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10화 (10/92)

10화

한국에서 날아온 문자메시지였다.

-신혼여행은 어떠니? 간단한 내용이지만 간단치 않은 발신자.

무려 시아버지의 메시지였다.

신혼여행 중인 며느리에게 시아버지가 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흔한가 싶기도 하면서, 동시에 최소한의 다정함을 느끼기도 했다.

이태화 회장. 그는 여러 모로 이중적인 면모가 있었고 며느리인 수진에게도 그랬다.

자기 집안과 사업체의 번영만 생각하고 며느리에 대한 입장도 철저하게 그 안에서 견지하는 최악의 시아버지인 동시에 좋은 점도 있었다.

스스로 가장 강한 악역을 자처함으로써 다른 시댁 식구들의 크고 작은 도발을 차단해주는 효과랄까.

심지어 며느리에게 가장 근거리에서 불편함을 주는 존재인 시어머니조차도 그에게 막혀 수진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는 상황이었다.

-네. 덕분에 잘 보내고 있습니다. 비키니를 입고 선택베드에 누운 채로 시아버지와 대화를 주고받는 상황이 썩 내키지는 않으면서도, 이미 수신 확인이 되었으니 답장을 안 보낼 수도 없어서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폐백 때 주신 용돈도 잘 받았습니다. 너무 큰돈을 주셔서……. 이미 받은 돈이니 어디에 쓰는지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지만 액수가 워낙 컸다. 말없이 멋대로 써버리기 부담되던 참에 잘되었다 싶었다.

-아버님의 따뜻한 마음을 기려서 좋은 일에 기부하도록 하겠습니다.-그건 니 맘대로 하고. 문자로도 느껴지는 차갑고 딱딱한 말투.

-강이는 잘 지내고 있니? 이 지점에서 수진은 갸웃했다.

아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 아닌가? 왜 굳이 며느리한테…….

그녀의 마음을 간파한 듯,

-녀석한테 물어봤자 잘 지내고 있다고 하겠지. 수진은 남편이 눈치채지 않게 슬쩍 돌아보았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느긋해 보이는 표정.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녀는 답을 보냈다.

-네. 편히 쉬고 있어요. 이 정도에서 대화가 그칠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결정적인 한 방은 방심할 때 턱을 부순다.

-너희들 쉬라고 열흘씩이나 회사를 비우게 해준 거 아니다. 응? 무슨 말이지?

반사적으로 긴장한 눈으로 핸드폰 액정을 보고 있는데 메시지가 이어서 날아들었다.

-내가 너의 의무에 대해 말해주었지? 최대한 빨리 우리 가문을 이을 후계자를 보고 싶다.

“아…….”

옅은 신음이 절로 새어나왔다.

-그에 따른 보상도 있을 거다. 돈 1억 정도가 아니겠지? 핸드폰을 쥔 손이 덜덜덜 떨렸다.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기에…….

분노가 치밀어 답장을 쉽게 보낼 수조차 없었다.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고. 서울에 오면 보자꾸나. 고분고분 ‘네~ 아버님’ 같은 답장을 보낼 수 없었다.

겨우 분노를 가라앉히고 자판을 눌렀다. 손끝에 들어간 힘을 빼느라 애를 먹었다.

-지난번에 폐백 때는 다른 친척 분들도 계시고 해서 말씀을 못 드렸네요. 아버님, 저는 아버님 손주를 낳기 위해 결혼한 게 아닙니다. 저는…….

“뭐해?”

가까이서 들리는 남편의 목소리에 놀라 수진은 핸드폰을 내렸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강이 가볍게 인상 썼다.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냐. 얼굴이 파랗게 질렸잖아.”

수진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버님에게 이토록 부당한 메시지를 받았다고, 불쾌하다고 항의라도 할까?

그러면 속은 좀 편해지겠지만 그건 비겁하고 쉬운 방법이지.

알잖아. 이 사람…… 아버지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는 거.

그녀는 결혼 전에 했던 몇 가지 결심들 중 하나를 떠올렸다.

결혼을 하면 시댁 식구 험담은 남편에게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시댁 식구와 있었던 일은 당사자와 직접 해결해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시댁 식구와 생긴 갈등을 남편한테 일일이 다 일러바쳐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그래. 나도 부담되긴 하지만 아버님과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해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편에게 털어놓자.

신혼여행이 끝나는 대로 담판을 짓자.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요.”

그녀는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래? 약이라도 먹을까? 리조트에 알아봐야겠다.”

“아니에요. 따뜻한 물에 좀 담그고 있으면 나을 것 같아.”

“그러자. 그럼 이제 들어가자.”

강은 파라솔 아래 놔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남편의 넓은 등을 보며 수진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그래. 내 남편은 이런 사람이지.

이이의 눈은 늘 나를 향해 있어. 나의 작은 표정까지도 신경 쓰지. 내가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주고, 내가 싫다는 건 강요하지 않아. 내 손에 작은 짐이라도 들린 꼴을 못 보는 사람이지.

하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 인생의 흐름을 자기 멋대로 바꾸어놓았어. 그것도 그 긴긴 세월 거짓말로.

내 남편 이강 씨. 내가 당신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까요?

“자, 가자.”

강은 양손에 짐을 들고 활짝 웃었다.

남편의 웃는 얼굴을 보며 수진을 스스로 다독였다.

그래. 어쨌든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까지 와버렸잖아. 이제 더 이상 이 문제를 들먹이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이 사람도 더 이상 나를 속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줘요. 비치백은 내가 들게.”

“아냐. 편하게 가. 무겁지도 않은데 뭘.”

“당신 무거울까 봐 그러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억지로 비치백을 빼앗아 들었다. 그렇게 비운 남편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손잡고 걷고 싶어서 그렇지.”

별것 아닌 말이 강의 눈을 반짝이게 했다. 그는 행복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수진은 가슴 한쪽이 아릿해졌다.

최고의 남편이지. 암. 그런데 왜 나는 다른 한해 오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녀는 자책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

강이 그녀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남편이라는 전제에 뚫려있는 구멍 하나를 발견했다.

다 해주는데, 다 허락되는데…… 한해 오빠와 관련한 모든 것은 안 된다. 전부 금지.

수진은 오래된 소설 제목을 떠올렸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안 돼…… 그러면 안 돼…….

그녀는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남편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쿵쿵쿵 강의 심장 박동이 느껴지는 듯했지만, 사실 평소보다 빨리 뛰고 있는 것은 그녀의 심장이었다.

.

.

.

배가 아프다고 둘러댄 거짓말 덕분에 느긋한 목욕을 즐겼다.

어딘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몸과 마음이 이완되었다.

순백의 욕조에는 뿌려진 장미꽃잎을 손끝으로 만지고 있노라면 향이 스미는 듯했다.

목욕을 하고 나서는 남편과 함께 스파를 받았다.

나른한 뉴에이지 음악과 기분 좋은 향이 감도는 방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나란히 누워 스파를 받는 중간 중간에도 강은 그녀의 상태를 체크했다.

“아프지 않아?”

“괜찮아요.”

“아프면 언제든 말해.”

그쯤은 챙겨주지 않아도 다 알아서 한다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이런 게 당신이 사랑하는 방식이라면 존중하고 감사해할게요.

그래. 이렇게 사랑하면 돼. 각자의 방식으로. 조금씩 더 참고 노력하면…….

잠깐만. 어디서 그런 말도 들었는데. 진짜 사랑이란 참을 수도 없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이라고. 노력이라는 말은 사랑과 가장 안 어울리는 단어라고.

아아. 머리 아파. 그만 생각하자. 그만…….

스파 직원의 정성스런 손길에 이끌려, 수진은 천천히 잠의 왕국으로 다가갔다.

*

인천국제공항 게이트 앞.

벤치에 느슨하게 앉은 레오는 스웨이드 재질의 로퍼로 바닥을 툭툭 밀었다. 뭔가 생각이 많을 때 그의 습관이었다.

세상의 그 어떤 괴로움과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미소년의 표정은 정작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한 사람.

“뭘 그리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큼직한 캐리어를 끌고 레오의 옆에 선 사람은 레이나였다.

레오는 고개를 들고 반갑게 인사했다.

“어, 누나.”

“짜식이 오랜만에 누나 봤으면 허그 정도는 해줘야지!”

레이나는 레오를 품에 꼭 안았다.

분명히 레오가 레이나보다는 머리 하나쯤 더 체격은 컸지만 레이나가 레오를 안아주는 것처럼 보였다.

피를 나눈 친남매의 인상은 정반대.

누나인 레이나가 연예인 못지않게 화려한 외모와 옷차림인데 반해 레오는 세상 곱상하게 생긴 데다 80년대 레트로 느낌의 데님과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도 정반대였다.

공항 터미널건물을 빠져나온 둘은 미리 불러놓은 콜밴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왜 그렇게 우울해 보여? 해피보이 답지 않게?”

레이나는 돌려 묻는 법이 없었고 레오는 누나에게 거짓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여자 때문에 그렇지.”

“짜식. 연애하냐?”

“연애하고 싶은데 잘 안 되는 거지.”

“누군데?”

“말하자면 길어.”

“인천공항에서 대치동까지 두 시간은 걸려. 아무리 대단한 연애사라도 충분히 들을 시간 돼. 그러니까 까불지 말고 찬찬히 실토해.”

휴우…… 역시 레이나 누나는 어쩔 수 없구나.

레오는 소월과의 인연에 대해 들려주었다.

기획사 연습생 시절에 만났고, 그의 첫사랑이고, 첫사랑을 잊지 못해서 다시 만났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특이하네. 항해사라고?”

“응. 그래서 일 년에 서울에 있는 날이 한두 달 될까 말까야. 지금도 고향에 내려가 있고.”

“좋아한다는 말은 했고?”

“비슷하게는 말했는데.”

“똑바로 말해야지.”

“말했잖아. 소월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뺏으면 되지.”

“그게 말처럼 쉬워?”

“인생에 쉬운 일이 어딨니?”

레이나는 현자처럼 되물었다. 레오는 인정할 수 없었다.

“누나 말처럼 인생에 쉬운 일이 없지. 근근이 음악을 하고 있지만 한 번도 뜬 적이 없는 내가 너무 잘 알지. 하지만 누나는 안 그렇잖아.”

레오는 꽤나 궁서체로 말했으나 레이나는 딱 이런 눈으로 동생을 보고 있었다.

요 녀석 귀엽네.

“누나는 인생에 힘든 일이 하나도 없었잖아.”

실제로 레이나의 인생이란 누가 봐도 그런 인생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던 그녀는 예쁜 걸로도 유명해 주변 학교 남학생들까지 구경을 왔다.

동생인 레오 주변의 형들도 누나 좀 소개해달라는 부탁이 끊이지 않았고, 누나의 팬이라며 건네주는 선물을 전해주는 게 일상이었다.

대부분은 선물은 포장지조차 뜯지 않은 채로.

“레오 너 가져.”

레이나의 흥미조차 끌지 못했지만.

어차피 여자 향수나 보석 따위가 대부분이어서 레오에겐 쓸 데도 없는 선물이었다. 그래도 레이나는 무심했다.

“중고나라에 팔든가.”

한국에서 하는 공부로는 성에 차지 않은 그녀는 미국 최고의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더니 일타강사로 변신했다.

압도적인 수학실력에 자신만만한 태도, 지루해 질만 하면 학생들 정신을 번쩍 깨우는 말 한마디를 잊지 않는 강의 솜씨는 그녀를 일타 강사 중에서도 최고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리는 일타강사들이 즐비한 대치동 학원가에서도 보기 드문 백억 대 연봉을 받고 사교육 업체 메타스터디와 계약을 맺었다.

학원에서 받는 돈 외에도 그녀가 펴낸 교재는 늘 베스트셀러였고 그녀의 인스타그램은 천만 명이라는 경이적인 팔로워 숫자를 자랑했다.

공부와 아무 상관 없는 게시물, 이를테면 개인 요트에서 선탠을 즐기는 비키니 샷에도 팔로워들은 열광했고 그녀에게 광고하겠다는 업체가 줄을 섰다.

레오는 너무나도 월등한 누나 때문에 늘 놀림을 받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는 자신의 인생에 늘 당당했다. 스스로 이렇게 말할 정도로.

“나랑 누나는 유전자가 골고루 섞이지 못했어. 누나한테는 지적인 유전자가 몰빵, 나는 감성 유전자가 몰빵.”

레이나 누나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공항 고속도로를 달리는 콜밴 차창 밖으로 잠시 시선을 돌렸던 레오가 중얼거렸다.

“누나는 내 고민 이해 못 해. 인생이 한 번이라도 어려웠던 적이 있어? 누나한테 인생이란 답을 알고 있는 수학 문제잖아.”

“겉보기엔 그렇겠지.”

“속은 달라?”

“나도 연애는 뜻대로 잘 안 되더라.”

“풉. 웃기시네.”

레오는 코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핵인싸 레이나 누나의 곁에는 늘 끝내주는 남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부터 연예인이나 유명한 운동선수들이 그녀와 사귀려고 주변을 맴돌았고, 그녀는 수학 문제를 풀 듯 연애하고 헤어지고를 반복했다.

“연애야말로 누나한테 제일 쉬운 문제 아니었어? 뭐, 이차방정식 수준?”

“나한테 연애는 리만가설 증명 같은 문제야.”

“그게 뭔데?”

“수학의 7대 난제라고 불리는 건데, 자세히 알 필요는 없고.”

“누나는 진심으로 좋아한 사람이 있기는 해?”

“있지.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사람.”

“정말? 그런 사람이 있는데 왜 갑자기 미국으로 갔어?”

레이나는 전에 본 적 없는 감상적인 표정으로 변했다. 콧날에 살짝 주름이 진 채 창밖으로 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대시했는데 차였거든.”

“헐. 누나를 차는 사람이 있어?”

“대시가 아니라 프러포즈였지. 결혼하자고.”

“와우. 누군데?”

“아주 잘난 놈이야.”

“누나 주변엔 늘 잘난 놈들밖에 없잖아.”

“그 정도 급이 아니야.”

“뭐 설마 재벌 2세라도 돼?”

“빙고.”

레오는 눈이 동그래졌다.

“재벌 2세에 모델같이 생겨먹은 녀석이지.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갑고.”

어릴 때부터 누나에게 인간적인 온기를 느껴본 적 없는 레오는 처음으로 인간의 온도를 느꼈다.

“누나도 어쩌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보통 사람들 보기에 내가 엄청 돈도 많이 벌고 대단해 보이겠지만 그 사람 눈에는 그냥 개미같이 열심히 일하는 학원 강사야. 일타강사가 뭐의 준말인지도 모르고, 말해줘도 금방 잊어먹을 정도로 관심도 없어.”

“뭐 다들 자기가 속해 있는 세상이 있으니까. 사실 난 좀 실망이네.”

“뭐가?”

“누나가 누군가를 정말로 좋아했던 이유가 돈 때문이라니. 난 누나가 돈을 많이 버는 동시에 또 돈에 초연했다고 생각했거든.”

“일단 나는 돈에 초연하지 않았고. 그다음, 난 그 사람이 돈이 많아서 좋아한 게 아냐.”

“그럼?”

“몸은 재벌 2세인데 마음은 거지더라고. 불쌍해서 좋아하기 시작했어.”

“연민이다? 감히 재벌 2세를?”

“응. 불쌍해. 너무 불쌍해.”

“그 사람하고는 얼마나 연애했는데?”

“연애는 아니고, 뭐 내가 쫓아다니듯이 가끔 만났지. 그런데 작년에 제대로 사귀어보자고 했더니 결혼한다고 하더라고.”

“결혼? 뭐야 그럼. 따로 여자친구가 있었다는 얘기잖아?”

“응. 여자친구가 있긴 했지.”

“그런데도 누나는 그 사람을 계속 만났어?”

“그 사람 여자친구라는 여자를 우연히 봤는데 뭐…… 그 사람하고 너무 안 어울리더라고.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는데 그냥 회사원에 수수한 느낌? 그래서 오래 못 가겠구나 싶었지.”

“결국 그 여자랑 결혼했어?”

“응. 알고 보니 그 여자가 첫사랑이었대. 풉. 결혼 날짜를 잡았다는 얘길 듣고 현타가 왔고. 그래서 쉰 거야.”

레오는 그제야 이해가 갔다.

대치동에서 제일 잘나가던 일타강사 레이나 쌤이 돌연 6개월 동안 학원가를 떠났던 이유를 나만 아는 셈이네.

“그랬구나. 난 정말 상상도 못 했네.”

“세계 일주를 했더니 이제 머리가 좀 맑아졌어.”

“잘했어.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으니까.”

그렇게 말해놓고 레오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 얘기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들어야 할 얘기니까.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를 보고만 있는…….

“응. 세상은 넓고 남자는 많지. 그런데 1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녀봤는데도 그 사람만큼 내 마음을 끄는 사람은 없더라고.”

“응? 그 사람 얼마 전에 결혼했다며?”

“응. 뺏으려고.”

감상적인 표정에 잠시 젖어 있던 레이나는 다시 그녀 특유의 악녀 페이스로 돌아왔다.

“누나…….”

“그러니까 너도 뺏어봐. 소월이라는 여자. 누나가 도와줄게.”

레이나의 입가에 걸린, 사악하면서도 지독하게 매력적인 미소가 반짝반짝 빛났다.

“난 수학 문제를 대할 때 항상 다짐해. 뭐라고 다짐하게?”

레오는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이 세상에 풀 수 없는 문제는 없다.”

*

바다에서 바다로.

동해바다를 마주한 수진은 얼마 전까지 머물렀던 하와이의 바다를 떠올렸다.

오랜만에 온 고향 바다여서일까? 오랜 세월 영혼의 깊은 바닥의 침잠해 있던 감정들이 요동치며 살아났다.

뛰어다니고, 헤엄치고, 겨울에는 연을 날리고, 자전거도 타던 꼬마아이 수진이 보이고 들리는 듯했다. 그 곁에는 늘 든든한 호위무사가 있었다.

하와이에서 서울로 돌아와서 하루를 쉬고 강이 직접 운전해서 울진까지 내려왔다.

근처 펜션에 짐을 풀고 강은 잠깐 눈을 붙이겠다고 했고, 수진은 잠깐 산책을 나온 길.

“아아 좋다!”

혼잣말로 탄성을 흘리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파도 소리와 저녁 어스름, 아직 무르익지 않은 밤하늘에 빛나는 어린 달과 별. 거기에 추억의 감상까지 더해졌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바닷가를 걷던 그녀의 걸음이 딱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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