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뺏겠습니다-9화 (9/92)

9화

천천히 끝까지 숨을 들이마시고 같은 속도로 내뱉기를 여러 번.

한해는 수진이 남긴 글을 눈으로 쓸어 담았다.

-오빠. 저 수진이에요. 그이한테 사정을 들었어요. 그이는 제가 예전 일을 다 잊고 새 삶을 살게 해주려고 거짓말을 했대요. 오빠가 죽었다고.

충격적인 내용이었으나 짐작 못한 것도 아니었다. 댓글을 내용보다 더 깊이 마음을 찌르는 건 두 글자였다.

그이.

그렇구나. 이제 강이가 너의 그이가 되었구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멀쩡한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요. 그이가 오빠한테 사과하는 게 맞겠지만, 그이가 그럴 리 없으니 저라도 해야겠어요.

그이…… 그이…… 그이…….

-아내로서 남편의 무례를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그리고 마지막 한 문장이 그의 눈을 할퀴었다.

-행복하길 바랄게요.

“으음…….”

한해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눈으로 보이는 것이 있고 감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수진의 얼굴이 눈꺼풀 안쪽에 상으로 맺혔다. 어릴 때부터 시작해 결혼식장에서 본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까지 파노라마 사진으로.

그는 입을 굳게 닫은 채 마음속으로 물었다.

‘너는 행복하니?’다시 눈을 뜨자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러나 하늘에는 여전히 그녀가 빛나고 있었다.

강이 거짓말을 했다. 수진이를 위해 그랬다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핑계일 뿐.

이강. 너는 수진이를 뺏어갔어. 거짓말로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니? 맥없이 이대로 운명에 순종할까? 아니면 부당한 운명을 거부할까?

한해는 사토시 씨가 추천해서 읽었던 옛날 소설을 떠올렸다. 마치 그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아 읽고 또 읽고, 이제는 외우기까지 하는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구절을.

그래도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조류에 가로막힌 조각배처럼 과거로 끝없이 떠밀려가면서도.

한해는 수진의 인스타그램을 잠시 살폈다.

결혼식 사진과 신혼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이 깔끔하게 올라왔다. 요란한 제목이나 글은 없이, 담백한 사진들만.

화려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럭셔리 끝판왕의 결혼식.

보고 있노라면 영혼이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 되어버리는 그녀의 웃는 얼굴.

노을을 등지고, 바다를 배경으로, 백사장에서 찍은 예술작품 같은 사진들.

어릴 때 봤던 중학생 소녀가 아닌 어엿한 어른의 몸을 드러낸 비키니 사진에서는 잠시 숨을 멈추기도 했다.

그녀의 인스타 역시 팔로우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회사 동료들로 짐작되는 사람들 몇몇의 답글이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신부! 수진아 축하해!

-이것이 재벌가 결혼식 클래스!!! 오지고요 지리고요ㄷㄷㄷ

-신부님 미친 미모 무엇...

-이제 재벌가 사모님이 되신 건가ㅠ 부러우면 지는 건데 완죤 부럽다아

한해도 답장으로 댓글을 남기려고 자판에 손가락을 올렸다. 쓰고 싶은 말도 있었다.

‘사과는 받을 수 없어. 사과는 누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는 강…… 너의 남편과 약속한 바를 다 지켰어. 나에게 거짓말을 했으니 그건 그 녀석이 직접 사과해야 할 일이지.’그러나 그는 댓글을 달지 않았다. 행동으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행복하라고? 행복해질게. 그런데,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려면 네가 필요한데 어떡하지?’오늘 밤도 달이 뜨고 별이 빛나고,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의 형형한 시선은 어둠의 심장을 꿰뚫었다.

나는 계속 나아간다. 조류에 가로막힌 조각배처럼 과거로 끝없이 떠밀려가면서도.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반짝였다.

하늘에 길잡이별이 있어, 희망이 있어 멋진 밤이었다.

*

소월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어때요, 그대여. 이제는 될까요? 두 눈엔 오직 그대 하나만 보입니다.”

서울에 머무르는 집은 너무 좁아 엄두도 못 낼 일이기에, 고향인 울진 부모님 집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음악에 대한 갈증을 마음껏 풀곤 했다.

“너의 달콤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너의 촉촉한 눈빛들이 내 얼굴을 스칠 때. 사랑한다는 얘기를 너의 귓가에 속삭여 투나잇. 너의 가슴에 나를 안겨줘.”

파란의 노래 ‘첫사랑’을 그녀가 어쿠스틱 기타 반주로 편곡한 노래였다.

“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너의 이름 부를 때. 나의 촉촉한 눈빛들이 너의 얼굴 스칠 때. 사랑한다는 얘기를 나의 귓가에 속삭여 투나잇. 뛰는 가슴에 나를 안겨줘.”

한해를, 며칠 전에 그와 함께했던 밤을 떠올리며 그녀의 목소리는 낭창낭창 울려 퍼졌다.

아직 그는 그녀를 달콤하게 불러준 적이 없다. 그의 눈빛이 촉촉했던 적도 없고, 사랑한다는 얘기를 귓가에 속삭여준 적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확신했다. 혹은 간절히 소망했다. 이 노래처럼 그런 감격스러운 날이 언젠가 찾아오기를.

그 생각만으로도, 노래를 다 불렀을 때쯤에는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고 마는 것이었다.

“하…….”

그녀는 옅은 숨을 뱉어내고 기타를 내려놓았다.

한해에게 통화하자는 메시지를 보낸 지 30분. 읽기는 했지만 답장이 없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마음을 얻고 바로바로 메시지 답장을 받는 사이가 되려면, 더 나아가 그가 먼저 뭐하냐고 물어보고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이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꽤나 길고 괴로운 시간이.

각오는 되어 있었다. 몇 년 동안 망설이기만 했는데, 갑자기 얻은 이 기회를 날려버릴 순 없다.

아직 수진이라는 여자가 마음에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어차피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니 그녀가 지워지는 건 시간문제.

소월의 마음은 불안과 희망이 공존했고, 지금처럼 창밖의 달을 볼 때면 한없이 낭만적으로 젖어들었다.

부르르, 핸드폰이 떨리며 메시지 도착을 알렸다.

그녀는 빛의 속도로 핸드폰을 낚아채 확인했다.

-답장 늦어서 미안해요. 제가 전화할까요?

“예스!”

소월은 바로 통화버튼을 눌렀고, 한해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잘 쉬고 있어요?”

“네. 항해사님은요?”

“전 오늘 부모님 집에 내려왔어요.”

“아, 울진에 가셨어요?”

“네. 오빠는 울진…….”

소월은 스스로 말을 끊었다. 그녀에겐 부모님이 있는 편안한 고향이지만, 한해에게는 아버지를 빼앗기고 인생이 부서진 고통의 장소일 테니.

이름조차 듣고 싶지 않을 수도.

“괜찮습니다. 울진 얘기 하셔도.”

“오빠는…… 안 내려오세요?”

“아무래도. 내려가도 만날 사람도 없고요.”

“이젠 내가 있잖아요. 같이 내려와도 되고. 우리 집 넓어요. 오빠 재워줄 정도는 돼요.”

“한번 가보고 싶네요. 벌써 10년도 넘었으니.”

“내일 내려와요.”

그 말에 한해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 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 소월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웃었다. 한해 오빠.”

“제가 그렇게 안 웃습니까?”

“그런 건 아닌데, 지금도 봐요. 너무 딱딱하잖아. 항해 중도 아닌데 무슨 대리석 같은 말투야.”

“제가 아직 배 밖에서 인간관계가 서툴러서요. 14년 동안 배만 탔으니.”

“그럼 지금부터라도 연습해 봐요.”

“어떻게요?”

“나한테 말 놓기.”

“아…… 그건 좀…….”

“귀여워. 그건 좀이래. 큭큭큭.”

“저는 갑판원이고 소월 씨는 항해사니까…….”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 이건가요?”

소월은 소리 내어 웃었다.

즐겁다. 고작 전화통화를 하는 것뿐인데도, 웃음이 나오고 신이 난다.

“해봐요. 빨리. 일단 이름부터.”

“네?”

“소월아~ 한번 불러봐요.”

“저 사실 불편한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했습니다.”

소월의 입가에 머물던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알아요. 쉽게 저를 받아들일 수 없겠죠. 그 얘기죠?”

“저는 그 사람 포기 못 할 겁니다.”

이 남자 말하는 것 좀 봐. 진짜 인간관계 서툰 거 맞네. 자기 좋아한다는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 얘기 이렇게 대놓고 말하기 있기 없기?

뭐 그런 건 둘째 치더라도…….

“다른 남자하고 결혼했는데? 유부녀하고 불륜이라도 저지르겠다는 얘기예요?”

“그런 뜻은 아니지만, 지금 제 입장에선 다른 사랑을 시작할 상황이 아닙니다.”

“알아요. 내가 조른 것도 아니잖아. 그냥 내 마음을 고백했고, 내가 불편하게 만들었어요?”

“그렇진 않습니다.”

“혹시 나한테 미안해서 그래요? 내 마음을 당장 못 받아줘서?”

한해는 말이 없었다.

그러네. 그거네. 착한 남자 병.

“그런 것까지 신경 안 써도 돼요. 오빠가 그 여자 얼마나 기다렸다고 했죠?”

“14년입니다.”

“하…… 길긴 길다. 내가 14년은 모르겠고, 4년 정도는 오빠한테 쓴다.”

“그러지 말아요.”

“내 인생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는 내 자유예요. 오빠가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고. 심지어 오빠는 지금도 솔직하게 다 말하고 있잖아요. 그런 얘기 들으면서도 내가 좋아서 그러겠다는데 뭐. 다 내 책임이지.”

한해는 잠시 말이 없다가,

“그래. 소월아.”

불쑥 반말이었다. 미치도록 매력적인 중저음의 목소리로.

허를 찔렸다. 소월은 뒤에서 누가 무릎을 친 느낌으로 마음이 허물어져버렸다.

뭐야 이 남자. 왜 사람 마음을 이렇게 막 무너뜨려?

아…… 이름만 불렀는데도 달다 달아.

그녀는 아까 기타를 치면서 불렀던 노래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너의 달콤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를 때.

“한 번만 더 불러주면 안 돼요?”

“이름쯤이야. 소월아.”

미치겠다. 하아…….

그녀는 며칠 전 흠뻑 느꼈던 그의 품을 떠올렸다. 그 생각만 하면 온몸이 감전된 듯 짜릿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오늘은 정말 신나는 밤이에요.”

“나도 솔직하게 말하고 나니 홀가분하다.”

“갑자기 엄청 가까워진 느낌이야.”

“나도 그러네. 고향 동생 같고.”

“고향 동생 맞잖아요. 울진에 놀러 와요.”

“그럴까? 머리도 식힐 겸.”

“우리 동료로서도 괜찮았잖아요. 고향 선후배로서도 괜찮을 거예요.”

“그래. 내일이나 모레, 오랜만에 고향 구경하러 가지 뭐.”

“수영복 챙겨 와요.”

“망향?”

“나는 봉평 해수욕장이 더 좋은데.”

“동해 바다는 어디든 좋지.”

동향 사람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대화를 하면서 소월은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하나 더 말할 게 있어.”

“뭔데요?”

“나 이제 배 그만 타려고.”

소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야. 이제 다른 일을 해볼까 하고.”

“무슨 일?”

“말했잖아. 전문 투자자가 되려고 오래 공부했다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길고 긴 항해 내내 한해는 여가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늘 자신을 단련했다.

운동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그의 좁은 선실은 늘 이런저런 책들로 가득했다. 주 종목인 투자 영역이 아니더라도 역사, 문학, 철학 등등 그의 독서 영역은 방대했다.

그런 모습 역시 소월의 마음을 잡아끈 사이렌의 노랫소리 같은 것이었다.

“아…… 그래서 이렇게 말을 놓았구나.”

“그래. 이제 간판원과 항해사는 더 이상 아닐 테니까.”

“오빠의 새로운 인생을 응원하겠지만…… 솔직히 너무 서운하다.”

“만약 내가 계속 배를 타는데 네가 그만두었다면, 나도 그런 기분이었을 거야.”

“그렇게 말해줘서 진짜 고맙! 갑자기 마음을 결정한 이유는?”

“그냥 그런 확신이 들었어. 그래서 어머니를 만나고 왔어.”

“네. 오빠 어머님이 예전에 신 내림 받으셨다고…….”

“사실 난 이미 결정을 내려놓았는지도 몰라.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의식처럼 어머니한테 말씀드리고 온 거야.”

“하아…… 진짜 막막하네. 오빠 없이 항해할 생각 하니까. 회사엔 말했어요?”

“내일 전화해야지. 다음 항해에 갑판원 빨리 구해야 할 테니까.”

“선장님도 그러셨는데. 오빠 같은 갑판원은 자기 20년 배 타면서 처음 봤다고.”

“나도 다들 그리울 거야. 바다도. 육지에서 보는 바다와 바다에서 보는 바다는 다르니까.”

한해의 목소리에 진심이 느껴져서 소월은 안도했다.

“그럼 투자 회사 같은 곳에 취직하는 거예요?”

“반대지. 내가 작은 회사를 만드는 게 목표지.”

“와, 진짜 대단하다.”

“벌써 10년 가까이 준비한 일인데 뭐. 조력자가 있기도 하고.”

“그래요? 누군데요?”

“나중에 알려줄게. 울진 내려가서.”

묵직한 용건들을 다 주고받고, 잘 자라는 인사로 통화를 마쳤다.

“아, 진짜 뭐냐.”

소월은 혼잣말을 내던지고 털썩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러나 인간이란 당장 눈앞의 일이 중요한 법. 그녀는 한해 없이 떠나야 할 다음 항해는 까맣게 잊고 내일이나 모레 한해를 만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더구나 여기 고향에서!

한해와 함께 모래사장을 산책하고, 바로 잡아온 회를 한 접시 썰어놓고 소주잔을 부딪칠 생각을 하니…….

바닷가에서 노래를 불러주면 어떨까? 노래방에서 춤 솜씨를 뽐내보는 건? 오빠는 어떤 노래를 부를지도 궁금해!

사랑의 감정이 세포를 활성화시키는 힘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가 있다면 바로 그녀를 연구하면 될 터였다.

*

에메랄드보다 더 에메랄드 같은 색의 바다.

수진은 짚으로 만든 파라솔 아래 선탠 베드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남국의 바다는 여행자들이 하나같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라고 찬양하지만…….

“무슨 생각해?”

옆에 누워 책을 보고 있던 강이 물었다.

“이상해요. 저 바다를 보면서 자꾸 고향 생각이 나서.”

“나도 그 생각 했는데. 나도 1년 넘게 살았잖아. 너랑 같이 수영도 많이 하고.”

“그러게요.”

강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불쑥 물었다.

“말 나온 김에 모레쯤 들를까?”

수진은 놀라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왜? 우리 며칠 더 시간 있잖아.”

둘을 위한 신혼여행 기간은 열흘.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도 며칠이 남는다.

본인이 워커홀릭이며 아들도 그러기를 바라는 시아버지 이태화 회장이 무슨 이유로 이렇게 긴 신혼여행을 허락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간은 충분하다.

“당신 안 내키면 그냥 서울에서 쉬고.”

“아니에요. 저도 하도 오랜만이라 가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럼 가보자.”

강은 환하게 웃어주고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 어린 시절 늘 한해에게 밀려 수진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그 바닷가에서, 이제 최종적으로 그녀를 차지한 남자로서 승리감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녀의 팔짱을 끼고 해변을 걸어야지.

노을 지는 하늘 아래 길고 긴 입맞춤은 어떨까.

내가 결국 이 여자의 남자가 되었다고. 바다에게, 보란 듯이.

강이 무슨 생각으로 울진행을 제안했는지 까맣게 모른 채, 수진은 핸드폰을 뒤적이며 남국 해변에서의 망중한을 누리고 있었다.

열흘간의 신혼여행.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시간.

인생에 몇 번 주어지지 않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이지만 사람이 어디 그런가.

완벽한 휴양지에서도 신경 쓰이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고, 그중 한 가지는 한해의 댓글이었다.

그녀는 한해의 인스타그램을 찾아 댓글로 정중히 사과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찜찜한 짐을 덜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아직 답이 없다.

댓글을 아직 안 읽었는지, 아니면 읽고도 답을 안 하는 건지. 혹은 아예 답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건지.

한해의 상황을 알 수 없기에 자꾸 신경 쓰였다.

그런 마음을 부정하려는 방어기제로 인해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의식중에, 한해를 완전히 잊고 아무렇지도 않게 휴식을 즐기고 있음을 남편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괜한 장난을 치기도 했다.

발을 들어 올려 발가락으로 태양을 집어보았다. 알코올 도수가 꽤나 있는 칵테일을 천천히 음미하기도 했다.

애써 나른한 시간이 호수마냥 잔잔하게 흐르던 중, 그녀의 핸드폰 알람이 가볍게 울렸다.

퐁당. 돌멩이가 동심원 물결을 밀어내듯 그녀의 시간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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