도 없지. 어차피 나도 유부녀인걸.

“여자 친구 있으면 뭐 어때요?”

다소 쌀쌀한 말투. 그녀는 롱스커트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났다.

“가요. 우리 둘 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언덕에서 바다로 내려가는 길은 아까 올라올 때와 달랐다. 올라올 때 말이 없었던 이유가 가슴이 너무 뛰어서였다면 지금은 너무 내려앉아 말이 없었다.

한해도 수진도 현실의 시퍼런 칼날을 목격했다. 우정도 흔들고 사랑도 식게 만드는, 그 무엇보다 무서운 현실.

한해가 끝내 내놓지 못한 한마디.

‘돌아와.’그녀에게 하고 싶은 천 마디 말들 중 하나만 고르라면 바로 그 말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 신혼여행도 끝나지 않은 새색시에게 이혼하라고?

수진이를 되찾겠다는 내 의지는…… 가당키나 한 걸까?

수진 역시 마음이 몸살 걸린 몸뚱이처럼 무거워졌고, 흥분도 가라앉았다.

“괜히 오빠한테 화내서 미안해요.”

“괜찮아.”

“정말 오빠가 잘못해서 화낸 게 아니라…… 나도 그때 오빠 처지였다면 똑같이 했을 테지만…… 그냥 우리 운명이 너무…….”

“알아. 힘든 말 하려고 애쓰지 마. 다 아니까.”

흙길을 밟는 자박자박 소리는 시간의 발자국 소리처럼 들렸다.

언덕을 다 내려온 둘은 해안가 도로에 섰다.

어느새 저녁 어스름이 바닷가에 내려앉았다.

잠시 꿈처럼 같은 방향으로 걸었지만 운명도 현실도 명령하고 있다.

저녁이 왔단다, 얘들아. 나란한 발걸음을 이제 반대로!

작별 인사 직전에 수진은 망설였다.

이렇게 헤어지면 이제 다신 못 보려나? 이렇게 우연히 만날 확률은 백만분의 일쯤 될 텐데 그 확률을 써버렸으니.

한해도 같은 마음.

전화번호라도 달라고 할까? 불편하려나?

수진의 얼굴 뒤로 멀리 보이는 등대에 불이 들어왔다.

어린 시절 매일 같이 보던 등대였는데, 불이 들어오는 그 순간을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좋은 징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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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머릿속에 알람이 내장되어 있어,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알람시계 없이도 잘 일어나곤 했다.

물론 핸드폰으로 알람을 설정해놓긴 하지만 늘 직전에 눈을 뜨고 아직 울지도 않은 알람을 해제하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한 시간만 자겠다고 생각한 그는 정말 딱 한 시간 뒤 눈을 떴다.

“으음!”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넓은 창으로 보이는 바다를 마주한 채 섰다.

돌아왔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아버지 사업이 잠깐 어려워졌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에게는 가장 강렬한 계절. 그 계절을 보냈던 바다. 바로 그 바다에 돌아왔다.

얼마 만이지? 꼽아보니 14년 만이네.

결국 해냈어. 수진이는 내 아내가 되었고, 나는 한해 형을 이겼어!

갑자기 결혼식장에 나타나서 민망하고 난처한 상황이 생겼지만 이제 그것도 다 정리됐어.

촌놈 새끼가 이젠 깨달았겠지. 결국 최후의 승자는 나라는걸.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지.

단잠을 잔 뒤의 상쾌함에 강렬한 성취감까지 더해졌다.

좋다. 너무 좋다. 울진에 오길 잘했어.

그는 고지를 점령한 장수처럼 뿌듯하게 동해바다를 관조했다. 출렁이는 바다를 담은 창문이 꼭 대형 스크린 같았다.

수진이는 아직 안 왔네. 산책 중인가?

그의 자문에 답하듯 스크린에 뭔가가 나타났다.

머뭇머뭇 느리게 걷는 남녀의 모습이었다.

그는 단박에 둘을 알아보았다.

편안하게 늘어져 있던 손이 부들부들 분노의 주먹을 쥐었다.

기분 좋은 미소는 이가 부러질까 겁날 정도로 악다문 표정으로 바뀌었다.

관조의 시선은 공포의 시선으로…….

최고의 순간에서 최악의 순간으로 감정이 추락했고, 박살 났다.

뭐야. 저건 뭐냐고! 강한해가 왜 저기 있어?

하아…… 설마 둘이 연락이라도 몰래 주고받은 거야? 신혼여행 중에? 그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잖아?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질투라는 놈은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음을 먹잇감으로 삼고 조롱하는 녹색 눈의 괴물이라고.

그 괴물이 강의 마음을 신나게 물어뜯었다. 깔깔대고 비웃으며.

며칠 전, 신혼여행 중에 메시지를 보냈을까?

-오빠. 나 울진에 갈 건데 오빠도 올 수 있어요? 강의 머릿속에는 본 적도 없는 메시지가 난무했다.

-내가 울진 가봤자 뭘해. 넌 신랑이랑 있을 거잖아.-신랑 몰래 데이트할까?-걸리면 어쩌려고?-스릴 있고 좋잖아.-강이 그 새끼 좀 불쌍한데.-보고 싶어, 오빠.-조금만 기다려. 그 마음 다 채워줄게.

“이런 XX!”

좀처럼 욕을 하지 않는 강의 입에서 상스러운 욕이 튀어나왔다.

“개 같은 것들이!”

그는 미친 사람처럼 펜션을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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